쌍취헌 권철이 퇴계선생을 찾은 일화에 대한 소견(글/권오신)'일화(逸話)'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에 관련된)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흥미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일화를 통해서 인물의 성격이나 인품 등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일화이기 때문에 그 인물의 숨겨진 면모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도 모른다.
우리 고장이 낳은 대학자이신 퇴계 이황 선생도 그분이 위대했던 만큼 그에 얽힌 일화도 많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이런 일화를 들으며 선생의 위대함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위대한 분이 우리 고장에 살았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퇴계 선생에 얽힌 일화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쌍취헌 권철이 퇴계 선생을 찾은 일화'이다. 이 일화는 '퇴계 선생의 검소함'을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다.
소설가 정비석이 지은 '퇴계 일화선(退溪 逸話選)'에 실린 이 일화는 그 후 다른 많은 저서와 인터넷 사이트에 그대로 인용되어 퇴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 읽거나 들었을 것이다.
일화는 뜻 그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지 과장된 이야기거나 근거 없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다. 특히 '쌍취헌 권철이 퇴계 선생을 찾은 일화'는 이 글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그 내용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먼저 1980년 퇴계학연구원이 발행한 정비석 저 '퇴계 일화선'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쌍취헌(雙翠軒) 권철(權轍)은 이퇴계와 동시대의 대학자로서, 명종(明宗) 때에 영의정(領議政) 벼슬까지 지낸 명현(名賢)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만고명장(萬古名將)의 이름을 떨친 권율 장군의 아버지이기도 했거니와, 선조(宣祖) 때의 명재상(名宰相)이었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장인(丈人)이기도 하다. 권철은 워낙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남달리 투철하여, 불한당(不汗黨)이나 다름없는 이항복의 사람됨을 알아보아서, 온 문중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우겨서 이항복을 사위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처럼 견식이 탁월한 권철이 이퇴계에게 추앙심을 아니 가졌을 리가 없었다.
권철은 영의정으로 재직 시에, 평소에 추앙해 오던 이퇴계를 만나보고자 서울에서 안동 도산서당(陶山書堂)을 몸소 찾아 내려온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안동까지는 오백오십 리의 머나먼 길이다. 영의정으로서 머나먼 길에 일개 사숙(私塾)의 훈장을 몸소 찾아간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으로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철은 관계(官階)를 초월하여, 대학자 이퇴계를 친히 방문했던 것이다.
영의정 권철이 초헌( 軒)을 타고 도산서당을 찾아가는 바람에 관에서는 안동읍에서 도산서당이 있는 도산면(陶山面)까지의 칠십 리의 길을 새로 확장해야 할 지경이었다. 퇴계가 예의를 갖추어 영의정 권철을 융숭하게 영접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그 다음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끼니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다가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국과 가지잎 무친 것과 산채 뿐으로 고기부치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퇴계는 평소에도 제자들과 꼭 같이 그런 식사를 해왔는데, 상대방 손님이 영의정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내왔던 것이다.
평소에 진수성찬만 먹어 오던 영의정 권철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권철은 도저히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었는지 몇 숟갈 뜨는 척 하다가 그대로 상을 물려 버렸다.
그러나 이퇴계는 모르는 척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 놓았다. 권철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상을 그냥 물려 버렸다. 주인이 이퇴계가 아니라면 밥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가 워낙 스승처럼 추앙해 오는 이퇴계이고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은 도산서당에 더 묵어가고 싶어도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정을 앞당겨 다음 날은 부랴부랴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은 작별에 앞서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찾아뵙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것을 깊이 기념하고자 하니 선생은 좋은 말씀을 한 마디만 남겨 주시지요."
"촌부(村夫)가 대감 전에 무슨 말씀을 여쭐 것이 있겠나이까.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솔직히 여쭙겠나이다."
이퇴계는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으며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을 못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 전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고, 저들이 먹는 음식은 깡보리밥에 된장찌개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스럽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심열성복(心悅誠服)하겠나이까?"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이퇴계가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던 것이다.
권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들어볼 수 없는 좋은 잠언(箴言)입니다. 나는 이번 행차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서울에 돌아가거든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성인이 능지성인(能知聖人)이라고나 할까. 영의정 권철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퇴계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권철은 서울에 돌아오자 만조백관들은 불러놓고 퇴계의 말을 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 날부터 생활을 일신하여 퇴계를 본받아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일국의 영의정이 선생을 찾아 수백 리 길을 달려오는 내용은 선생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그리고 먼 길을 온 손님에게, 그것도 재상에게 보리밥과 보잘것없는 반찬을 내 놓는 것을 봐서 선생이 평소에 얼마나 검소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생의 검소함에 깨달음을 얻은 권철이 돌아가 자신도 검소한 생활을 함은 물론, 만조백관에게 선생의 말을 전했다는 부분에 와서는 퇴계 선생의 위대함이 더욱 빛나게 된다.
권철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이 있었기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퇴계 선생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보충하여 설명한다. 권철은 퇴계보다 나이로는 두 살 아래지만 서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짐작된다. 권철은 1528년(중종 23)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34년(중종 29)에 식년 문과에 합격했다. 즉 퇴계 선생과 소과와 대과 모두를 동방 급제한 셈이다. 옛날엔 급제시 시험관을 스승처럼 여기고 동방 급제자끼리는 동문으로 여길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특히 소·대과를 모두 동방 급제하였으며, 중·명조 때의 사화 속에 같이 조정에 있으며 정치 성향도 비슷했으니 두 사람 사이가 각별했음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일화에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첫째로, 권철이 영의정으로 재직 시에 퇴계 선생을 만나보고자 찾아온다는 내용이다. 권철은 1566년(명종 21) 1월에 우의정에 제수되고,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1571년 5월에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퇴계는 1570년 12월 세상을 떠나니 권철이 영의정이 되기 전에 돌아가신 셈이 된다. 시간적으로 맞지 않다.
둘째로, 권철이 서울에서 안동 도산서당까지 내려온다는 내용이다. 또 권철은 퇴계보다 두 살 아래이다. 아무리 퇴계 선생을 흠모한다고 하더라도 70에 가까운 노인으로 더구나 일국의 정승이 한양에서 도산까지 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권철이 안동에 온 일은 있었다. 경상도 관찰사(1554. 9∼1555. 10)로 있던 1555년 순시차 안동에 들른 것이다. 그 때 전설서별제(典設署別提)를 지내다가 은퇴하여 안동으로 낙향하여 사시던 숙부 권칙(權勅)에게 문안차 들러 뜰의 반석(盤石) 곁에 일산(日傘)을 세우고 그 반석 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이 바위를 감사암(監司岩 : 이 바위는 안동시 법상동에 있었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권철이 퇴계 선생을 찾은 온 것은 선생이 만년에 관직을 제수받고 서울 서소문동(西小門洞)에 머무를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권철이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선생은 예조 판서를 제수 받고 상경하여 1567년 6∼7월 두 달간 서울에 머물렀었다. 또 권철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선생이 의정부 우찬성을 제수받고 상경하여 1568년 7월에서 이듬해 3월 낙향할 때까지 8개월간 서울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아마 그 때 퇴계 선생을 찾은 것이 후일 와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퇴계 선생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하더라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한 지나친 과장된 칭찬은 오히려 선생의 위대함에 누를 끼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하지 않는가.[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