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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적막을 가르는 소리처럼 종알거린다 <영양 주실마을 조지훈 생가를 가다>(글/한경희 - 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주실마을을 찾아가다
안동에서 영양으로 가는 길에는 공사하는 구간이 두어 곳 있다. 큰비가 내리면 산중턱에서 내려오는 흙과 자갈, 암석들이 위협적이어서 그 제방을 쌓느라 바쁜 곳이다. 아스팔트 도로를 잘라가든가, 도로 바닥 가득 흙과 자갈을 쌓아놓을 때도 있어서 터널까지 만들어 둔 곳도 있다. 큰물이 지면 산도 당해낼 재간이 별로 없을 때가 간혹 있다. 그렇게 몸집이 크고 우람차게 보이는 산을 물렁한 몸으로 만들다니 비는 참 대단한 위력을 지녔다. 공사하는 도로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고 공사장을 알리는 여러 표시들이 덩달아 경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특히, 경사가 심한 고개, 가랫재에 오르자면 조심스런 마음은 더 커진다. 노란 바탕에 검은 사선을 그은 방어벽이 설치된 곳으로 휘어들면 긴장이 고조된다. 그저 몇 개의 돌을 세워둔 곳보다 훨씬 경계심이 강하게 일어난다. 아마도 정신 차리라고 일부러 도색을 했으리라. 휘어든 곡선을 보고 긴장하면 할수록 더욱 운전대가 굽어드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운전에 능숙한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위험한 길일수록 풍경이 아름다운 이치는 무엇일까. 굽이치는 물길처럼 고개를 오르고 내리는 경사도 특별한 맛이 있다. 그 고개마다 굽이도는 지점마다 절경의 한 폭이 담겨 있으니 자연의 아름다움도 우리들에게 쉽게 자리는 내주는 게 아닌가 보다.

휘휘, 고개를 돌다 그 정점에서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이나마 도로가 별로 복잡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신록을 지나 성성한 여름으로 가는 입구에 다다른 산들은 참 다양한 녹색의 몸을 보여주었다. 엄밀하게 산이 아니라 나무와 풀들이지만, 그들은 산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어도 상관없는 것이 그들이 모여 이룬 것이 산이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람과 만나서 휘청거리는 것이며, 곧장 자기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순발력이며, 원근이나 빛의 각도에 따라 색색이 다 따로 보이는 것이 가을의 단풍만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 녹색 일색이어도 넘치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푸른 하늘과 조화롭게 만나는 그 유장함이란 또 하나의 반변천이 되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영양의 주실마을을 찾는 일은 그리 멀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임동, 진보를 거쳐 거의 굽이굽이 돌아드는 국도를 따라 달리다보면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물론 초행길이라면 약간 갈등이 생기는 곳이 있다. 영양 석보를 지나고, 입암도 지나서, 영양읍까지 오면 잠깐 헛갈릴 수 있다. 직선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좌 ․ 우회전을 해야 하는지, 시장을 한 바퀴 돌아도 주실마을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조바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좀 차분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생기지 않는다. 읍내 시장골목을 다 벗어나야 왼쪽으로 조지훈 생가라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양읍내 중심지에서 곧장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면 되는데 이왕이면 길이 헛갈리는 지점에 이정표가 있으면 좋겠다.

주실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훤하게 돌을 깎아 세운 표지석이 보인다. 곧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알려진 주실(주곡)마을이다. 입구부터 조지훈문학관이 설립되었음을 알리는 게시판과 안내의 글이 나란히 줄 서 있다. 이 산뜻한 알림글은 문학관 앞에도 두어 군데 더 있었다. 조지훈문학관이 서기 전에 돌에다 시를 새겨 조지훈의 형 조동진 시비와 함께 마을 입구에 나란하던 그 풍경도 아주 기품 있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돌의 무게만큼 묵묵하게 주실마을 입구부터 조지훈 시인의 존재를 알렸던 상징물이었다. 그 비장한 상징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추억이 될 모양이다. 어쨌든 옛 것의 기품과 새 것의 산뜻함을 조화시키는 일이 언제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영양 입구부터 “문향영양”이라고 큰 빗돌이 길가에 서 있는 이유를 잘 알만 하다. 한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00년대 초, 중반 이곳 지역출신 문학자들은 활동이 대단했다. 감천마을 출신인 오일도의 역할이나, 두들마을의 이병각, 이병철의 문학 활동 등은 주실마을의 조지훈 형제와 나란히 영양을 문향의 지역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식민지 시절을 지나온 작가들로 전통적인 문학소양과 함께 미감을 갖추고 있었으며 좌․우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도 비껴서는 일이 없이 전면에 서 있었다.

문학관이 만드는 문학풍경들
새로이 문학관이 개관되기 전까지 주실마을을 찾아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지훈, 조세림(조동진) 시비였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배려한 것인지 짙은 나무그늘 밑으로 웅장하게 자리 잡은 시비는 주실마을의 초입을 지키는 웅장한 구조물이었다. 거기다가 그 마을입구에서 조지훈 생가까지는 길이 굽이쳐드는 물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한양조씨 집성마을이다 보니 반듯한 기와집이 여러 채가 있었고 그 집들이 모여들어 주실마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새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옛 것이 편안하고 자연스런 법이다. 그래서 새로운 전시물을 읽어가면서도 자주 두리번거렸다. 돌로 기품 있게 풍광을 조성해두었던 동네 입구의 분위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문학관이 새로 개관되면서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시비는 사라졌고 말끔하고 단정한 전시물로 바뀌었다. 물론 이미지 자체가 훨씬 밝고 선명했다. 또, 문학관을 개관하면서 호은종택(조지훈 생가)을 비롯한 마을이 문학 공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새로 기와를 올린 집들이 더러 보였고, 양옥집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 전통가옥들이 규모 있게 터를 잡고 있었다. 담장을 아예 헐어낸 집도 더러 있었다. 대체로 집집마다 흙벽돌 담을 쌓고 있어서 시간을 거슬러 오른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약간의 경사를 이용해서 시공원도 조성되어 있었다.

문학적인 정서와 아름다움이 더 이상 책이나 우리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생활환경과 삶의 울타리에도 묻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조화로운 일인가. 조지훈문학관은 단순히 한 채의 건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위 자연풍경과 조화를 잘 이루어내고, 원래 살아온 마을 사람들과 한 호흡이 되어 있었다. 새롭게 단장한 마을 집들과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이 편하도록 손을 본 것이며 문학이 추구하는 세계와 삶의 터전이 조화를 이뤄내는 곳이 이곳이란 생각을 했다.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공간을 쉽게 만난다. 그때마다 언어와 문자에 갇힌 문학이 아니라 우리 삶 속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작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문학을 위한 문학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매우 전문적인 직업인의 관심에서 출발하고, 문학의 신비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 문학의 진정성, 혹은 문학성은 지속되는 문학의 가치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문학지식이 지향하는 인문학적인 가치와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인간의 생활 전 영역에 걸쳐 세속에서 진지한 내면세계까지 문학은 다루지 않는 영역이 없고 금지된 구역도 없다.

그러나 문학이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문제는 얼마나 생활 속에서 친근하게, 쉽고, 재미있게 사람들과 소통하는가이다. 이 물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리는 길에 문학관은 한몫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역의 출신이나 지역에서 문학 활동을 했던 인물에 대한 이해는 지역의 역사까지 포함하게 된다. 이렇게 접근하다보면 문학은 생활 속에서 소중하게 다뤄야할 많은 것들을 자연스레 포함하게 되고 그것이 지역의 중요한 역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더구나 소풍가듯이 즐겨 풍물을 구경하는 방식으로 문학이해를 넓힌다면 생활 속에서 문학적인 감수성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기념하고, 기념할 인물과 대상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 역시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 절대 양보할 수 없고, 끝까지 아름다움을 버릴 수 없어서 끙끙대는 이름이 바로 예술이 아닐까. 아름답기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므로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세상을 이해하고 나면 생기는 깊은 정신의 여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줄 것이다. 그 자유로움이 세상구경을 통해, 소풍과 나들이를 통해, 자연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우리들의 머리 안에서만 생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집안내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문학관은 동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으나 생가까지는 제법 걸어들어 가야한다. 동네길 한편으로 밭이 나란했는데, 고추는 제법 자랐고 이름 모를 약초도 한창 햇볕을 받고 있었다. 고추밭은 풀 때문인지 비닐로 지붕까지 덮어둬서 잡초 뽑기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그 밭 가로 몇몇 할머니들이 굽은 허리로 땅을 헤아리고 계셨다. 고추가 잘 자라도록 받침대를 꼽아둔 곳에 박카스 빈 병을 하나씩 거꾸로 덮어 놓아서 여쭈어봤더니 받침대에 사람이 찔릴까봐 그렇게 해두셨다고 대답하신다. 참, 아름다운 마음을 아는 고추는 더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농사를 짓는 일도 사람 키우는 일 못지않음을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은종택은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안채 문은 안으로, 혹은 밖으로 잠겨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밖으로 잠겨 있었다. 사람이 기거를 하고 살림을 사는 곳이므로 분명 개인공간이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럽다. 오늘도 역시 대문은 활짝 열려져 있으나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다. 자물쇠가 단단하게 문고리를 잡고 있다. 가끔 바람이 한 번씩 몰아불면 온몸으로 삐걱거리면서도 자물쇠는 꿈쩍도 않는다. 마당에 서서 앞으로 보이는 산은 주실마을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형세를 하고 있다. 그 산을 일러 문필봉이라 하고 그 풍수지리는 학자를 많이 배출한다는 이야기로 전해온다. 그런 까닭인지는 모르나 주실 마을 출신 중에는 괄목할 학자들이 많이 계신다.

봄꽃들이 다 진 마당은 걸릴 것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빈 여백이 충분히 돋보이는 마당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와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돌절구와 용도를 모를 오래된 돌 하나가 있다. 물이 좀 고여 있는 돌절구는 모서리라고는 찾아볼 길 없이 닳은 몸이다. 대물림해서 내려오던 귀한 방앗간이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큰 솟을대문이 중간에 있다면 생가를 향해 오른쪽 옆으로 작은 문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큰문, 작은 문은 용도도 다를 것이다. 옛날 궁궐문이 좌우로 협문을 둔 것으로 보면 그와 유사한 기능을 했을까, 그저 짐작하는 수준이다. 밖에서 집을 두리번거리며 안을 드려다 봐도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시늉만 해보는 것이 전부이다. 보이는 것이 없어서 마음대로 집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임을 위로삼아 중얼거려보았다.

가만히 보자니 툇마루를 낸 벽 위로 아주 조그마한 창을 내 놓았다. 왼쪽, 오른쪽 돌아가면서 방이 있음직한 곳마다 작은 창이 보인다. 가로, 세로 크기가 몇 센티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창이다. 전통가옥은 통풍의 기능이 자연의 호흡처럼 잘 되어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기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전혀 다른 기능이 있을까. 문학관으로 달려가 여쭤보려다 우물쭈물 거리기로 했다. 우물쭈물은 참 많은 여유를 불러내는 기호이다. 생가 오른쪽으로는 정자의 기능처럼 마루방이 있었는데 이곳에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가옥들이 대체로 자연과의 조화로운 구조로 방을 제외하고는 마루는 그대로 막지 않고 열어둔 것을 생각해본다면 추측이 가능하다. 그 마루는 무슨 정자처럼, 우아하게 집밖으로 나 있으나 엄연히 대문 안에 있으니 안팎을 다 아우르는 구조물이 된다.
오늘은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큰 대문을 들어가면서 오른편 문간방에 문이 열려 있었다. 그 방은 부엌까지 달린 방이었는데 이들의 구조를 고스란히 사진에 담고 구경할 수 있었다. 아궁이가 하나 있고 붙박이식 찬장까지 달린 아주 아담한 부엌이었다. 그 옛날에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고 소죽이라고 끓였을 것을 상상해보는 일도 즐겁다. 부엌 창은 얼기설기 나뭇가지를 엮어 짜놓았는데 단정한 집 풍경과 아주 대조되면서도 조화를 부르는 것이 묘하다. 문간의 방은 여느 사랑방 못지않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배한 지가 오래지 않아서 흰 벽지의 단정함과 노랗게 물먹인 장판지는 고운 느낌까지 들게 했다. 역시 붙박이장이 있었고, 귀여운 창이 하나 나 있었다.

뒤뜰로 가니 기능을 잘 추측하지 못할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단단하게 닫혀 있었고 내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둥 한쪽에 휴지를 걸어두었던 흔적이 있을 뿐,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는 건물도 하나 있었다. 뒤뜰에서 본 방문은 비와 바람을 맞아 헐어 있었는데 오래 사용하지 않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집안에는 도랑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마당 가장자리를 통과해 흘러내려가는 길을 만들어 두었다. 이 물길은 담 밖으로 통하고 냇가로 이어지는 물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툇마루 밑으로 섬돌이 보였는데,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인데 시간의 깊이만큼 다듬어진 돌이 동그라니 앉아계신다. 이 집을 찾아오신 손님들의 발길이 한 번씩 그 섬돌에 닿으면서 모서리 없는 동글동글한 돌을 만들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신발을 벗어두거나 디디고 지났을 것인데 빗방울이 바위를 뚫는 형국이다. 평평하게 고르게 정돈이 되어 있는 것이며 울퉁불퉁 모가 나 있었을 돌이 둥실둥실 다듬은 듯 정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다. 반듯하게 깎은 댓돌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을 키우고 성장시키던 마을
바람이 제법 불어오가니 풍경은 거침없이 딩댕동동 거린다. 5월 중순의 행사가 막 한숨 돌리는 시간이라 인적도 드물다. 어느 한적한 산사를 찾은 풍경이 적막을 가르는 소리처럼 종알거린다. 문학관은 우람하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얻는 바람이 분다. 5월만 신록의 계절이나, 여왕이라 부르기 아깝다. 6월도 손색이 없다. 녹색 잎들이 겹겹이 하늘을 가리고 가끔씩 그 틈새로 쏟아내는 햇살을 두고 푸른 계절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한 사람이 자라나는데 고향이라 불리는 지리적 환경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까. 정신적인 고향이야 낳아주신 부모님이라고 하겠지만, 바람과 흙과 새소리와 냇물과 마을은 또 어떤 기운을 줄 것인가. 당시만 하더라도 마을이 직업 따라 분포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가문의 영향력으로 형성되었으니 개인에게 마을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하다. 친척, 일가들이 모인 동성마을에서 유년을 보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집안과 성씨가 중심이 된 유교적인 문화질서에는 긍정적인 역할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은 집안내력과 가계의 역사를 몸으로 체화시키는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을 통과하면서 집안 분위기와 선조대의 가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근대식 교육이 정착되기 전에는 마을단위로 친, 혈족을 통해 수학을 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 밖을 벗어나도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알고 인사를 나누는 친근한 관계 안에서 유년을 보내는 일은 소중하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마을단위의 문화풍토가 일반적이었다. 서당식 교육방법은 마을 단위로 이루어져 마을의 고유한 문화가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자라나는 세대를 직접 가르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생활과 교육이 분리되지 않는 살아있는 교육을 받는다. 그러니 당시만 하더라도 마을은 행정단위 이상의 매우 중요한 의미와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겠지만 영양지역 역시, 마을을 통해 건넬 이야기는 아주 많다.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에는 호은 조전이 처음 들어와 지금의 호은종택을 짓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과거를 통해 집안을 번창시킨다.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의 경우, 변화된 세상을 읽고 상투를 잘랐으며(단발), 양력설 제사를 지냈으며, 당시 일본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등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변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일은 지혜가 필요한 일이지만, 변화를 알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란 지혜를 넘어서서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위정척사와 개화로 명분이 갈리는 시절에 적절하게 대처한 조인석의 의지는 놀랍다. 혁명가와 같은 정신으로 현실에 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수용하는 것이나, 전통문화 안에서 극복할 것들을 거리낌 없이 벗어던지는 것 등은 매우 대단한 실천의지에서 가능하다.

조인석은 식민지 현실은 조선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전개과정에서 빚어지는 세계적인 구조라는 틀을 읽어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고 아랫세대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침이 되었다. 신분질서와 위계질서가 강고하던 시절에 그 기득권을 다 내놓고, 특히 여성들의 교육을 강조해서 교재까지 만들어 가르쳤던 조인석은 조지훈 형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혜로우면서 실천의지까지 겸비한 조부를 가까이 보아온 형제는 혼란스런 세상을 돌파할 기상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형 조세림(본명;조동진)은 아주 적극적인 성격으로 마을 아이들끼리 소년회도 만들고 문집도 만들었으니, 그가 일찍 요절하지 않았다면 많은 일을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조지훈 역시, 개인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마다 합리적인 명분과 전체를 배려한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일제말기 그가 절필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일이나,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송시 쓰는 일을 거절한 일이나, 한국전쟁에 종군작가로 뛰어든 일이나, 4.19 이후 글을 통한 입장표명이나, 5.16이후 엄혹한 군부독재시절에 보여준 기개 등이 그러하다. 조부의 기개와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손자에게까지 그대로 미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마을단위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마을과 고향은 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감천마을의 오일도 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지훈의 글은 영양지역 안에서도 각 마을별 교류와 관계의 깊이를 확인하게 해준다. 조지훈의 아버지와 오일도의 특별한 관계를 떠올리며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어느 마을인들 아름다운 이야기가 없겠는가.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일가의 마을을 찾아가 전통마을이 지니는 의미를 더듬더듬 적어보았다. 이제는 사라진 전통마을, 마을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렇게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으로 포장된 향수가 아닌 생활과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던 가치들을 재발견하는 일이 우리들의 몫이다. 너무 많이 사라지고 말았으나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을 찾아서 그 기억을 복원해보는 일, 닳고 닳은 유물 하나를 두고 시원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일처럼 마을을 찾아가 마을을 돌아보고 오랫동안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이 바로 마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체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마을은 마을로 이어진다
초여름 풍경이 물씬 나는 길을 가는 일은 즐겁다. 바람도 적당하게 불고 길가에 심어둔 알록달록한 꽃들도 아주 예쁘다. 길을 다듬어낸 손길이 그 꽃을 따라 함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꽃을 아름답게 손질하니 길도 덩달아 아름다워진다. 비록 굽고 휘어진 고갯길이 있을지라도 꽃들과 함께 있는 길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이제껏 자란 나뭇잎들은 녹음으로 우거질 것이다. 푸른색들이 어우러져 검푸르러지고, 녹색이 만나서 더욱 짙어지는 그런 계절로 가는 중이다. 길 위에서 그 푸른 숲과 나무와 꽃들을 보는 일은 길을 나서서 즐길 수 있는 경지가 된다.

문학관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다 보니, 마치 새 옷을 입었을 때 드는 느낌과 비슷하다. 새 옷이기 때문에 입고 다니기에 너무 조심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다. 모든 집이란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뤄내는 것인데, 낯선 건물이 아직 다른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엔 시간이 좀 필요하리라. 문학관의 웅장함에 주변의 소박한 자연물이 적응하고 친해지기까지 말이다. 어쩌면 이미 자연풍물은 문학관과 잘 어울렸고 그들끼리 소통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다만 우리들이 새 건물에 대해 낯설어하다가 아주 더디게 그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한 주실마을은 낯선 만큼 새로운 의미를 다듬어내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낯설음과 새로움은 다른 말이 아니므로.

호은종택으로 불리는 조지훈 생가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한가운데에서 마을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이다. 주실마을에서 문학관이 개관되기 전에는 조지훈 생가가 직접 상징물이자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문학관이 개관되면서 생가에서 닫혀 있던 조세림, 조지훈 등의 한양조씨 집안내력과 역사가 구체적인 내용물로 눈앞에 전시되었다. 이 전시는 낯선 구성물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 듣거나 보아온 주실마을 역사이자 구체적인 사실들이다. 이 구체성이 하나의 사물처럼 포장되고 전시되는 일이 바로 문학관, 문학공원이 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이때 집이란 변화하고 혹은 변화하지 않는 가운데 있거나,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보여주는 실물이 된다.

주실마을을 돌아 나오다 곡강이란 마을을 만났다. “곡강리” 앞으로는 시원하게 흘러가는 반변천이 있었다. 이들 물굽이를 따서 곡강이라 지명을 붙였을 것이다. 물이 돌아드는 지역은 그 아름다운 경치를 피해 마을이름을 지을 까닭이 없을 것이다. 자연이 준 특별한 의미를 마을의 이름으로 정하는 일이 당연하다. 자연이 경계짓는 마을이 바로 전통마을의 특징이었을 거란 생각도 해보았다. 영양 일월산에서 시작되는 반변천은 영양, 청송, 안동까지 흘러오는데 이 물줄기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 안동은 반변천의 하류에 속하는데 이렇게 물의 흐름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마을 역시 이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당연히 마을이름이 있고 이름 따라 역사도 함께 흐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