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여름풍경(글/이인우-의성 안평중학교 교사)
현이의 숙제
학생 문예작품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받고 교내대회를 열었다. 교내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의 작품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국어시간에 수행평가로 글의 주제와 분량을 이야기하고 다 쓰지 못한 학생은 가정학습으로 하도록 했다.
작품을 보내야 하는 날 아침 자습시간에 내 메일을 점검해보니 글을 가장 잘 쓰는 현이의 작품이 없었다. 숙제는 교사의 메일로 보내던지 아니면 디스켓으로 가져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현이에게 확인을 하니 분명 메일로 보냈다고 했다. 아마 메일 주소를 잘못 쓴 것이 분명했다. 현이도 난감해 했다. 그러면서 집 컴퓨터에 숙제가 들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디스켓을 하나 들고 현이를 불렀다. 아직 1교시가 시작되려면 30분도 더 남았다. 현이네 집은 다행히 학교에서 4km정도 떨어져 있었다.
현이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가면서 내가 준비한 디스켓을 주었다. 집 근처에 거의 도착하자 차를 세우고 집에 갔다 오라고 했다. 현이는 나를 몇 번 돌아보더니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마 집에 들어가자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던 것 같았다.
한참 후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 온 현이는 디스켓을 2개나 들고 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또 잘못 되면 어떻게 해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이는 부모님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하기 때문에 자전거도 탈 줄 모른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자전거로 통학을 하는데 말이다. 매일 아침 동생과 함께 부모님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무척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부모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내 충고를 얼굴 가득 받아들였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차를 함께 타고 이것저것 묻는 내말에 또박또박 대답을 하며 묻기도 했다. 현이는 무슨 일이던지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무척 영리하다. 대도시 어느 학교에 가도 학업성적과 예의는 결코 뒤지지 않는 학생이다. 숙제를 가지러 간 본래의 목적보다 현이와 자연스럽게 상담을 할 수 있었던 시간에 무게를 두고 싶었다.
뽕나무와 강당 터
우리 학교 교사(校舍) 뒤편 동쪽 언덕 위에는 강당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그 언덕에 오르는 길은 오래된 시멘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 중간 지점에 언제부터 자라기 시작했는지 뽕나무가 우뚝 서있다. 시멘트 계단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허물어진 것을 몇 번인가 그 명목이라도 유지하려는 듯 땜질을 했다.
뽕나무에 파란 오디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제법 검은 색을 띠게 되어 먹음직하게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오디를 따기 위해 창고에 있는 학생의자를 꺼내어 계단으로 올라갔다. 내가 뽕나무에 오디 따는 것을 보고 2학년 남학생 몇 명이 다가왔다. 가만히 쳐다보더니 먹는 것이냐고 물었다. 먹으면 맛이 달다고 하자 그 중 한 학생은 맛을 안다는 듯 뽕나무를 후려잡더니 능숙하게 오디를 따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한두 개 따서 입에 넣더니 뱉어버렸다.
뽕나무가 수난을 당했다. 아마 내가 없는 사이에 의자도 없이 나무에 올라간 모양이다. 나무 꼭대기 한가운데가 부러져 하늘로 향해야 할 가지가 땅에 처박혀 있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부러진 가지를 톱으로 잘라 주었으면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나서 계단에 가보니 가지는 거꾸로 매달려 부러진 그대로 새잎이 나고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은 환경에 순응하고 있었다.
계단 위에는 강당이 있었다고 연혁지는 말하고 있다. 지금은 그 흔적으로 계단만 남아 있다. 여기다 강당을 짓고 학생들에게 훈화를 하던 선배님들이 떠오른다, 그 때는 학교의 규모도 크고 학생 수도 무척 많았으리라. 그러다 교사(校舍)가 현대식 건물로 신축되고 강당은 너무 낡아 쓸모가 없어지자 터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학생들이 아침저녁으로 청소하던 시멘트 계단을 이제는 뽕나무 고목이 지키고 서있다. 누구 하나 올라가지 않는 곳이련만 뽕나무는 묵묵히 강당 터를 지키고 있었다. 기억 속으로 묻혀버린 강당은 잡초가 우거져 학생들도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부지런한 학교아저씨가 가을을 맞이하느라 풀을 베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바람도 불고 가을비가 내리는 시간이 흐른 뒤, 그 계단을 우연히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계절을 망각한 쑥이 파랗게 돋아난 것이다. 봄에 탐스럽게 자라 열매를 맺었을 그 쑥이 또 새싹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오디를 빼앗겨버린 뽕나무는 그렇게 해묵은 계단과 함께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가 다듬어 주었는지 땅을 향하던 볼품없는 가지는 없어지고 엉덩이가 펑퍼짐한 뽕나무로 만들어 놓았다. 또다시 봄을 맞이하고 여름이 오면 까만 오디를 키울 것이다.
금 나와 뚝딱, 교무실
늦여름이 안간힘을 쓰며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오후였다. 1학년 남학생이 체육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교무실에 들어왔다. 다짜고짜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 환기구멍에 얼굴을 들이밀며 팔을 들고 만세를 부르듯 찬바람을 쐬고 있었다. 더위를 식히는 학생을 보고 나무라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저 일상으로 있는 일이라는 듯 교재 연구에 몰두 했다.
계절로 보면 늦여름이긴 하지만 에어컨을 켤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다. 또 한 학생이 교무실에 들어오더니 선생님 의자 뒤에 있는 선풍기를 힘껏 틀어 옷을 반 정도 벗고 흔들며 땀을 식혔다. 언제 왔는지 에어컨 앞과 선풍기 앞에는 여러 명의 학생들로 북적대고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위해 잠시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요즘 학생들은 무척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한다. 교무실에 출입하는 자세부터 옛날과 무척 다르다. 옛날에는 교무실 출입문에 들어서면 거수경례를 하고 용무만 간단히 보고 나가면서 또 거수경례를 했다. 요즘 학생들은 교무실에 들어오면 노크를 한다. 부담 없이 출입문을 열고 요구사항을 이야기 하거나 행동으로 옮긴다.
교무실에 오는 학생들의 유형을 보면 화장지가 없어서, 우산이 없어서, 너무 더워서, 너무 추워서 또는 비가 오면 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심지어 하드나 과자를 사달라고 예쁘게 조르는 학생도 있다.
교무실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게 된 것은 아마 교복이 자율화되고부터 조금씩 그래 왔던 것 같다. 교복이 자율화되었다가 다시 교복을 입게 되었어도 옛날의 교복세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동안 시대도 많이 바뀌었고 교무실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수세식 화장실이 일반화되자 학교에서도 수세식으로 개조하였다. 그러나 화장지는 학생 개인이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화장지를 준비했다. 학교에서는 화장지를 사기 위해 우유팩과 폐지를 모으기도 했는데,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화장지를 준비하는 학교가 무척 많아졌다. 학교에서 화장지를 준비하자 학생들은 한 수 더 떠서 휴지가 없으면 교무실에 와서 휴지를 달라고 하게 되었다.
얼마 전만 해도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면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고 있었다. 그것은 이름표도 되고 코 닦는 수건도 되었다. 요즘학생들은 손수건 보다 휴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생활화 되었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걱정 할 만큼 버릇이 없어진 것은 더욱 아니다. 예의바르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민망했던 그날 오후
7교시를 마치고 청소가 끝나자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갔다. 시골이라 집에 일찍 간다 해도 부모님들이 농사일에 바빠 계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원에 가는 학생도 드물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오락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학교에서는 독서 환경이 좋은 도서관에서 한 시간 정도 독서와 과제를 하는 것이 무척 유익할 것 같아 학생들에게 권했는데 대다수 학생들이 따라 주었다. 선생님들도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바쁜 분들을 제외하고는 5시까지 열심히 지도를 한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동안 교무실에는 한 두 분의 선생님이 남아 잡무를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도 잡무를 처리하다 보면 5시가 되어 퇴근을 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날은 혁신의 날 독서과제를 하기 위하여 책을 읽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옆에서 잡무를 보시던 분이 밖으로 나가고 나 혼자 적막한 교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에 빠져 열심히 독서를 하는데 배에서 이상한 소식이 왔다. 마지막까지 책상 앞에 있던 분이 밖으로 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이때다 싶어 소리가 나도록 시원함을 만끽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보통 때 같으면 교무실에서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으나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마음 놓고 소리를 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 나갔던 분이 들어오면서 퇴근을 재촉하고 먼저 나가버렸다.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던 학생들도 시간이 되자 현관으로 나가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렸다. 나는 느긋하게 책상을 잠그고 창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실내등 스위치가 있는 캐비넷 쪽으로 가는데 돌이킬 수 없는 낭패감과 민망함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교무실에 나와 마름모 방향의 출입문 쪽 책상에 얌전히 앉아 사무를 보고 있는 젊은 여선생님의 머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평소 말없기로 하면 첫째가는 그녀였다. 젊은 분이지만 행동은 고참교사보다 더 침착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마음대로 가스를 방사했던 나는 너무도 민망하여 ‘무슨 말을 해야 되나’ 아니면 ‘다른 문으로 아무 소리 없이 빠져나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전기 스위치가 뒷문 옆에 있고 출입문은 그녀 옆에 있었다. 아무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것보다 태연하게 나가기로 정했다. 교무실 문을 나오며 “퇴근합시다.” 하고 출입문을 나왔지만 너무도 민망하여 무엇인가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아니면 할 말이 남아있는 사람 마냥 현관 앞 신발장으로 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