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지위와 의료의 질(글/김승열-선린병원 응급의학과장)2007년 8월달에 카자흐스탄에 다녀왔습니다. 의료봉사팀과 함께 갔지만, 내심으로는 솔직히 의료 봉사보다는 다른 나라의 의료실태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서 의료는 어떤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본 주제가 의사의 지위와 의료의 질입니다.
한국의 의료제도는 매우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와 풍속, 사회제도에 익숙하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의료제도는 다른 나라와 매우 다릅니다. 다른 특색도 많지만, 단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있는 제도입니다. 몇 달 전의 칼럼에도 말했지만, 이러한 한국의 의료제도,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혹은 자본주의의 모습과 사회주의의 모습을 아울러 갖춘 독특한 제도는 다행히도 두 제도의 단점 보다는 장점을 많이 융합시키고, 더하여 한국의 의료에 대한 정서가 결합되어, 영국의 연구에서 말했다시피 한국의 의료제도는 세계 최고의 효율성을 가진 제도입니다. 즉 저비용 고효율의 제도입니다. 한국의 의료제도의 장점은 외국에서 진료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자본주의 의료제도이든, 사회주의 의료제도이든공통적으로 한국의 의료제도를 칭찬합니다. 한국에 살면서는 한국의 의료제도와 의사를 비난하던 사람도 외국에서 진료만 한번 받아보면 거의 대부분이 칭찬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사회주의 의료제도가 정착된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 장애인에 대한 철저한 지원과 관계된 진료를 받아본 사람은 아직도 한국의 장애인이나 소아에 대한 의료 체계의 미흡함을 비판하고, 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일반적인 진료를 받아본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자본주의 의료의 본산인 미국에서는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가장 큰 이유가 질병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이나 의료보장 체계가 없는 미국에서는 보통 회사가 직원을 사보험에 가입시켜 줍니다. 그런데 일단 이 직원이 중병이나 만성병에 걸린다면 해고의 위험이 매우 높고, 일단 해고 되면 다시 취직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높고, 따라서 일단 중병에 걸린 경험이 있거나 만성병이 있는 사람은 사보험비도 매우 높거나, 아예 가입이 불가능하고, 이런 사람에 대한 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높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의료비용은 한국과 비교한다면 천문학적임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은 있고, 치료는 해야 하고, 치료비는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직업은 없는 상태가 되므로 중산층이라 해도 막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반면에 사회주의 의료 체제인 캐나다나 영국에서는 C.T(컴퓨터 단층 촬영)를 찍으려면 아무리 급해도 사흘은 걸리고, MRI(자기공명영상촬영)를 찍으려면 석 달이 걸립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한국에서 의사의 지위는 적어도 예전의 사회주의 국가에 비교한다면 매우 높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일반 노동자에 비해서도 오히려 낮을 정도입니다. 카자흐스탄도 예외가 아닙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의사의 지위가 얼마나 낮은가 하면 의사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어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좋은 점은 대부분의 의료는 무료입니다. 그런데 의료의 질, 의사의 질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낮습니다. 카자흐스탄 사람을 진료하면서 양쪽 귀의 고막 파열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려 20년간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한국이라면 몇 만원, 아무리 많아도 몇 십 만원에, 이비인후과 의사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고막파열 치료를 하지 못해 20년간이나 난청으로 살아온 환자의 예는 카자흐스탄에서는 매우 흔한 예입니다. 놀랄 일은 이 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한 이유가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고막 파열을 치료할 능력이 있는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구 40만 명의 수도 아스타나에 CT(컴퓨터 단층 촬영)가 있는 병원이 단 2곳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CT를 찍는다고 해도 판독이 정확할지도 당연히 의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카자흐스탄에서 의사는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사이비, 돌팔이 비슷한 취급을 받을 정도라고 합니다. 아예 의사를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카자흐스탄 의사들의 진료에 대한 지식과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감기나 단순 복통 외에는 속수무책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들의 공통점입니다. 또 사회주의 의료제도를 채택하면서 선진국인 나라는 불필요한 의료쇼핑으로 인한 의료자원의 낭비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국 또한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의료비를 자기가 전혀 내지 않는 환자들의 불필요한 입원에서 보다시피 심각한 문제입니다.
캐나다나 호주와 같은 나라는 또 의사가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의 상한선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하루에 15명 이상의 환자를 볼 수 없게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의료 체제이므로, 그 이상을 보아도 아무런 추가적인 보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사 또한 환자를 하루 15명이상 볼 경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약을 하지 않고는 진료를 받을 수 없으니, 한국의 의료제도에 익숙한 한국 사람이 캐나다에서 아기가 열이 난다고 아무리 호소를 해도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진료를 하지 않고, 들은 척 만척하고, 그래도 빨리 진료를 받고 싶다면 자기 부담이 엄청난 응급실을 찾을 수밖에 없으니 캐나다의 의사와 간호사, 의료제도에 대해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카자흐스탄을 생각할 때, 의사의 지위와 의료의 질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렇다고 의사의 지위가 세계 최고인 미국이 바람직한가도 의문입니다. 최선의 의료를 위한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복지국가로 진입하고 자본주의 의료제도에서 사회주의 의료제도의 색채가 강해지는 한국에서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