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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전 배나무골 효부 이소노 유코 이야기(글/이미홍-객원기자)

사나흘 전에 오는 듯싶지도 않게 날리던 눈발들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흔적 없이 스러져버린 시내와는 달리, 응달에 여직 녹지 않고 군데군데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는 밭 언저리가 괜시리 반가워 마음이 넉넉해졌다. 햇살이 따스한 게, 어디 재 너머 마을 할머니 댁에 마실 삼아 삶은 고구마라도 얻어먹고 이야기라도 한 자리 들으러 가는 마음으로 녹전면 배나무골을 향해 고즈넉한 시골길을 달려갔다. 일본에서 시집와 효부상을 받았다는 배나무골 임 씨네 며느리 이소노 유코(磯野裕子)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시집와 효부상 받은 배나무골 새댁
시어머니 권영자 할머니(67)가 전화로 일러주신 대로 녹전중학교에서 온혜온천 쪽으로 얼마쯤 가다 보니 버스 서는 곳이 보이고 맞은 편 언덕에 ‘이현2리’라고 쓰인 바위가 세워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니 집 몇 채가 보였다. 전화를 했더니 권영자 할머니가 집 앞에 나와 손짓을 하셨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집 앞에는 개가 지키고 있었고 조심조심 개를 지나친 곳에는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어미 소와 송아지 태를 아직 덜 벗은 작은 소가 반겼다. 마당에는 양지쪽에 툇마루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상할머니가 누워 햇볕바라기를 하고 계셨다. 올해 93세라는데 귀가 어두우신지 인사를 드리니 그저 고개를 돌려 한 번 건너다보시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햇볕을 쬐셨다. 권영자 할머니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아랫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과 연결된 안방인 듯 저쪽 부엌에서 둘째며느리 이소노 유코(42)씨가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어머님 앞이라 조심스러워 말을 아끼는 유코 씨를 대신해 세 살배기 막내 혜진이를 안고 시어머니 권영자 할머니가 먼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직장 관둔 효자 남편
이소노 유코의 남편 임기두(45)씨는 권영자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다. 4형제 중 둘째인데 자랄 때부터 정이 많고 부모님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직장도 그만두고 아픈 어머니를 모시느라 고향 마을에 들어와 농사를 짓다 보니 결혼이 늦어지게 되었다. 아들의 혼처를 두고 고민하던 권영자 할머니는 누군가가 통일교 재단에서 신붓감을 주선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청을 했다. 기두 씨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혼자 나이를 먹어가는 아들이 안타까워 할머니는 아들을 재촉했다.
“내가 마흔다섯 때 큰 병이 걸렸어. 재생성 빈혈이라고 하는데, 여름에 고추 따러 나가다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 그때 애비가 청송감호소에 교도관으로 있었는데 내가 일 년이나 병원에서 지내야 했는데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지가 사표를 내고 일 년 동안 내 병간호를 했어. 그때 지 생각으로는 나중에 다시 시험 쳐서 어디든 들어가면 된다고, 엄마 병간호가 더 중요하다고 사표를 낸 거지. 그런데 병원에서 일 년 있다가 퇴원을 하고 막상 집으로 내려와도 내가 일을 잘 못하고 농사일은 많고 아버지도 아파서 혼자서 농사짓는 게 힘들고 해서 농사일을 맡아 하게 되었어. 농사일 도우면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했지. 그런데 농사일이 밤낮이 없다 보이 시험공부를 한다고 해도 잘 안되지 뭐. 그래그래 촌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자연결혼도 늦어지고. 그런데 지는 어무이 아부지 모시고 산다고 안 나가더라고. 결혼 생각도 없다 하고. 자꾸 나이는 먹어가지, 장가는 뜻이 없다 하지, 그러니 내 맘만 탔지. 서른여덟이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는 걸 보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 이웃에서 통일교에서 신붓감을 주선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권해 달라고 했지.” 직접 만나서 선을 보는 게 아니라 사진을 보고 결혼 상대를 처음 만나는 것이 통일교에서 배우자를 맺어주는 형식이다. 첫 번째로 주선해준 아가씨의 사진을 보고 와서 기두 씨는 싫다고 했다. 뚱뚱하다는 핑계를 댔지만 엄마도 나도 원하는 사람이 아니더라고 했다. 끌리는 데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두 번째로 유코 씨의 사진을 보고는 선뜻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시어머니인 권 할머니가 결혼식 때 처음 보았을 때 유코 씨의 몸무게도 만만치 않았다는데 기두 씨는 한 번 만나보지도 않고 사진으로만 봤는데 뭘 보고 끌렸던 걸까? 처음 사진을 보고 와서 사람이 맑고 순박해 보인다고 했단다. 그 뒤 몇 차례 전화로 통화를 하고 그리고 2000년 3월 서울서 처음 만나 인사를 하고 올림픽 공원에서 합동결혼식을 했다. 권 할머니도 그 때 유코 씨를 처음 보았다.
“그런데 처음 만났는데 너무 내 마음에 안 드는 거라. 내사 며느리 여 있어도 바른 말 하는데, 처음에는 별로 인물도 없고, 퉁퉁하고 그래. 파마를 했는데 머리도 어설프고. 진짜래. 그래 속으로 너무 실망을 했더랬지. 말도 안 통하는데, 살가운 거 같지도 않고 그랬어. 그래도 저들이 좋다고 하니까 결혼식을 했는데, 내가 아프고 하다 보니까 시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리말 배운다고 안동에 와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별로 신경을 못 써줬어, 내가. 다른 사람들은 다 며느리가 이쁘다고 하는데 나는 내 아들이 아까워서 그런지 그때는 별로 이쁜 줄을 모르겠더라고.”
옆에 있던 유코 씨가 시어머니 말에 그러셨느냐는 듯, 소리 내어 웃는다. 흉이 흉이 아님을 아는 얼굴이다. 시집와서 많이 이뻐졌다는 시어머니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사실 제가 결혼할 때는 몸무게가 70kg 정도 되었는데, 여기 와서 17kg 빠졌어요. 그래서 처음에 어머니가 그러셨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안동에 있는 통일교 교회에서 지내면서 우리 문화와 말을 배우면서 유코 씨는 안동새댁이 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2000년 11월 3일 실질적인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둘만의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녹전면 신평리 배나무골 시댁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이미 내 사람이라 싶어서 그랬는지 집안으로 들어서는 며느리 유코 씨가 권 할머니 눈에 참 이쁘게 보였다고 한다.
“머리를 깔끔하게 치고 양장을 입었는데 인물이 훤하더라고. 그래 참 이만하면 됐다 싶은 게 성격도 참하고 수더분해 보이는 게 이제 우리 집 사람이다 싶더라고. 그래 와서 하는 게 지금까지 잘 해. 어른들이 저리 계신데, 어머님도 그러시고, 야들 시아버지도 그렇고 옛날 분들이라 까다롭기가 말도 못해. 나도 가끔씩은 까다로운 입맛 맞추기 어려운데 요즘 우리나라 젊은 여자들 같으면 여기 와서 못 살지 싶어. 근데 야는 어른들이 그러셔도 하나도 밉거나 싫은 마음이 없다고 그래. 나보다도 더 잘 한다 카이. 이제는 어디 가도 우리 며느리만한 며느리 없다고 생각하며 살지.”

도쿄 아가씨에서 녹전 배나무골 새댁으로
이소노 유코 씨의 고향은 도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제과점 직원으로 직장 생활을 오래 했다. 자신이 결혼해서 살 곳이 이런 시골인 줄도 몰랐다. 신랑을 따라 처음에 마을로 들어섰을 때 어디 캠프에 오는 기분이었다고 했다.“처음에 왔을 때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경치도 좋고 해서 캠프에 왔다는 기분으로 지냈어요. 시어머니 모습이 친정어머니랑 많이 닮으셨어요. 그래서 친정어머니라 생각하고 지내고 있어요. 별로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애기 아빠 처음 만났을 때 애기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냥 마음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냥 이 사람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제과점에 다니던 중 그곳에서 남편 임기두 씨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유코 씨는 첫눈에 이 사람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반려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오직 한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매일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사랑을 키웠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하루 빨리 만나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사진을 보고 반해버렸던 잘생긴 신랑을 만났을 때 유코 씨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무뚝뚝해 보이는 신랑은 마음이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유코 씨가 한국으로 시집간다고 했을 때 친정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유코 씨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아시고는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니 결정을 존중하겠다. 니가 선택한 만큼 가서 열심히 잘 살라’고 하셨다.

상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 4대 가족 살림꾼
아직 농사일은 잘 못하지만 딸 아이 셋 데리고 시어른들 모시고 열 식구 삼시 세끼 식사 챙기고 애들 건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유코 씨다. 첫째 수진이와 둘째 예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는 그나마 조금 수월해진 눈치다. 크고 순한 눈매가 엄마를 닮은 막내 혜진이는 역시나 낯선 이가 있어도 보채지 않는 순둥이다. 어느덧 시집온 지 7년째에 접어드는 유코 씨고 보니 이곳 생활이 몸에 익어 그런지 자연스럽고 스스럼이 없는 것이 이집 사람 다 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말이 어눌한 유코 씨는 그래서 말을 꾸미거나 지어서 하지 못했다. 돌려서 말할 줄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진심을 어떡하면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는 사람 같다. 우리가 묻는 말 하나하나에 머릿속으로 한 번 생각한 후 천천히 말을 골라 한 마디 한 마디씩 또박또박 답을 했다.
“처음 왔을 때 안동에 와서 배웠던 것들은 여기 시집에 와서 별 소용이 없었어요. 수저 놓는 것도 몰랐고, 음식 하는 것도 모르고, 말이 서툴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힘들었어요. 뒷산에 가서 갈비(솔잎마른 솔 갈비)를 해오라 하시는데 먹는 갈비를 왜 뒷산에서 가져오라 하시는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결혼한 지 7년째에 접어들지만 유코 씨는 아직 한 번도 일본 친정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옆에서 혜진이를 어르던 권 할머니가 ‘바쁘고 아직 어린 고만고만한 애들 데리고 가기가 쉽지 않아서 아직 한 번도 못 보내줬네.’ 하고 미안해하는 데, 유코 씨가 그랬다.
“제가 처음 결혼해서 여기 왔을 때 생각했어요. 완전히 이곳 사람이 되기 전에는 친정에 가지 않기로 다짐을 했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문화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그랬어요. 한 칠 년 동안은 어린 아이라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나가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 혼자 마음속으로 7년 동안은 친정에 가지 않겠다 다짐했어요. 그래서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보고 싶지만 전화도 있고 편지도 있으니까요. 저희 친정아버지도 일본에서의 생활은 잊어버리고 시어머니 말씀 잘 듣고 시아버지 시할머니 잘 모시라고 당부 하셨어요.”

자신이 선택한 삶, 충실히 채워나가는 유코 씨
유코 씨가 한창 집안일에 바쁘면 손녀들 챙기는 건 당연히 시어머니인 권 할머니 몫이다. 요즘 같은 농한기에는 막내 혜진이는 할머니가 끼고 살다시피 한다. 그렇지만 일이 한창 바쁠 농사철이면 시어머니가 밭에 나가느라 아이들을 봐 주지 못한다. 그럼 유코 씨가 막내를 안거나 업고 일을 한다. 첫째 수진이와 둘째 예진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전 세 아이가 매달려 보챌 때면 유코 씨는 아이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훌쩍 마실 나들이에 나선다. 막내는 앞으로 업고 둘은 오토바이 앞뒤에 태우고 한 바퀴 휙 바람을 쐬고 온다. 어린이집 차가 집 앞까지 오기 전에는 버스가 서는 큰 도로까지 애들을 오토바이로 태워주고 데려오고 했다. 하루가 버스가 아침저녁 두 번 다니는 시골 마을에서 오토바이는 여러모로 유용했다. 처녀 시절 배운 오토바이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엄마가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한 바퀴 휘 드라이브를 시켜주면 아이들도 좋아라 한다. 아무리 세상에 하나뿐인 님과 살지라도 살면서 유코 씨라고 답답할 적이 없겠는가? 처녀 시절 유코 씨가 다니던 제과점은 직원이 유코 씨 하나뿐인 그곳에서 오래된 소규모 제과점이었기 때문에 매일 새벽 일찍 유코 씨가 문을 열어야 했다고 한다. 꽤 먼 거리를 매일 집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배웠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여년을 한결같이 여름이나 겨울이나 새벽같이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먼동이 터오는 새벽길을 달려 4시 반에 가게 문을 열고 아침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고 했다. 겨울에는 좀 추었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면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다고 말하는 유코 씨 얼굴이 참 맑고 행복해 보인다. 아마 그때도 유코 씨는 어쩌면 단조로웠을지도 모르는 그 일상들을 참 열심히 채워갔을 것이다. 그것도 찡그리지 않고 웃으면서 말이다. 그런 유코 씨니까 이렇게 잘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그제서야 속으로 웃음이 났다. 내색은 않지만 힘들고 어려운데 참고 인내하며 사는 건 아닐까 지레짐작을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만치 유코 씨는 잘 살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선택한 삶에 한없이 충실하게 녹아들어가고 있다고 할까, 유코 씨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다면 말해보라는 은근한 추궁에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점이 없다.’고 말해 우리를 기함하게 했다.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다들 5, 60세 넘은 분들이라 유코 씨는 마실 가는 것도 쉽지 않다. 다행히 녹전에서 들어오는 대로변에 유코 씨처럼 일본에서 시집온 또래가 있어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의지를 많이 한다. 이곳이 너무 멀고 외지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 학습지 선생님이 그 친구 집으로 와서 공부를 봐 주기 때문에 애들을 데리고 가는 길에 만나서 얘기도 하고 아이들 공부 문제도 의논하고 지낸다. 애들도 또래가 있어 학습지 공부하러 가는 날을 기다린다.
“아이들이 일본말하고 한국말을 다 잘하게 가르치고 싶고 영어도 잘하게 키우고 싶어요. 엄마하고 아빠하고 결혼해서 아이들이 두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자라는 것도 나중에는 아이들한테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있는 집이 으레 그렇듯이 벽에는 숫자며 알파벳이며 한자가 인쇄된 종이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데, 그 중에 구구단이 큼지막한 크기로 가지런히 쓰여 높이 붙여져 있다. 유코 씨가 직접 써 붙였다는데 글자에 힘이 있고 단정한 것이 꼭 유코 씨를 닮았다.

소금 뿌린 토마토에 화들짝, 지금에야 웃지요
유코 씨는 목욕하는 일과 화장실이 제일 불편하다고 했다. 일본은 목욕문화가 발달해서 다들 매일 목욕을 하는데 여기는 시골이라 목욕 한 번 하는 일이 쉽지 않다. 변변한 욕실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어른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여름에도 조심스러워서 마음 놓고 씻을 수가 없어 그게 제일 불편하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애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은 욕심에 이것저것 계획이 많지만 이곳 배나무골을 떠나서 갈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유코 씨는 목욕하는 것과 화장실이 조금 불편해도 그것만 빼면 여기서 식구들하고 다 같이 모여 사는 게 좋다고 말한다.
“식구니까, 식구들은 다 같이 모여서 사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요. 시할머니까지 4대가 같이 살면 부부 관계도 좋고 아이들한테도 좋다고 들었어요. 시할머니 시부모님 있어서 아이들이 정말 사랑 많이 받아요. 어른들 계시니까 서로 큰소리 내지 않고 존중해주고, 할아버지가 애들 한자도 가르쳐 주시고 구구단도 가르쳐 주시고. 어머니가 애들도 봐주시고 저한테 한국음식 하는 거랑 살림하는 거 일일이 다 가르쳐 주시고요. 토마토 하나만 해도 일본에서는 소금을 쳐서 먹는데 한국에서는 설탕을 뿌려서 먹잖아요. 처음에 여름에 토마토에 소금을 뿌려서 내갔더니 아버님이 이걸 어떻게 먹냐고 화를 내셨어요. 이제는 어머님이 가르쳐 주셔서 흉내는 내지만 그래도 아직 한국요리는 자신이 없어요. 제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일본에 있을 때 요리학원을 3년을 다녔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한국 요리 말고 이태리 요리나 멕시코 요리 같은 다른 나라 요리는 잘 안 드세요. 가끔 제가 한 요리를 드시면 아버님이 이게 무슨 맛이냐고 하세요.”아마도 유코 씨가 마음먹고 스파게티라도 해 드린 모양이었다. 시골 어르신 입맛에야 당연히 안 맞고 말고다. 그런데 유코 씨는 그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자신의 요리 실력을 인정받고 싶어도 아직 한국 요리는 서툴고 자신 있는 이태리 요리나 일본 요리는 아버님이 안 좋아하시고.
처음 시집올 때 신랑이 농사를 짓는 지도 몰랐고, 이런 시골에 와서 살줄은 더욱 몰랐다. 그런데도 유코 씨는 예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양 편안해 보이는 게 이 자리가 천상 유코 씨의 자리가 맞았나 보다. ‘당신이 최고야’ 라는 노래도 있듯이 그 사람 하나만 보고 왔다는 유코 씨의 말에 옆에서 권 할머니가 “그러이 힘들어도 당신 하나만 믿고 산다 이거지!”라며 한마디로 정리를 해 주신다.

후딱 해치우는 시어머니 vs 느긋하고 무던한 유코
할아버지가 칠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권 할머니는 동서만 일곱이다. 그러니 설 명절에 친척들이 다 모이면 칠십 명이 넘는다. 그 많은 친척들 먹는 것만 챙겨도 얼마나 일이 많을지 짐작이 간다. 설을 열흘 남짓 앞두고 있어서인지 강정을 내어 온 것을 보니 어느새 벌써부터 설 준비가 한창인 모양이다. 집에서 하셨느냐고 넌지시 여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제 권할머니가 유코 씨와 둘이서 집에서 강정을 했다며 내놓으셨다. 어른들 말씀으로 ‘그저 집에서 먹을 거 조금 밖에 안 했어.’ 하는데, 결혼한 며느리 입장에서는 그 ‘조금’이라는 말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먹으려면 조금도 우리가 생각하는 조금은 아닐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당연히 조금씩이나마 이제 식혜도 해야 하고 감주도 해야 하고 묵도 쑤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저 조금씩 집에서 먹을 만치만 말이다. 우리네 할머니들의 ‘그저 조금씩만’이 가지는 말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유코 씨가 보낼 설 명절 풍경이 짐작이 갈 것이다. 요즘 젊은 주부들 같으면 벌써부터 명절증후군이 열 번은 나타나고도 남았을 테지만, 권 할머니가 무던하다고 평하는 유코 씨는 그런 일이 힘들다거나 짜증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권 할머니가 어저께 강정 만들던 날에 유코 씨 때문에 속 터졌던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는 강정이 굳을까 마음이 급한데 친구한테 온 전화를 받으러 들어간 유코 씨가 나올 줄을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내 혼자 두 판을 할 동안이나 안 나오는 기라. 강정이 곧 타서 누를 판인데 전화를 붙잡고 있으니 내 속만 타 들어가지. 어구 눈치도 없기도 싶더라고. 그때 당장은 밉더니만 돌아서서 금방 또 잊어버리지 뭐. 그러니 같이 살지.”어제 일이 생각나 웃으며 며느리 흉을 보는데 말 속에 정이 그득하다. 그 마음을 알아서인지 그 말을 듣고 유코 씨가 소리 내어 웃는다.

급한 데 없고 성격 느긋한 유코 씨가 시집살이 하는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마도 그럴 때 속 태우는 건 시어머니인 권 할머니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권 할머니가 놀 때는 놀고 일할 때는 후딱 일부터 해치우고 나서 쉬어도 쉬어야 하는 바지런한 성격인데 반해 유코 씨는 바쁜 일도 없고 서두르지도 않고 묵묵하게 일하는 느긋한 성격이다. ‘몰라서 그런 걸 어쩌누?’하는 게 할머니도 어느새 일본 며느리한테 단련이 되었다고 할까, 낯선 데로 시집 와 고생한다고 권 할머니도 시집살이 안 시키려고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쓴다. 7년을 한 집서 부대끼면서 그야말로 서로 정이 푹 들어버린 거다. 외국인 며느리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닐 정도로 농촌에는 많은 다문화 가정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모두가 유코 씨처럼 농촌 생활이나 시댁 문화에 적응해서 잘 사는 게 아니다. 파경을 맞는 이도 많고 서로 살아온 문화가 달라서 고부 갈등을 겪는 집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래서 시집 식구들이랑 오순도순 어울려 사는 유코 씨 모습이 이웃들 눈에 더 들었나 보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한가 했더니 어느새 이장이 면에 추천을 해서 유코 씨가 지난 2007년 안동시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은 것이다.

에미야, 무 넣고 시원한 동태국이나 끓여먹자”
새해 녹전 배나무골 마당의 따뜻한 가족풍경
가끔 남편한테 아버님이, 어머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섭섭함을 하소연 할라치면 ‘그건 이래서 그런 거다.’ 하고 남편이 한 마디만 하면 ‘아, 그렇구나!’하고 곧 수긍을 하고 만다는 유코 씨. 그러니 일년 가도 큰 싸움 날 일이 없다. 무뚝뚝하지만 정도 많고 자신을 많이 아껴준다는 걸 알기에 이 사람이랑 결혼하길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제 혼자 마음속으로 약속했던 7년이 다 되어가니까 7년이 지나면 친정 부모님을 한 번 만나러 가고 싶다고 유코 씨가 시어머니 앞에서 차마 못했던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소죽을 끓이신다며 마음 놓고 이야기 하라고 자리를 비켜주신 할머니가 손에 동태 두 마리를 들고 들어오신다. 좀 전에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트럭 몰고 다니시는 이동슈퍼 아저씨가 다녀갔다 한다. 동태를 유코 씨한테 건네주며 권 할머니가 오늘 저녁에는 무 넣고 시원한 동태 국이나 끓여 먹자 하신다. 마당으로 나왔더니 평상 위에 나와 계시던 상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주무시는 듯 기척이 없으시고 쇠죽이 끓는지 아래채 아궁이에 불이 발갛다.

해가 넘어가는 마당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면에 일이 있어 외출했던 남편 기두 씨가 탄 트럭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가끔 남편이 시간이 나면 유코 씨랑 아이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간다고 했던 그 트럭이다. 3월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수진이와 예진이가 아버지를 따라 같이 차에서 내린다. 어린이집 차를 만나서 태우고 들어온 것 같았다. 우리를 본 기두 씨가 쑥스러운지 인사를 건네고는 멋쩍은 듯 딴 데를 본다. 그런 걸 가족사진을 찍자 하니 딸 둘을 앞에 세우고 선다. 유코 씨가 막내를 안고 웃으며 그 옆에 가서 선다. 다섯 식구가 참 많이도 닮았다. 까맣게 진한 큰 눈이며 순한 인상이 똑 닮았다. 사진을 찍고 돌아서 나오면서 보니까 아래채에 딸린 마구간 아궁이에서는 할머니가 지펴놓은 쇠죽 솥 장작이 벌겋게 타오르고 저쪽 사랑채에는 들에 나갔다 들어오신 할아버지가 군불을 때고 계시는데, 마지막 저녁 햇살이 집 뒤 언덕배기로 넘어가고 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