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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문서로 보는 안동이야기(글/김학수)

시골 아전에서 공신으로 -[권희학 관련문서]-

우리 전통시대에는 향리라 불리는 어중간한 신분집단이 있었다. 수령을 보좌하는 지방행정의 실무자였던 향리는 흔히 아전으로 불려졌다. 고려시대만해도 향리는 지방의 세정을 주관하며 고을의 유지로 당당하게 행세할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신분은 중인으로 하락되었고, 과거의 기회도 박탈되어 관료로 진출할 수도 없었다. 여기에 자자손손 향역을 세습하면서도 단 한 푼의 급여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전하면 탐학과 수탈을 떠올리는 원인도 여기에 있었고, 이런 풍토에서 향리에게 청렴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향리가 자신들의 숙명을 딛고 일어설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나라에 훈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 권희학(1672-1742)이란 인물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안동부의 호장 권명형의 차자로 태어난 그는 매우 명민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향리집안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여느 향리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십여세 무렵에는 향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희학은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일생일대의 은인을 만나게 된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소론의 거두 최석정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최석정은 병자호란시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평소 권희학의 자질을 눈여겨 본 최석정은 상경시에 그를 향역에서 면제시켜 서울로 데리고 왔다. 이후 권희학의 서울살이는 그야말로 별천지였고, 최석정의 후광에 힘입어 유수한 가문의 자제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힐 수도 있었다. 더욱이 1697년에는 최석정을 배행하여 연경을 다녀옴으로서 이제 그는 더 이상 시골뜨기가 아니었고, 가슴 속에는 출세의 야망이 불타올랐다.

1724년에 발발한 무신란은 개인적으로는 권희학의 야망에 불을 지핀 사건이었다. 당시 금위영의 교련관이었던 그는 총사령관 오명항의 휘하에서 진압군으로 활동하여 마침내 분무공신(3등)에 책훈되고 화원군에 봉해졌다. 완벽한 신분상승이었고, 향리사회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봉화군 풍호리의 후손가에 소장된 고문서에 따르면, 그 역시 다른 공신들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특전과 노비·토지 등의 상이 내려졌고, 무려 여덟 고을의 수령을 살며 치적도 쌓았다.
사후에는 영의정 조현명이 그를 위해 기꺼이 신도비명을 지어주었고, 1805년에는 안동의 향리와 양반은 물론 모모한 고관들의 협찬 속에 봉강영당이 건립되었으니, 웬만한 양반들도 누리기 힘든 영광이었다.

이렇게 권희학은 양반들로부터는 냉대를, 일반 백성들로부터는 원망을 받던 향리에서 일약 일류 양반으로 부상함으로서 조선후기의 신분변동을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한 몸이 되어서도 늘 조신하였으니,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분수를 돌아본다는 의미의 감고당이란 아호가 이를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학봉 선생의 진중편지

학봉선생의 삼강오륜 중에 부부유별이라는 것이 있다. 지아비와 지어미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이 말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3대 윤리규범의 하나였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예전 사람들은 남존여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았고, 내외간의 금슬이란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안동 검제리의 학봉종가에 소장된 한글편지를 대하는 순간 이런 오해는 금새 풀리고 만다. 더욱이 이 편지는 학봉 김성일 선생이 정부인 안동권씨에게 보낸 영결의 편지였으니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는 이의 가슴을 젖어들게 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화급을 다투는 상황에서 평소 학봉을 신임했던 선조는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봉을 경상우병사 겸초유사로 다시 임명하여 국난타개의 선봉에 서게 했다. 감격한 학봉은 민중을 위로하고 의병을 격려하여 영천대첩과 진주대첩을 이끌어 내며 왜군의 진로를 봉쇄했고,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학봉 역시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그에게도 그리운 부인이 있었다. 몸은 비록 천리 타관에 있었지만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섣달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592년 12월 24일 마침내 학봉은 부인에게 전할「진중편지」를 적어 내려 갔다. 부인을 배려하여 한글로 작성한 이 편지의 수신처는 안동 납실의 우감사댁이었으니, 납실은 곧 학봉가족의 피난처였다.

퇴계선생의 고제로서 학문과 행실을 인정받았고, 정승일지라도 면전 탄핵을 꺼리지 않아 대궐안의 호랑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강직한 학봉이었지만 가족에게만은 자상한 지아비요 인자한 아버지였다. 이런 양면성 때문이었을까? 학봉의 편지에는 가장으로서의 세심함과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비장함이 함께 풍겼다.

학봉의 편지는 가족의 근황을 묻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자신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부인을 안심시켰고, 장모님 안부와 자식들에 대한 염려의 마음도 아끼지 않았다. 명색이 감사 벼슬을 살면서 새해가 되어도 아무런 음식을 보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겸양이었을 뿐 학봉은 조기 2마리, 석이버섯 2근, 석류 20개를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편지와 함께 보냈던 것이다.

이 무렵 학봉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은 편지의 행간에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부인에게 전황을 넌지시 전하며 긴장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도 않았다. 이런 자신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말고 편히 지내라는 말로서 편지는 종결되었고, 내외간의 서신 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결국 이 것은 영결의 편지였던 것이다. 예감처럼 학봉은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1593년 4월 29일 진주성의 공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운명을 예감한 학봉이 영결을 고한 것은 자식도 형제도 아닌 부인이었다. 일생 고락을 같이한 부인이었기에 전장에서의 인간적 고뇌를 토로할 수도 있었고, 그런 부인이었기에 해로하지 못함이 못내 미안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학봉의 진중편지는 평생을 이어 온 부부금슬의 징표이며, 지어미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던 것이다.

삼일좌수첩

예로부터 안동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고 민도가 높기로 유명한 영남의 유서 깊은 고을이었다. 사대부가의 자제들은 예닐곱살이면 이미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업에 정진하였고, 아무리 집안이 가난해도 자식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런 풍토 때문인지 벼슬길이 한창이던 선조 임금 때는 정승·판서를 지낸 고관이 고을 안에 가득하였고, 한말까지도 저명한 학자·관료를 줄기차게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안동의 선비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긴 직함은 정승도 판서도 아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들이 선망한 자리는 유향소의 좌수였다. 좌수란 고을의 사무를 총괄하는 유향소의 수장으로 요즈음의 지방의회 의장과 유사한 직책이었다. 다른 고을에서는 양반의 아래 계층에서 이를 담당하였으니 매우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안동만은 예외로 양반 중에서도 최고의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으로 엄선되었다. 이것이 바로 안동문화의 특수성의 하나였던 것이다. 안동좌수와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선조가 대신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싱글벙글하는 서애를 보고는 "경은 내가 정승에 임명해도 좋아하는 기색이 없더니 오늘 이처럼 기뻐하는 이유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서애는 "제가 이 번에 고향에 갔다가 안동좌수에 임명되었습니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서애의 기쁨은 곧 안동좌수의 권위와 위상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안동좌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학식이 있어야 했고, 집안이 좋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온 고을을 복종시킬 수 있는 덕망을 지닌 인격자라야 했다. 퇴관한 정승이 좌수가 된 사례가 안동좌수 격을 더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벼슬은 좌수 선발의 기준도 Merite도 아니었다. 그러면 왜 안동의 선비들은 좌수가 되기를 갈망했을까? 좌수에게는 고을의 사무를 주관하고 400명이 넘는 아전집단을 지휘·감독하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그 보다는 한 고을의「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안동좌수를 최고의 명예직으로 이끈 바탕이었다.

금번 안동 갈전의 순흥안씨 집안에서 발굴된 1858년 안윤희(1783-1861)의 삼일좌수첩은 좌수 임명장으로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귀중한 문서이다. 삼일좌수란 좌수 유고시에 다음 좌수를 선임하기 위해 마련된 임시직으로 반드시 전직 좌수 중에서 학식과 인망이 뛰어난 인물을 선정하였다. 이런 명예스런 자리에 생원 명함이 고작인 안윤희가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벼슬보다는 학식과 인품을 중시하는 안동사람들의「어른대접」전통이 면면히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예의와 염치를 중시한 안동의 고상한 양반문화도 그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집안에 어른이 있으면 가정이 건강하게 유지되고, 마을에 어른이 있으면 패륜아가 생길 수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분명 법보다 어른을 무서워 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두머리는 있어도 참된 어른은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나라에 참된 어른이 있었더라면 정국이 이렇게 난마처럼 얽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엉망이 되었으며, 사회풍조가 이처럼 혼탁해졌겠는가? 우리 모두에게 반문하고 싶은 말이다.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임청각매매문서

안동에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임청각(보물182호)이라는 양반주택이 있다. 세칭 99간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사랑채·사당·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다.

정침인 군자정(君子亭) 마루에는 지금도 퇴계선생의 친필액자가 걸려있고, 정자 아래로 보이는 작은 연못에서는 담박한 선비의 취향마저 풍긴다. 고가의 규모와 격조가 이러했기에 한 때는 안동 선비들의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했고, 안목이 무척 까다롭다던 일본인들로부터는 국보지정(303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수난의 민족사는 임청각으로 하여금 유한공간으로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임청각은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었고, 무언의 노력 속에 독립운동사의 뒤편에 묻힌 새로운 이력 하나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석주 이상룡(초명 相羲)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선생은 바로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이며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는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천적 지성이었다.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이 강행되었다. 비보를 접한 석주는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사유를 고하였다. 분주한 망명이었지만 집안의 종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여 방면하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으니, 안동의 유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석주는 가족들을 데리고 비장한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맹자은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었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석주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13년 6월 석주의 외아들 이준형이 갑자기 귀국했다. 임청각을 매매하기 위해서였다. 석주는 임청각의 매매 대금으로 독립자금을 충당하려고 아들을 보낸 것이었다. 임청각이 어떤 집이던가? 17대를 내려 온 고가요 안동 고성이씨의 대종가가 아니던가?

임청각의 문서상자에 보관된 2점의 매매증서는 1913년 6월 21일의 상황을 너무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1점은 99간의 임청각을 900원에 매매하는 증서였고, 다른 하나는 임청각 주변의 택지와 산야를 100원에 매매하는 증서였다. 1000원이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매증서의 매도인은 중화민국 회인현 항도천의 이상희였고, 매수인은 안동에 사는 이종하 등 3인이었다.

결국 석주는 민족과 집안의 갈림길에서 민족을 택했고, 그러한 의지는 임청각의 매도로 나타났던 것이다. 독립을 향한 열정과 신념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석주는 1932년 생을 마감함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그의 정신은 독립운동에 활력을 주기에 충분했고, 자신을 포함한 아들·손자·동생·조카 등 무려 10명의 집안 사람들이 독립유공자가 되는 저력이 되었다.

예전에 양반망국론이란 것이 있었다. 양반 때문에 나라가 망했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견해다. 과연 그럴까? 석주는 누구보다 양반의 자제였고, 그가 보여준 행동은 그 어떤 사상가나 운동가보다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석주의 활동이 활발할수록 일제의 보복도 강화되었고, 후손들의 삶도 어려워져 갔다. 일제는 중앙선의 개통을 명분으로 임청각의 상당 부분을 헐어버렸고, 그 앞으로 철길을 내고야 말았다. 나아가 "친일파의 자손은 떵떵거리며 살아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말처럼 석주의 후손들 역시 어린시절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독립운동의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작금의 보훈정책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야야 할 것이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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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씨는 1967년생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 고문서연구반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위의 글은 한겨레신문 옛문서 옛사람이야기에 연재되었던 것을 필자가 재편집하여 보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