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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고향을 묻는 후배에게(글/손명호-서울사는 안동사람,사진/박영대-동아일보 기자)

내게 고향은 인생의 등대와 같은 의미일세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소개받고 대화를 하다보면 ‘고향이 어디세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때마다 잠시 망설이다가 ‘저 안동입니다’라며 조심스럽게 그 의도를 살피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네.
고향을 마음에 담고 힘겹게 세파를 헤쳐가야 했던 지난날에는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편안해지고,
‘男兒立志出鄕關 (남아입지출향관)
남자가 한 번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났으면
學若不成死不還 (학약불성사불환)
만약에 성공을 하지 못한다면 죽어도 돌아가지 말라.
埋骨豈唯墳墓地 (매골기유분묘지)
어찌 뼈나 묻을 묘지를 찾아 고향에 갈 것인가!
人間到處有靑山 (인간도처유청산)
사람이 가는 곳마다 푸른 산은 있기 마련인데!’
라며 마음을 새롭게 다잡게도 해주던 그 정겹던 동네를 두고 말일세.

어느 누구에게나 고향이 그렇듯 나에게도 안동은 그저 은퇴하여 돌아가야 할 공간이 아니라 좌절하던 한때의 나를 단련시켰고, 숱한 유혹에도 끊임없이 방향을 찾게 하여 초심에서 생각토록 하는 인생의 등대와도 같은 의미일세.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릴 때 고향에서 자라던 얘기는 곧잘 하면서 그 고향이 구체적으로 어디냐는 물음에 망설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10여 년 만에 자네를 만나고 자연스럽게 안동을 언급하면서 내재된 망설임의 원인을 생각하게 되었다네.
요즘 지명을 언급하면서 안동만큼 수식어가 많이 붙는 지명도 흔치는 않을 것이네. 추로지향(鄒魯之鄕), 예향(禮鄕), 선비의 고장, 심지어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등등.
사실 안동의 철학사적, 문화적 가치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수식어로 볼 수도 있네.
그런데 크게 드러낼 것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에게는 지난 날 제방 위에서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던 만월(滿月), 길안천 위로 불던 시원한 바람, ‘책바위’ 등 고향의 세 벗보다 그 명칭들이 더 무게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안동시에서는 2006년 7월 4일 유교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추로지향의 도시, 국내 유일의 지역학인 안동학(安東學) 존재, 대구·경북 최초 평생학습도시, 독립운동의 성지, 전통과 예절이 살아 숨쉬는 ‘인보협동’ 고을, 탈춤놀이와 민속축제라는 한국 대표축제 개최지, 과거의 엄청난 지식정보를 집대성하고 미래의 비전을 설계하는 한국국학진흥원 존재 등 7가지의 논거를 제시해 특허청으로부터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란 브랜드 등록 결정을 받고 그 이듬해 제막식까지 했다네. 또한 1981년 1월 孔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 박사가 도산서원에 알묘(謁廟)한 후 전서체 친필로 ‘鄒魯之鄕’(추로지향)을 썼는데 이 글씨를 기념비로 제작하여 서원 입구에 세워 두었다고 하네.

고향이 잘 되고 축복받는 데 반갑지 않고 기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안동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고 방문객이 많아 지역경제가 나아지고 어디 가서도 ‘안동입니다’고 했을 때 ‘추로지향’으로 또는 ‘양반의 고장’에서 자란 꽤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하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긍지요 자부심이겠지.
고향에는 벌초, 시사, 집안 애경사, 번다한 생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1년에 평균 대여섯 번 정도는 방문하는데, 과문한 탓인지 귀향할 때면 ‘안동이 제대로 가려면 이런 것은 아닌데... ’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네.

대학시절 가슴에 담고 있던 글귀의 하나가 ‘공자지도 충서이이의’(夫子之道忠恕而已矣)라는 논어에 나오는 말일세. 이를 주자가 풀이하기를 충(忠)이란 하늘이 부여한 천도(天道)로서 진실한 품성이고, 서(恕)란 나의 품성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충서(忠恕)는 인(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였네. 忠은 만사만물의 근본인 주체이므로 恕의 근원이고, 恕는 忠의 작용이며 실천이라고 보면 신독(愼獨)하는 측면에서는 ‘자신에게 엄격하게, 타인에게 관대하게’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좌우명 정도로 여기고 있다네.
또한 대학에는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卽近道矣)라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며 선후(先後)를 알면 도에 가깝다는 말도 있다네.

사려 깊은 자네는 이미 내가 왜 윗글들을 인용하고 언급하는지 알 것으로 믿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우리끼리 얘기지만 ‘수도’라는 말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번성한 집안, 이름난 고장일수록 충신, 열사가 많듯이 또한 난신적자(亂臣賊子)도 나는 법일세.

안동다운 여유가 곳곳에 있었으면 좋겠네
예향이라 일컬어지는 고장이 한 두 곳인가? 또한 그곳에도 학맥이 있고 유림이 있고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하다네. 남들이 그렇게 불러준다면 고마운 일이나 안동 출신들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다면 선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제적 브랜드 가치로 치더라도 안동이 고향인 나조차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른 고장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더욱이나 퇴계(退溪), 서애(西厓), 학봉(鶴峯) 등의 학문과 진퇴(進退)의 풍모를 흠모하는 안동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나 싶네.
그리고 추로지향이란 비석도 공덕성 박사가 써 준 글씨를 잘 표구하여 서원 어딘가에 보일듯 말듯 그렇게 걸어 놓고 단정한 서체로 글귀의 유래와 쓴 사람의 연혁 등을 비치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안동다운 여유가 아닌가 싶네.
안동이 이제껏 반드시 유교적 정신문화의 정점에서 항상 군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난날 개국을 하거나 왕이 등극을 하면 책봉을 받기 위해 연연하던 것처럼 꼭 외부로부터 가시적인 인정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조급함을 낳지는 않았을까?

위의 언급이 지나치다 생각할지 모르나 물질적 가치에 편중되어 경박해지는 세태를 유학적 가치관으로 균형을 맞추어 가자면, 선비의 고장 안동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안동인들은 더 자신에게 엄격하고 표현을 아끼고 매사에 세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일세.
또 안동은 사랑방 문화가 나름대로 뿌리 깊은 곳이지. 그 안에서는 흉허물도 다 소화될 수 있고 의기투합도 쉬워 국난의 시기에 유난히 우국지사, 의병장들을 많이 배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네.
하지만 평시에는 배타적인 형태로 왜곡되어 구한말 세도정치로 국정을 농단하고 지방 토호들의 권모술수의 장이 되었던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네. 이런 사랑방 문화도 좀 더 유연해지고 충분히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일세.
그리고 안동이 교육도시로 자타가 공인하는 지역이라면 이제는 옛날의 서원이나 향교처럼 전인교육에도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 면단위 정도에 특성화된 대안학교나 서당, 청소년수련원 등 명칭의 교육시설들을 유치하는 것 말일세.

이방인처럼 지내온 세월, 뒤돌아보게 되었네
내 고향인 길안면 묵계리만 해도 폐교가 되어 모 단체에 공매로 매각된 후 외부인 출입마저 통제하여 방치되고 있는 묵계초등학교 부지를 확보, 묵계서원 및 만휴정과 연계하고 안동대 유학과나 유림의 도움을 받는다면 훌륭한 교육공간이 마련될 수 있다고 보네.
소달구지에 아이들을 태우고 훈장님이 계신 서원이나 정자로 가면서 하늘, 바람, 자연을 강의하고, 작은 텃밭을 놀이터로 제공하여 농사체험, 대도시의 사립초등학교 등과 자매결연, 학부모 초청 등으로 직거래센터 운영 등 제대로 된 지역공간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호사정구수인야(狐死正丘首仁也)라!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향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는 것처럼 타관으로 나간 사람들이 왜 고향을 못 잊는지, 한번쯤은 반드시 귀향을 언급하게 되는지를 헤아려 안동인 특유의 정서를 하나로 묶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네.
요즘 동창회, 향우회 등 모임에 가끔 나가보면 일상의 편린들을 나누며 정을 쌓는 것도 좋지만 모교나 고향에 기여하자는 구체적인 계획이 논의되지 못하고, 명함을 돌리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처세와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골몰하는 경향이 많다네.
그 이유를 보면, 세파의 험난함에 지친 사람,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사람, 부모 형제들이 모두 이주하여 고향에는 연고가 완전히 끊긴 사람 등이 대부분이고, 더욱이나 고향 소식조차 잘 알지 못하여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 그리고 어쩌면 내가 할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느낌도 받고.......

모처럼 자네와 대화를 하면서 두서없는 말들을 많이 늘어놓았지만 마음은 오직 하나일세.
선조들의 발자취만 바라보고 예향을 논하기에 앞서 미래에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할 고향으로 함께 가꾸어 가자는 말일세.
그리고 늦었지만 내가 할 일을 찾아 앞으로 적극 동참하여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날 생각도 있다네. 인구가 점점 줄어가고 폐교가 늘어가는 고향 현실을 보면서 이제는 마음에만 담아 둔 고향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가꾸어 가는데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네.
1983년 대학 간다고 상경하여 지금까지 고향에 대해서는 이방인처럼 지내온 세월을 자네를 보면서 제대로 돌아보게 되었네. 나를 키워준 그 땅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기쁨도 애환도 함께 나누고, 남들이 저절로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힘을 합쳐 보세나.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