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전 상서(글/이성자-안동내방가사 전승보존회 회장)해마다 돌아오는 계절이지만 이맘때면 항상 마음이 가라앉고 밤마다 불안한 꿈으로 뒤척이다 눈이 떠집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아부지의 죽음이 언젠가부터 여명 속에 묻혀버려 그 옛날의 어렴풋한 기억처럼 아련합니다. 뒤척이는 밤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 끝에 ‘며칠 안 있으면 아부지 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제 가슴에 머무르지요.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니 아부지와 상별(相別)한지도 벌써 33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지애가 남다르셨던 우리 아부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아부지는 유아기에 할머니를 여의시고 서모를 맞으시어 부모정이 그리운 당신의 자녀들에게 남다른 사랑을 쏟으셨지요. 어려운 시대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힘들고 고독하게 성장하셨지만 범상하신 아부지는 안덕조씨 대문중 종갓집 칠남매 중 외딸이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셨지요. 짧은 생애지만 일제식민지와 6.25를 겪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처가곳 찾아들어 삶의 터전 마련하고 보릿고개 흉년에도 허리띠 졸라매고 묵정밭일 구워 놓고 수년간 남의 논 소작하여 우리를 먹이시고 키워내신 장하시고 정 많으신 우리 아부지.
사람은 아는 것이 있어야 세상을 잘 살수 있다면서 저희 칠남매를 수시로 앉혀놓고 ‘어른을 공경해라, 서로 사랑하라, 우애하라, 부지런하라, 검소해라, 배고픈 사람 밥주라,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라’ 늘상 우리들을 밥상머리 교육으로 가르치고 당신의 실천으로 우리를 양육하며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요. 오늘은 그랬던 아부지가 더욱 그립습니다.
위로 두 딸만 결혼시키고 6살 어린 영수까지 5남매의 교육이며 결혼이며 그 큰일들을 어매에게 부탁말씀 한마디 안 던져놓고 어찌 그리 야속하게 가셨나요?
저희가 첫 발령으로 대구에 살 때 아부지 사망이라는 전보를 받고 하늘과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아, 겨우 몸을 추슬러 어린 동생들과 택시로 달려갔지요. 꿈이기를 바라면서 문전 당도하여 외갓집을 바라보니 외할매 누우셨고, 외할아부지 하늘만 쳐다보고 우리를 아니 보니, 꿈이 아닌 현실이라 아부지 시신 붙들고 우리들은 모두 혼절을 하였지요. 아무리 아부지! 아부지! 보고 싶어 하시던 자식들이 왔다고 눈을 뜨고 보시라고 아우성을 쳐보아도 묵묵부답. 땅을 치며 불러도 아무대답이 없으시니 원통하기 그지없고, 야속하기 그지없어 어매보고 원망했지요. 딸을 넷 두고 아들형제 보셨다고 그리도 좋아하시던 아부지.
원태, 원식 두 형제를 철부지 큰딸을 믿고 대구로 유학시켜두고, 농사일 하시다가도 보고 싶은 마음 생기시면 밤중에도 쌀 몇 말 감자 한 포대 가지고 바람같이 왔다가는 첫 새벽에 농사일 바쁘다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공부 잘하고 있거라! 또 오마.’ 하고는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서 가셨지요?
아부지요. 미성전 오남매 교육과 남혼여취(男婚女娶)는 누구에게 맡기시고 말없이 가셨나요? 지금도 저희들은 그때의 원망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고생은 어찌 글로 기록 다할까요. 말없이 흐르는 세월에 어느덧 셋째동생 정혼을 하고보니 홀로 계신 우리 어매 혼수준비 누구하고 의논할까요? 몇날며칠을 연구해도 의논상대 없으니 그 마음 아부지 아실까요? 시집간 딸들과 만나서 의논을 하려해도 시부모 모시고 시집살이 하는 딸 둘이 즈그 생활에 얽매여 어매마음 알지마는 달려갈 수 없었지요.
대구 월배동에 평산신씨 사파종가 장손으로 셋째동생 시집보내고, 또 세월 지나 딸 된 것이 아깝다 하시던 원걸이가 고등학교 마치고 진학을 더 못하고 농협에 공채시험으로 합격 취직하여 어매를 도와주니 한편은 든든하나 한편은 어린 것이 그 큰집에 혼자서 자고깨어 출근하니 애무섭기 그지없었지요. 어매는 큰 머슴, 작은 머슴 다보내고 어린 삼남매만 데리고 공부시키려고 객지로 다니면서 그 많은 고통 고생하셨으니, 아부지 아시나요.
어머니 몸져누웠을 때 원걸이가 죽을 끓여 어매에게 간병하며 하는 말이 “어매 안 먹으면 나도 안 먹는다.” 면서 어매를 위로하는 것을 보고 외할머니 통곡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아부지를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럭저럭 지낸 세월 원걸이가 사촌김씨 천사종가 기차손과 결혼하고 남은 동생 삼남매는 어매의 글염으로 대학까지 고생 끝에 마치고 예쁜 배필 만나 다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딸 남매씩 두었지요. 큰 동생 원태, 둘째동생 원식이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 아부지 이젠 우리 칠남매 걱정은 하지마시고 좋은 세상에서 편안히 지내세요.
우리들 칠남매가 다 아부지 가르치심 받들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홀로두신 어매걱정도 이젠 하지마세요. 아부지! 안 보는 정은 쉬 잊혀지는지 오랜 세월 탓인지, 때론 우리들이 모여서 하는 말 아부지가 지금까지 계셔도 우리 칠남매와 손자손녀 외손들을 보시면, 아마도 너무 좋아서도 죽으셨을거야 하면서, 웃다가 아쉬운 여운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아부지, 우리 칠남매 모두가 그리도 불러 보고 싶은 이름입니다. 아부지, 이제 부디 우리들 걱정은 하지마세요, 아부지. 큰사위 얻으시고 실컷 못 보셔 한이셨지요. 대구 발령으로 주일되면 저희들이 안동 가니 얼굴이라도 보시려고 의성역에서 한종일 기다리시다 못 보시면 안동까지 밤중에 찾아오셔서 보고 가셨지요.
오월 어느날, 학교은행잎은 숲을 이루어 소쩍새가 살기에 때 우리자매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내내 소쩍새가 울더군요. 소쩍새 우는소리에 적막에 쌓여 모처럼 느껴본 향수 같은 기분에 젖어드는데 동생 원걸이는 “언니야 우리 아부지 돌아가시던 해에는 저 소짹새가 얼마나 울던지 밤에 잠을 못자도록 울었어.” 하면서 ‘지금도 저 소쩍새 우는 소리는 싫다’고 하던 그 얘기가 아직도 제마음속에 메아리로 들립니다.
아부지의 큰 자리가 텅 비어 그 어린마음에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나 봅니다. 아부지, 저와 원걸이, 원식이 세 남매는 한 이웃에 살면서 자주 우리집에 모여서 의좋게 지내고 있어요.
제가 오늘 이 편지를 올리게 된 것은 그 동안은 아부지 제사를 큰 동생 원태가 서울에서 모셨는데, 큰 동생 원태가 지금 외국 연수관계로 출국하여 국내에 없으니 작은 동생 원식이가 올해 아부지 제사는 안동에서 지내면 안되냐고 묻길래 큰 동생이 못 오니 좋을대로 하자고 의논하여 올해는 아부지께서 안동에서 작은 아들이 차려올린 제사상을 받으시게 되어 저희들의 사연을 적어 이렇게 아뢰게 되었습니다.
혼령이 계시면 이 자리에 오셔서 둘째며느리가 정성껏 차려 올린 음식을 고루고루 흠향하시고, 쓰러져가던 우리가문을 일으켜 세운 두 며느리에게 크게 복을 내려 주세요.
아부지, 부탁 말씀은 큰 동생 외국연수 잘 마치고 무사히 입국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 어매 사시는 동안 아부지 몫까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길안 작은집 오빠, 형님, 아부지 제사 참석하였고요 우리 많은 남매들이 다 모였습니다. 아부지 이 모두를 기뻐해주세요.
아부지 손이 친손외손 모두 합하여 서른명이 됩니다. 우리 모두 사회에 큰 인물 되어 대성하게 도와주세요. 또, 아부지께 마지막으로 부탁말씀이 있습니다. 아부지요 하늘나라 가시거든 우리 시부모 내외분 만나셔서 우리집 소식 전해주시고 사돈 간의 유정을 길이길이 나누소서. 아부지요 조상 전에 가셔서 할아부지, 할머니, 큰아부지, 큰어매, 작은아부지, 작은어매, 고모들 셋까지 다 만나시거든, 이곳 소식 전하시고 부모 동기 운우의 정을 천년만년 누리소서.
-안동에서 칠남매 대표 큰딸 권실이 올림.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