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을 찾아서(글/피재현)철없던 시절, 나는 고흐가 자학과 모험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흐가 좋았던 것은 물론이다. 삶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어김없이 내게도 가해지는 억압과 비극의 사건들을 겪어 오면서 나는 고흐에 대한 내 동경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확실하게 미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모범적 답안으로 고흐를 또 다른 측면에서 동경하게 되지만 그 동경이 종국에는 나에게 '인간 고흐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꽃병에 꽂힌 열 네 송이 해바라기](1888. 8.)-2002년 1월 2일,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꽃은 빨리 시들어버리는 데다, 단번에 전체를 그려야하기 때문이다(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델란드 시절의 대표작인 [감자먹는 사람들]과 [구두]를 보면서 나는 고흐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발광체에 대해 생각했다. 석탄에서 묻어나온 듯한 암갈색 톤의 후면에 어김없이 도사리고 있는 노란색의 발광체, 그 발광체의 정체는 [감자먹는 사람들]에서는 태양으로 보이기도 했고 [구두]에서는 대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숲의 끝](1882)이나 [식사하는 농촌 여인](1885)등의 그림에서도 여전히 후광(後光)으로만 작용하던 발광체는 [씨 뿌리는 사람](1888. 6.)과 [황혼의 밀밭](1888. 6.)에 이르면 새벽과 황혼의 태양으로 직접적으로 그려진다. 빠리시절 인상파들과의 교우를 거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흐가 그린 10여 점의 해바라기는 노란색 바탕과 푸른색 바탕의 그림들이 있다. 그 중에 나는 이 노란색 바탕의 해바라기가 가장 좋다. 어린시절과 성숙, 죽음이라는 인생의 순환을 그려 넣었다는 해바라기, 예술가는 초기에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지만 그가 자연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대립으로 기가 꺾이기는커녕 자연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고흐의 생각이 해바라기와 태양, 그리고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합일시키는 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고흐의 노란색은 이제 더 이상 숨어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그림 전체에 녹아든 태양이며 대지가 되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7.)-2002년 1월 3일, 암스텔담 고흐미술관에서
평생 고흐의 후견자이기를 자임했던 동생 테오와 주고 받았을 빛 바랜 편지 한 통을 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까마귀가 나는 밀밭]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낮게 내려앉은 코발트색 하늘과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불어가는 바람이 눈에 선연한 붓 터치. 나는 까마귀떼가 하늘에서 내려와 바람을 거슬러 내 앞으로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을 따라 하늘로 빨려 올라가 묻혀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식구들과 청량산에 갔을 때, 돌로 참나무를 때리는 아들놈을 나무라며 무심코 이놈아, 나무도 돌도 다 살아있는 거야라고 해놓고 나는 고흐의 이 그림을 떠올렸다.
고흐의 광기(狂氣)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집착, 색과 붓터치로 살아있는 자연을 그리고자 하는, 그래서 자신이 그 자연의 역동성과 생명력에 동화되고 빨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예술혼의 집착이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광기로 내몰지는 않았을까? 글을 쓸 때도 정확하게 대상과 내가 일치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리지 않던가!
일 드 프랑스의 하늘은 변덕스러웠고 얕은 언덕 어디쯤에서 비가 그친 뒤의 밀밭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고흐의 캔버스가 눈에 선하다. 바람과 비를 지나보내고 부스스 몸을 털 준비를 하는 노란색의 밀밭 앞에서 어쩌면 고흐는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예술혼의 최고 정점에 서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귀를 싸매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1889. 1.)-2002년 1월 5일, 쮜리히 시립미술관에서
프랑스의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앙토냉 아르토는 소크라테스도 갖고 있지 못했던, 다만 니체만이 갖고 있었던 눈, 육체를 혼에서 해방시키고 정신의 속임수를 발가벗긴 눈이 바로 「귀를 싸매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에 나오는 반 고흐의 눈이라고 말했다.
그림으로 밖에는 그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던(고흐가 죽고 난 후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고흐는 평생 35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초상화를 팔아 돈을 벌 생각과 모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자화상은 그의 말년의 것이다.
고흐가 라파엘 전파(前派) 연합(빅토리아 시대 아카데미 중심의 관학 예술과 산업사회의 관습에 반발하면서 일어난 19세기 영국의 예술운동)과 비슷한 성격의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 결성을 꿈꾸며 만들었던 아를의 노란집에서 동거하던 고갱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귀자르기 사건 이후 귀를 붕대로 싸맨 두 개의 자화상 중 파이프 담배를 문 자화상이다.
그의 나이 36세. 사랑도, 사도가 되고자했던 꿈도 이루지 못하고 폭풍우같은 고통의 드라마를 살아온 그의 자화상 앞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그의 광기를 보고자 했다. 고갱의 등 뒤에 들이댄 면도칼의 광기가 그 자화상 어디쯤에 분명히 스며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푸르고 깊은 두 눈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르토의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눈이었으며 무엇인가에 대한 골똘한 응시를 제외하면 코도 입도 귀를 싸맨 흰 붕대조차도 하얀 백지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정직한 자화상이었다.
이즈음 형의 건강을 걱정하는 테오에게 고흐는 이렇게 편지를 쓴다.
아직 한겨울이니 제발 조용히 작업할 수 있게 내버려다오. 그 결과가 미친 사람이 그 린 그림에 불과해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흐의 얼굴이 해바라기를 닮아 있었다.
[반 고흐의 방](1888. 10.)-2002년 1월 11일, 빠리 도르세이 미술관에서
이번에 그린 작품은 나의 방이다. 여기서만은 색채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 그게 전부다. 문이 닫힌 이 방에서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이 그림은 내가 강제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한 일종의 복수로 그렸다(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에게 방(房)은 일생동안 고통의 공간이었다. 늘 생활고에 시달리며 동생의 원조로 연명하던 그의 방은 낡고 삐걱거리는 공간이었으며 사랑을 그리워하고 물감 값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의 공간이었다.
다행히 이 그림의 방은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노란 시트와 노란 햇살이 있는 방이었다. 물병이 있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벽에 걸린 소품들과 나무 침대가 누우면 금방이라도 곤한 잠이 들 것 같은 방.
노란집 이층에 있던 고흐의 방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그림 판 돈을 나누는 방법으로 공동체 회원들의 생계와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받는 화가공동체를 꿈꾸던 고흐의 소망이 담긴 방이었다. 그 일환으로 고갱과의 동거가 이루어져 함께 살기도 했던 집, 고흐의 일생을 통틀어 아를의 방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의미의 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흐는 이 그림을 강제휴식에 대한 복수라고 표현했다.
고흐의 진정한 휴식은 이 방이 아니라 오베르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1888년 2월부터 1890년 5월까지 아를에 사는 동안 그린 200여 점도 모자라 고흐는 오베르에 사는 두 달여 동안 [오베르의 성당],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 수 십 점의 그림을 더 그린 후에야 서툰 총질로 생을 마감했다.
그림에 영혼을 다 소진해버린 것이다. 그림이 그의 영혼을 다 갉아먹은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고흐는 행복했을까?하고.[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