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둥지를 떠나 날아오른 아이들, 둥지를 지키는 어머니(글/이미홍-객원기자)

시간은 아이를 어른으로 자라게 한다. 봄에서 가을로 가는 시간은 하롱거리는 꽃잎을 꽉찬 열매로 익어가게 하고, 때로 시간은 없던 것을 있게 하기도 하고 내 옆에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도 한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시간 속에는 우리가 걸어온 순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간은 시간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기도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을 키워간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사람들, 그리고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우리는 달라져 있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시간은 우리를 변화시켜 놓는다.

둥지를 떠나 훨훨 날아간 아이들
20여년 전에 ‘둥지’라는 가족신문이 처음 만들어졌다. 안동지에 ‘둥지’를 만든 안동수필문학회 지유숙(71) 씨 가족이 소개된 지도 20년이 지났다. 10년이 지났을 때 ‘둥지’ 식구들은 10년의 시간만큼 자라 있었고 새로운 식구들이 더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된 현재 ‘둥지’ 가족들은 10년이 더한 시간을 어떻게 채색하고 있는지 지유숙 씨네 둥지를 찾았다. 10년 전에 찾았던 그 집에서 지유숙 씨가 홀로 우리를 맞았다. 혼자 지낸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했다. 집 안이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닮아 맑고 고즈넉했다. 정갈한 풍경 속에 20년 전 ‘둥지’의 안주인이었던 지유숙 씨가 20년의 세월을 건너 조용히 웃고 서 있었다.
둥지 속에 오순도순 모여 있던 아홉 식구들이 어느 새 둥지를 떠나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가 버리고 지숙 씨 홀로 둥지를 지키고 있었다. 때때로 그 둥지로 자식들이 찾아들면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어주며 바깥세상이 춥고 힘들면 언제든지 와서 쉬어 가라는 양 한 마리 어미새처럼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이 지금도 엄마 집이라고 오면 가족신문을 꺼내서 너무 재미있게들 읽어요. 지금 보면 서툴고 유치한 것도 많은데 일일이 직접 손으로 쓴 것들이라 볼 때마다 그때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깔깔깔 웃고 그래요.”

우리가족을 돌아보게 만든 가족신문 둥지
‘둥지’는 가족 각자에게 많은 의미를 가진 작업이었다.
“생각해 보면 둥지를 통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저 애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 싶게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글 쓰는 일에는 별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던 막내가 의외로 글쓰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것도 둥지를 만들면서 알게 되었고, 딸아이들이 엄마가 아들 효원이에 비해 자신들을 차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저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둥지를 만들던 그 몇 년간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참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구나 싶어요. 둥지를 만들면서 아이들도 나름대로 많이 성장을 한 거 같고요. 자기들 나름대로 잠재된 것들을 발견한 것도 있고 동기간에 우애도 좋아지고요.”
처음 ‘둥지’라는 제호 옆에 -효원이네 가족신문-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친지와 ‘둥지’네 가족을 아는 지인들 50명에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손으로 직접 쓴 ‘둥지’ 1호를 보냈다. 그러던 것이 소문을 듣고 우리도 달라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200부를 찍게 되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느냐는 말끝에 누구와 더 친하다느니 하는 오해도 받았다. 우표 값도 값이려니와 일일이 주소를 써서 발송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힘은 들었지만 가족 중 누구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신문 첫머리에 쓰여 있던 [펴낸이: 가족 모두. 지도: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전체 책임: 윤경. 특파원: 큰 언니, 작은 언니, 효원. 기자: 은경, 제경.] 이름 그대로 ‘둥지’가 만들어지는 동안 가족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기꺼이 자기 몫을 했다.
처음 아들 효원 씨가 어디선가 듣고 와서 가족 신문을 만들자고 해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둥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언젠가는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육남매에게보다는 한 집안의 안주인이자 여섯 새끼들의 어미인 지유숙 씨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어갔던 게 아니었나 싶다. 글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가족들의 마음을 읽고, 보듬고, 아파하고 기뻐했을 터이다. 본래 글쓰기를 좋아하고 꼼꼼해서 무엇 하나 흘려 넘기지 않고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며느리이자 엄마였던 지유숙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어머니로 육남매의 기억 속에 새록새록 각인시켜준 건 수필문학회 회원 지유숙 보다는 눈에 보이는 가족 신문 ‘둥지’를 만드는 순간의 엄마, 가족 신문 ‘둥지’ 속에 살아 있는 엄마의 글이었을 지도 모른다.

“제가 뭐 특별히 교육 철학이 있거나 훌륭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데, 제 나름대로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엄마로서 제가 글을 쓴다는 것이 저들한테는 나름대로 많은 영향을 준 거 같아요. 애들도 자라면서 그런 말들을 했어요. 엄마한테 배운 거 중에 가장 큰 게 읽고 쓰는 거라고요. 지금 육남매가 다 가정을 이루어한 집에 아이들이 둘씩이니 다 모이면 24명이예요. 그런데 지금도 마음으로는 다들 그때처럼 둥지를 다시 만들고 싶어 해요.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요. 그런데 각자 흩어져서 바쁘게들 살다보니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되더라고요. 누구 한 사람이 책임지고 일을 맡아서 해야 하는데 자기 일 해야 되고 각자 식구들 챙겨야 되고 하니 제가 고집을 피울 수도 없고요. 그래서 몇 번이나 말을 해 놓고는 실행을 아직 못하고 있어요.”

세월따라 육남매가 자리물림한 둥지 편집장
86년에 시작한 ‘둥지’는 92년 봄에 나온 18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큰아들 효원 씨가 결혼을 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을 나가면서 잠정적으로 중단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다들 좀 있다 안정되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 결혼을 해서 첫 아이를 가지고도 꾸준히 둥지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첫째와 둘째인 혜경, 선경이 연달아 둘째 아이를 낳고 윤경, 은경에 이어 막내까지 결혼과 출산이 이어지면서 언젠가는 다시 만들자는 약속은 하루하루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이들 뒷바라지가 어디 보통 일인가,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 꿈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저마다의 생활 속에서 ‘둥지’는 어느새 식구들이 저마다 한 번씩 꾸는 ‘꿈’으로 남고 말았다. 첫째인 혜경 씨가 처음에 맡았던 ‘둥지’를 편집하는 일은 혜경 씨가 결혼을 하면서 둘째인 선경 씨에게로,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고 있던 셋째인 윤경 씨에게로 이어졌는데 오랫동안 편집을 책임졌던 윤경 씨가 결혼하면서 편집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탓도 있었다. 막내인 제경 씨가 잠시 편집을 맡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하나 둘씩 나래 짓을 하더니 육남매가 저마다 엄마가 만들어준 ‘둥지’를 떠나 자신들만의 둥지를 지어 훌훌 날아갔다.

텃밭일구며 소박하게 살자던 남편
2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둥지’ 식구들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이제는 곁에 없는 두 사람일 듯하다. 둥지의 가장 큰 어른이셨던 할머니와 지유숙 씨의 남편이자 둥지 식구들의 가장이었던 아버지 이동국 씨의 부재다. 육남매가 모두 떠난 집에서 아이들의 난 자리를 채우느라 방 한 칸씩을 차지하고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살았었다. 복작대던 아이들이 다 자라 어미 곁을 떠났지만 서운한 한편으로는 대견했고, 그제야 마음 놓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할 여유가 생겼다고 좋아하던 시간도 잠시 6년 전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신 뒤에 찾아오는 허망함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1년 뒤 어느 날 남편이 거짓말처럼 시어머님을 따라 가버렸다. 퇴직을 하고 이제야 두 부부가 텃밭이나 일구며 사이좋게 늙어가자 싶던 차였다. 채전을 마련해 아이들에게 채소며 고구마며 몇 전이나 부쳐줬을까, 어느 날 쓰러진 남편은 그 날로 세상을 버렸다. 황망하고 억울해서 쉽게 남편을 놓아버리지 못해 오래오래 속앓이를 했다.

“남편이 갑자기 그렇게 가고 나니까 세상 천지에 나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은 게 너무 힘들었어요. 성실하고 믿음직해 믿고 따랐지만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보수적인 남편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었죠.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이제 나도 하고 싶은 말도 좀 하면서 싸우기도 하면서 둘이서 한 번 살아봐야 되겠다 했는데, 그만 한 쪽이 뚝 떨어져 버리니까 슬픔도 슬픔이지만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부부가 해로하지 못한 내 그 마음을 애들은 알지 못해요.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요. 저들한테는 아버지일 뿐이지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육남매는 가신 분들보다 엄마가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시간이 그 아픔을 뒤로 하게 했다. 어머니는 남아 있는 식구들과 새로 태어난 새끼들을 둥지 안에 품어 보듬어야 했으므로 무너져 내리려는 자신을 다잡고 자식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휴간된 가족신문 둥지, 다시 낼 그날이 오겠지요
올해는 아들 효원 씨네 집에 큰 변화가 있었다. 효원 씨가 그동안 몸담았던 14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치고 금년부터 새롭게 문을 열게 되는 모교의 로스쿨 교수로 가게 되었다. 학문하는 게 천성에 맞는 아들이고 보니 효원 씨 자신도 가족들도 모두 환영을 했다고 한다.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면 생활도 안정이 되고 시간도 여유가 생길 거 같아 그렇지 않아도 ‘둥지’ 특집호라도 내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넷째인 은경 씨네가 대학교수인 남편의 안식년을 맞아 네 식구가 지난 달에 외국으로 떠나고 없다. 하나가 시간이 생기니 하나가 떠나고, 또 누구는 다시 일을 하게 되어 바쁘고, 그러니 다시 또 제자리다. 그래도 그렇게 다들 바쁘게 사는 것이 한편으론 보기가 좋다. 누구 하나 노는 자식이 있어, 시간이 한가로워 편집 일을 맡아한다면 그걸 보는 것도 부모로서는 가슴 아픈 일일 것 같아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새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가족들
창간호 때 편집을 맡았던 맏딸 혜경 씨네는 얼마 전 서울로 이사를 했고 혜경 씨네 첫째 아들 현우는 어느새 대학 4학년이 되었는데 언제 봐도 듬직한 외손자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열심이던 가인이네 엄마 둘째 선경 씨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서 다시 취직을 했다. 지금은 어린이 전문도서점 세원북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 윤경 씨는 종교 생활을 오래 해 온 엄마인 지유숙 씨의 오랜 소망을 알기나 했다는 듯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결혼을 해서 목사 사모님이 되었다. 남편을 도와 교회 일로 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딸인 외손녀가 어느새 중학생이라니 시간이 부리는 마술이 새삼 놀랍다.
그리고 둥지 7호 봄호를 만들 때만 해도 여고생이었던 막내 제경 씨. ‘청소년 향토사 교실을 다녀와서 ’라는 글과 더불어 ‘아기새’라는 만화를 그렸던 애교가 많던 제경 씨는 현재 서울 노원구의 YMCA에서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고 있다. 가기 싫어하는 걸 설득을 해서 법대를 보냈더니 나와서는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딸애들은 대학원 나오면 시집보내기 힘들다는 아버지를 한동안 온 식구가 속여야 했었다. 그런데 전공을 살려 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을 보니 저마다 지 갈 길이 따로 있다 싶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보니 일하랴 두 아이 키우랴 요즘 제일 정신이 없다.

다들 자기들 삶을 사느라고 바쁘다. 하나는 분당에 있고 하나는 수지 살고 하나는 의정부에 있고 둘은 서울 살고, 다들 안동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보니까 안동에 혼자 남아 있는 엄마가 걱정인지 틈만 나면 올라와서 같이 살자고 성화들이다. 그러나 지유숙 씨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혼자 있다 보니 저들이 마음이 안 놓이는지, 안동 집 정리하고 올라 와서 손자 손녀 재롱도 보고 우리하고 어울려 살자고 자꾸 그래요.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자주 가서 보면 되지 하고 자주 올라가서 아들네 집도 가고 딸네 집도 가고 했어요. 그러다가 생각했어요. 내가 저들한테 마음의 짐이구나 하고요. 내가 약한 모습을 자꾸 보여서 아이들 걱정을 시켜서는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내가 내 자리를 지켜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내가 자주 가는 대신에 아이들더러 내려오라고 해요. 설, 추석 명절에는 한 번은 내가 올라가고 한 번은 애들이 내려오고 해요. 제사는 아들이 모시고 있으니까 내가 가고요.”

재학시절 안동여고 교가도 작사한 글솜씨
육남매가 알게 모르게 글쓰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하나같이 책 읽기를 즐겼다. 둘째 선경 씨도 국문학과를 나와 한때 ‘둥지’의 편집을 했었고, 감성이 남달랐던 윤경 씨가 출판사에 근무하게 되면서 지유숙 씨가 알게 모르게 덕을 많이 봤다. ‘둥지’ 편집 일을 제일 오래 맡아해 준 것도 그렇고, 첫 시집을 낼 때도 편집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자신도 없고 부끄러운 마음에 그동안 써 둔 원고를 밤새 혼자 교정을 보고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휴가를 받아온 윤경 씨가 교정에서부터 제본까지 나서서 해 주어 신앙시집 <무엇이관대 이처럼 사랑하는가>를 무사히 낼 수 있었다. 첫 시집을 낸 이후로 자신에게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를 그린 시집 <사부곡>과 수필집 <되돌아온 편지>를 출간했다. 안동수필문학회의 초창기 회원인 수필가 지유숙은 지금도 여전히 안동수필집에 글을 쓰고 있다.
시댁의 가세가 기울면서 형편이 어려워지자 당시에는 박봉이었던 교사인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예안에서 시작한 수예점을 교사인 남편을 따라 안동으로 나와서도 계속했다. 아이들이 다 자라기까지 20년을 수예점을 해서 먹고 살았다. 유교적인 가정에서 자라난데다가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로서는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런 그녀를 버티게 해 준 것이 신앙생활과 글쓰기였다. 어려서부터 공부 욕심이 많아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고, 안동여고에 다닐 때에는 교가 가사를 써서 화제가 되었을 만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유숙 씨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안동댐 공사현장에서 개최된 백일장에 참가해 운문부 장원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안동수필문학회에 들어 2회 때부터 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지유숙 씨가 쓴 글은 시집과 수필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그건 지유숙이 쓴 글의 일부분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써온 일기장이며 독서기록노트, 육남매의 육아일기, 가족사 기록노트까지 서재에는 정갈한 글씨로 빼곡히 정리된 두꺼운 노트들이 가득했다. 육아일기는 결혼을 할 때 본인들에게 줬지만 나머지 기록들은 서재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런데 요즘 지유숙은 그마저도 짐이라 여겨진다. 제 마음의 상념들을 자신이 간 뒤 자식들이 떠맡는 게 영 마뜩치가 않다. 온전히 태워 없애자니 자신이 왔다 간 흔적들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거 같아 서운하다. 그래서 제 상념의 찌꺼기들은 자신이 가져가고 마음의 씨앗이 될 알갱이들만 모아 따로 정리를 하고 있다.

손녀에게 받은 표창장, 세상 가장 큰 상입니다.
없는 살림에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 데리고 엄벙덤벙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다들 별 탈 없이 바르게 잘 자라 주었다.
설 때면 딸들이 첫날 시댁에 갔다가 둘째 날이 되면 다들 엄마한테 세배한다고 아들네 집으로 오는 데 딸네들 식구들까지 다 모이면 한 집에 아이들이 둘 씩 해서 스물 네 명이다. 거기다 지유숙 여사까지 보태면 스물다섯 명이 꽉 들어찬다. 그럴 때면 지유숙 여사는 며느리한테 괜시리 미안해진다. 다섯이나 되는 시누이에 며느리는 달랑 저 하나니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스물다섯 식구 뒷바라지가 어디 쉬운가. 그래도 서로 밉다 싫다 않고 육남매가 우애 있게 지내니 보기에 좋고 안심이 된다. 누구 하나 기죽어 기울거나 구석에 내돌리지 않고 다들 제 밥그릇 챙기고 사니 그 또한 다행이다. 어떤 때 생각하면 내 힘으로 키운 게 아니라 저들 스스로 잘 큰 거 같단다.

몇 년 전에 지유숙 여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에 누워 있는 할머니를 병문안 왔던 당시 5학년이었던 손녀 예인이가 병상에 누워서 “나는 해 놓은 일도 없고 속상하다”고 손녀 앞에 푸념 아닌 푸념을 하는 것을 듣고 “할머니가 왜 한 일이 없어요?” 하더니 즉석에서 돌아앉아 얼마간 부스럭거리더니 할머니에게 급조한 표창장을 수여했다.
-표창장. 위 사람은 나라와 국력의 기둥인 어린이를 많이 배출해 내었으므로 나라의 일등공신으로 집현전 학사직을 내리노라. 세종여왕 1년 이예인-
지유숙 여사의 서재에 지금도 끼워져 있는 그 표창장을 보고 다들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을 받았다며 부러워들 한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둥지를 떠나버리고 허전했던 그 마음을 손녀가 알았나 보다. 지금 대원외고 2학년인 예인이는 아버지 모교인 서울대에 진학하는 게 꿈이란다.
자식들이 언제라도 지친 날개를 쉬러 올 수 있도록 홀로 의연하게 둥지를 지키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외로운 일상 속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 겉모습을 닮아 속도 맑고 정갈할 것 같은 지유숙 여사가 안쓰러워서일까? 너무 자식들한테 짐 되지 않으려고 혼자 알아서 하려는 엄마가 어렵다고들 한다. 일도 사람도 질척거리며 감정을 흘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할 것 같은 그녀기에 자식들한테는 아직도 만만한 어머니는 아닌가 보다. 은근히 뒤끝이 있을 것 같은 만만치 않은 시어머니를 상상하니 왠지 즐거워진다. 늙어갈수록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나는 좋다.

우리가족의 둥지, 삶 다하는 날까지 지킬터
“저들 보기에는 이 엄마가 친구도 많지 않고 그렇다고 어디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에서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면서 전화 오기만 기다리면서 자식들만 바라보고 있을까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야. 그래 자꾸 뭐도 배우고 뭐도 배우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즐겁게 살라고 노래를 해요. 그래서 저들 걱정 말라는 생각도 있고 나도 좀 변화를 줘야 되겠다 싶어서 이번에 안동병원에서 여는 ‘리더스 포럼’과정에 등록을 했어요. 정원이 80명인 과정인데 그것도 나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났을 텐데 친구가 같이 들어보자고 해서 큰 맘 먹고 등록을 했어요. 다음 주부터 시작이니 다음 주부터는 좀 더 바빠질 거 같아요. 교회 가는 일하고 가끔 수필문학회 모임에 나가는 거 말고는 외출이 적었는데 이제는 공부도 하고 친구도 만들고 그렇게 지내려고요. 내가 잘 살아야 자식들이 마음 편하게 지내지요.”

엄마가 며느리랑 사위랑 지내는 거 불편하면 저들 가까이 따로 살 집을 마련해서 육남매가 저마다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들 들러 시간도 보내고 좋은 구경도 다니고 하자고 해도, 서울에는 평생교육원 과정도 많고 글쓰기 강좌도 많고 하니까 평생소원이자 한이었던 글쓰기 공부도 실컷 하라고 성화를 해도 지유숙 여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나고 자라 아이들을 키워낸 이곳만이 온전한 자신의 둥지인 것 같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묻힌 이곳이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끝까지 이 둥지를 지킬 작정이다.
“지금도 내가 아쉬운 게 아이들한테 신앙생활의 기초를 잘 쌓아줬더라면 하는 거예요. 저는 결혼할 때도 첫 번째 조건이 믿는 집일 정도였어요. 그런데 생활에 쫓기다 보니 신앙생활도 소홀해지게 되더라고요. 정신없이 먹고 사느라 그 와중에 아이들에게 신앙생활 기초를 닦아주는 것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요. 그게 내 남은 날 빚입니다. 그래서 가는 날까지 부지런히 빚을 갚아나갈 생각으로 주일예배와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닙니다.”
자식을 위해 어머니는 지금도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