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각 예술품의 전시장 루춘(盧村) 마을(글/임세권-안동대 교수)
루춘마을 앞의 유채꽃 핀 들판. 온통 노란 물감을 부은 것만 같다.
황산시에 도착한 후 내가 처음 구입한 황산의 마을을 이해하기 위해 구입한 책은 "중국고진유(中國古鎭遊) 시리즈 열네 번째 책인 휘저우(휘주,徽州)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산 첫 번째 이유는 표지사진 때문이었다. 책 표지 전체가 두 개의 문짝이 마주 닫힌 분합문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화면의 우측 상단과 좌측 하단이 비스듬히 사선으로 그림자가 져있고 표지면의 위쪽으로 삼분의 이 정도 공간을 차지한 붉은 색의 문살조각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나는 표지 사진 하나만으로 그 책을 사가지고 와서 사진의 문이 어느 마을에 있는 어느 집 것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 그 것이 루춘 마을의 지성당(志誠堂)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지성당은 목조각 장식으로 중국에서도 매우 유명한 집이며 그런 이유로 목조루(木雕樓)라는 별칭을 갖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꼭 1년 전, 유채꽃이 만발한 2007년 4월 11일 나는 루춘을 찾았다. 홍춘에서 차를 내려 루춘까지는 삼륜차를 타고 가야했다. 루춘으로 넘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 멀리 마을이 보이고 마을의 동쪽과 남쪽을 둘러싸고 있는 들판이 온통 노란 물감을 부은 듯이 보였다. 루춘의 유채꽃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노란색의 바다위에 남색 하늘이 붙어 있고 그 사이에 초록색 산이 한줄기 경계선을 그어 주었는데 마을은 그 산 아래 눈부시게 흰 색으로 누워 있었다. 홍춘이나 시디마을에 비교하면 작고 소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흰 색의 벽과 검은 색의 기와가 노란 유채밭에 둘러싸여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유채밭과 마을 사이에는 시아먼시(하문계,下门溪)라는 하천 하나가 경계를 짓고 있는데 뒷 산과 마을 남쪽의 하천으로 훌륭한 배산임수형 지형을 이루고 있다.
찻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로 꺾어들면 시아먼시 하천을 건너는 돌다리 하나가 있다. 마을은 그 다리를 통해 세상과 접하고 있었다. 돌다리는 사차교(驷车桥)라고 하는데 송나라 때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리 이름에 얽힌 유래가 있다. 송나라대 루춘마을에서 배출된 유명한 인물 루천쭝(노신충,盧臣忠)이란 사람이 있었다. 옛 사람들은 사마고차(驷馬高車) 즉 네 마리 말이 끄는 지붕이 높은 수레는 특별히 귀한 사람이 아니면 탈 수 없다고 알았다. 루춘마을 사람들이 다리 이름을 '사마'로 지은 것은 노씨 가족들의 고귀함을 나타낸 것이다.
마을에는 마을을 돌아가는 도랑이 하나 있는데 이는 인공적으로 파낸 것이다. 그 도랑은 마을 서쪽의 하문계에서 마을 안으로 물길을 낸 것으로 마을에서 완만히 구부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도랑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마을 동쪽을 거쳐 전가계로 합류된다. 이는 휘주 고촌락이 물의 활용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마을의 노인
강태공의 후손들이 루(노,盧)씨로 살다
전 중국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이웃 홍춘마을과는 대조적으로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이 마을은 그래서인지 입장료도 홍춘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된다. 그래도 우리 돈으로 삼천 여원이나 되니 입장료 비싸다고 아우성대는 하회마을보다도 거의 천원 이상 비싸다.
입장권을 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중심통로를 가운데로 하고 양쪽으로 좁은 골목길들이 직각으로 갈라져 있다. 관광객이 적으니 홍춘이나 시디 마을처럼 관광객 상대의 가게들도 없고 주민들의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가 하나 보일 뿐이다. 가게 앞에는 마을 아낙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 건너편 넓은 마당에는 참깨를 비롯한 몇 가지 농작물들이 널려져 있었다.
이 마을 이름이 루춘(노촌,盧村)인 것은 루(노,盧)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루춘마을은 즈샨춘(치산촌,雉山村)이라고도 한다. 이현치산노씨종보(黟县雉山卢氏宗谱)에 의하면 루씨와 쟝(강,姜)씨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루씨의 선조는 제나라 제후였던 유명한 강태공이다. 그의 후손 쟝까오(강고,姜高)는 전란으로 인해 호리병에 음식을 모아 먹고 살았는데 후손들이 그의 고생을 마음에 새겨 호리병을 뜻하는 루(노,蘆)와 같은 발음을 가진 루(노,盧)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고조 때 루관(노관,盧绾)이 나라를 세우는데 공을 크게 세워 나라에서 연왕(燕王)에 봉했는데 하북(河北)의 탁군(涿郡)이었다. 그곳은 뒤에 범양군(范阳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후손 루동메이(노동미,盧冬美)의 아들 루이(노이,盧易)가 안휘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루이는 아들 루쩐(노진,卢振)을 낳고 타이핑현(태평현,太平縣) 거춘(갈촌,葛村)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지금의 황산구 궈춘(곽촌,郭村) 일대이다. 루쩐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루시엔(노현,卢玄)이 이현(이현,黟縣)의 북쪽 산천이 수려하고 땅이 기름진 것을 보고 남당(南唐) 말년에 거춘마을에서 즈산마을로 옮겼다. 이후 그는 즈산루씨(치산로씨,雉山卢氏)의 시조가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의 역사를 가진다.
루춘마을은 문풍이 크게 성하고 명인들이 많이 배출되고 또 관직에 나아간 사람도 적지 않다. 북송 태평흥국시기의 루추(노저,盧儲), 남송때 루린(노린,盧麟) 등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루춘마을에서는 뛰어난 장인들이 나왔는데 이 장인들은 목조(木雕) 석조(石雕) 전조(塼雕)의 뛰어난 기예를 지닌 사람들로 휘주 각지에 그 족적을 남겼다.
장식으로 가득한 지성당 내부
지성당과 루방시에
이들 장인들의 솜씨가 최고로 발휘된 건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마을의 상징이기도 한 지성당(志誠堂)이다. 지성당은 내부의 나무기둥이나 문 판벽 등을 온통 정교한 조각품으로 채워 사람들이 목조루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루씨 33세손인 루방시에(노방섭,盧帮燮)가 청나라 도광연간(道光年間,1821~1850)에 건립한 것이다. 루방시에는 일찍이 상업을 경영하여 선조로 부터의 제도를 이어 받았으며 봉정대부(奉政大夫)와 조의대부(朝議大夫)를 맡았으니 가히 관리로서 그리고 상인으로서 모두 출세한 사람으로 관상일신(官商一身)이라 할 만하다. 그로 인해 후인들이 그를 루바이완(노백만,盧百萬)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생 다섯 명의 처를 취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큰 집들을 여러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높은 기풍이 서렸을 뿐 아니라 정교하고 또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중국 최고로 평가되는 목조루에는 지금도 노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건립 당시 루방시에는 두 사람의 장인을 고용하여 20년간에 걸쳐 정교한 조각을 완성하여 휘주목조제일루(徽州木雕第一樓)라는 별칭을 얻는 명예를 얻었다. 몇 년 전 휘주여인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남향을 한 지성당 집 앞에는 좁은 통로가 있고 골목에서 이 집으로 가려면 아치형의 문을 통해 이 통로로 들어가서 통로 중간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통로 양 쪽 아치형 문에는 제액이 있는데 동서 정면에 "동계장춘东启长春", 서벽연추(西辟延秋)라 되어 있고 뒤쪽으로는 종기(钟奇) 육수(毓秀)라고 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뜰이 있는데 양쪽에 편청(偏厅)이라 부르는 부속건물이 있다. 안뜰과 편청 사이에 있는 담장에는 벽돌조각장식으로 구성된 투창이 있다. 투창의 가운데는 돌로 조각된 장식이 있고 사방 둘레는 모두 벽돌조각으로 장식하여 안뜰 전체를 자연과 인공의 아름다운 요소들이 잘 어울린다. 청당의 정문 문 위에는 청석으로 벽에 문방(门枋) 즉 문 위를 가로지르는 석재를 붙였으며 정교한 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조각들의 도안은 장엄함과 화려함을 겸하여 갖추고 있다.
문방석은 위 아래 둘로 구성되어 있다. 윗쪽의 중간에는 한 폭의 긴 길상도(吉祥图)가 새겨져 있는데 서쪽에서 동으로 오면서 연잎과 연꽃, 원앙, 봉황과 모란, 소나무와 학 까치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길상과 관련된 상징들이다. 즉 연꽃은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을 의미하며, 한 쌍의 원앙은 부부의 금슬이 좋은 것을 의미한다. 또 봉황과 모란꽃은 부귀를 누리는 것을 뜻하고 소나무와 학은 장수를, 까치는 즐거운 일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래쪽 문방에 새긴 그림에는 모두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있다. 가운데 집에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둘 있는데 구름무늬로 가득 찬 옷을 입고 한 사람은 오른 손을 위로 쳐들었다. 모두 머리가 잘려 있어서 얼굴은 알 수 없으나 오른쪽 사람은 수염이 길다. 양쪽에는 양산을 받쳐든 사람, 전기(战旗)를 든 문무관원 등이 있는데 양쪽의 깃발에는 모두 박쥐그림이 있다. 박쥐는 비엔푸(편복,蝙蝠)이라고 하는데 이는 복이 된다는 뜻의 비엔푸(변복,變福)과 발음이 같아서 중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장식문양이다.
지성당 정문의 정교한 문방석 조각
이러한 그림들은 집주인 루방시에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인물의 양쪽으로 늘 푸른 소나무(송백장청松柏长青)와 매화나무에 앉은 까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까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가져다주는 새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는 전쟁과 관련된 내용도 많이 있어 흥미를 끄는데 루방시에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의 두 차례의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전쟁에 관한 그림에는 수전(水战), 육전(陸战) 등이 반영되어 있는데 조각예술품에는 사람들이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고 풍경도 사실처럼 묘사되어 있다. 인물들도 모두 생동감이 넘치는데 이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명품이다.
조각 예술품의 향연장 지성당 안채
이러한 대문 위의 조각품들은 휘주 지역 웬만한 전통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니 그리 놀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대문을 들어서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건물의 기둥이나 벽체 그리고 모든 문살에 크고 작은 정교한 조각들이 가득 차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성당 안채는 앞채와 뒷채로 되어 있는데 이 두 채의 집 내부 모두가 그대로 정교한 조각 공예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성당 내부의 좌우에는 각각 여덟 짝으로 된 칸막이 구실을 하는 연화문(蓮花門)이 있다. 우리나라의 꽃살문처럼 만든 문의 중심에는 보병(寶甁) 모란꽃 등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모두 부귀와 평안 그리고 길상여의(吉相如意)의 의미를 취하였다. 아래쪽으로 붙은 좁은 문장식에는 꽃무늬, 박쥐(蝙蝠=福), 사슴(鹿=祿), 벌과 원숭이(蜂猴) 등이 있는데 이들은 중국 민간에서 글자의 발음을 맞추어 좋은 뜻을 비유하는 도안들이다. 즉, 박쥐는 비엔푸(편복,蝙蝠)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푸 즉 복(蝠)이 복(福)과 발음이 같아 복을 내리는 의미로 해석한다. 사슴은 록(鹿)자가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월급을 뜻하는 록(祿)과 발음이 같으며 벌과 원숭이를 뜻하는 글자인 봉후(蜂猴)는 봉후(封侯) 즉 벼슬에 봉한다는 의미와 통하기 때문에 많은 장식도안에서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무조각 장식에는 사람들이 학문을 구하고 벼슬로 출세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한 것이 가장 많다.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표현하거나 이름을 세상에 떨친 후 손님들이 집안 가득히 모이고 집 전체가 호사를 누리는 내용을 묘사하는 것도 있다.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서생을 새긴 문판조각
지성당 내부의 조각 작품들은 중국의 역사를 표현한 것들이 많아 중국역사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훨씬 더 보는 맛이 있을 것이다. 문판 중의 한 판은 문혁 당시 궤짝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아 인물이 완전하게 보존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도연명이 은거한 후에 한가로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는 반쯤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한손은 턱을 고이고 한손은 연잎을 쥐고 있으며 작은 동자아이가 연잎 안에 술을 따른다. 나는 술을 하지 못해서 술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 무척 유감이지만 연잎 안에 고인 술 향내를 맡으며 몽롱한 상태로 취한 기분이야 술을 못 마신다고 어찌 느끼지도 못하겠는가? 도연명으로 보이는 인물이 반쯤 취한 상태로 땅에 엎어진 술 단지에 의지하여 있는 풍경은 이 집 주인이 그와 같이 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문판의 조각예술의 촬영은 실패하고 말았다. 지붕의 그림자가 얼룩져서 광선상태가 나쁘기도 했으나 어쩐 일인지 촬영된 사진파일이 컴퓨터에서 보이지 않았다. 파일이 손상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귀한 작품을 그리 쉽게 사진으로나마 가지고 가는 것을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성당에 남은 문판의 조각 중 또 하나 인상적인 작품은 과거시험 보러가는 서생의 이야기를 새긴 것이다. 서동 하나가 봇짐을 지고 서생을 따라가고 있고 집 문에서는 이웃사람들이 배웅을 하고 있다. 서생을 태운 말이 막 작은 다리를 건너는데 앞에 원숭이 한마리가 길을 막고 있다. 소위 마상봉후(馬上逢猴)의 이야기이다. 이 그림은 발음상으로 금방 제후가 된다는 뜻의 중국어 마상봉후(馬上封侯)의 은유적 표현이다.
지성당의 전청(前廳)의 동서에는 각각 하나의 곁채가 있고 따로 루방시에가 거처하는 큰 방이 따로 있다. 두 방은 처첩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화창 아래에는 정교하게 새긴 죽림칠현도가 있고 칠현이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풍경이다.
도연명 이야기를 새긴 문판 이외에 조각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얼굴이 깎여나가고 없다. 마치 얼굴 없는 귀신같이 변해버린 이들 인물상들은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 당시 무자비하게 깎여나간 것들이다. 그 많은 조각품들에서 인물상을 골라 조그만 얼굴들을 칼로 깎아내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문화대혁명이야말로 철저하게 중국의 과거를 부정하고 파괴한 것인데 거기에 왜 문화라는 명칭을 붙였는지 이거야 말로 모순 중의 모순이 아닌가?
지성당 외의 집들
루방시에는 지성당을 지으면서 모두 일곱 채의 집을 지었다. 내가 마을을 찾았을 때는 이 중 지성당을 제외한 두 곳의 집을 볼 수 있었다. 지성당에 이웃해 있는 이 두 채의 집들 모두 지성당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데 이 집들은 모두 루방시에의 처첩들이 거주하는 곳이라 한다. 이 집들의 목조각 장식들 또한 각각 특색이 있어 많은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사성당은 현재 루방시에의 셋째 부인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이 집은 지성당을 향해 가면 가장 먼저 들리게 되어 있는데 내가 4월에 처음 들렸을 때 마당의 양쪽에 있는 두 그루의 커다란 감나무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집 주인 남자는 대문간 한켠에서 대나무 광주리를 짜고 있었는데 부인은 밖에서 농사일을 하고 자기는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 내다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 대통령이 두 사람이나 자기네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집안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어서 대나무를 잘라 만든 작은 물통으로 물을 뜨도록 했는데 물은 깨끗하고 맛도 괜찮았다. 전쟁을 만나거나 하면 집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저장한 양식에 의존하여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 때는 이 우물은 매우 중요한 존재로서 몇 달씩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사성당의 정문 위에도 문방이 있어서 여러 가지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지만 문화대혁명 때 모두 파손되어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사성당 안채에도 지성당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주 정교한 문창살조각이라든가 기둥위의 황금칠한 공포들이 그 집의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집의 천정에도 모란꽃과 까치가 그려진 천정화가 장식되어 있다.
감나무에 감이 발갛게 익으면 이 집이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하고 나는 10월 11일 다시 이 집을 찾았다. 때 맞춰 온다고 했으나 이미 감은 많이 떨어졌는데 그래도 높은 가지 위에는 아직도 제법 달려 있어서 가을의 정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감나무 사이로 건물의 정문 위에는 호리병 모양의 작은 창문 하나가 뚫려 있었다. 집주인은 감나무 두 그루와 그 호리병 창문이 합하여 사사여의(事事如意)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즉 감나무는 시(柿)라고 쓰고 스라고 읽는데 이것이 일 사(事)자와 발음이 같은 것이어서 시시(柿柿)는 사사(事事)와 같고 호리병은 로(蘆)라고 쓰고 루라고 읽는데 이것도 여(如)와 발음이 비슷하므로 두 그루 감나무와 호리병 창문이 합해서 사사여의(事事如意)를 나타낸 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정원의 나무 한 그루도 다 길상의 의미를 부여해서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성당과 지성당 사이의 좁은 골목길 뒤에 숨어 있는 사제당(思濟堂)은 관청(官廳)이라고도 부른다. 사제당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사람하나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다. 골목에서서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은 골목과 같은 직각모양으로 도려낸 옥색의 유리조각처럼 보인다. 기역자로 꺾어진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갑자기 그리 넓지 않은 사각형의 광장이 나타나고 이 광장의 북쪽에 남향으로 당당한 위풍을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이 집은 홍춘마을의 승지당 건축 양식과도 매우 흡사한데 전하는 말로는 승지당이 사제당을 모방하여 지었다고도 한다. 사제당이 승지당보다 50여년 앞서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독특한 건물로 파리청(玻璃厅)이란 집이 있다. 이 집은 서양식을 가미한 건물로 집주인 루방시에가 상업을 경영할 때 독일에 갔다온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 서양건축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독일의 건축양식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유리도 멀리 독일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집은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홍춘마을의 버스정거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뒤를 돌아 마을을 다시 보니 유채꽃 노랗게 피었던 들판은 이미 벼 추수가 끝난지도 한참 지난 후여서 야채밭으로 변해있었다. 밭에는 무와 배추들이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고 멀리 검은 기와 밑으로 하얗게 빛나는 담벽에 감나무들이 예쁜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