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도 않고(글/김세현-경북대학교 의과대학4학년)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조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 것이로다.

오고 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날이여./ 땅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 이 한 마딧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그만 향낭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위 속에서/ 날이 날마다 들이쉬고 내쉬이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은 내 것이로다.

위의 시는 내가 좋아하는 미당 서정주의 「석굴암관세음의 노래」라는 시다. 오늘따라 지난해 3학년 임상실습 때  R.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을 원어로 암송해 주시며 ‘시한수로도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던 가정의학과 이정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나는 그 분 앞에서 감히 “예”라고 대답을 드렸었다. 그 즐거운 추억은 의대를 졸업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나를 행복하게 미소 짓게 만들 것 같다.  학문을 한다는 것,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오롯이 사랑이신 그 분 스승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나를 내가 되게 해 주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이, 내가 기다리던 분이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논어 안연편(顔淵篇)의 “선생님은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시는 분(君子 成人之美)”이라는 말씀처럼 배우는 이로서의 나는 선생님의 사람됨과 높은 학식, 그 성품을 깊이 사모하고 그 인격을 배워 마침내 나도 참사람이 되어보자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사랑이 된다고 했던가. 스승과 제자로 만난다는 것, 훌륭한 스승을 찾아 사모하여 배운다는 것, 그보다 귀한 일이 있을까? 꽃 피고 열매 맺는 즐거운 소식이 들려오는 일 아닌가? 제자란 근본적으로 어리석음이요, 스승은 하늘의 별보다 찬란히 빛나는 지혜시다. 언젠가 고향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마음속에 한분의 모습이 떠오르고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마음속에 떠오른 그 분은 경북의대에서 내가 만난 선생님이셨다.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순간 눈물이 저절로 고였다. ‘선생님 당신은 누구이시며, 저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렇게 맘으로부터 선생님의 배려를 느낀 순간, 부족한 나는 이미 있는 그대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석가모니의 제자 주리반특은 바보였다. 주리반특의 어머니는 길에서 그를 낳았으며, 그는 저능아였다. 형을 따라 출가했으나 공부에 진전이 없어 늘 놀림감이 되었다. 마침내 형에게 쫓겨나 기원정사의 산문 밖에서 울고 있던 어느 날, 마침 사위성에서 돌아오시던 석가모니께서 그를 보게 된다. 석가모니는 공부에 진전이 없어 절망에 빠져 산문 밖에서 울고 있는 그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고는 손을 잡고 가람으로 들어가서 “먼지를 쓸고 때를 닦으라 [불진제구 拂塵除垢]”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주리반특은 ‘먼지를 쓸고’를 외우면 ‘때를 닦으라’를 잊었고, ‘때를 닦으라’를 외우면 ‘먼지를 쓸고’를 잊어버렸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운 결과 잊어버리지 않고 다 외울 수 있었다. 빗자루로 먼지를 쓸고 때를 닦으며 청소를 하던 어느 날, ‘무엇을 쓸고 닦으란 말인가?’라고 깊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집착과 번뇌와 속박을 지혜라는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내고 닦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오온(五蘊)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주리반특은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스승님 나를 가엾이 여겨 발 닦는 수건 친히 주시며 ‘네 마음 한 곳에 모아 이 깨끗한 것에 머물게 하라’하셨네

나 세존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에 즐거이 머물러 최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삼매(三昧)를 닦았네.

아! 마침내 나 전생 일을 알고 하늘눈[천안天眼]이 깨끗해졌도다. 삼명(三明)을 통달하고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 성취했네.

주리반특의 게송을 들은 석가모니는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말하면 이것을 이름 하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하시며 주리반특을 칭찬하였다. 어느 날 주리반특은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비구니 스님들에게 법을 설하게 되었는데, 주리반특이 저능아임을 알고 있었던 비구니들은 그를 비웃어주자고 모의를 하였다. 그러나 막상 아라한과를 증득한 주리반특을 대하니 저절로 존경심이 일어나게 되었고 설법에 크게 감명을 받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와 주리반특의 이야기는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우리 의학도들에게도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석가모니는 주리반특에 대해 history taking을 하고 처방전을 적어주었으며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그 가르침을 공경하여 순전히 신뢰하여 선생님을 배우고 마침내 선생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깨우치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주리반특의 그 모습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시절 의대공부를 하면서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외울 것이 너무도 많아 스트레스만 받다가 제 풀에 지치고 좌절하곤 할 때마다 주리반특의 공부를 되돌아보고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새롭다.
참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순수하고 온전한 헌신을 요하는 일이요, 주리반특처럼 몰입 속에서 궁(窮)하면 통(通)하는 일인 것 같다. 의대에서 회자되는 말처럼 콩나물시루에 물 주듯, 괴테의 말처럼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도 않고’ 가다보면 갓난 아이 눈이 뜨이듯, 심봉사 눈뜨듯 조금씩 무엇인가 알게 되는 그 묘한 맛, 그 묘한 즐거움.......
일찍이 왕양명은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파산중적이 파심중적난) -산속의 적은 물리치기 쉽지만 내 마음속의 적은 참으로 무찌르기가 힘들구나-” 라고 고백한 바 있다. “쓸고 닦으라”는 단순하고 명료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결국 행복에 이른 바보 주리반특이야말로 자기 마음속의 적을 무찌르고, 자기를 이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요, 멋진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진정 한바탕 시리디 시린 추위가 없다면 어찌 매화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해 임상실습을 돌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가 정재명교수님이 말씀하셨던 “너희들은 다이몬드 원석 아이가? 갈고 닦아 찬란하게 빛을 내야한다.” 라고 하시던 「의대생 다이아몬드원석론」이다. 일찍이 경봉스님은 금도 불에 넣어서 단련하고 단련하여 잡철이 다 제거되어야 순금이 되어 세계에 통용하는 보배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순금이 되기 위해 기꺼이 불속에 들어가 게으름을 태워버리는 금처럼, 한 바탕 추위 속에 새봄을 기다리는 매화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야겠다. 바보 주리반특처럼 처절하게 공부하며, 많은 좌절과 고난 그리고 절망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스스로를 경책하며 제대로 공부해서 마침내 찬란한 자기를 꽃피우는, 그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논어 자한(子罕)편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子曰,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산앵두 꽃이 펄펄 흩날린다.
어찌 널 생각하지 않겠는가마는,
집이 너무 멀구나


子曰,
未之思也 未何遠之有哉
이 시를 보시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애정이 모자란 것이다. 어찌 사랑길에 멂이 있으랴!"


의대 4학년, 졸업반-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이제(now), 여기서(here) 스스로에게 물어본다.“정녕 나는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배움에 대한 나의 사랑과 열정이 부족하지 않은가?”
먼 산 너머 그 어디메 쯤에서 시나브로 꽃망울 움트는 정겨운 봄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 봄,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안동>


 


글쓴이 김세현 씨는 길안 묵계가 고향이며 안동시청 총무과, 경북도청 도시계획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경북의대에 재입학하여 현재 본과4학년에 재학 중이다. 두 아이를 둔 40대 가장이며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 안동 관광안내하기와 비오는 날 글 끄적이는 것이 취미이며, 멋진 잡지 한번 만들어보는 게 많은 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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