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대사마을에서(글/장완수-한국사진작가협회 안동지부 회원)
길안천 맑은 물이 흐르는 대사마을에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은걸 보니 가을이 깊어가나 보다. 붉나무는 봐 주는 이 없어도 고운 자태로 옷을 갈아입고 풀벌레는 들어주는 이 없어도 노래를 한다. 맛좋기로 소문난 길안 사과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개울 건너 나락은 샛노랗게 변해간다. 고향을 지키는 몇 안 되는 사람들, 들판에 곡식은 누가 다 거둬들이려는지 은근한 걱정을 해 본다. 간혹 나이든 부부만이 여유롭게 들길을 걸어갈 뿐 동네는 아늑하고 조용하다.
돌담 밑 해바라기는 고개가 무거워 들지 못하고 일찍이 거둬들인 팥은 가을 햇살에 타작하기 좋게 여물어 간다. 마당에 널어놓고 도리깨로 두들기면 새빨간 팥알이 금세 한마당이 된다. 타작이 끝나고 나면 깍지는 소여물이 되고, 씨알 좋은 팥은 동짓날 팥죽으로 쑤어먹기도 하고 떡을 할 때 팥고물로 사용되기도 한다. 붉은 색은 잡귀를 쫓는다하여 조상들은 팥죽이며 고사에 지낼 떡에 반드시 팥을 사용했다고 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담장 아래 풍경이 정겹다.
오늘은 말린 고추를 새 푸대에 담아 저울질을 하는 날이다. 자녀들을 모두 도회지로 떠나보낸 부부는 올 일 년 땀 흘린 대가를 저울에 단다. 새 푸대에 옮겨 담은 고추는 길안 장날에 내다팔아 살림살이에 쓰게 된단다. 고추 값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사과 값이 떨어져 걱정이다. 힘들고 없이 살아도 예전에 마을이 번성했던 그때가 그립다고 말하는 부부, 그래도 잘 자라준 자식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푸대를 풀썩인다. 산세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고향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도 가을처럼 영글어간다.
뒷동산 텃밭에 허수아비가 지나가는 사람을 반긴다. 콩밭을 지키는 건지 익어가는 감을 지키는지 알 길은 없지만 갸우뚱하게 고개를 돌린 모습이 장난꾸러기 같다. 내가 떠난 후 잠자리 떼가 나타날 오후까지 녀석이 심심해 할까봐 떨어진 감 하나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녀석 몰래 잘 익은 홍시 하나를 따서 얼른 먹어치웠다. 알고도 모른 체 해주는 허수아비가 있는 그곳 대사리에는 고요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