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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미주의 고향 일직 더붓골을 찾아서(글/한경희_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쌀쌀한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도둑처럼 12월이 찾아들어도 무방비로 맞이하고 또 그냥 가는대로 두고 보는 이 세월의 무게가 꽤나 무겁다. 언제나 추위와 함께 찾아오는 계절에는 햇살의 따뜻함이 반갑다. 그야말로 한줄기 햇살의 따사로움이 각별한 때를 누구나 통과하고 있는 중이므로. 도로 주변 야산은 목이 마른 순한 짐승이 되어 웅크린다. 인간들이 내는 온갖 잡음과 매연까지 감수하는 중이므로 더욱 건조해져 있을까. 단풍은 오래 전에 지고, 우수수 낙엽되어 땅으로 직진하거나 이미 흙이 되었으니 나무는 더 바싹바싹 말라간다. 깡마른 단단함에 묻어나는 부드러움이란. 마른 나무가 키를 길게 늘인 그림자를 힐끔거리며 일직으로 길을 나선다. 나무와 나무그림자 사이사이로 수북한 낙엽은 마른 겨울산을 그래도 다독이는 풍경이 되고 있었다.

생명의 기운을 다 땅으로 내려놓은 듯해도 안으로 봄맞이 준비를 바쁘게 서두르는 것이 또 겨울나무다. 물오른 나무의 기운도 반가운 일이지만 겉으로 몸을 두껍게 감싸고 안으로 쟁이는 기운이 겨울나무에 가득하다. 그들 몸은 어느 계절보다 강인한 생명의지를 활활 태우면서도 밖으로 기척도 없다. 겨울나무 가지를 잘라 천연염색을 하는 이유도 그러할 거다. 꽝 마른 듯, 말라서 곧 부서져 버릴 듯, 퍽퍽한 들판의 흙색이며 더러 얼어붙은 개울의 수면이며 겨울을 수식하는 언어조차 건조하지만 생명을 틔우는 응집된 기운이 그 안에 스며 있음을 우리는 봄이 되면 알게 된다. 어쨌든 겨울나무처럼 더러 웅크리고, 자주 건조하더라도 마디를 새기는 이정표쯤으로 알고 생을 살아야 할 일이다.

오늘 찾아가는 일직 더붓골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서미주의 고향이다. 마을 어디나 사람들이 모여 살면 온기가 묻어나는 것인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담하고 나지막한 더붓골 집들이 포근하다. 지붕을 하나로 엮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앉은 집들이 정겹다. 그러나 군데군데 쓰러지는 집들이 보이기도 한다. 고향 떠날 일이 있었을 사연이 빈 집의 황량함 보다 더 컸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심은 마늘밭을 덮어둔 비닐은 흙이 거의 닿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고 사방을 흙으로 눌러두었다. 봄이 와서 순이 돋아 키가 자라면 비닐에 구멍을 낸다고 한다. 또 고추모종을 심어둔 비닐하우스는 웅장할 정도로 높았고 몸집도 컸다. 더러 소 울음소리가 건너 마을에서 흘러나왔는데 우사도 많은 거 같았다. 마침 송아지를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가는데 겨울 하늘보다 투명한 눈망울이 지워지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냇가로 뿌리를 뻗은 채 우아하게 서 있었다. 아마도 가게였던 흔적이 역력한 담배점포는 이젠 담배 외는 팔지 않는지 안을 볼 수 있는 창도 없이 봉해져 있었다. 작은 시골 점방의 먼지 앉은 과자를 만나기는 어려운 시절이 되고 말았다. 보건지소가 마을에 붙어 있어서 몸이 불편한 할매, 할배가 자주 다녀가시고, 그 길가에 노인정도 아담하게 앉아있는 아주 예쁘고 고요한 동네였다.

작가 서미주의 고향집을 알 길이 없어서 먼저 노인정으로 가보니 방안이 텅 비었다. 추위 때문이 아닐까.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인 집배원을 길가에서 만나 작가의 집을 물으니 역시 모른다면서 보건지소로 가라고 일러 주신다. 딱 적중했다. 날도 춥고 몸도 불편하시니 당연히 의료기구가 있는 보건지소를 가시는 거다. 거기서 어떤 할배가 일러주신 집을 길잡이를 해주시는 분의 도움으로 찾아갔다. 아주 쉽게 찾았다. 언덕이랄 것도 없이 낮고 아담한 동네 집이니 한 집 한 집 방문을 해도 어려울 게 없을 정도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이사를 나가고 다른 분이 사시는 집이라 조심스러웠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작가의 세계가 혹시 고향집 어느 틈에 있지나 않은지 눈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어느 집도 대문을 잠근 집이 없이 환하게 열려 있었고 더구나 작가의 고향집은 빈집처럼 드나듦이 쉬웠다. 현재 사시는 분도 집안사정으로 멀리 출타 중이시라니 더더욱 썰렁하고 황량했다. 문설주에 붙은 편지함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라도 되듯이 편지가 서너 통 꽂혀 있었다. 아마도 여러날 주인인 누군가가 집을 비웠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누구나 한옥에 살던 시절 이맘때처럼 추위가 시작되면 그 황소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겨울 추운 이야기를 곧잘 들을 수 있었다. 문고리에 손이 얼어붙었다든가, 방 윗목에 둔 그릇에 물이 얼었다든가, 그래서 바람 막을 요량인지 샷시로 본채를 모두 에워싸서 집안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마당에는 겨울 김장독이 나란히 묻혀 있었고 시멘트로 마감을 한 가마솥이 여유롭게 걸려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호롱(불)이 있었는데 아마도 오래오래 이 집에 굴러다니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적어도 수십 년은 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저 호롱에 작가의 시선이 스치지 않았을까, 눈길 보다 손길이 묻었을 확률이 더 높을 거란 짐작도 하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담도 서서히 기울거나 무너지고 있었는데 이미 뚫린 데로는 오후 햇살이 한 움큼 들어차 있었다. 오래된 흙벽은 표면도 거칠거칠 흠이 많이 생겼고 댓돌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으니 아무래도 곧 사람들이 비울 집이 아닐까 싶었다. 바깥으로 한 채는 벽도 기울고 지붕도 내려앉아서 기와가 한쪽으로 곧 쏠려 떨어질 거 같았다. 그리로도 햇살은 쏟아지고 있었다. 동네 할배 어느 분이 마을이름이 원래 대밭골이었는데 더붓골이 되었다고 하시더니 작가 고향집 뒤꼍에는 푸른 대나무가 두어 그루 있었다. 텅 비고 황량한 빈 집 뒤꼍에 푸른 대나무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마을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대나무가 더러 보이기도 했다.

마을 앞뒤로는 아담하게 야산이 있었는데 어른들의 설명에 따른다면 앞산을 남산으로 불렀고 북쪽 뒷산은 그냥 뒷산이라 한다. 아마도 북산이라는 말을 예부터 피했기 때문일 거다. 작가가 소설에서 끝없이 추구했던 심연의 세계, 심원한 미지의 세계는 남산과 뒷산의 바람소리와 계절변화에 따른 모습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바로 집 뒤로 밭이 펼쳐지고 밭 가장자리에서 산이 시작되니 집과 산의 거리는 좀 넓은 뒤뜰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자니 작품 속 어린 소년의 동경으로 그려지는 세계가 뒷산 숲에서 우러나왔을 법하다. 마치 북유럽의 어둡고 깊은 숲이 이야기의 원천이 되듯이 작가에게 뒷산과 남산의 자태는 놀라운 세계를 열어주는 창이 되었다.

깊숙이 자기를 가두는 일, 유폐를 감행한 작가를 떠올리는 일은 말을 머뭇거리게 만들 정도로 난감하다. 문을 닫아두거나 잠금장치를 끝낸 대문 앞에서 고함치는 일과 벽을 두고 혼자 중얼거리는 일의 비유로도 턱없이 모자란다. 대화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상태에서 질문을 던지고 추측을 해야하는 일이란 게 주책없다. 그 먼지처럼 숱한 말, 그만 닫아두자는 데도 말을 잡고 뭔가를 기웃거리는 심정이 참 착잡하다. 그래서 언제나 말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먼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것인지. 그래도 말을 잡고 말을 두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모순이란 또 어쩌란 말인가. 지리멸렬한 이 상황에서 <남한산성>의 말 먼지가 실감나는 중이다.

1989년에 출판된 소설집 <스물의 어둠은 너무 깊어라>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큰 줄기 하나는 작가의 슬픔이나 깊은 우울이다. 이십대 초반 작가의 감성에는 진하디진한 우울이 드리워져 있었다. 유년부터 몸에 익숙했을 가난이나 어설픈 시골살이 뿐만 아니라 작가가 몸 담은 시대조차 우울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겨울 찬 바람의 휑뎅그렁한 살풍경들이 작가에게는 슬픔 같은 무늬였으며 그 느낌으로 온몸이 가득찼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계절의 배경에는 겨울이 무척 선명하게 등장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우울과 슬픈 그늘은 찬 바람이 되어 불었다. ｢어린손님｣에는 “겨울은 쓸쓸한 철”이라거나 “겨울엔 별들도 파랗게 추워 보인다”거나 “목울대까지 쓸쓸함이 차오른 아이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숨이 턱 막힐 정도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사색을 담은 작품에서도 한결같이 슬픔은 큰 주제로 흐른다. 이 우울과 슬픔이 가닿을 세계에는 그리움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그리움의 깊이는 소년과 새를 비유하면서 전개시킨 ｢강｣이란 소설에서 인간존재 문제로 확장되고 있었다. 돈 벌러 떠나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혼자만 탈 수 있는 나무배를 만들어 준다. 가족들이 다 탈 수 있는 것이 아닌 유일하게 혼자서 탈 수 있는 배를 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배경에는 새가 있다. 무리를 벗어나 홀로 날아오르는 새를 통해서 소년이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의 특징답게 굵직한 사건의 교차나 인물 갈등이 부각되는 경향이 전혀 없고 딱히 주인공이라고 못 박지 못할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탐사하거나 곁눈질하다보니 내면의 심리흐름이 주된 표현방법으로 쓰였다. ｢신목｣에서 우길이 아비는 사상 때문에 죽었다는 설명 이외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갈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서른 해가 넘도록 떠돌이로 지낸 할배의 귀가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모든 순간의 놀라움은 내면의 충격으로 흡수되고 밖으로 표출되는 사건은 없다. 태어나서 처음 대면하는 할배, 그 할배를 맞는 할매의 심정 등, 모든 갈등이 내면에서 흡수되고 소화되고 무화되는 방식을 작가는 즐겼다고 볼 수 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큰 평지｣는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린 소년에게 삼촌은 어른세계를 조금씩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있었고 친구처럼 은근했던 관계이다. 삼촌이 사춘기의 방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는 나날을 소년은 어른스럽게 바라볼 줄 안다. 거기다가 삼촌이 새벽이면 그 방황의 한 끝을 달래느라 부는 하모니카 소리를 꿀밤나무 뒤에서 몰래 들으면서 삼촌을 이해하는 것이다. 주위 어른들이 모두 다 소년에게 무리이고 너무 멀다는 큰 평지를 가보고 싶어하는 동경이 삼촌을 통해 실현될 기미가 보였지만 삼촌은 소년이 한참 자는 새벽녘에 집을 떠나간다. 대신에 소년은 삼촌과 이별하는 그 새벽에 어른에 가까운 성장이 이뤄지고 있었다.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통과의례에서 이뤄지기 보다는 사람들 틈에서 훌쩍훌쩍 깊어지는 생각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년에게 큰 평지를 다니는 어른들은 동경과 부러움이 대상이다. 어둠을 밀어내며 아버지와 삼촌을 기다리면서 기대를 키운다. 그렇게 혼자 설레면서 또 소년은 성장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외로움은 소년에게 주요한 정서로 설정되어 있는데 새벽에 부는 바람을 외로워서 아무에게나 쉽게 다가든다고 묘사한다. 겨울 새벽에 잠을 깬 소년이 마려운 오줌을 참는 묘사며, 문살에 비치는 새벽 푸른 기운이며, 이른 아침의 안개 등의 묘사는 절창이다. 누이와 미끄럼 타는 즐거운 놀이 부분에 오면 소년은 놀이에서 대단한 기량을 발휘한다. 녹두자갈이 깔린 산구릉 꼭대기에서 미끄럼을 타는 일인데 닳은 고무신이 속도를 내고 거기에 가속도까지 붙으니 신나는 놀이이다. 눕거나, 앉거나, 거꾸로 엎드리는 등 위험천만한 미끄럼 놀이를 즐기는 소년의 모습도 등장한다.

작가의 대학생활이 짐작되는 글을 보면서 나름의 추측을 더해 본다. ｢스물의 어둠｣이란 산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나이에 어울리는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산문대로라면 안동시내를 같이 걷고 우울한 정서를 나눌 남자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양복집, 가방집, 술집, 찻집, 만두집 등이 즐비한 거리에서 팔을 꿰는 멋진 남자친구를. 아마 이맘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의 대화에는 미래를 향한 이상이 빛나고 있었는데 자유, 환상, 밝음의 명사는 모두가 놀라운 것이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 희망사항으로 ‘작가라는 놀라운 자유인’이 될 의지도 비췄다. 그러나 미래의 불안한 속성 앞에서 ‘캄캄하고, 무섭고, 두렵고, 불안한’ 심정도 토로한다. 이것으로 볼 때 미래를 두고 이상과 불안을 함께 나눈 친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흥성거림과 분주함이 서점 풍경에서 등장한다. 카드를 사려는 사람들의 북적거림, 가벼운 문고본이지만 “헤겔에서 하이데거까지” 라는 묵직한 제목의 책을 집어든 남자친구와의 그 아름다운 관계를 막연하게 그릴 수 있다. 아마도 작가의 사회참여 문제를 담은 내용으로 파악되는데 “구속된 작가는 말이 곧 행동”이라는 문구를 읽다가 구역질이 나서 화장실을 찾았고 어둡고 싸늘한 통로에서 곧 진정이 되었다고 썼다. 그 대목에서 갑자기 멍해졌던 것인데 길원여고 재학시절 문예부 활동을 같이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너무나 순수해서 그랬다고 볼 수 있다. 너무 여린 친구였고 더구나 여고시절 장티푸스를 앓아 머리카락도 빠지고 학교도 장기결석하는 등 마음과 몸이 심약했다고 한다.

아마도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담은 내용으로 추측되는 대목도 있다. 손수건이 차분히 들어있는 여류화가 수상집 한권과 금빛 도금이 닳은 만년필을 가진 남자친구와 아픈 이별이 묘사되어 있다. 혼자 남은 작가는 ‘소녀적인 감상과 어둠과 허약함과 스트렘토 마이신 주사약’이 끝나기를 간절하게 염원하면서 발길이 닿는대로 여행길에 오른다. 열병에 시달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한 일, 그 나약함과 불쾌함을 잊을 수 없어하는 작가는 고열 속에서 사유는 온통 백지장처럼 표백되고 말았던 경험이 있다. 45일이나 열병을 앓으며 보낸 불면의 밤은 인내심, 지구력, 참을성을 완전히 녹아내리게 했던 것이다. 자신의 아픔 몸과 이성적인 판단이 완전히 불협화음을 내고 말았던 시간은 작가가 귀중하게 여긴 모든 가치의 질서를 흔들고 정체성까지 흔들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달강｣에는 안동에 대한 글이 있다. 약간 음울하고 나른한 바람냄새가 나는 조그만 도회지, 특히 “이 세상의 어느 것 하나도 건들지 않고 그대로 두겠다는 완고한 바람”이란 말에서 고루한 안동의 면모가 읽힌다. 안동에서 빨리 걷는 사람은 이방인이란 표현도 아주 적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당시 안동에는 신호등이 하나도 없었고, 2차선 도로에서 얼굴 아는 버스 운전기사는 차를 세우고 인사를 나눴으니 말이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이육사 시인의 ｢황혼｣이란 시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다. ｢건강진단서｣의 아픈 사연에는 공무원 보다 대학진학이 꿈이었던 작가에게 또 다른 절망의 단편이 들어있다. “기껏해야 시골 오급공무원이 되겠다고 내 양심은, 내 본질을, 내 이상을 팔아 버리겠다는 건가?” 공무원이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을 실현하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나 강했고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선택한 공무원을 폐결핵 증상으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 서미주의 작가혼이 여기서 절절하게 확인된다. 건강의 이유로 죽음 문턱까지 이르러 본 사람이 간절하게 원하던 삶이 바로 작가였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달걀낳기 익숙치 못한 햇닭이 숨어서 낳은 달걀”의 설레임(｢이야기｣)을 말하면서 자신의 마음 언저리의 무늬들을 가슴 저리게 받아들여 글을 썼던 것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결국 고향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길과 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길의 물리”를 터득한 듯 풀어놓았다. 작가의 고향은 의성과 안동의 경계에 있었는데 명진 더붓골까지 해물장수가 미역을 팔러 오면 그 장수의 이야기를 따라 온통 세상이 길로 이어졌던 것이다. “꿈이 밥을 얻어 주지는 못해도 밥은 곧 꿈을 낳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을 먹고 숨을 쉬면서 꿈을 꾸느라고 길을 갔다. 그 길이 언제인가는 그 어떤 마을로 데려가 주리라 믿었다.” 해물장수의 큰 보따리는 바다냄새를 실어왔고 그들의 별난 이야기는 어린시절 작가에게 꿈과 길이 이어지는 것임을 알려준 또 다른 길이었던 셈이다.

작가 서미주를 어떻게 써야 하나 엄청 고민이 되었다. 대화를 나눌 상대가 누굴까를 고심하다가 그냥 소설 읽기로 작정했다. 작품 한 편 한 편이 작가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이십대 초반에 쓴 단편소설들의 세계는 작가가 겪은 우울한 내면의 상처와 풍경이 그대로 나타났고 아직 이상을 그리는 소녀처럼 크고 높은 무지개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걸려 있었다. 그의 문학에서 <어린왕자>는 밤바다의 등대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꿈을 먹는 소년과 소녀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내려가 삶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작품이 ｢큰 평지｣이다. 서미주 소설을 읽으면 견고한 표현력에서 놀라고 세상을 모를 게 없는 소년의 순수한 희망 앞에 부끄러워진다.

지속적인 작품 창작이 가능했다면 벌써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른으로 성장했거나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것이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성장 중인 소년들로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소년 상징은 그대로 작가의 이미지로 밀착되고 있다. 엄밀하게 작가의 성장소설로 작품세계를 이해해도 좋을 것이나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을 들춰본다면 문학을 통해 희망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삶의 반대편에 희망을 던져두고 사는 어른들의 굳어진 삶을 소년의 꿈이라는 거울을 통해 선명하게 비춰주면서 삶과 꿈이 길처럼 이어져 있음을 은근히 말했던 것이다.

서미주 작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이 별로 없다든가 목소리가 작다고 한다. 사춘기 소녀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는 너무 여리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작가가 별로 말없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작가는 눈빛만 봐도 속사정을 헤아릴 사람들과 어울렸을 것이니 긴 말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상대를 이해한다면 설명도 다툼도 필요하지 않다. 작가가 마음을 닫고 세상과 결별을 선택했던 동기는 구구하다. 그 구구함도 우리가 풀어낸 숱한 변명들에 불과하다. 작품이 추구한 진실을 함께 살아버린 작가를 두고 우리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보다는 많은 소문을 모으는데 열중한 것은 아닐까. 작가는 생명 이상으로 소중했던 문학적인 삶을 살았던 것인데 그 진정성의 무게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직은 작가의 진실한 삶에 좀더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