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락의 유주왕산록遊周王山錄(글/이해영_안동대 교수)유주왕산록을 따라 나서며
유주왕산록(遊周王山錄)은 김세락(金世洛 : 1854〜1929)이 1913년 계축년 음력 8월 초에 자신이 살던 봉화 물야 오계리를 출발하여 안동 청송을 거쳐 주왕산을 유람하고 21일 집에 돌아올 때까지의 20여 일 간의 기록이다. 일정이 나름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여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김세락의 자는 문현(文顯), 호는 고암(古巖), 풍산김씨이다. 유연당 김대현의 팔련오계〔八蓮五桂 - 8명의 자제가 모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그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편집자 주〕중 여섯째인 학사 김응조의 후손이다. 서애 유성룡과 여헌 장현광에게 배운 김응조의 학문은 증손인 노봉 김정(1670〜1737), 서소 김종휴( 1783〜1866)를 거쳐 김세락으로 계승되었다고 말해지는데 김세락이 살았던 물야 오계리는 김정이 마을을 개척함으로써 풍산김씨 세거지가 되었다.
김세락은 어려서 조부 김종휴의 가르침을 받았고 뒤에 용산 이만인(1834〜1897)에게 집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청참오적물허왜청소(請斬五賊勿許倭請疏)를 지었다. 글이 매우 절실하여 읽은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분발하였다고 한다. 나라 돌아가는 꼴에 울분을 품고 고향 오계리를 떠나 문단으로 이사하고 다시 원당으로 옮겼다. 1910년 나라를 왜적에게 빼앗긴 경술국치를 당하여는 여러 날을 통곡하였다. 그 후 두문불출하고 바깥일에는 귀를 닫았다. 1912년 ‘내 비록 세상에 어떻게 힘을 쓸 수는 없지만 어찌 조상들의 옛집을 황폐하게 놔둘 수 있겠는가?’ 하고 고향마을로 돌아와 누대의 서적과 유물을 정돈하면서 지냈다. 60세 즈음 계룡산, 주왕산, 동해 등을 유람하면서 유주왕산록과 동유록이라는 기행문을 지었다. 계룡산을 유람한 기록은 시 한두 편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동유록(東遊錄)은 1915년 을묘년 음력 8월 22일 오계리 집에서 출발하여 육백여리 27일간 여행을 한 동해 바닷가로의 여행기이다. 유주왕산록과 동유록은 당시의 풍광뿐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만남을 갖고 유대를 가꾸어 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탁월한 문장가였던 김세락의 글을 필자의 능력으로 제대로 번역해낸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그러한 마음은 더욱 절실하였다. 다만 사랑방에서 그 기록을 토대로 김세락이 걸었던 길을 밟아 가면서 100여 년 전과 오늘을 비교해 살핀다 하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기로 하였다.
유주왕산록遊周王山錄
나는 타고난 본성이 용렬하고 게을러서, 세상의 속된 일에는 일찍이 일절 뜻을 두지 않았다. 나이가 노년에 이르러 온갖 생각들이 모두 재처럼 사위었는데 다만 산수를 유람하는 즐거움만은 마음 안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 봄, 한 달여에 걸쳐 계룡산 주변만을 유람했을 뿐이어서, 늘 박경란(朴景蘭), 강우행(姜禹行)과 더불어 ‘주왕산의 승경을 유람하는 일은 그만 둘 수 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이 해 8월 초, 나는 선영에 일이 있어 안동에 가는 길에 원당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박경란, 강우행 두 사람을 찾아보고 이번 나들이에 이어 곧바로 주왕산에 가려하는데, 공 등은 함께 유람할 뜻이 없느냐 하였다. 둘이 모두 ‘좋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암랑 멱곡의 선영〔학사 김응조의 묘소가 있는 학가산 북쪽〕에 성묘하고 에둘러 오미동을 향하였다. 초 3일, 안동에 이르렀다. 다음날 저녁에 강우행이 왔다. 경란은 일이 있어 오지 못했다.
천전에 유하다
5일은 안동에 머물렀고, 6일 경인일에 우행과 더불어 마부와 말은 돌려보내고 도보로 길을 떠났다. 동강을 건너 선어대를 지나며 두루 형승을 살펴보니 암벽 위에 백암 김선생〔김륵(金玏: 1540〜1616)〕이 제방을 쌓은 일을 기리는 송덕비가 있었다.〔1605년 김륵이 안동부사로 있을 적에 대홍수가 나서 주민들과 더불어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았다고 한다.〕 오시에 천전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김학래金學來〔김소락金紹洛〕, 김순극金舜極〔김진선金鎭璿〕과 더불어 주왕산을 같이 유람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학래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으며 말하기를, ‘어른의 행색이 어찌 그리 장하시오’ 하였다. ‘나는 주왕산 큰 신선 있는 힘을 다하여 쇠약한 몸 이끌어 먼길을 왔다네’라고 하였다. 서로 더불어 한번 웃었다. 단 순극은 외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기에 기평으로 하여금 오라고 하였다. 오후에 여러 나이든 동반들과 더불어 백운정에 올랐다. 이 정자는 청계공이 지은 바로서 운암공에게 준 것이다. 백장의 푸른 언덕에 강이 흘러 가로로 띠를 둘렀고, 산에 걸린 석양 그림자 물결 속에 거꾸로 비치니 기이한 온갖 형상을 그릴 길이 없었다. 벽 위에는 선현의 시판이 많이 걸려 있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이어 시판의 운을 따라 율시 한편을 지었다. 저녁이 다가오자 정자 아래 깊은 못에 배를 띠웠다. 검푸른 빛이 수리에 걸쳐 빙 둘렀는데 강가를 따라 위 아래로 오르내리다가 감흥이 다 한 뒤에 돌아왔다. 밤에 순극의 집에서 잤다.
다음 날 아침(7일) 후 여러 집에 들러 인사를 하였다. 날이 어둑어둑 할 적에 순극이 돌아왔다. 활짝 기뻐하며 손을 잡았다. 밤에는 여러 벗들과 말씀을 나누었다.
8일 임진일, 우리 두 사람과 학래, 순극 모두 주왕산을 향해 떠났다. 장고(長皐)를 거쳐 대강을 건너 임하를 바라보며 잠시 경산재사(景山齋舍)에서 쉬었으니 바로 청계공의 묘소이다. 산세가 높고 가팔라 제대로 절을 할 수가 없어 다만 우러러 바라보며 예를 행하였다. 잠시 후 권국형(權國衡)이 뒤따라 이르렀다. 그는 이우당二愚堂(권환) 사손(嗣孫)으로 우리 집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다섯 사람이 나란히 대지팡이를 짚고 작은 고개를 넘어서 사빈서당(四濱書堂)에 올랐다. 사빈서당은 청계공 6부자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금령〔아마 1871년의 서원철폐령인 듯〕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우뚝한 집 하나가 강가 언덕에 서 있는데, 푸른 강 파란 언덕의 빼어난 형승이 쑥대가 자라고 가시덤불이 엉켜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 나게 하였다.
도연을 지나다
오후에 강을 건넜다. 강을 끼고 강 언덕 따라 6-7리를 올라가니 갑자기 동부가 나타났다. 강 가운데 암석은 별을 늘어놓은 듯, 바둑알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엎드린 형상은 마치 용이 웅크린 듯하였고, 우뚝한 모습은 마치 호랑이가 기세 돋우는 것 같았다. 혹 볼록하게 솟아나 있고, 혹 움푹 패어진 사이로 틈을 벌리고 있다. 혹 나는 새 날개로 땅을 훔치는 것 같고, 혹 큰 물고기 머리 들어 물결을 마시는 듯하였다. 혹 기화이초와 같고, 혹 마른 나무 썩은 뗏목과 같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신비로운 빛이 눈길을 빼앗는다. 암벽위에는 도연(陶淵) 선창(仙倉)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반타석이 있는데, 40-50인이 앉을 만 하였다. 잠시 쉬면서 차를 끓였다. 눈길 따라 멀리 바라보니 이른바 음주암(飮酒巖), 계마암(繫馬巖)이 모두 형상이 비슷하여 이름 붙인 것이었다. 이외에 기괴한 것들은 명칭이 아직 없는데, 이는 어찌 옛사람들이 그 형상을 이름 붙이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겠는가? 몇 리를 가자 강 언덕에 큰 바위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陶淵 石門 4자가 새겨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니 흰 눈이 허공에 뿜어진 듯한데 우레 소리가 땅을 울린다. 이는 도연폭포이리라. 가파른 바위 돌길을 의지해가며 기어올랐는데 날이 이미 캄캄하여 폭포에 다가가 즐기고 감상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강을 건너 도연요사(陶淵寮舍)에서 묵었다.
다음날(9일) 아침 일찍 일어나 표은선생유허비(瓢隱先生遺墟碑)를 삼가 찾아 살폈다. 그 위 수백 보 즈음에 송정(松亭)이 있고 그 동쪽에 와룡초당(0臥龍草堂)이 있으니 표은 선생이 한가로이 쉬시던 곳이다. 그 서쪽 하늘과 나란히 있는 커다란 산이 격진령(隔秦嶺)이다. 돌산 가운데가 잘라져 강물이 빠르게 뿜어져 내려와 폭포를 이루었다. 조화옹이 힘써 안배한 것이리라. 선유정(仙遊亭)은 선찰(仙刹)의 아래, 절벽의 위에 있으니 땅의 기이하고 빼어남이 도연을 넘어선다.
표은옹은 병자호란을 만났을 때, 오랑캐를 황제로 섬기는 치욕을 마음에 두고 주나라를 높이는 의리를 밝혔다. 표은옹은 자신을 고결하게 가다듬고 속세를 벗어나 도연의 깊은 곳에 은거하였으니 도연의 뛰어난 경관은 공 때문에 이름난 것이다. 후인들은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흠모하여 세상에 환하게 밝히고 조금도 줄어들지 않게 해야 마땅하다. 다만 지난날 제사 올리던 곳이 황폐해진 지 이미 오래니 그 시운이 따르지 않는 안타까운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다. 금일 나라를 빼앗긴 변고는 당시의 성을 빼앗긴 치욕뿐 만에 그치지 아니한다. 둥근 관을 쓰고 모난 옷깃을 여미면서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 선생의 유허를 지나면서 아득히 선생의 풍모를 우러르니 어찌 눈물이 옷깃을 적시며 몸에 진땀이 흐르지 않겠는가? 이에 시판의 운을 따라 율시 3편을 지었다. 아침 후 길을 나섰는데 국형은 제사가 있어 집으로 돌아가고 네 사람이 길을 떠났다. 오시에 오금리(梧琴里) 김애(金哀)의 집에 들르고, 저녁에 청송의 덕천에 이르러 심계오(沈啓五) 주사의 집에서 묵었다.
10일 갑오일, 떠나려는데, 우행이 계오에게 동행을 요청하였다. (계오가) 매우 어렵게 여겨 마침내 인사하고 작별하였다. 일행은 청송부에 이르러 찬경루(讚慶樓)에 올랐다. 시판의 운에 따라 시를 지었다. 점사(店舍)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집안 조카 병기(秉淇)가 군청의 서기로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온다는 것을 듣고서 나와 맞았다. 담화를 하였는데 안주와 술이 자못 풍성하였다. 조금 있다가 계오가 뒤쫓아 이르렀다. 영천(永川)의 강영세(姜永世)가 그 문생 임연섭(林淵燮)을 보내서 노자를 지니고 앞장서게 하였다. 오시에 청운역(靑雲驛)에, 저녁에 하삼의(下三宜)에 이르렀다. 바라보니 석봉이 하늘을 찔렀는데 둥글고 아리따운 자태를 지녔으니 이른바 옥녀봉이다. 율시 한편을 읊었다. 어스름 저녁에 상삼의(上三宜)에 이르렀다. 국보(國輔) 이준구(李俊久)는 회재 선생의 후손으로 세상을 피하여 입산한 사람이다. 그는 풍류와 문장과 학식으로 인근 사우들로부터 추앙을 받는데 우리들이 온다는 것을 듣고서 마을 어귀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그 집으로 들어가 머물러 묵었다.
주왕산에 들다
11일 을미일, 날이 맑았다. 이 때 가뭄이 매우 심하여 땅은 심히 메마르고 곡식들은 대부분 타들어갔다. 곳곳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대고 있었다. 백성들이 모여서 사무치게 걱정하였다. 나그네를 상대하는 가게에도 조석을 제공할 쌀이 없었다. 계오가 사람을 보내서 사방으로 구하였으나 쌀 한말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닭 두 마리를 사서 식사의 방안을 삼았다. 아침 먹은 후 대전암(大典庵)을 향하였다. 절은 무너져 황폐하였고 오직 주지승 하나만 있었다. 절 뒤에는 기암(旗巖)이 있다. 큰 바위가 우뚝 솟아나 마치 깃발과 같으므로 이름붙인 것이다. 작은 시내를 건너 백련암(白蓮菴)에 들어갔다. 황폐하기가 마치 대전사와 같았다. 벽 위에는 학봉선생 오언율시가 걸려 있었다. 삼가 차운하였다. 절 뒤에는 이른바 고암(鼓巖)이 있는데 그 형상이 기암과 같으나 조금 둥근 까닭에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입동운(入洞韻)을 잡아 율시 한편을 각각 지었다. 드디어 언덕을 끼고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수리쯤 가자 자하성(紫霞城)이 있었다. 속세 말로 주왕이 쌓았다 하는데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동쪽으로 돌아 남쪽으로 꺾어들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그 사이의 관문으로 기어올라 들어갔다. 동문은 매우 그윽한데 숲과 나무가 하늘과 나란하다. 멀리 바라보니 단청을 한 누각이 암석 사이에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주왕암(周王庵)이다. 주왕암 앞에 있는 누대에는 가학(駕鶴)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주왕이라고 한 것은 주왕의 옛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주왕의 이름은 도(鍍), 진(晋)나라 주기(周覬)의 8세손이다. 당나라에 벼슬하다가 당 현종 때, ‘진을 위하여 복수한다’고 내걸고 군대를 일으켜 장안에 쳐들어갔다가 곽자의(郭子儀)에게 패하여 달아나 신라로 들어와 이 산에 은거하였다. 현종이 신라왕에게 조서를 내려 장군 마사성(馬四聲)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였다. 도는 패배하여 매우 궁하게 되자 석굴에 숨었는데 마삼성이 곧바로 굴 안으로 들어와 밧줄로 묶고 사성이 창 갈고리로 들어 올려 장안으로 보냈다. 도의 아들 대전(大典)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 울면서 간하였으나 도는 듣지 않았다. 대전은 군대가 패한 뒤에 다시 이 산으로 들어와 머리를 깎고 수도 하였다. 지금의 대전사는 그가 수도한 곳이다. 또 말하기를, 이 산의 주위가 마치 방과 같으므로 일명 주방(周房)이라고 한다.
주왕암은 뭇 봉우리 사이에 있는데 이 산의 형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곳이다. 주왕암 동북쪽을 마주하면 양 석봉이 서로 묶여 하늘과 나란한데 햇빛을 볼 수가 없다. 겨우 한 몸을 돌릴 만한데 옷을 벗고 띠를 풀고 기어 올라갔다. 이른바 촉도를 꿴 물고기처럼 줄줄이 늘어서서 지나간다는 말이 이에 불과할 것이다. 활 하나 길이 쯤 되는 바위 벼랑이 가파르게 솟아 있는데 그냥 기어 올라갈 수는 없고 잔도를 의지하여 엎드려 엉금엉금 오르니 형세가 자못 편편하고 넓어 반무(半畝)의 땅 만하였다. 그 위에 석봉이 웅장하고 가파르게 우뚝 서 있는데, 떨어지는 낙숫물이 마치 폭포와 같았다. 봉우리 아래에는 굴 하나가 휑하니 있다. 깊이가 한 장쯤 되고 10여인이 들어앉을만한데 주왕이 붙잡힌 곳이라 한다. 돌 기운이 싸늘하고 찬바람이 휙 하니 부는데 추워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잔도를 통해 아래로 내려왔다. 오점에 주왕암에 이르렀다. 암자에는 한 사미가 있었는데 자못 양순하고 제공하는 밥도 매우 정갈하였다. 이 또한 산을 유람하는 한 행복이리라.
오후에 청학동에 갔다. 동구를 나서자 마주보는 동쪽 봉우리 허리쯤에 돌 비탈이 길을 이루었다. 비스듬히 이어진 돌 비탈을 올라 나아가자 석봉이 앞을 마주한다. 웅장하고 가팔라서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다. 이름은 급수암(汲水巖)이다. 또 그 동쪽 몇 걸음쯤에 쌓여진 돌이 대를 이루었는데 그 형세가 구름과 더불어 가지런하였다. 이름은 학소봉(鶴巢峯)이다. 학이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 입고 때때로 날개 펼쳐 춤을 추니 나무꾼이 왕왕 그것을 보았다고 한다. 학소봉의 아래에는 용추(龍湫)가 있다. 돌이 움푹 패어 못을 이루었다. 세찬 물결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울리었다. 반반한 바위에 늘어 앉아 오래도록 감상하며 즐기었다. 그 근원을 찾고 싶어 층층이 쌓인 바위를 기어 올라가지 큰 돌이 위를 덮고, 뭇 바위들이 지탱하고 있다. 아래에 길이 있어 엎드려 넘고 넘어 올라가니 위의 용추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이 저절로 못 하나를 이루었다. 맑고 깊어 검푸른데 또한 장관이다. 마침내 다시 암혈을 찾아 나왔다. 계오가 홀로 바위 위에 앉아 ‘나는 추위에 약해서 들어갈 수 없는데, 어른은 유람하는 흥취가 어찌 그리 장하시오’ 하였다. 동북쪽 가장 높은 곳에 복암(腹巖)이 있는데 사람이 배를 붙이고 가야하는 까닭에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다리 힘에 자신이 없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고개 돌려 서북쪽을 바라보니 석봉이 웅장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곱다. 이를 연화봉(蓮花峯)이라 한다. 그 아래에 연화굴이 있다. 시험 삼아 높은 곳에 의지하여 바라보니 이 산의 사방 둘레의 가운데에 동부가 열렸다. 뭇 흐름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넓고 깊은 골짜기가 되었다. 석봉이 늘어서 있는데 가파르게 깎여 길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장인지 헤아릴 수 없고, 그 많음은 다시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큰 힘을 지닌 신령이 쪼갠 것인가? 신비한 도끼로 깎아 만든 것인가? 둥근 것은 규(圭) 와 같고 모난 것은 홀(笏)과 같다. 지탱하여 기둥이 되고 가로질러 들보가 되었다. 어떤 것은 신령한 용이 구름을 타고 곧바로 하늘 밖에 닿은 것 같고, 어떤 것은 노한 호랑이가 기세 돋우어 위엄이 뭇 짐승에 떨치는 것과 같다. 혹 영롱한 신비로운 빛깔 햇빛에 비쳐 빛을 발하니 늠름한 봉황이 구포에 날개를 펼친 것인가? 전체가 희고 깨끗하여 높이 구름 끝자락을 뚫은 것은 나이든 학이 꽃 기둥에 머물고 있음인가? 천길 우뚝 섰는데 뭇 돌들이 봉우리지어 험준한 것은 마치 깃발에 수술들이 달려 있는 것 같다. 아래는 둥글고 위는 우뚝한데 모가 나서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마치 매달린 종의 고리와 같다. 어떤 것은 수많은 군사와 말들이 달려 올라가 싸우는 데 나이든 장군이 갑옷입고 투구 쓰고 여러 장수를 호령하는 것 같고, 어떤 것은 나이든 노승이 불진을 잡고 좌대에 오르고 좌우의 참선하는 자들이 늘어서서 불경을 듣는 것 같고, 어떤 것은 정직한 간관이 단정히 홀을 쥐고 조정에 서서 공정하고 서슬이 퍼러니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않는 것과 같고, 어떤 것은 대인군자가 무리 가운데 뛰어나서 후한 덕과 빼어난 용모로 사람들이 바라보며 우러르는 것과 같다. 그 웅장하고 험준하여 비스듬히 비끼거나 바로 곧거나 매달려 떨어질 것 같은 것, 솟구쳐 넘어설 것 같은 것, 높고 험한 것, 민둥민둥하면서 가파른 것,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인 것들은 비록 〔송나라 때 유명한 문인화가인〕용면거사 이공린으로 하여금 종신토록 그리라 하여도 그 참된 모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서 이 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니 이른바 만물상이라는 것도 그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인가? 이름난 봉우리는 향로(香罏), 비로(毘盧), 연화(蓮花), 급수(汲水), 학소(鶴巢)이다. 이 밖의 여러 봉우리들은 그 이름을 적을 수가 없다. 새 주지승도 물어도 대답하지 못하니 어찌 절 안의 고적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아직 보지 못한 것이겠는가? 남쪽 지방의 유명한 산, 소백산, 청량산 같은 것은 모두 최치원, 주세붕이 그것을 두고 지은 작품이 있는데, 두 분이 유람한 자취가 혹 이산에 미치지 못한 것인가? 어찌 뛰어난 산과 멋진 굴이 드러날 때와 숨겨질 때가 있어 머물러 후인의 품평을 기다리는가? 주왕의 자취는 허술하고, 불가의 설은 허망하다. 이 산으로 하여금 여기에 머무를 뿐이라면 조화옹이 나누고 가르는 공에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탄식할 일이로다.
밤에 주왕암에 묵었다. 저녁 후에 강필원이 양지소로부터 왔다. 그 아버지를 뵈웠다. 밤에 문 밖에 나가 가학루(駕鶴樓)에 앉았다. 하늘 끝까지 구름은 없고 달빛은 낮과 같은데 좌우의 석봉들이 면면이 기이함을 드러낸다. 높은 것은 첩첩이 쌓여 떨어질 듯 하고 푸르름은 창창하여 물방울과 같다. 소연(翛然)히 깨끗하고 황연(愰然)히 밝다. 티끌 하나 이르지 아니하니 만상이 모두 드러난다. 알지 못하겠노라. 이 경계가 별천지인가. 옥구슬 밭인가를. 이른바 적송자가 바라는 것이 없다면 그뿐이겠으나 있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노닐고 쉬는 것이리라. 퇴계선생의 시 ‘오늘날 신선을 만나 볼 수 있다면 땔감과 마실 물 바치고 신령을 구해오고 싶네(약사선옹금가견若使仙翁今可見, 원공신수걸령래願供薪水乞靈來)’를 낭송하였다. 선경 안에서 자니 뼈는 시리나 정신은 맑다. 이리 뒹글 저리 뒹글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잠시 맑은 경쇠소리가 위 쪽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퇴침을 밀치니, 멍하니 마치 요지(瑤池)의 한바탕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귀가길에 오르다
아침 후(12일) 임생을 시켜서 함께 노닌 기록을 가학루의 남쪽 들보에 쓰도록 하였다. 이어 산을 나와 대전암에서 잠시 쉬었다. 신선의 산을 돌아보니 구름 가장자리가 아득하였다. 각각 出과 山을 운으로 하여 율시 한편씩을 지었다. 오시에 삼의촌에 도착하여 이른 식사를 하였는데 필원군이 제공한 것이다. 국보와 인사하고 작별하였다. 우행은 몸이 약간 좋지 않아 길을 가기에 어려웠다. 그 맏아들과 더불어 양숙리(良宿里)에 가서 장차 말을 세내어 돌아가기로 하고 천전에서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임생이 또한 일이 있어 먼저 갔다. 4인이 길을 떠나 청운리에서 잤다.
13일 정유일. 맑았다. 길 따라 가뭄이 더욱 심하였다. 잠시 송읍에서 쉬었다. 오시에 계오의 집에 도착하였다. 두 노인은 머물러 묵고 나는 이사리(伊沙里)를 향해 가서 진사 류수경(柳受卿) 어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묵었다.
14일 무술일, 일찍 길을 떠나 오리쯤 가다 길에서 두 노인을 만났다. 입으로 각각 율시 한편을 읊었다. 저녁에 도연에 이르러 묵었다.
15일 기해일, 일찍 떠나 강을 건너 폭포의 형승을 두루 살펴보았다. 강 따라 내려오면서 운 하나를 잡아 각각 시를 지었다. 사빈을 거쳐 임하에 이르러 국형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족인들이 모두 모였다. 술 마시고 운을 정해 시를 짓고 교분을 나눔이 매우 기꺼웠다. 오후에 천전에 이르렀다.
다음날(16일) 머무르며 우행을 기다렸다. 우행은 끝내 오지 않았다.
17일 신축일, 길을 떠나며 학래와 작별하였다. 늘그막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헤어짐은 절실하게 애달프고 아름다운 느낌을 더한다. 순극과 함께 삼수리(三數里)에 이르러 작별을 나누었다. 그 뜻 또한 감동적이었다. 낮에 동성에 이르러 이희팔(李羲八)을 방문하였다. 마침 이여룡(李汝龍)이 와서 머물렀다. 손을 잡고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다음날(18일) 희팔 여룡과 더불어 함께 영호루에 올랐다. 시판의 운을 따라 시를 지었다. 오후에 서악의 광감루(曠感樓)에 올라 관왕의 소상을 봉심하였다. 이 두 누각은 일찍이 임신년〔1872년〕가을에 홀홀히 한번 보았었다. 지금은 이미 40여년이 흘렀으니 강과 산의 풍경은 또 새 정자의 느낌을 면치 못한다. 지난날과 오늘을 깊이 생각하니 처연하여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시판의 운을 따라 율시 한편을 지었다. 어둡기 전에 돌아와 동성에서 묵었다.
다음날(19일) 느지막하게 출발하였다. 저녁에 금광리(金光里) 점사에서 묵었다.
20일, 오시에 광승(廣升)에 이르렀다. 저녁에 망동(望洞) 이준여(李俊汝)의 집에서 묵었다.
21일 계사일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