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천 이원조의 고향, 원촌을 찾아서(글/한경희_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봄날처럼 포근한 날 바람도 가벼워져 길을 나서기엔 안성맞춤이다. 입춘이 지나니 바람이 부드러워졌다. 아직 해가 지면 서늘하다 못해 얼음처럼 찬 기운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봄은 왔다.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가니 해가 점점 길어지는 현상이 새롭다. 차츰 어둠도 더디게 오고 있다. 절기상으로야 동지부터 봄기운이 태동하는 것 아닌가. 오늘 나서는 길은 어째 마음이 무겁다. 한 사람의 생사를 속 시원히 풀어놓지 못하는 일이 그렇고 또 꺼내는 말도 조심스럽다. 무슨 사명감을 가진 건 아니나 우리지역의 작가를 소개하면서 빠뜨리는 것도 좋지 않다. 근대문학의 초입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이원조의 고향으로 가고자 한다. 이 길은 언젠가 이육사 시인을 찾아간 길과 다르지 않다.
시인 이육사의 친동생인 문학평론가 이원조의 흔적을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자니 길이며, 자연풍경이며 무슨 구별이 있을 것인가 염려되기도 한다. 이 걱정의 바탕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인물이란 데 있다. 해방되고 월북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문학평론가의 흔적을 더듬는 일은 그야말로 난색 그대로다. 그런 그를 굳이 찾아서 실마리라도 잡아보고 추억하는 까닭은 우리지역 출신이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이원조의 평론을 모아 단행본으로 엮은 조카 이동영은 나라가 망하자 집안도 기울었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함의하는 대로 이원조 형제들은 민족을 발견하려는 삶을 과감하게 살았다. 민족을 발견하는 일에 얼마나 구구한 해석이 있었고, 있을 수 있는가. 개인적인 삶으로도 과감하기 힘들었던 식민지시기를 떠올려 본다면 용기백배한 이원조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원조를 추억하고 흔적을 더듬어 보는 일은 이육사를 떠올리는 일과 겹쳐지기도 하나, 얼굴이 다르듯 개성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오늘의 주어는 이원조이다. 원촌으로 향하는 길에 간간이 얼음 풀린 낙동강 얼굴이 보였으나 강바닥은 온몸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물 고인 웅덩이인양 드문드문 살얼음 낀 자리도 말라드는 거 같았다. 심각한 가뭄 속에서 농사준비는 무사한지, 군데군데 작년 비닐을 걷고 흙을 손질한 정갈한 밭들이 보인다. 그러다가 얼어버린 배추가 가득한 추수하지 않은 밭도 지나간다. 한두 곳이 아니다. 거름으로라도 쓰일 것인지 궁금하다. 허옇게 겨울 내내 버려진 채 서 있는 배추를 보면서 이웃의 농산물 사먹기는 운동이 아니라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언제나 생활에 밑줄 긋는 일은 어려운가 보다.
이원조 형제들이 자랐던 생가터를 가자니 날쌔게 생긴 개가 자리를 뜰 때까지 짖는다. 분명 언덕을 향해 개가 지키는 집을 오르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쉬지 않고 짖는 개가 무서웠지만 짖어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내가 더 무서웠을 수도 있다. 오죽(烏竹)이 겨우내 가물었던 목을 물 대신 바람에 부비고 흙길에는 먼지가 펄펄 일어난다. 어디서나 가물어 있었다. 원촌의 생가터에 세워진 육우당 기념비문에서 이원조의 흔적은 육형제의 넷째로 평론활동을 한 이력이 소개되어 있다. 여섯 형제를 나란히 소개하는 문장에서 두어 구절 떼어내 보면, 문학평론가 여천 이원조, 여천공은 독립조국과 민족문학 건설을 위하여 애쓰시다가 북녘땅에서 옥사하셨다로 요약된다. 굴곡 심한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의 죽음임을 감지할 수 있다.
2.
이원조, 아마도 이들 형제들은 유년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마을의 전설로 내려오는 왕모산성 이야기는 왕모산의 풍모로 더욱 현실감이 더해진다. 이곳 갈봉(갈선대, 칼선대)의 절경과 어울려 함께 나눠 가졌을 기억이 궁금하다. 이육사는 수필 이외 시 ｢절정｣에서도 그 공분모를 드러내었고, 이원조는 고향을 추억하는 수필에서 왕모산 일대의 봉우리를 묘사하는 문장이 있다. 우측의 사람이 읍한 듯한 모양을 한 쌍봉인 탕건봉, 좌측 층암단애의 갈봉을 갈선대라 부른다고 하였다. 갈선대에 올라본 사람들은 그 비경에 감탄한다. 정면에서 보면 그리 높은 기암괴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작 갈봉에 서면 그 아찔함과 돌아드는 물굽이의 푸른 기운이 어울려 묘한 비장감이 일어난다.
형제들에게 고향의 들판은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육사가 그러했듯이 이원조 역시 너른 밭과 강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 있었다. 이원조의 ｢회향기｣에 따르면 열다섯 살이 되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마음속에 유년의 그림이 지워지지 않았다. 원촌은 강가에 있지만 강촌처럼 비리(卑俚)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강촌의 비루함 대신 반촌의 ‘규범’이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엄격했던 전통의 규범에서 자란 형제들의 추억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북돋우고 키웠던 전통의 위엄이 부담스러웠을 터이나 당시만 하더라도 소년들은 작은 어른에 불과한 시절이었으니 가문의 위업으로 받아드렸을 법하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동네는 백여 호가 모여 살았고 그 앞으로는 뽕나무, 조밭, 담배밭이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2009년 2월의 풍경 속에는 원촌교 밑으로 포크레인 두 대가 강바닥을 파고 있다. 단순히 강바닥을 고르는 공사인지 모래가 밀려 내려와 정리하는 작업인지, 아니면 논란이 분분한 운하관련 사업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세상은 변해간다. 적어도 아름다운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누대로 보존하는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 않을까. 이육사, 이원조 형제들은 운하를 어떻게 볼까. 강촌의 꼬마로 자란 소년들의 꿈에서 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육사 수필에도 강과 들은 별을 보는 자리이자 소중한 꿈을 담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
당재에 오르면 급경사를 이루다 평지로 이어지는 곳부터 원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강줄기 옆으로 넓고 훤하게 트인 들판이 이 마을 사람들의 경작지였다. 강의 범람이 만든 문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밭 옆으로 강이 흘러서 여름에 홍수가 나면 범람했을 것이나 또 그만큼 풍작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 농사를 짓고 살았을 법하다. 바다에 태풍이 불고나면 어부는 풍어로 행복해지는 것처럼 자연의 힘에 순응하면서 농사를 짓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릴만한 너른 들이다. 분명 태풍에 배가 부서지고 홍수에 농작물이 떠내려가지만 또 다시 그 터전에서 삶을 잇는 것은 단순히 질긴 생명에의 의지만이 아닐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의무를 떠올릴 일이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프로그램되어 있고 그것이 진화되기도 한다고 설명하는 것도 너무나 사소해진다.
어느 마을에나 있었던 당나무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방축 한가운데 서 있는 풍경을 기억한다. 소년 이원조도 작크의 콩나무처럼 느티나무가 신비로웠을 것이다. 어른들이야 믿음을 구하는 대상이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하늘과 통하는 특별한 길이 된다. 이원조도 쓰고 있듯이 “하늘을 찌를 듯이 절려선” 나무와 친구처럼 혹은 하늘길을 열어주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당나무는 두렵지 않고 친근하게 아이들의 상상세계를 언제나 받아준 넉넉한 공간이었다. 특히, 여름철 나무그늘에는 매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곤충들의 피서지이다. 나무 등줄기를 기어오르는 여러 곤충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나무를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년 이상 묵은 고목이었던 그 나무의 그늘은 여름 뜨거운 햇볕이 감히 들지 못했다고 한다. 짙은 그늘을 찾는 여름에 햇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은 촘촘한 밀도의 고목이 원촌마을에 있었던 것이다. 여름 한낮의 태양을 피해 즐겁게 모여 놀 수 있었던 놀이공간으로서 그늘이다. 동굴처럼 햇빛이 차단되면서 사방은 확 트인 공간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던 즐거운 추억의 자리이다. 이원조는 어린시절 이 느티나무 그늘에서 책도 읽고 놀이도 하였다. 여름에 푸른 풀밭이 펼쳐지면 그 위에서 말뚝박기 놀이를 즐겨 했고 옷고름을 풀어 고삐를 만들었고 마부까지 두고 당나귀 소리를 흉내 내면서 즐겨 놀았다. 또 달음박질을 치기도 했다. 이렇게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추억이 풍성했다.
이원조의 형제 여섯 명의 우애는 윗대 증조부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조부 통덕랑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맏아들이 일찍 죽자 바로 밑에 둘째가 자신의 외아들을 형의 양자로 보낸다. 공의 삼형제 중 막내가 4형제를 두고 있어서 이들 형제 가운데 양자를 들여도 충분했을 터이나 굳이 둘째는 독자인 아들을 형의 양자로 보냈다. 이렇게 조부 삼형제의 우애가 깊고 넓었다고 전해진다. 그 맏형의 양자가 된 분이 이원조 형제의 조부가 되신다. 이렇게 우애의 깊이는 역사를 가진 이야기가 되었다. 우애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일제 때 창씨개명에도 조부를 비롯한 집안사람 어느 하나 창씨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제 욕심 차리면서 허세나 부렸으면 당시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장조카인 고 이동영 선생은 선대의 내림이라고 하였다.
여섯 형제가 하나같이 재예(才藝)가 뛰어났으며 가장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이원조로 꼽힌다. 가장 근엄한 사람은 이육사였다고 한다. 이육사는 친구를 가려서 사귀는 편이라면 다른 형제들은 친분관계가 두터웠고 이원조 역시 교유가 넓었다고 전해온다. 형제들이 할아버지께 글을 배울 때 재기발랄하면서 장난이 심한 이원조는 형 이육사를 골려주는 일이 있었다. 이때 화가 난 이육사는 책을 집어던졌고 이원조는 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렸다. 이원조는 책 속에 공맹과 성현이 있는데 책을 던지는 것은 성현을 욕보이는 것이니 형을 벌줘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형과의 싸움에서 판정승을 얻는다. 사소한 형제들 간의 다툼에서도 이원조의 재기가 훤히 보인다.
이원조는 1946년 이육사의 유고시집을 처음 엮으면서 “동기(同氣)이면서 동지(同志)의 한 사람”이라고 형에 대한 만감을 표현했다. 동기(同氣)는 한 부모를 가졌다는 것이지만 동지(同志)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목적이나 뜻을 같이 나누는 사람을 동지라고 하는데 한 형제 사이에 있기 힘든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보다 친한 사이이면서 애증을 나누는 관계이기에 동지의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보통 형제관계란 위계질서 때문에 일방적이기 쉬운데 마음에 먹은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뜻을 인정하며 같은 길에 나아갔다. 어린 시절 일화를 통해 보면 형은 동생을 인정했고 동생은 그런 형을 존경했을 것이다. 이런 형제를 둔다는 것은 세상에 둘 없는 친구를 얻는 일이며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거기다가 일방적인 존경이나 흠모도 아닌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세계를 나누는 이런 사귐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참고로 이원조가 동경에서 유학 중일 때 쓴 작품인 ｢이국춘｣을 보면서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을 대신하기로 한다.
이국춘
낯설은 땅에 와서
이름 익은 꽃을 보니
나그네 외론 봄이
이만해도 넉넉건만
멋모를 수란한 심사
따로 숨어들어라
머나먼 내 고향은
꿈속에도 다 못가를
다사한 요새쯤은
겹옷입은 시절인가
소식도 오래막히니
몰래 아득하여라
피는 꽃 바쁜 속에
내잠 홀로 게을러라
누엿이 넘는 해가
하늘한편 붉었으니
三千里 어린 꽃빛이
놀 지은가 하노라
3.
창작을 하는 시인과 소설가에게 비평가란 존재는 불편하다. 서양문학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평가는 종종 개 취급까지 받기도 했다. 아마 근대문단에서 비평가는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알아듣기 불편한 소리나 하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으로 취급된 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백치아다다>로 유명한 계용묵이 추억하는 비평가로서 이원조의 면모를 살펴본다. 계용묵이 말하는 이원조는 씨암탉을 채어가는 소리개(솔개)는 아니라고 한다. 씨암탉을 잃어버린 주인 심정은 둘째 치고, 잡혀가는 씨암탉은 죽음에 이른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고 돼먹지 못한 것이 비평가란 말이다. 솔개 앞에 꼼짝 못하는 암탉이 작가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솔개는 먹이사슬에서 존재를 인정받을 뿐 현실적으로 야비한 사냥꾼에 불과하지 않은가.
솔개 비유를 보더라도 계용묵에게 비평가가 얼마나 떨떠름한 존재였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비평가의 입장에서야 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비판한다고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작품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계용묵은 이원조의 평론을 두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해 섭섭하다고 쓰고 있다. “평가가 작가의 의도를 몰라주는 때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하였다. 대신 난해한 논법을 가진 비평가에 비해 평이한 논법을 가진 이원조의 존재를 높이 산다며 긍정적으로 보았다.
1930-40년대 이원조는 기자생활과 평론가로 문단교류가 왕성하였고 특히 해방공간에서는 그 위상이 뚜렷이 부각되었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해방공간은 참 많은 말을 해야 한다. 가장 간단하게는 우리 힘으로 찾은 나라는 아니었으나 국가를 제대로 세워야 하는 선급한 과제가 있었다. 이 시기에 문학은 물론 모든 일은 정치적인 선택과 판단에 묶여 움직였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어려운 시절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정치가 만들어낸 좌․우이념은 아직까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 증거로 오늘 돌아보는 이원조의 삶도 자료부족으로 정리하기 어렵고 구체적인 삶을 알기도 힘들다.
궁색한대로 이원조를 기억하는 작가들의 입담을 소개해보면 이렇다. 윤세중은 이원조를 두고 여자처럼 얼굴이 하얀 미남자라며 특히 뒷모습은 안방마님의 걸음걸이와 비슷했다고 추억한다. 김동리는 영남지역 출신 작가들의 대담자리에서 이원조를 아주 의젓한 애주당(愛酒黨)이라 소개하면서 언제나 술값이 준비되어 있다면 가서 술을 좀 사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먼저 술값 준비가 되면, 뛰어가서 참 슬프디 슬픈 술 한 잔 대접할 작정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김동리가 말한 “슬프디 슬픈 술 한 잔”은 무얼까. 이 글이 1940년 7월에 쓴 것이니 일본의 전승을 구경해야 하는 식민지민의 설움이 가장 크게 읽히는데, 어쨌든 당시 고향을 두고 쓰는 글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우울이 짙었다. 이미 1940년이 되면 문인보국대가 조직되어 있었으니 슬픈 술 한 잔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4.
일본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이원조에게 문학적 감수성의 깊이는 어떤 색채를 띠는 것일까. 이육사와 달리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 없으나 우연히 읽은 이원조 시 몇 편을 소개해 볼까 한다. 의지와 기개가 당찬 목소리로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도 있지만 마음 깊숙이 담긴 섬세하고 부드러운 심성도 드러난다. ｢무제｣라고 딱히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은 시 두 편을 보면 청년의 기상이 보인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자세를 갖추리란 의지가 보이고 스스로를 믿으며 믿는 만큼 더욱 씩씩하게 자신감을 갖추는 놀라운 의지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오늘날 표기로 고쳐 놓았다. 스스로의 내면을 다 밝혀놓은 작품으로 십대의 방황과 갈등이 잘 포착된다.
열일곱 열여덟 한창 적에/세상엔 나 하나이라고 믿었던 마음/거짓 없이 믿었던 마음/나는 무엇을 믿고 그랬던고/지금은 그때 그 마음을/알 길조차 없어라 (｢무제｣)
대장부 마땅히 죽을 때 죽어야 한다고/이전에 누구에게 들었던 말을/오늘도 어느 친구 말하는 것 보니/아마도 이 말을 알기는 다 아는 게로구먼/그래도 육척(六尺) 넘은 대장부들은/죽을 때 하나도 죽지 않고/제멋대로 살다가 죽어지는 걸 (｢무제｣)
외국문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를 묻는 말에 이원조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답변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는 결국 외국문학을 매우 즐겨했다는 것이다. 이원조는 불문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철학과 연구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스터디도 했던 모양이다. 불문학도를 ‘에피큐리앙’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그들을 자신의 세계관과 차이나는 사람들로 간주했으며 마음의 거리를 두고 지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철학연구에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젊고 의욕적인 불문학과 교수를 만나 문학사 스터디를 하면서 문학공부에 충실했고 앙드레 지드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동양고전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양의 문학을 공부하는 일은 양날의 칼을 갖추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무릎 아래서 사서를 익힌 일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선택한 면모에서 소신이 보인다. 사실, 근대 이전의 학문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했다. 학문이 분화되지 않았던 시대라는 걸 감안하고 본다면 문학적 사유와 글쓰기, 심성을 갖추는 일이 단순히 교양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삶을 구속하는 직접적인 힘을 가진 시대였다. 근대와는 달리 전통사회에서는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되는 삶을 추구했으므로 그때는 문학이 현실적인 호소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5.
아쉬운 대로 이원조의 흔적을 돌아봤다. 이원조의 평론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일은 다 피하고 시 두어 편으로 글을 대신했다. 서울도, 평양도 아닌 해주를 선택한 평론가로서 이원조의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그도 역시 민족을 발견하기 위해 어려운 역사 현장에 서성이지 않았을까. 역사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면서 왕모산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소나무 두어 그루와 어울린 당집을 만났다.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느라 깨끗하게 비질이 된 당집은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무슨 모양인지 가늠하기 힘든 돌덩이 두개가 새끼줄을 두르고 있었다. 그 길로 이육사문학관을 지나며 당재를 넘다가 멈췄다. 언덕에 스러져가는 당집이 있었다. 원촌을 들어오는 초입에서 보면 오른편 언덕에 무장해제한 듯 이울어진 당집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이원조 형제들이 소년이었을 시절 이전부터 당집이 있어 이곳을 당재라 부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