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따뜻한 희망을 노래하는 김화섭씨(글/임종교_문화를 가꾸는 사람들 사무국장)
아주 오랜만의 외출이다. 첫째, 둘째 아이를 낳고 그리고 한동안을 두문불출하였으니 그때 태어난 첫째 아이가 벌써 6살이 되었다. ‘안동’지는 찾는 이의 호들갑스러운 기대나 반가움과는 무관하게 예나 지금이나 무뚝뚝하면서도 야단스럽지도, 새삼스럽지도 않게 늘 곁에 있었던 존재로 날 반겨주었고 그런 모습이 더 편안하게 다가오는 나이를 나도 어느새 갖게 되었다.
함석공 김화섭씨, 경북농아인협회 안동지부장 되다
1993년 안동지 28호에는 ‘장애를 딛고 선 신용함석의 김화섭’이라는 타이틀 아래 청각 장애를 가진 장애인이지만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일 잘하는 사람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늘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교육열도 높아 딸 경희 씨의 공부를 봐주던 37세의 화섭 씨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16년 만에 장년의 화섭 씨를 만나러 간다. 그는 현재 경북농아인협회 안동지부 지부장을 맡고 있었다. 성창여고 입구쯤에서 유턴하여 오른편에 협회가 보이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화섭 씨는 나와의 약속을 아무래도 깜빡한 모양이다. 다른 모임에 가 있어 좀 늦어지고 있었고, 별다른 일이 없는 한가한 오후 시간 수다를 나누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의 손은 바빠 보였다. 내가 수화를 좀 할 줄 알았더라면, 그 수다에 끼여들었을텐데…
화섭 씨와 인사를 나누고 조금은 생소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수화통역사인 정순희(5년 근무)씨가 옆에서 도와주었다. 나와 순희 씨, 그리고 화섭 씨로 이어지는 삼자회담(?). 화섭 씨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함석공업사 운영하던 이야기며, 아궁이 상회 종업원으로 일하던 이야기, 그리고 극장 포스터 그리던 이야기, 양복점에서 재단하던 이야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계약체결을 하면서 손해 봤던 기억들…. 그 기억에 덧붙여 ‘농아인이 참 일 잘하고 기술도 좋다’더라는 입소문이 돌아 방송이며 신문에도 나갔다며 자기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야무지게 앞가림 잘해준 자식들 덕에 뿌듯
당시 살던 법흥동 집에서 월세와 전세를 거처 의료원 근처에서도 살다가 지금은 다시 법흥동에서 살고 있다. 아빠를 도와 수화통역을 하던 딸 경희(30) 씨는 작년 3월 결혼을 했다. 예쁘고 공부 잘하는 딸로 동네의 부러움을 샀던 초등학생 경희 씨는 현재 경희대학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고, 화섭 씨에게는 손녀딸도 하나 생겼다. 아들(27)은 호텔조리와 외국어 통역을 전공하고 현재 부산에 있는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 화섭 씨는 자기의 자리를 찾아 열심히 살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뿌듯하고 흐뭇하기만 하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지도를 많이 했어요. 딸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막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지원해주기 위해 노력했죠. 자립심을 키워서인지 둘 다 잘 하고 있어요.”
일일이 그의 손을 통해 챙겨두었던 사진들은 이제 그가 만든 미니홈피에 오롯이 담아놓았다. 딸아이 돌 사진이며 아들 아이 졸업사진이며, 여행사진, 그리고 협회 행사 사진까지 그의 꼼꼼함이 묻어난다.
그의 일터 신용함석공업사는 2004년 문 닫아
북문시장 초입에서 신용함석공업사를 운영하던 그는 2004년에 가게 문을 닫았다. 직접 사러 오는 일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받이 공사나 난로 공사 같은 것이 주된 일인데 협회 일까지 하게 되니 늘 가게에만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아내가 집에서 주문을 받으면 작업한 뒤 방문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다. 가게 문은 닫았지만 그의 꼼꼼한 성격과 성실함을 믿고 주문을 해오는 일이 있어 소일거리 정도는 하고 있다. 게다가 딸 경희 씨가 ‘힘든 일이니 적당히 건강 생각을 해가며 하라’고 해서 가끔씩만 주문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충북에서 배기통 만드는 회사의 이사를 맡고 있었는데 그 일도 경기를 타는지 부도 직전인 모양이었다. 그만둬야 될 것 같다며 말하는 그의 손은 집안 경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 풍요로운 생활은 아니더라도 그의 천성상 걱정은 되지만 낙담은 없어 보인다. 예전 그의 집에 걸어두었던 ‘하면 된다’는 가훈을 아마도 아직 걸어두고 있지 않을까.
농아인이 세상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그날까지
그러면서도 그는 올해부터 무엇보다 협회 일에 매진할 생각이다. 선거를 통해서 뽑고 있지만 무보수 명예직인데다 그 일을 맡아서 할 사람도 마땅히 없어 보인다. 깔끔하게 차려 입있던 양복이 취재에 따른 촬영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회원만 100여명이 되고, 현재는 주로 농사일을 하거나 혼자 지내는 농아인들이 많은 터라 그들을 위한 재가복지, 수화통역 서비스 정도의 일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농아인들을 위한 만남의 장도 만들고 후원도 많이 받아서 여러 면에서 농아인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했다.
현재 장애인차별금지라던가 여러 가지 법 제정이 잘 되어서 의무적으로 수화통역도 세우고 영상전화기 설치 조항도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곳도 많고, 무엇보다 급한 것은 사무실을 구하는 일이다.
“더 좋은 서비스를 주기 위해서 넓고 쾌적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수화는 아무래도 눈만 돌리면 볼 수 있기 때문에 수화하면서 개인의 비밀 보장이나 상담이 어렵거든요.”
그러고 보니 좁은 사무실에는 사람들로 빼곡하고 소파하나 빈자리가 없다.
직접 찾아가서 원하는 걸 듣고 농아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뜻도 밝혔다. 덧붙여 후원도 많이 해주시고, 일반인들이 수화도 많이 배우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일을 이해해주고 지원해주는 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당시 “사람이 참 좋아요. 말 못하는 거 그거 가지지 사람이 참 아까워요. 내 곁에 올 사람이 아니라요. 나는 편하게 사는 것 같애요” 라며 남편에 대한 믿음과 돈독한 부부애를 보여준 부인의 인터뷰가 순간 겹쳐진다.
자신의 노력과 성실함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화섭 씨, 이젠 농아인 전체가 좀 더 넓은 세상과 마주하고 따뜻하게 살았으면 하는 희망에 도전하고 있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