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홍 시인의 갈잎의 노래(글/사진/천남희_경기도 하남 사는 안동사람)
예안 부포가 고향인 91세 배위홍 시인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게 된다.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그 일을 꿈꾸며 희망한다. 그러다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면 그 꿈은 어느새 나와는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고 이내 현실에 안주하며 또 다른 꿈으로 바뀌어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안동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그 꿈을 남들이 인생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는 70이라는 나이에 이루어낸 사람이다. 그리고 아흔이 넘은 지금도 그의 꿈 이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게 91세라는 나이는 흔히 말하는 숫자에 불과했다. 새색시처럼 곱고 부끄럼 많은 얼굴이며 바른 걸음걸이에 뱃심 넘치는 목소리, 어느 것 하나 그에게서 노년의 징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귀가 잘 안 들려 얼굴을 맞대고 조금 큰 소리로 말해야 된다는 것 외에 그와 함께 하는 동안 고향 친구 어머니를 만나 정을 나눈 것 같은 마음 따뜻한 날이었다.
“내가 나기는 예안면 부포동에서 났는데 거가 우리 외가였어. 지금은 안동댐으로 수몰되고 없지. 외갓집 건너편에 도산서원이 있었어. 우리 어머니가 진성이씨 이황선생 직계 집안의 딸이라. 외할머니는 하회 류씨고. 내 다음 여동생까지 안동서 나고 내가 3살 때 대구로 이사를 갔어. 할아버지 할머니만 늪실에서 살았지. 북후면 연곡동에 늪실마을이 있는데 연자방아 도는 거 하며 지금도 눈에 선해. 거어가 전부 권씨만 사는 동넨데 한가운데 배씨가 딱 한집만 살았어. 그게 우리 할아버지 집이랬지. 원래 흥해 배씨는 풍산에 마이 살았는데 지금은 다 서울로 올라와서 풍산이 다 비었지 뭐.”
그가 먼저 고향 얘기를 한다. 안동지에서 왔다는 내 인사 한마디에 숨 고를 겨를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그와 얘기를 시작했다.
“1919년 12월 14일에 내가 팔남매의 맏이로 태어났지. 우리 엄마가 두 살 터울로 여덟을 낳았는데 내 다섯 살 때 셋째 낳고 폐렴에 걸렸어. 지금도 기억이 나. 엄마가 등에 이불을 높게 해서 기대어 숨을 헐떡거렸어. 그래서 우리 아부지가 나랑 세 살짜리 동생을 할아버지 댁에 보냈지. 세 살짜리는 어리다고 먼저 데려가고 난 내버려 두더라고. 한 3년을 늪실에서 살았지 아마? 그르다가 일곱 살 말쯤에 학교가야 되니까 대구로 갔지. 다섯 살 되는 걸 데리고 할아버지가 천자문을 가르치더라고. 우리 할아버지가 선비셨거든. 여섯 살에 천자문을 다 뗐어. 할아버지가 책접이라는 걸 맨들어서 한 글자 한 글자 재끼면서 읽어보라 캐. 아무 대나 펼치고 해도 알더라네. 동몽선습 이르다가 내가 학교 들어갔지. 소학은 읽으라캐도 안 읽었어. 일곱 살 되니까 붓으로 내 이름 석 자를 써 주대. 32절 크기 정도 되는 종이로 책을 이만큼 매가주고 거다가 배위홍(裵渭泓)을 써라 캐. 근데 뭐 아무리 써도 배자 하나 쓰니까 한 장 다 썼부래. 획이 많아 가주고 잘게 쓴다고 써도 한자 들어가면 없어. 그럼 또 책 바꿔 주고 바꿔 주고 하더라고. 그래도 자꾸 쓰라 하시니까 한 일 년 쓰니까 한 장에 다 쓰대. 천자문 읽어 놓으니까 학교 들어 가이깨네 배울게 없더라고. 한자 하면서 한글 배운 거지. 지금도 글 쓰면 버릇이 돼 가주고 한자가 먼저 나와. 내 시조에도 한자가 많지. 마카다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난 것들이라 그냥 있는 데로 쓰는 거지. 내가 옛날 사람 돼서 옛날 말이 많이 나오지. 처음에 쓸 때 정완영 선생 시조 보니까 한자가 나오대. 그래서 써도 되는 줄 알고 썼지 뭐.”
일흔이 다 되어 시작한 시작詩作 활동
아주 잠깐 시 얘기를 했다. 그가 시조를 쓰기 시작 한 것이 정완영(시조시인 91세) 시인의 ‘채춘보’를 본 후부터라고 한다. 그전에는 한시조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시조가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어느 날 그 책을 보고 눈이 확 뜨이더란다. 그게 그의 나이 68세인 1986년의 일이다. 그가 다시 고향 얘기로 빠진다. 고향 얘기 할 때의 그의 해맑은 표정이, 약간은 들뜬 듯한 그의 목소리가 나 역시 지금 눈에 귀에 선하다.
“보통학교 댕길 때 내가 3학년 때까지 방학만 되면 늪실에 갔어. 방학 때가 되면 서울 대구로 간 권씨네 얘들이 마카다 모이잖아. 노니라꼬 방학 숙제 할 여가가 없었어. 이 마을 저 마을 댕기면서 온 들을 다 맸지. 늪실에서 등 하나 넘으면 안지라는 곳도 있는데 거도 넘나들고 남후면도 넘나들고 얘들이 많으니까 다 동무지 뭐. 참외 서리 콩서리 하면서 입이 시커멓게 해 가주고 돌아 댕기고 그르다 참외밭 할배한테 들키면 야단맞고 다 뺏기기도 하고 그랬어. 근데 그 할배 원두막에서 잠들면 우리가 몰래 가서 불침을 놓는 거라. 불침 모르제? 성냥불 타던 거 까만 거 있지. 그걸 침 발라서 다리며 이마며 세워서 불붙이고 도망가면 잠자던 할배가 여기 저기 따가우이 깨네, 잠도 못자지 뭐. 논두렁을 가다보면 땡삐(땅벌) 집이 있어. 거길 질퍽한 논 흙 한 줌 가져가서 입구를 치는 거야. 그럼 벌들이 난리지. 벌 피해서 도망 다니다 쏘이면 집에 가서 된장 바르고 그랬어. 그 땐 위험하고 뭐 그런 것도 몰랐지. 한 번은 집 앞 개울에서 목욕하는데 권진사라는 분이 날아가는 듯이 모시 도포 입고 큰 갓 쓰고 지나가데. 참 잘 나신 분이라. 우리가 물장구치다가 도포에 구정물이 튀니까 호되게 혼내시데. 지금 생각해도 좀 미안한 일이야. 고모가 참외 장사가 오면 겉보리 한 되 갖다 주고 치마로 하나 가득 바꿔다 주기도 했어. 아휴 거긴 지금도 훤하지. 내가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대구로 오셨는데 할아버지 집에 있던 호상이 도곡이 머슴이름도 내 안 잊었부렀다. 내 엎어 주던 접실이도 생각나는걸. 내가 왜 시에도 썼잖아 -
서말떡 치고도 남는 듬직한 나의 요람
업히면 잠이 들던 접실이 등허리는
내 고향 늪실처럼 그리운 추억의 보금자리
지금은 마이 달라졌어. 기와집이 많았었는데 다 없어졌대. 안동시내 큰 약방 있지 왜. 그 장춘당 약방인가 그 약방 하던 권씨는 그때 스무 살이 넘었고 그 밑에 태홍이도 약학과 나왔는데 동생들 태묵이 태현이, 숙희, 경희랑 사금파리로 소꿉장난 하던 생각도 나네. 옛날에 뭐 있나 그런 거 줏어모다 놓고 놀았지. 지금도 가들 눈에 선하다. 그런데 만날 수가 없어. 만난다 캐봐야 다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이 몇인지 몰라. 아이구 지금 안동이사 그때 생각하면 대도시지.”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얼굴 새까만 장난꾸러기들이 온 동네를 쏘다니는 옛 시골의 풍경이 그대로 전해진다. 1920년대의 일이다. 유년기의 추억이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나 보다. 그의 시조에서도 늪실에서의 추억이 많이 나온다.
“할아버지가 대구로 오신 후로는 두해 여름 방학에 할아버지 모시고 칠곡 송림사에 있는 도덕암으로 피서를 갔었어. 5촌 형제들 하고 우리 삼남매, 고종 사촌 오빠 등 고만고만한 아들 일곱이 갔었지. 그때 우리 아부지가 제유업을 크게 하셨는데 친가 쪽이고 외가 쪽이고 다 거 붙어살았었거든. 할아버지가 신문지를 모다서 지게에 지키고 장에 나가서 먹과 붓을 이마이 사서 갔지. 절에서 아침 먹고 나면 12시까지 글 쓰고 한시 짓고 하다가 오후에는 맘대로 놀아라 하데. 그때부터 작대기 하나 들고 암자 주위에 우거진 숲을 헤쳐 가며 감도 줍고 그랬어. 내가 길 터놓으면 그제야 다른 얘들도 따라와. 내가 그 짓을 잘하더라고. 몸도 작지만 눈이 작아서 겁이 없었는동 내가 좀 왈가닥이었나봐. 애가 일곱이니 얼마나 놀기 좋아. 안치는 장난이 없지 뭐. 절에 밥 해주는 분이 누룽지 안 긁어 주면 밉다고 성냥 머리에 똥도 바르고 그랬어. 해우소 뒤를 돌아가면 노다지여서 그냥 들어 갈 수가 있었지. 새벽에 나와서 불킬라 카면 뭉크덩 하잖아. 그런 장난도 해봤어. 피서 끝나면 한시 쓴 거 다 모다서 집에 가져와. 그러면 할아버지 친구 분들이 모여서 점수 매기고 하데. 그날은 돼지도 잡고 떡도 하고 그래. 시라 캐봐야 도덕암에서 보이는 경치지 뭐. 그래 방학을 보내기도 했지.”
사랑에서 뛰놀고, 아부지 팔베개 하고 잤던 말괄량이
“보통학교 다닐 때 그땐 국어(일본어) 상용이라 캐가주고 학교서는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하게 해. 하면 반성문 쓰인다고. 매일 일기 써서 아침에 써내만 오후에 선생이 다보고 도장 찍어 가주고 거기다가 그날 국어 상용 몇 점이냐 자기점수 자기가 매기게 했어. 노다지 일본말만 썼지 뭐. 어떤 때 8점하고 써내만 빨간 줄 쫙 그어서 나오지. 내가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 경북여고) 8회 졸업했는데 작문 시간이라고 있었어. 글 써서 내면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모다서 철을 해서 도서실에 걸어 놓테. 내가 항상 거기 끼더라고. 요새 말로 하면 수필이지 뭐. 국어시간 그러니까 일본어 시간인데 잘 된 거 뽑아서 도서실에 걸어 놨어. 몰라 그 때 그런대로 글을 잘 썼나보지. 그 때는 일본어로 와까 하이꼬 라고 글자 수에 맞춰서 시를 쓰는 것이 있어서 시도 짓고 그랬어. 조선어 시간은 일주일에 한번 밖에 없었지. 일본말은 지금도 훤하지. 큐슈 같은데 가면 내 보고 동경에서 왔나 카고 물어 보더라. 10년이나 배웠는데 잊어버릴 리가 있나. 안 쓰다가도 말하면 다 나오데.”
일제강점기 때의 학교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준다. 나라 잃은 설움이니 전쟁이니 그런 거 모를 때라서 더 재미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나이가 어려서 그랬을 거다.
“나는 하도 왈발이 같아서 늘 사랑에서 놀았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아부지 팔베개 하고 잤지. 아부지가 사업하시면서도 늘 공직생활을 하셨는데 저녁마다 연회가 있어 늦게 들어오셔서는 날 안아다가 사랑에 델고 가서 주무셨지. 난 알고도 가고 모르고도 안겨가고. 집에서 목욕하면 꼭 아부지가 씻겼어. 그 바쁜 양반을 기다렸다가 꼭 씻겨 달라고 했지. 옷 다 벗고 기다리는 대야 어쩔 수 있나. 우리 아부지가 딸을 이뻐하시기는 하셨나봐. 낭중에 엄마에게 그러시더래. 저것만 아들 같았으면 밑에 다 딸이어도 괘안타꼬. 저거 남 주기 아까운데 하시더래. 커서들은 얘기야. 아부지는 당최 말이 없으셨어. 때리는 법도 없고 큰소리 내지도 않았고 맞아본 기억도 없어. 엄마는 우리가 저지래 해 놓으면 빗자루 거꾸로 들고 때리는 시늉을 했지. 우리 아부지가 지금은 경기고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제일고등보통학교 12회 졸업생이야. 북후면에서 권진사네 아들 하고 아부지하고 두 분만 서울 올라왔어. 그 두 분이 안동읍까지 30리 왕복 60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어. 그래 보통학교만 안동서 다니고 중학교는 서울로 올라오셨지. 맨날 카시데 공부는 잘 했는데 음악만 ‘을’밖에 못 받았다꼬. 우리 할아버지가 선비시면서 많이 깨이셨지. 그 시절에 서울 유학 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때 2전 주면 전차 탔는데 진사집은 부자니까 전철타고 우리 아부지는 그걸 아끼느라고 운동 삼아 전차 따라 달리면서 학교 다니셨다 그러대. 농사지으면 일 년 양식 빠듯한 넉넉찮은 집이었으니까, 또 전차가 천천히 가기도 했고. 우리 팔남매도 우로 너이는 건성으로 공부했고 알로 넷은 머리도 좋지만 노력파드라고. 대학졸업 할 때 마카다 톱으로 졸업하대. 너이는 놀기 좋아서 공부도 안했어, 머리는 모르겠고.”
고향 얘기에서 가족얘기로 그는 쉼 없이 내게 들려주었다. 난 그저 간간히 대답해주며 맞장구를 쳐주는 정도였다. 나이가 들어 깜박깜박 한다면서도 그는 날짜며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직장 카는 거는 몰랐어. 그런 게 어딨노. 우리는 그런 생각도 못했지. 이화여전에 갈라 캐도 대구여고보 교장이 거기 아들이 사치하다고 원서를 안내주는 거라. 보육과만 원서를 내 줬는데 친구가 가면서 같이 가자고 해서 맘먹고 사랑방에서 아부지한테 갈래요 갈래요 하며 졸랐지. 곧 허락이 떨어질라 카는데 마침 아부지 친구 분이 오셔서 ‘야가 머라카노’ 하면서 우리 아부지보다 더 난리가 나는 거라. 정작 아부지는 아무 말도 안하는데. 그 분은 큰 과수원을 하셨는데 딸을 초등학교만 졸업시키고 국어, 영어, 수학을 독선생을 넣어서 중학교 과정 4년을 다 마치게 한 거야. 하기는 그때 여고보에서 ‘부르마’라고 하는 주름잡은 운동복을 입었는데 아래가 방그런 반바지 반팔을 입고 운동하면 갓 쓴 노인들이 딸아들이 저게 뭐꼬 하면서 손짓하고 그러기도 했어. 그 분 때문에 이화여전을 못 갔지. 공부가 하기가 싫기도 했지만. 내가 그리 갔으면 내 평생이 바뀌지. 그 집에 시집도 안 갔고. 아부지가 일흔 한 살에 돌아가셨는데 내 정신적 지주였는데 돌아가시니까 어째 살꼬 싶대 그때는.”
구순을 넘긴 나이지만 아버지 얘기를 하던 그가 잠시 집 앞에 흐르는 탄천으로 시선을 돌린다. 부모 얘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 한가지인가 보다. 내친 김에 그의 시집살이 얘기를 좀 더 들어야겠다. 시조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면서도 그의 인생사 듣는 것이 왠지 더 흥미로워 얘기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말았다. 하기야 그의 시조는 거의 생활사를 활자화 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시조를 읽다 보면 어느 시골 풍경화를 한 폭 보는 듯도 하고, 어떤 일의 한 장면이 눈에 보이듯 선하기도 했다. 꾸밈도 없고 인위적인 것도 없이 진실 되게 써내려간 그의 시조들은 그렇게 모두 그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서 들은 옛날 어린 시절과 얘기들은 그의 4권의 시조에 모두 써놓은 것들이다.
이젠 다 가고, 남은 친구 한명과 왕래하면서 지내
“시집살이는 내대로 된 시집살이를 했지. 우리 아부지하고 시아부지가 니네돌이 하는 친구라. 내가 여고보를 졸업하고 나니까 우리 시아부지가 날 데려가겠다 하니 대구서 같이 모임 하던 다른 친구 분들이 전부 다 우리 아부지를 들쑤시는 거야. 그르이 아부지가 집에 와서 우리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는 안 된다 카지. 엄마는 그 집에 딸 안준다고 일 년이 가깝도록 반대를 했지. 행차 저거는 맏며느리도 못주는데 외동며느리는 더 안 된다 카지. 우리 시댁이 1남 5녀에 4대가 한집에 살아 식구도 많고 층층시하였거든. 그이 엄마는 반대를 할 수 밖에. 아부지는 친한 친구 사이에 자식을 달라 하는데 거절을 못하겠더라고 하더구만. 나는 신랑 이름도 몰랐고 얼굴도 못봤지. 내 그래도 잘 살았어. 왈발이처럼 컸지만 내가 잘못하면 두 분 사이에 금이 간다는 것만 골수에 사무치가지고 늘 긴장하면서 살았지. 시댁도 지주집이라서 식모도 있고 머슴도 있고 해서 빨래도 안 해보고 청소며 밥도 안했지. 내 시집살이는 딴게 아이라 조신하느라고 힘들었어. 시조모님도 함께 살고 외시조모님이 시댁 바로 뒤가 집이라서 늘 밤12시가 넘어야 그 어른이 가시니까 모셔다 드리고 내 방에 갈 수 있었지. 손님 찾아오면 상 차려 오는 게 내 담당이었어. 그게 바빠. 어른 뵈러 온다고 손님이 삣삣내로 오는 거라. 와서 또 일주일도 좋고 열흘도 좋게 묵어가잖아. 우리 식구만 밥 먹어도 열여덟이야. 그르이 서말지 솥에 밥을 했지. 입 닫고 안 보고 안 듣고 9년을 그리 살았어. 몸이 건강해서 앓아누운 적도 없어. 하루 종일 서 있으면 다리도 붓고 이대로 아팠으면 좋겠다 했는데 자고 나면 또 멀쩡해. 옷 입고 앞치마 한 양 그대로 잤지 뭐. 내 친정이 부자라서 그런지 시집가니까 문화 수준이 좀 차이가 나대. 우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풀장도 가고 방학이면 일주일 동안 포항해수욕장에 피서도 갔는데 시집가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애 다 놓도록 반팔 원피스도 못 입었어. 우리 집이 좀 자유로왔다면 시댁은 좀 완고하고 구식 그대로였지. 안동에서도 한 이년 살았어. 남편이 공직에 잠깐 있어서 발령 받아 안동으로 갔지. 셋째는 안동서 낳았어. 명륜동에 잠사공장이 있었는데 그 옆에서 살았어. 거기서 해방을 맞았는데 그해에 시댁에서 들어오라 캐서 다시 대구로 갔지. 서울은 1965년도에 올라왔어”
큰아이가 태어나서 4개월 동안 낮밤이 바뀌어서 참 힘들었다며 그때는 잠도 많을 때라 어디 다락 방 같은데 가서라도 눈이라도 좀 붙이라 해 줬으면 했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더란다. 그것이 지금도 못내 야속하다. 어찌 지냈나 생각해보면 그게 다 정신력이 아니었겠냐며 웃으신다. 시집살이 하던 거며 놀던 거며 옛날 일은 하나도 안 잊어 버렸는데 요즘은 들어도 깜박깜박 잊어버려 한참은 있어야 생각이 나는 것이 늙어서 그렇다며 아쉬워도 하신다. 그는 요즘 화요일과 토요일엔 항상 잠실에 나간다. 분당에서 잠실까지 역 이름이며 계단 숫자까지 기억하던 그였지만 이젠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 아파트 자체에서 운행하는 순회버스를 이용한다.
“동기생 중에서 요즘 걸음을 걷는 친구가 서울에 둘 뿐이야. 다 갔어. 하나는 아프고, 누구는 치매 걸리고, 실버하우스에도 가 있고, 그래서 우리 둘은 죽을 때까지 만나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만나지. 경주가 고향인 친구인데 만나면 옛날 얘기도 하고 살아가는 얘기도 하면서 점심도 사먹고 그르지. 아직 허리도 안굽도 다리는 안 아프지만 귀도 가고 눈도 가고 하잖아. 지금은 딸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같이 있어. 사위가 가고 없거든. 그 뒤부터 내한테 와 있지. 딸도 장가 안 보낸 아들이 둘이 있어. 영등포가 자기 집인데 왔다 갔다 하지. 가면 사흘도 자고 오고 이틀도 자고 오고 그래. 그 딸 안 낳았으면 어쩔 뻔 했노? 지금도 난 손부 며느리들한테 딸 낳아라 그러지. 딸이 최고라고. 아들은 장가보내면 내가 며느리한테 맡긴 거잖아. 관리나 잘 해라 하고. 그럴라고 아들 장가보냈는데 며느리 바라보면 어떻게 해. 영감 살았을 때도 아들집에는 오라 그래야 가지 안 그러면 안 갔지. 남편 돌아가신지 올해로 이십년이 되었네. 그렇게 날 일찍 해방시켜 줄지 몰랐지. 영감 살아 있을 때부터 시를 썼어. 처음 시 써서 책 내니까 좋아 하데. 뭐 할라 캐도 아무것도 못하게 하드만. 처음 ‘江가에서’ 내고 두 번째 시조집은 자기가 내 준다고 카더니만 그냥 가버렸네. 책은 내가 원고를 써 놓으면 그게 출판사로 넘어가고 돈만 저가 내지 뭐. 내가 몇 부 찍겠다 그르면 저들이 알아서 내. 근데 맘을 두는 자식도 있고 무관심한 자식도 있어. 내면 내나보다 하고.”
부끄럽지만 불러보는 갈잎의 노래
그가 처음 시조집을 낸 것이 1988년 그의 나이 70세 때이다. 그 후에 1995년 두 번째 시조집인 ‘조각보와 가을 꽃’이 나왔고, 2002년에 ‘태극선 푸른 바람’ 으로 세 번째 시조집을 내었다. 그때 그는 그것이 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묶어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구순의 나이인 지난해 12월에 다시 네 번 째 시조집인 ‘갈잎의 노래’를 내며 생의 마지막까지 창작의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시조집은 그의 생일 달을 맞추어서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출판 기념회를 겸해 생신 축하연을 한다. 이제 그의 자녀들은 백수 기념 시조집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책 나올 때마다 부끄럽기만 해. 늘 마음에 차지 않아. 마카다 그렇고 마음에 차지 않다니까. 활동이라 캐봐야 뭐 있나. 집에서 심심풀이로 쓰는 거 되든 안 되든 보내지 뭐. 그래도 일 년에 여성시조에 3편, 대구에 있는 낙강에 5편 보내지. 손녀딸들이 결혼 할 때 축시도 써 주는데 벌써 9편이나 썼어. 올 유월에 또 한 편 써야 되고. 두루마리에 써서 읽으면 모두 특이하다 그르지. 첫 손녀는 내가 읽었어. 큰 아들 경북고등학교 졸업 50주년 축시도 썼지. 밤에도 쓰고 자다가도 한 구절 생각나면 깜깜한데도 덮어 놓고 써 놓으면 이튼 날 내 글씨니까 알아보지. 어떨 때는 귀찮타꼬 안 써놓으면 이튿날 깜깜해 몰라. 이것저것 끄질러 놨다가 다시 다듬고 하지.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어야지. 그것도 없으면 종일 심심해서 못살 거 같애. 아침에 한글자도 빼지 않고 신문을 다 보니까 신문 두 개 보는데 오전이 다 가뿌래. 잔글씨는 덧 돋보기 대고 보지. 옛날에 6남매(5남1녀)를 어떻게 키웠는지도 몰라. 모다 친구들을 좋아해서 가들도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 우리 애들 몇이 빠져도 몰르지 뭐. 서른셋에 막내를 낳았는데 그때까지는 화장도 못했어. 요새 얘들 별나게 키우는 거 보만 저래서 어쩌노 싶어. 아들 다섯 낳았다고 칼게 아이라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들 낳으면 의사나 판검사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큰 얘는 문장도 좋고 필적도 좋고 머리도 좋아 법정대 보냈는데 판검사는 줘도 안 한다 카고 둘째는 수의과 가더니만 졸업하고는 사업하대. 내 뜻대로 안되더라. 내 원대로 이리저리 다 시켜보고 싶었는데 둘 밖에 못했어. 넷째는 너덧 살부터 키우기가 버겁더라고, 그래 내가 속으로 미국 유학이라도 보내야겠다 맘먹었더니 그대로 되대. 국제 로터리클럽 장학금 받아서 유학 가서 하버드대 도시계획과며 일리노이드대 공대 건축과도 들어가고 하대. 청계천 프로젝트도 가가 한거야. 우리 얘들이 클 때 말썽 없이 잘 커 주더라고. 내가 밥 남기거나 반찬 투정하는 거는 못하게 했지 다른 거는 그냥 평범하게 키웠어. 내가 오늘 소일 잘하고 있네. 초면이지만 구면처럼 반갑다. 누가 늙은이를 이리 상대해 주겠나. 늙으이께네 변하나 보다 말도 많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
그는 또 여행을 좋아한다. 아프리카만 빼고 다 가봤다고 할 만큼 세계 여러 곳을 다녀왔다. 미국에 여동생들이 살고 있기도 하지만 노년에 혹여 외로움이라도 탈까봐 자녀들이 배려해 준 것이다. 사람과 음식을 안 가린다는 그는 여러 곳을 다니는 것을 즐긴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는 외국은커녕 국내 여행도 혼자 다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남편이 일찍 해방시켜 주었다는 것도 그런 뜻이다. 여행지 마다 느낀 감회가 세 번째 시조집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우리네 평범한 어머니들과 좀 다르기는 했다. 해방 전 후의 우리네 어머니 들은 공부보다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집안일을 돕는 것이 더 일반화된 삶이 아니던가. 동생들 돌보며 농사일에 바빴을 나이에 그는 아버지와 풀장을 다니고 방학 때면 해수욕장으로 일주일간 피서를 다닐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서민들의 생활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보통 우리네 어머니들이 살아온 삶을 책으로 쓰라면 몇 권은 너끈히 쓴다고들 말한다. 시가 아닌 소설로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 평탄 했던 그의 삶은 아름다운 시어인 시조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냈다. 그가 68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조 쓰는 일을 시작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활력소가 되어 노년에 작품성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시조를 읽으면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한 마을을 걷는 것도 같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는 느낌이다. 느지막하게 시작 했지만 그래서 더욱 시조 한편 한편에 삶의 진수가 우러나오나 보다. 창작에 대한 그의 애착과 부지런함 정성이 구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시조라는 형식을 빌려 삶을 엮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삶인지 내가 물었더니 ‘평범하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거지’라며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신다. 지금도 그는 생각날 때마다 심심풀이로 끄적여 놓는다.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자녀들이 모아서 책 한권 더 내줄까 하는 마음에서다. 그 시조집이 백수 기념 시조집이길 바래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