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동 골목길> 살구 따는 아이가 있었네(글/백소애_편집기자)
평화로운 평화동의 한낮
아이는 몇 번인가 총총 뛰어올랐다가, 또 깨금발을 하고선 살구를 따려다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살구며 감이며, 매달린 과실수에 관심을 갖는 아이가 요즘 몇이나 될까. 살구나무 주인이 본다면야 괘씸할 이 아이의 폴짝거림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아이는 몇 번 더 뛰어오르더니 미련 없이 가버렸다. 6월, 평화동 골목길의 평화로운 일상이다.
평화동은 북쪽으로는 안기동과 운안동, 동쪽으로는 금곡동, 서쪽으로는 송현동, 서남쪽으로는 태화동에 둘러싸여 있다. 서부초등학교 구간을 제외한 큰길은 시내버스 1, 2번이 다 거쳐 가는 곳이다.
안동진명학교를 중심으로 평화윗길, 평화아랫길, 석탑길이 나있는데 그 일대로 촘촘하게 많은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오래된 주택이 즐비해 있어 제법 골목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인근 서부초등학교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의 발걸음이 있는 곳이라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지나가는 녀석들을 간간이 만나기도 하는, 그런 골목이다.
진명학교 맞은편에는 옥동삼층석탑이 있는데 문화재 지정 당시 옥동으로 분류되었었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인근에는 일제강점기 때 안동철도국(安東鐵道國) 관사가 생기면서 관사마 혹은 철도관사라 불렸으며 이곳에서 죄인을 처형했다고 한다. 현재 하수관거 공사가 한창인 운안사거리부근의 평화동 172번지 일대는 하천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거랑터, 걸터라 불렸다고 한다.
점바치가 많다는 건 불황이 깊다는 것
평화동 일대에는 굳이 하수관거공사가 아니더라도 골목에 공사 부자재가 나와 있는 곳이 몇 됐다. 내부수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안동시내에서도 개조된 한옥이며 옛 건물이 상대적으로 많은 평화동 일대에도 이제 슬슬 원룸이 들어서고 있었다. 원룸과 경쟁하기에는 낡은 집 철문에도 방 있다는 안내문구가 있다. 새집은 새집 나름대로 낡은 집은 낡은 집 나름의 이유로 아직 주인을 맞지 못했으리라.
한적한 평화동 주택가에는 신점, 병점, 사주를 봐주는 점집이 몇 군데 눈에 띄었다. 펄럭이는 신대깃발은 불황이 깊으면 ‘점바치’가 는다는 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어느 집 출입문 앞에는 누군가 놓고 간 카네이션 바구니 하나, 퍽이나 효도가 늦었다. 기껏해야 ‘소변금지’와 ‘주차금지’만 써져있던 담벼락엔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는지 실명이 거론된 욕설이 휘갈겨져 벽 한 칸을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었다.
골목 끝에는 나무에 둘러싸인 비밀의 화원 같은 집이 있고, 엇갈림길 하수구에는 프리킥을 기다리는 마냥 아이들이 놓고 간 축구공 하나 덩그러니 남아있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걸 보니 골목집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공을 차고 다시 들어갈 것만 같다.
골목을 지나 빠져나온 평화 아랫4길 화단에는 작은 아이와 함께 꽃 같이 앉아 학원 간 큰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엄마가 보인다.
담벼락에는 처마에 고인 물이 느닷없이 쏟아지지 않게끔 양동이를 받쳐두거나 혀를 내빼듯 길게 비닐에 싸여 물받이를 만들어놓았다. 주택가 골목은 내부만이 아니라 집 밖에도 사람의 손길이 고스란히 보인다. 비료포대의 고추며, 철제대문 위의 상추며, 담벼락에 있는 물받이까지 말이다. 정적이나 사람의 손길이 있으니 사람냄새가 난다. 예전엔 깨진 유리병을 거꾸로 담 위에 박아두기도 했으나 간혹 철조망을 걸어놓은 집은 있어도 유리병이 있는 집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아날로그시대의 도둑은 순진하기까지 했는데, 동네 자취하는 남학생이 쌀집에서 쌀을 한 포대 훔쳐갔는데, 터진 포대에서 새나온 쌀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 잡힌 사연도 있었다.
지금도 연락하는 중학교1학년 때 짝꿍이 사는 집을 지나간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집에는 텃밭이 잘 가꾸어져 있다. 친구는 피아노를 곧잘 쳤었다. 친구를 따라 간 피아노학원 툇마루에서 만화책을 읽으며 들은 ‘엘리제를 위하여’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귓가에 울린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각종 알림음, 모닝콜, 전화 연결음 심지어 초인종으로도 쓰여 정말 만인의 방정맞은 ‘엘리제’가 되어버렸다. 친구네는 애물단지가 된 피아노를 몇 해 전 처분했다고 한다. 두 남동생을 포함, 친구네 빨랫줄에 걸려 난창난창 날리던 노란색 서부초등학교 체육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길에서 만난 권 영감님
옥동일대를 근거지로 폐지 줍는 일을 하는 권 영감(73)님을 만났다. 그는 옥동 사니지만 평화동 일대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안다고 한다.
“원 도로 태성주택 있지, 거기 큰 도로 이짝으로 해서 송현 사단 있는데 공고 있는 데로 넘는 데, 그리로 전부 평화동이지.”
평화동은 아파트촌보다 술주정뱅이들이 큰소리 빵빵 치기 좋은, 골목의 특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밤이면 술 취해 비척거리는 인물 여럿 봤다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로 폐지를 줍는다.
“책 같은 거 꼬물, 박스 이런 거 주워서 팔지 뭐. 어떤데 가면 이만치 재놨다고. 그거 줘서 팔면 되는데 책이나 박스는 보드라가지고 뒤에 실으면 자꾸 빠져싸 안돼. 그보다는 묶어서 바구니에 실으면 덜 일렁거리고 많이 드가.“
고향은 월곡.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살다가 월곡 갔다가 다시 시내 나온 택이다.
“옛날옛날에 우리 할배네가 안동시내 경찰서 있던 자리 동문동에 살았디랬어. 임진왜란 때 거 있다가 죽지 싶어 나 많은 어른들이 개골로 가자캐서 산골로 갔지. 안동댐 상류 월곡면 구룡으로 갔어. 요새는 월곡면 예안이지. 그래가지고 그 난리가 끝나 세월이 잠잠해지니 형제가 살다가 동생 되니는 형보고 이제 나가시더 이래는 못살시더 밤 되면 호랭이 내려오고 못 사니더 하이, 형은 가이 뭐하노. 여 사다 죽지 뭐 이랬어. 형제간에 동생은 나오고 형은 그냥 살았지. 그래 대대로 살다가 내 대서부터 시내로 나왔지. 나온 지 이제 9년째래. 거서 사무 농사짓다가 나왔지.”
요새는 폐지 줍는 것도 경쟁이 심하다. 잠깐 새 훌훌 걷어가 버린다. 그나마 형편 나은 이야 트럭이라도 몰고 다니지만 리어카, 자전거, 유모차를 끌고 거리에 나서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평화동은 내 아니래도 주을 사람 하도 많으니 주로 옥동에서 줍지.”
한번은 대형냉장고를 놓고 한 집에 대놓고 폐지를 가져가는 이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냉장고를 보곤 주인보고 가져가도 되느냐 물으니 못 들었는지 어쨌는지 아무 말도 없더란다.
“아지매 하나 나오길래 물으니, 본디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요. 에이구, 오늘만 할배 가져가소 뭐 이카더만. 스티로폼이며 비닐이며 소소한 쓰레기 다 버리고 밧줄 묶어 가져갈려니까 차 갖고 온 이가 내꺼 왜 가져 가냐고 해.”
자존심 단단히 상한 권 영감님이 아무리 보로박스 줘댕겨도 위아래도 없고 예의가 없어 시시비비 가리려고 작정했단다.
“니꺼내꺼가 어딨노, 어떤 사람은 더러 쓰레기 처리 안하고 폐지나 폐품만 덜렁 가져가는데 난 최소한 그러지는 않는다. 주인 아지매도 갖고가라캤고 이왕지사 이래된 거 담부턴 여 줍지마소 하고, 좋은 말로 했으면 좋잖아? 내 오늘 묶어논 건 절대 손 못댄다 캤지.”
쌀밥 먹고 헛소리하기도 싫고 거짓은 안 한다는 권 영감님. 5남매를 둔 영감님은 “애들이사 있어도 시시마끔 결혼해서 다 나가 사니 할마이하고 둘이 살지. 요새 누가 같이 사나.”하신다.
시쳇말로 한 까칠하시는 권 영감님은 늙어 괄시당할 일도 없고 내 한 몸 부지런히 놀려 지내면 세상 처세야 자연 익히게 되는 거라고 체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평화동 골목으로 망종(芒種) 스치네
장독대와 LPG가스통, 변소 아래 핀 꽃, 낡아서 아름다운 집.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것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것도 제법 어울린다. 셔터가 내려진 벧엘슈퍼는 공중전화박스와 함께 입을 다물고 있다. 자음받침이 떨어진 간판 아래는 주인을 기다리는 자전거가 한가로이 서 있고 인부들 몇이 담배를 길게 빼물고 나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다.
골목집 변소간 환기구에는 긴 머리 날리고 있는 두루마리 휴지, 작동이 의심스러운 환풍기, 이름 모를 풀이 자라고 있었다. 예전엔 골목만 빠져나가면 흔히 볼 수 있었던 위생차가 요즘은 드물게 보인다. 커다란 호스가 꿀럭꿀럭이며 마당을 지나 화장실 변기구까지 이어지면, 어린 우리는 과한 동작으로 비명을 지르며 냄새가 나지 않는 곳까지 뛰어가곤 했었다. 아침나절의 연이은 노란택시 세대, 장의차, 똥차는 행운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논리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옛것과 추억들이 사람의 심상을 가라앉히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쭈쭈바 봉지 하나도 날리지 않는 평화동 골목길, 어느 집 담장그늘 아래서 숨을 고르며 쉬고 있던 공공근로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마치 밀항자들처럼 소리도 없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니들에게 차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평화동 일대 쓰레기 배출 장소에는 양심등불이 설치되어 있다. 훤히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불법쓰레기 배출을 막아보자는 의도란다. 나름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이참에 진짜 필요한 곳에 양심등불을 달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망종을 하루 앞둔 평화동 골목길. 헌옷 수거함 위에는 구두 두 켤레가 일광욕을 하고 있다. 평화롭다 못해 처연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