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하라 마사아키의 소설 속 무대, 봉정사를 찾아서(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안동의 서후면 태장 출신인 다치하라 마사아키(立原正秋, 한국명 김윤규)는 일본의 소설가로 유명한 인물로 김원길 시인이 1998년 <<안동문학>>에 특집으로 소개를 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다치하라의 자전적 소설 <겨울의 유산> 중 1부인 ｢유년시절｣이 실려 있으며 작가가 직접 쓴 연보와 재일문학평론가 윤학준 선생의 글도 소개되어 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서후 출신 작가의 고향을 다녀왔다. 봉정사 이정표 쪽으로 우회전 하자 송야천이 마른 모래를 다 드러내놓고 겨우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6월 한낮의 햇살은 따가웠고 그만큼 도로도 조용했다. 이미 1980년대에 일본인 평론가 고정(高井)씨가 평론을 준비하며 작가의 고향마을에 답사를 와서 인척들을 만나면서 이곳 출신임이 확실해졌던 것이다.




조선인이면서 일본인으로 살았던 작가의 회한을 몇 줄의 글로 다 담을 수는 없다. 또, 회한으로 이 작가를 설명해도 될지 주춤하기도 한다. 어떻게 일본인으로 살 수 있냐고 힐난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별로 대안이 있는 질책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 근대사에서 일본은 그 자체가 콤플렉스였던 시절도 있었다. 근대라는 삶은 그 전 삶의 방식을 지우거나 변화를 시키는 것인데 이 변화 안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이 사라졌고, 새롭게 생겨야 할 것도 등장했다. 더욱 크게 보면 재일조선인의 문제는 아픈 생채기이지 아문 상처가 아니지 않은가. 이 역사적인 문제 안에서 한 명의 작가를 보는 일은 그냥 주마간산임을 어쩌지 못하겠다. 그래서 작품 내용에 충실하게 고향을 더듬거나 봉정사를 둘러보는 것에 멈추고 말 것 같다.

재일문학평론가 윤학준 선생에 따르면 다치하라 마사아키(立正)는 자신의 전기를 쓴 책 <立原正秋集>의 말미에 자신의 연보를 써 넣으면서 신분과 출생을 속여 부모가 한일 혼혈아이며 자신은 조선의 귀족출신이라고 했다고 한다. 윤학준은 이것이 비굴한 식민지 인간의 모습이며 이런 부류가 제법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참고로 윤학준 역시 안동 서후 금계출신이다.) 이런 면을 보자면 다치하라는 일본의 문학상을 받은 뛰어난 작가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신을 속이거나 위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거짓진술의 이유를 가난한 집안환경에서 자라면서 만들어진 열등의식으로 보는 것이 일차적인 평가이다. 이런 한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일본인 평론가 고정(高井)선생은 왜곡된 인간이 지닌 슬픈 내면을 충분히 이해하는 우호적인 입장에서 다치하라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고정(高井)선생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직접 안동 서후 일대를 찾아와 다치하라의 삶을 조명해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실을 잘 찾아 밝혀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진한 것은 식민지 인간의 비굴한 모습을 당시 조선인의 심정으로 보는 것과 일본인의 입장에 보는 것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고정 선생의 입장이야말로 인간적인 문학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치 철없는 아이가 저지른 실수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봤던 것은 아닐까. 정작 조선인이라면 또 어떻게 보였을까. 인간적인 면모로만 다치하라를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윤학준 선생의 말씀처럼 한심하고 안타까운 식민지의 비굴한 군상의 하나라고 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식민지시대 일본을 환상적으로 보고 그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근대 작가들이 한두 명이 아닌 사실은 우리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


다치하라는 고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 걸음 더 나가 조선을 또 어떻게 봤을까. 답하기 어렵다. 무엇을 근거로 제시하고 이 답을 제시할 수 있겠나. 대신 작품 안에 그려진 내용에 기댄다면 나름의 답을 내릴 수는 있다. 그렇게 아쉬운 대로 고향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려 한다.


윤학준 선생이 밝힌 대로 서후면 의성김씨 집안에서 “태장이란 동네는 학봉 김성일의 직계손이 아니며 학봉으로부터 수세대 위에서 갈라진 자손”이란 점이 다르다고 한다. 이 다름의 문화란 결국 혈통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혈통이 전통과 권위와 명예를 가르는 기준이었으므로. 오늘날 돈의 위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그러자니 자연 금계와 태장은 문화의 자장에서 다른 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작가는 더욱 콤플렉스를 느꼈고 그것을 지우고 새로운 자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다치하라는 아버지가 봉선사의 선승이라고 했으나 실제 의성 김씨 문중 안에서 자녀를 두고 승려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또, 조선 불교사에서 스님은 결혼할 수 없는 계율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대처승을 설정하였다. 십대 초반에 일본으로 간 작가에게 조선의 전통과 역사는 일본의 그것에 비해 너무 멀고 낯설게 이해되었던 결과가 아닐까. 작가의 생부는 승려가 아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은 이런 정황에서 드러난다.


고향을 이야기하자면 부모가 그 배경으로 되살아야 생동감이 있다. 고향은 단순히 사물이 아니라 가장 따뜻한 인연의 끈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공간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고향을 들여다보는 한계 때문인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매우 절절한 것이 보통이다. 특히 어린날에 며칠씩 집을 나와 절에서 공부한 설정으로 볼 때,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나 어머니를 보고 싶은 아들이 등장할 법 하나 공백처럼 비워져 있다.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드러나지 않는 성장소설이 가능한가. 다치하라는 그 가능성을 만들어낸 작가이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어머니는 사하촌의 생활을 쓸쓸하게 여긴다는 점, 아들을 무량사로 보내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며, 절이나 스님의 생활과 아들과는 차별화시키고 거리를 두고 싶은 모정이 이 소설에서는 전부이다.


소설에는 아버지의 숨겨진 여인으로 기생이 등장하는데 가족들에게 끝까지 숨기고 아버지는 자결하고 만다. “훗날 내가 재혼하여 떠나간 어머니보단 단지 두 번 밖에 만나지 않은 기생이 그리웠다.”고 쓴 점은 어떻게 봐야할까. 그 기생을 두고 아름다움, 부드러움, 착함이 상상 속에서 더 커졌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 보다 이 여성이 더 생각났다는 말의 함의를 어디까지 풀어야 할까. 작가가 소설에서 그린 아버지의 취미와 문화적인 감각은 식민지기 일본인이 보여준 조선문화에 대한 관심과 비슷하다. 유명한 야나기의 도자기 예찬이 생각날 정도이다. 야나기는 조선백자를 통해 조선 민중의 소극적이며 비극적인 정서를 설명한 적이 있다. 조선백자, 고려청자 등의 도자기 애호가로서 아버지 태도는 당시 일본 지식인이 식민지 조선을 이해한 수준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


부모에 대한 시선을 작품에서 읽어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일단 설정하고 고향을 살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또 작품의 한 대목을 본다. “우리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양반들이었고 특히 이 지방의 양반들이 좋지 못했다.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비행을 저지른 양반들이 많았으나 한일합방이 되면서부터 그 양반제도는 무너졌다. 남은 것은 양반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이 내용을 보면 귀족가문 출신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조상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나 가문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고향은 물론이고 양반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알 수 있으며 양반문화와 관련한 자기 존중감은 전혀 없다. 


“자신의 피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일도 한 번도 없었다. 혹시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피해가고 싶었다.” 이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실제 자신의 출생조건이 무엇인지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피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솔직한 인정일 수 있을까. “1973년 5월 나는 29년 만에 한국을 찾아 도요지와 사찰을 돌아보았을 때 글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자신을 뒤돌아보며 비로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 풍토에는 돌아갈 수 없으니 그곳이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나라였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1970년대 초반에 한국을 찾아와서 그가 확인한 것은 한국은 아버지, 할아버지의 나라라는 것이고 이 나라에 스스로를 개입시켰다는 어떤 증거도 이 글에는 보이지 않는다.


도자기와 다도, 선 등의 일본문화에 익숙했던 작가는 한국의 전통문화 역시 일본의 문화와 별로 다른 차이가 없을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역사를 모르는 작가에게 도자기는 술과 차를 담는 아름다운 그릇에 불과했다. 고려청자를 술 주전자와 술잔으로 사용하는 생활도자기 문화가 전부이다. 이것은 문화재 의식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의 문화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대목이기도 하다. 또 소설 서두부터 갈비를 구워먹는 스님인 아버지가 등장하고, 안동장날 풍경에서 개고기를 파는 식당을 다른 음식점에 비해 크게 부각시켜 놓은 점 등은 고향을 비롯한 안동 일대의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대목이며 더불어 고향에 대한 그의 생각도 살펴볼 수 있다.




 3. 


다치하라의 고향으로 알려진 서후면 태장리는 봉정사와 대면한 사하촌이다. 절 밑 동네 이름 그대로 많은 영향관계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어렵지 않다. 작품에서도 보이듯 마을과 절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고 어린시절 추억이 이 공간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애와 출생을 숨기거나 왜곡했던 작가는 죽음에 이르러 잘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생부의 경력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진실을 알고자 했던 모양이다. 그때 알려진 것은 ‘봉정사의 수리공사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가 겹쳐 병사한’ 것이다. 그런데 高井의 조사에 따르면 태장리의 다치하라의 생가는 아주 보잘것없이 초라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럼 이 대목에서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뻔하다. 초라한 집안의 가장이 봉정사 공사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병으로 죽은 생부의 구체적인 정황은 또 여러 가지 설을 만들어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인 나는 구체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없다. 무량사란 사찰이름 자체로 불리기도 하고 큰스님이 지어준 범해선문이라는 법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주변에 있을 뿐이다. 자전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표명할 이름이 필요 없었다고 봐야한다. 스스로를 호명하는 일에서 비껴나 있는 모습을 작가는 보이고 있다. ‘나’ 라고 하는 것으로 더 이상 군더더기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나 젊은 스님들이 어린 ‘나’를 두고 무량사라는 사찰이름으로 표현한 대목에서는 작가의 호기가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어린시절부터 무량사로 책을 읽으러 다녔다. 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묵계서원에서 공부했으나 대처승인 아버지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봉정사 대신 무량사란 사찰명을 지어 썼는데 이 무량사는 부석사의 대웅전 무량수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물론 충남 부여에 무량사가 있으나 작가의 출생지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부석사가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한다.


봉정사 입구는 소설 속 배경처럼 붉은 노송이 언덕길에 펼쳐있다. 이제는 두껍게 아스팔트가 깔려져 있어 일주문 앞까지 차를 몰고 올라갈 수 있다. 적어도 안동사람이라면 보름밤 그 광장에서 달구경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방으로 확 트여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내는 고고함이 있는 곳이다. 그곳까지 오르면서 양쪽으로 수로가 나란히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가뭄 뒤라 물이 흐르지 않았다. 겨우 비온 뒤라 축축하게 젖어 있기는 했으나 아마도 며칠 전까지는 바싹 말라있었을 것 같다. 천등산은 물이 많은 산인가 보다. 물이 흘러내리도록 사람이 오가는 길 양 옆으로 수로를 만들어 놓았으며 산 밑으로 더 깊고 넓은 자연의 물길이 또 있으니 말이다. 소설 속 아이들이 양동이로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았다는 그 물은 이제 볼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물이 많았으니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가 제법 있었을 법하다. 소설에서 그린 것처럼 지금 봉정사의 다리를 돌다리로 바꾸면 운치가 한결 더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위에서 이야기한 일주문과 주차장 사이에도 다리가 있다. 이런 다리를 시멘트 다리로 하기 전에는 아마도 징검돌을 놓거나 돌다리가 있었을 것 같다. 작가는 일주문 앞에 실개울이 흐른다고 쓰면서 아기자기한 그림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일주문 앞은 실개울이 아니라 개울이며 가뭄이 아니었다면 수량이 제법 흐를 곳이다. 겨울 가뭄이 극심했는데도 물 흐르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는 곳이 있다. 물론 명옥대를 내리 흐르는 물굽이는 목이 마를대로 말랐다. 그래도 가늘게 명맥을 유지하느라 졸졸거리지만 숲 가까운 산 밑으로 흘러내려가는 물소리가 따로 있었다. 그곳으로 가보니 실개울이 아니라 제법 큰 도랑이 멋진 물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작품에서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있다는 석비는 보이지 않았고 다만 한때 산성이었을 것 같은 돌무지가 이끼를 가득 머금고 있다. 푸른 이끼는 비교적 두루 퍼져 있어서 숲 속의 정원처럼 아늑하게 보이기도 했다. 넓고 큰 돌들이 줄을 잘 맞춰 한때의 위용을 과시한다. 그 틈새마다 기원이 담긴 작은 돌멩이가 옹기종기 앉아 있다. 어느 절에 가더라도 쉽게 만나는 풍경이다. 사람들이 마음을 담아 비는 모든 사물에는 따뜻한 온기가 있어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무지도 덩달아 따뜻하게 보인다.


언덕을 올라 일주문 앞에서 천등산에서 내려온 맛있는 샘물로 목을 축이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작품에서는 대웅전과 천화당이 마주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대웅전 너른 마당을 내려서면 만세루로 이어진다. 또 천화당이란 암자는 소설 속에서나 있다. 만세루 누각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명복을 비는 펼침막이 있어서 마음이 저려왔다. 덩달아 명복을 빌며 만세루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작품에서는 누대 밑은 넓은 마당으로 돌층계를 오르면 안마당으로 이어진다고 쓰고 있는데 이 묘사는 실제 배치와 거의 비슷하다.


영화 <동승>이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경이 되었던 영산암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서 깊은 물길이 가로로 흐른다. 개울이나 도랑으로 표현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다. 비록 물은 말라 있지만 장맛비가 시작되기라도 하면 그 물길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실감날 것 같다. 영산암 계단과 대웅전 마당 사이 중간쯤에는 웅장한 물길이 지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이곳도 시멘트 다리로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돌을 두었다면 작품에서 그리는 돌다리가 등장할지 모르겠다. 작가는 반월교라 하여 활처럼 휘어진 예쁜 다리를 묘사했으나 실제 봉정사에서는 반월교를 볼 수 없다. 혹시 작가는 영취산 통도사의 반월교를 떠올리며 자신의 작품에 접맥시켰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에서 산 쪽으로 한 발짝 발을 더 들여놓으면 그냥 숲과 만나게 된다. 오늘처럼 더운 날에 찌는 더위를 말끔히 가시게 하는 신기한 숲의 바람이 있다. 놀랍게도 깊은 바람소리까지 들린다. 숲이 깊어서 스스로 허공을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와 비교해 볼만한 신기한 일이다. 작가가 어린시절에 만났을 봉정사의 천등산과 숲은 너무나 신비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햇빛이 차단된 숲의 그림자는 어두웠고 오래 물을 흘려보냈던 물길에는 여전히 가늘거나 숨죽은 소리가 물로 흐르고 있었다.


영산암에 올라 만세루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지만 운치있는 누대 앞에 섰다. 감히 오르지는 못했다. 이 누대를 작가는 어린시절에 혹시 보았는지 모르겠다. 자그마한 절 마당에 알맞도록 누대를 따로 짓지 않고 승방과 연결시켜 놓았다. 승방과 누대가 연결되는 지점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약간 삐뚤 하지만 누대 마루에 놓인 의자를 보면 여전히 유용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영산암은 만세루와 극락전을 축소시킨 것은 아닐까 싶다. 유년을 회상하는 소설에서 영산암으로 추정되는 대목은 볼 수 없었으나 봉정사에서 제일 높은 계단은 이곳에 있다.




 4.


유년을 추억하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는 그냥 쓸쓸함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쓸쓸함은 다치하라 소설의 주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중요한 정감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의 눈에 비친 사물과 집과 사람, 자연물은 한결같이 쓸쓸함으로 귀결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막연하게 연결시키기도 하는 이 쓸쓸함은 그의 인생전반을 함께 하지 않았을까. 유년도 유년이지만 조선인이면서 일본작가로 글 쓴다는 것은 또 얼마나 쓸쓸했을까. 이 소설의 설정 가운데 하나는 음식이야기나 아이들의 놀이가 주요한 배경과 이야기로 들어와 있다는 거다. ‘부엌에서 멧돌은 매일 쓰고, 참기름은 닷새나 엿새는 걸려서 짜고, 비오는 오후에는 과자를 만들고’ 또, 송화다식에 조리댓잎에 약밥을 싸고, 두부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아이들의 고기잡이, 산딸기 따기, 메뚜기 잡기 등은 먹는 놀이는 흥성한 것이 아니라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을 담은 것이다.


무량사는 소설 속의 사찰이고, 봉선사는 다치하라 자필 연보에 나오는 사찰이며 소설 속 모델이 된 실제 사찰은 봉정사로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는 묵계서원이 등장하고 무량사의 이상적인 스님으로 허백당 청안이 등장한다. 소년인 나에게 정신적인 스승으로 자리잡은 허백당은 실제 묵계서원에 모셔진 보백당(김계행)을 염두한 것이었을까. 그런데 다치하라는 의성김씨이고 보백당은 안동김씨 문중이다. 묵계서원은 길안면 묵계리에 있어서 서후면 봉정사와는 먼 거리이지만 소설에서는 같은 공간으로 설정해 두었다. 주인공이 묵계서원이 아니라 무량사에서 공부한다는 선택은 작가의 실제 유년의 추억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아닐까.


봉정사 만세루를 오르는 계단에서 만난 감나무 고목은 몸통이 잘려나가고 그루터기만 남아서 새 생명을 피워냈다. 새로이 자라 오른 감나무는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거리는지 예쁘기만 했다. 키도 제법 많이 자라서 새싹이라고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을 정도다. 안동댐 가는 길에 잘려진 회나무가 피운 싹보다 키가 크다. 몸이 다 썩어 속은 비었고 거죽만 겨우 남아서 그랬는지 그루터기 주변에서 생명을 피웠다. 나무에게 죽음이란 다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씨앗에서 새롭게 자라나기도 하지만 몸 그 자체가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리인가. 민족, 조상, 가족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인간의 굴레와 다치하라의 개인적인 고민과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다치하라가 이 고목에서 핀 감나무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하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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