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선비의 지방 쓰기(글/편집실)젯상을 받는 이가 글을 아오 모르오?
남선면 구미동에 가면 풍산어른이라고 하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 어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맣은데, 한번은 풍산어른이 장례식때 쓸 베를 구하려고 강원도엘 갔습니다.
어떤 큰 집에 찾아들어가 하룻밤 자고 가길 청했습니다.
“여보 주인장! 하룻밤 잠자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오셨습니까?”
“영남에서 왔습니다.”
“아이고 손님, 잘 되셨습니다. 어서 사랑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당시에는 영남 산다하면 외지에서는 모두 선비로 알았습니다. 주인도 풍산어른을 선비로 알았습니다. 마침 그 집에 제사가 들었는데 지방 쓸 사람이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제사가 들면, 동장이 와서 지방을 써주었습니다. 온 마을에서 동장만이 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동장이 출타 중이어서 큰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주인은 ‘영남에서 선비가 왔으니 지방 걱정은 말고 얼른 제사음식을 차려야겠구나!’하고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주인은 풍산어른을 사랑으로 모시고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저녁을 먹고난 후 주인이 사랑으로 왔습니다.
“영남에서 오신 선비 손님. 오늘 저희 집에 제사가 드는데 지방 좀 써주십시오.”
풍산어른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선비로 알고 잘 대접해주었는데 이제와서 선비가 아니라고, 글을 모른다고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한참 생각하던 풍산어른은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주인. 지필묵 가지고 오시오.”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붓을 든 풍산어른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제사상을 받는 혼령이 글을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네, 글을 모릅니다.”
“그럼 잘 되었네.”
풍산어른은 지방 종이에 붓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로 꼰밭을 그려주었습니다. 땅바닥에 줄을 그어놓고 상대편 말을 따먹거나 길을 막아서 이기고 지고 하는 아이들 놀이에 사용하는 그 꼰밭을 말입니다. 무얼 알아야 지방을 쓸텐데 안 써줄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영남선비가 지방을 써주니, 그걸 붙여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강원도 지방의 제사풍습은 영남지방과 달랐습니다. 영남지방에서는 제사를 지낸후 지방을 태우는데 강원도에서는 지방을 보관합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도 지방을 간직해 두었습니다.
풍산어른은 다음날 아침에도 푸짐한 아침상을 받았습니다. 제사를 무사히 잘 지내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특별히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침밥을 맛있게 들고 있는데 출타했던 동장이 덜렁덜렁 찾아왔습니다.
“여보게. 내가 어제 볼일 보러 갔다가 늦게 와서 지방을 못썼는데 제사는 어떻게 지냈는가?”
“그렇지 않아도 큰 걱정을 했는데 마침 영남에서 어떤 선비가 손님으로 와서 지방을 써주어 제사를 잘 지냈네.”
“그래? 그 지방 가지고 와보게. 내가 한번 봄세.”
“여기 있네.”
지방을 펴보던 동장은 깜짝 놀라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이거 제사 잘못 지냈네. 이게 꼰밭이지 무슨 지방인가. 그 영남선비라는 사람 어디 있는가?”
“사랑에 계시네.”
사랑에 앉아서 대화를 듣고 있던 풍산어른은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동장에게 망신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이미 저질렀고, 어제 지방 쓸 때처럼 통 크게 나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동장이 사랑으로 건너와 인사를 대충하고 대뜸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이보시오. 어째 남의 지방을 쓰는데 이렇게 꼰밭을 그려 놓았소?”
“헛, 그것 참! 숙맥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가 물어보았잖는가. 죽은 혼령이 글을 아느냐고. 모른다고 하길래 지방을 이렇게 했소.”
“그래 글 모르는 사람의 지방은 모두 이렇게 꼰밭을 그리오?”
“허! 그것 참! 혼령에게 이리 와 앉아서 음식을 드시라고 하는 것이 지방인데, 글 모르는 혼령에게 제사 지낸다면서 어떻게 글씨로 쓸 수 있겠소. 글씨를 써봐야 어딘지 찾을 수 있겠소? 그래서 내가 그림으로 지방을 썼소이다. 이것이 이집 골목인데 여기 와서 이리로 해서 바로 찾아와 제자리에 앉으라는 뜻이오. 이게 바로 글 모르는 사람의 지방일세.”
“영남에서는 다 이렇게 합니까?”
“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 글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한다네. 글 모르는 사람에게는 지방을 써봐야 제자리를 찾지 못해. 그래서 이런 그림을 그려서 지방으로 사용한다네.”
풍산어른의 조리있는 말을 듣고 있던 동장은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어 무릎을 탁 쳤습니다.
“역시 영남양반이 틀림없구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선비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남사람들은 어딜 가든 다 양반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영남에는 양반도 많았고 선비도 많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영남이 양반고을로 인정받게 되고 또 일자무식이지만 양반이나 선비로 행사하는 데에는 엉뚱한 요소가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풍산어른은 양반인지는 몰라도 선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비로 대접받고 선비로 행세하며 또 선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영남사람이면 으레 선비라고 여기는 편견에 가까운 고정관념이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무식한 사람을 선비요 양반으로 대접하게 한 것이다. 잘못된 고정관념이 함정의 하나이다.
다음의 함정은 실제 선비도 아니면서 선비행세를 엉터리로 하는 것이다. 일자무식임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지방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밝혀야 마땅할 터인데, 풍산어른은 자신을 선비로 알아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선비행세를 해버렸다. 본디부터 선비가 아닌 터수에 선비행세를 엉터리로 했으니 이분은 선비의 길과는 영 딴판으로 행세한 것이다.
선비가 아닌 사람일수록 누가 선비로 알아주면 한층 더 선비 된 양 위선을 부리게 되는 것이 예사사람들의 한 속성이다.
마지막 함정은 자신의 잘못이 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배짱과 오기로 이를 오도하기 위해 거짓논리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이를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합리화시키려고 더 큰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풍산어른도 같은 함정에 빠져있다. 그 결과 순진한 강원도 사람들에게 엉터리 지방 쓰는 법을 가르쳐주어 그들의 문화를 오염시키게 되었으며, 영남사람들을 양반으로 확산시키는 근거가 참으로 엉뚱한 사실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하는 풍산어른보다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 강원도 사람이 참으로 선비답다.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궤변론자들을 향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처하는 저들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적어도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가 하는 사실 한 가지는 알고 있다고 했다.
남들이 다 우리 안동사람을 양반이나 선비로 봐주는 것을 빌미삼아, 풍산어른처럼 엉터리로 선비행세나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선비의 길과 어긋난 방향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자신이 빠진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풍산어른의 말 재치나 든든한 배포 하나만은 높이 살만하다. 무식하지만 유식한 사람 이상의 수완을 지닌 분이다. 이러한 역량이 지역성을 대표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발휘된다면 김선달이나 정만서, 정수동 이상의 인물이라 하겠다. 무식하다고 해서 기죽을 것이 없다.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해서 고민만 할 것도 아니다. 기를 펴고 궁리를 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배포도 있어야 한다. 재치도 부릴만하다.
그 결과 풍산어른은 자신의 체면도 살리고 제사지낸 집의 망신도 면하게 했다. 하마터면 남의 제사를 정말로 망치게 할 뻔했다. 만일 엉터리 지방으로 밝혀졌다면 제사 지낸 집에서는 얼마나 큰 낭패로 알겠는가? 일은 이미 그르쳐진 것, 모두들 제대로 잘 지냈다고 믿게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결이다.
따지고 보면, 무식한 방법으로 해결한 풍산어른의 지방이 더 옳은 방식인지도 모른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나 제사를 받는 사람이 한결같이 모르는 한자 문귀를 남의 힘을 빌려 써놓고 지방이라 하는 것은 허식일 수 있다.
어차피 허식인 것이 지방이라면 애써 밝혀내어 사람들을 낭패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허식을 따르며 양반이나 선비로 행세하는 것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전통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