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고시절, 추억의 법석골(글/백소애_편집기자)
바야흐로 빵 하면 맘모스, 선물 구입은 몽블랑, 미팅 하면 소문난 제과, 햄버거는 달라스, 분식점은 코끼리, 시화전 하면 학생회관 시절이었다. 고교 3년간 꼬박 올라갔던 오르막길의 추억이 새록한 법상동 골목길 입구에 서본다. 대석동 농협 사거리에서 안동여고까지의 짧은 구간이지만, 나는 떨어트린 동전을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호들갑을 떨며 올랐다. 변한 거리에 두리번거리다가 대문 아래로 기어코 주둥이를 내미는 개 때문에 놀라 도망을 치고, 새마을금고 여직원 유니폼과 흡사하다 놀림 받았던 파란색 교복의 옛 기억에 잠시 도로의 감식가처럼 그렇게 천천히 법상동을 훑어보았다.
옛부터 화성동은 잿골, 금곡동은 서당골, 법상동은 법석골, 법석골 윗동네는 논골이라 불렀다. 법상이란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에 법상사(法尙寺)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졌다. 논골은 광복 전까지 254평의 천수답(天水沓)이었다 한다. 1949년 이후 모두 집을 지어 지금은 논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동네사람들은 논골이라 부르고 있다.
법상동 터줏대감, 성미슈퍼
법상동 입구에 있는 문구점 드림디포의 젊은 아주머니는 지금 4년째 법상골목을 지키고 있다. 예전엔 에덴문구 간판이 걸려있었던 자리다. 이 동네 터줏대감이 누구냐 물으니 아주머니는 스스럼없이 ‘성미슈퍼’라 일러준다. 성미슈퍼는 꽤 오래전부터 법상골목을 지키고 있다 한다.
오래전 안동여고를 졸업했지만 졸업 후 학교를 가봤던 기억이 없다. 경험에 의하면 모교를 찾는 경우는 두 가지다. 모범생이거나 일찍 취업이 되어 각종 증명서가 필요한 경우거나. 두 가지 모두에 해당사항이 없다. 그나마 각종 증명서는 온라인 상에서 다 해결이 되고 모범생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학교를 올라갈 일이 없었다.
일대는 법상길, 법상 아랫길, 법상 윗길로 주소 명칭이 변경되어 있었다. 성소병원과 이어진 샛길에 ‘법석골’이라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맞은편 성미슈퍼에는 30여년 슈퍼를 운영한 부부가 살고 있다. 주인아저씨는 더위를 피해 모시옷을 입고 눈을 붙이고 있었고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잠시 옛날 기억을 되짚어 준다.
슈퍼는 새로 단장한지 6년째 들어선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내부는 깔끔했다. 줄지어선 앵글에는 정갈하게 물건이 놓여있다. 처음엔 법상식품으로 시작해 20년 전쯤 성미슈퍼로 이름을 바꿨다. 집값은 올랐고 장사는 예전만 못하다. 이마트며 농협 파머스마켓이며 신시장마트며, 큰 매장이 있으니 자연 장사는 수월찮다. 또 전에는 학생들이 올라가면서 사먹고 내려오면서 사먹었는데 지금은 일절 그런 게 없단다. 아침나절이면 한 부대씩 오곤 했는데 이제는 학교 매점도 생겼고 요새 아이들도 그다지 주전부리를 하지 않으니 손님들은 대게 동네 단골손님들이다.
30여 년간 법상골목을 지킨 주인아주머니는 법상동의 변화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가게 앞 도로 사이에는 도랑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법상만화방’자리가 어디쯤인가 물으니 바로 옆 해바라기가 있는 집이라 알려준다. 나는 어떠한 장소를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퍽 마음에 든다. 해바라기가 있는 집, 장독 많은 집, 전봇대 앞에 있는 집, 골목 끝집, 그렇게 특징 지어주는 무엇이 있는 집, 그러한 호칭이 무척 정겹다.
옛날에 우리 집은 세 들어 있던 이발관 호칭을 딴 ‘이발관 안집’으로 불렸었다. 이발관이 이사 가고 난 이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불렸었다. 마당에서 놀다보면 면도거품이 남은 얼굴로 화장실을 다녀가는 아저씨들을 본 기억이 있다. 이발관 집, 미용실 집 등 그러한 호칭은 주택을 겸한 소규모 영세 상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이제는 골목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들이 되고 말았다.
법상동 골목길의 명물이었던 법상만화방은 하교 후 꼭 들리는 코스였다. 여고 앞에 있었던지라 당연히 순정만화 일색이었고 간혹 어쩌다 누나 따라 들어온 남학생은 불안한 기색으로 구석에서 숨죽여 만화책을 보곤 했다. 그러나 비단 그 남학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숨죽여 봤다. 혹시나 한권 값에 서로 돌려보진 않는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피는 호랑이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기관지가 안 좋았던지 카운터 아래에 있는 깡통에 수시로 가래를 뱉어내곤 했다. 나는 그 깡통을 누군가에게 복수를 할 때 꼭 쓸 거라고 다짐했었던 다소 난감한 여고생이었다. 성미슈퍼 아주머니는 기와집이었던 법상만화방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할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는 엄연히 안동 여고생들의 추억 한 켠을 장식한 인물이었다. 나는 옛 기억에 젖어 해바라기집 앞에서 잠시 해바라기를 해본다.
법상길을 타고 올라가는 담벼락에서 골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쓰레기 관련 문구를 발견한다. 나무는 내놓지 말라는 경고문이다. 재활용도 아닌 것이 척하니 재활용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인근 주민들이 골치를 썩는 모양이다. 별 효과는 없는지 역시나 나무가 버려져 있다.
효성원룸과 정은맛집은 법상길에서 제일 번듯하게 지은 건물이지 싶다. 그전엔 무엇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효성원룸 앞 공터에는 원두막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햇볕이 뜨거워서일까, 원두막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법상동 터줏대감쯤 되는 할머니가 손부채를 하고 있거나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고 있거나를 기대해보지만 날씨가 예사롭지 않아서 별 소득 없이 다시 길을 오른다. 인근 규장각 서점은 간판만 달려있을 뿐, 광고사로 바뀌어 있었다. 안동시내 서점도 몇 손가락을 꼽을 정도니 학교 아래 서점이야 오죽할까, 나만해도 오프라인으로 책 구입 한지 꽤 됐으니 말이다.
법상 아랫길로 접어들자 2층집 아이 하나가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신기한 듯 내려다본다. 손을 여러번 흔들었지만 아이는 생뚱맞은 표정만 지을 뿐이다. 골목 끝집 담장 위에는 호박이 익어갔다. 거리 화단에는 시든 가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법상길과 교차해 가로놓인 금명로에는 제법 큰 옥수수가 서 있다. 열어놓은 대문 안으로 화장실이 보인다. 한옥식 주택이 많던 시절엔 세 들어 사는 이와 화장실을 공용으로 썼던 터라, 식구들만 살면 굳이 써 붙이지 않아도 되는 화장실 명판이 붙여져 있다. 가족이 아닌 다음에야 나란히 있는 욕실 혹은 다용도실 문을 한 번씩 꼭 열어본 후에야 화장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상 윗길의 보성슈퍼
명찰과 배지를 가다듬고 하교후의 은밀한 약속을 주고받고, 혹은 등교가 늦는 친구를 기다리던 골목 사이사이를 훑으며 오른다. 휴대폰이나 메일이 보편화되어있지 않던 시절이니, 기다린다는 것이 꽤나 익숙했었고 사람들의 행동반경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 없는 친구는 독서실에서 찾을 수 있고, 독서실에 없다면 만화방, 만화방에 없다면 자취방, 자취방에도 없다면 시내 놀러나간 것으로 추측했고 대부분의 추측은 들어맞았으니까.
안동여고로 향하는 길 오른쪽에 보성슈퍼가 보인다. 퍽이나 오래된 것이라 느낀 간판이지만 전화번호 국번이 세 자리다. 맞은편에서 가게를 하다가 옮겼다는 보성슈퍼 부부와 동네 아주머니가 한창 담소 중이었다. 86년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 23년 세월이다. 언제부터 가게를 했냐는 물음에 기억이 안 맞는 부부는 끝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티격태격했다.
“우체국 다니는 이가 원래 여 앞서 가게 했잖아.”
“그럼 첨에 우리가 한 거 아이가?
“아이래. 거한테 우리가 다이 3만원 주고 샀잖아. 아, 아이다. 집세가 30만원이랬고 나무 다이값으로 만원 쳐줘서 총 31만원 줬드랬어. 거가 전화번호가 4가 네 개랬어. 전화번호가 4444.”
구체적인 기억이 남아있는 아주머니가 승. 갸우뚱하는 아저씨가 증거를 못 내놓고 있어 그렇지 본인 기억이 틀림이 없다며 도무지 아주머니 말에 수긍하지 않는다. 방학이어서일까? 사복을 입은 안동여고 학생들 몇이 내려오긴 했지만 보성슈퍼의 매출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였다.
“이 슈퍼로 자식들 다 키우셨겠네요.”
“하이고 예전엔 가능했지. 10원짜리 장사도 재밌을 때가 있었어. 지금은 택도 없어요. 하루에 만원이나 벌랑가. 우리 집이니 세 안나가이 그냥 벌려놓고 있는거지 뭐. 이걸로만 해선 밥도 못먹어.”
옆에 앉은 아주머니도 한마디 거든다.
“옛날엔 밀가루 둘둘 말어 핫도그 장사해도 재밌었어. 여기 은주네 집, 욱이네 집이 했을 때만 해도 애들이 하나씩 물고 댕겼는데.”
또 학교 매점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아이들이 동네 슈퍼를 찾는 일이 뜸해졌다. 시원찮은 벌이에 나는 500원짜리 생수 하나밖에 못 보태주었다.
보성슈퍼 맞은편에는 미용실이 있다. 슈퍼나 미용실은 어느 동네에서나 그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곳이다. 옹기종기 모여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다.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 사진 한 장 찍자니 기겁을 하신다. 요즘은 어째 본인의 입성이 형편없다며 사진 찍기를 거절하는 분들이 많다. 올해 몇 되시냐 여쭈니, 아직은 7학년 밑이라고 농을 치신다.
법상 윗길로는 크게 변한 게 없다. 아래 금명로 쪽만 길이 넓혀지고 새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여도 젊은 사람 없고 나 많은 사람, 영감 할마이들이 많이 살지. 주택엔 요새 다 그래. 길 나고 그러면서 저 밑에만 좀 변했지 여기사 옛날 그대로래.”
할머니 한분이 슈퍼 맞은편 골목그늘에 무료하게 앉아있다. 지나가는 새댁이 인사를 하자 반갑게 손을 흔든다. 동네 새댁의 인사도 반가울 터, 할머니는 대체 하루에 몇 마디를 나누며 사실까.
추억의 파란 교복, 법상 윗3길의 안동여고
왼쪽으로 법상 윗3길의 안동여고, 직진해 논골쪽으로 오르면 오래전 구멍가게가 있었던 법상 윗길이 나온다. 구멍가게가 없어진 자리에는 자물쇠가 채워진 빈 점포만 남아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아저씨에게 옛날 가게 자리가 맞는지 묻자 아저씨는 일부러 자전거를 세워서는 그렇노라고 답하고 간다.
법상길 일대는 안동여고생들의 자취방이 수두룩했었다. 이곳 윗길에도 아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시내가 집이 아닌 면단위 촌 아이들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영양, 청송, 진보 등지에서 유학 온 아이들이 10대 중반부터 홀로 밥을 지어먹고 학교를 다니곤 했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아이들은 밥 수발하러 같이 나온 할머니와 함께 청소년기를 보내기도 했다. 일찍 부모와 떨어져 지낸 아이들은 이후에도 부모와 살 기회가 없다. 졸업 후 타지에 나가게 되면 그야말로 남보다 더 못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시절 친구들의 부모는 거의 대부분 그렇다. 늙고 병들어 시골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한 친구들은 하지만, 여전히 자기 생활에 바쁘다.
안동여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안동여고 학생들에게 가혹한 오르막길은 ‘우리가 왜 무다리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변명이 종종 되어주기도 했다. 학교 언덕에서 내려다본 어느 집 담벼락에 뽀로로 돗자리가 걸려있다. 5살 전후의 유아가 사는 집이리라. 학교 우측으로 난 길에는 우편함이 하나 서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일까. 물어볼 길이 없다.
교문 앞에 서본다. 지각, 명찰과 배지 미착용자를 색출하느라 등굣길 교문 앞은 항상 혼잡했다. 지각했으면 잡을 일이 아니고 빨리 들여보내고 명찰은 안달아도 친구들이 내 이름을 알 터이고 배지는 안달아도 교복 보면 알 터인데 왜 이런 고루한 일에 진을 빼게 하는 것일까, 그 시절 소심한 나는 불만도 꽤나 많았던 여학생이었다.
법상동 골목기행은 마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처럼 미지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떨어져나간 간판 하나와 시든 가지 하나에도 애잔한 마음이 든다. 오늘 나로호를 발사한다고 한다. 국가 위상을 제고하고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것에 발사의 의의를 둔다는데, 정말 따분하고 지루한 말이다. 이 긴 장마와 이 찌는 여름처럼 말이다.
골목에서 사람을 만나고 옛 한옥에서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나고, 텃밭에 채소를 가꾸고, 햇빛나면 햇빛 쬐고, 빙판 생기면 연탄재 깨부수고, 최첨단에서 비껴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골목길을 사랑방 식구들도 마음이 적적할 때, 한 번씩 걸어보길 권한다. 비가 오면 더욱 운치 있겠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