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속을 씻어야(글/편집실)숙맥 석바우
옛날 안동의 어느 마을에 박월봉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아주 숙맥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숙맥이었나 하면 동무들이 “두 냥 반이 더 많으냐, 오십 전이 더 많으냐?”물으면 “그야 오십 전이 더 많지.”하고, “그럼, 두 말이 더 많으냐, 닷 되가 더 많으냐?” 물으면 “닷 되가 훨씬 더 많지.”할 정도로 숙맥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석바우였는데 동무들은 모두 숙맥 같은 석바우를 놀려주기에 바빴습니다. 저녁이면 마을의 어느 집에 젊은이들이 모여 일도 하고 놀기도 하였는데 석바우는 모임에 갈 때마다 동무들에게 찌짐바탕이 되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무들이 석바우를 데리고 온갖 장난을 쳤던 것입니다.
석바우 부모님들은 불쌍한 아들이 안쓰러워 장가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장가를 가서 어른이 되면 동무들의 대접이 좀 달라지리라 생각해서입니다. 석바우는 숙맥이긴 했지만 엄연한 양반집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얼굴이 예쁜 소실의 딸과 혼인을 했습니다. 같은 양반과의 결혼은 좀 힘이 들어도 소실 집안이라면 쉽게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석바우가 예쁜 부인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자 동무들은 샘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른대접은 커녕 여전히 장난을 쳤습니다. 장가를 가서 어른이 되어도 석바우는 여전히 울고 들어왔습니다. 참 딱한 사람이었습니다. 장가를 가도 사정은 여전하니 석바우는 처갓집엘 가지 못했습니다. 처갓집에 가서 실수하고 곤란을 당할까봐 갈 엄두조차 못내었습니다.
장인어른이 양반 사위라고 문자라도 더러 쓰면 알아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처갓집에 계속 안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는 큰 용기를 내어 처갓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아침이 되니 심부름하는 아이가 세수 하시라며 대야에 세숫물하고 세숫비누를 갖다주었습니다.
석바우는 비누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에 들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아이가 벌써 숙맥인줄 알고 한마디 일러 주었습니다.
“서방님, 그게 비누라고 하는 건데 물에 풀어서 쓰시면 됩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석바우는 ‘옳다! 됐다.’하며 비누를 물에 풀었습니다. 거품이 뭉실뭉실나는 것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한 세숫대야 가득 거품을 풀었습니다. 이제 세수를 하려고 비눗물을 얼굴에 대니 향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꽃향기 같은 것이 코를 상쾌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거, 세수하라고 갖다준 것이 아니라 먹으라고 갖다준 것인가 보다.’하고 석바우는 비눗물 한 대야를 그만 다 마셔버렸습니다.
심부름 하던 아이가 가만히 지켜보니 서방님이 세숫물에다 비누거품을 풀더니 막 들이마시는 것이 아닙니까. 기가 막힐 숙맥이었습니다.
“아, 서방님! 그 비누는 세수하시라고 내어놓은 것이지, 마시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석바우가 대뜸 받아서 한다는 말이,
“헛! 그것 참 정말 뭘 모르네. 너 같은 상놈은 거죽을 씻지만 말이야. 우리 같은 양반은 속을 씻어야 된단 말이야.”
정말 말 한번 잘 했지요.
속 씻는 숙맥 짓, 차라리 양반답다
흔히 안동사람들을 숙맥들이라고 한다는데, 이 이야기 속의 숙맥 박월봉 씨, 별명 석바우는 예사 숙맥이 아니다. 숙맥 노릇을 하며 이른바 똑똑하다는 사람들 어떻게 보면 약아빠진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긴 했지만, 스스로 남을 곯려주거나 괴롭힌 적은 없는 순진무구한 이다.
특히 “양반은 속을 씻어야 된다.”는 말은 어느 성현군자의 말씀이나 경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훌륭한 경귀이다. 양반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마음에 평생 새겨두고 살아봄직한 말귀절이다.
몸의 때는 언제라도 쉽게 씻어버릴 수 있지만, 마음에 낀 때는 평생을 두고 씻어내도 다 씻어내기 어렵다. 석바우의 언행을 두고 정말 숙맥짓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모두 숙맥이 되는게 낫겠다.
이제는 안동사람을 일컬어 숙맥이란 말을 해도 그 말을 비난이 아니라 대단한 찬사로 새겨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