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뚝 서쪽마을, 자전거도 쉬어가네(글/백소애_편집기자)

사실 난 지독한 길치다. 안동의 길을 잘 아는 분이 골목 구석구석에 얽힌 사연과 내력, 그리고 애환을 담아내야 마땅하건만, 원고 청탁을 부탁드릴만한 분을 찾기 어려웠다는 핑계도 있지만 부러 내가 맡아보았다. 이참에 골목에 대해 알아보고 안동의 길도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공부’가 아니라 ‘감상’이 되어버렸다. 내가 둘러볼 골목 목록을 뽑아놓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나서기 일쑤여서 다른 일 때문에 나선 길, 후미진 골목에 섰다가 셔터를 눌러대곤 한다.


그날은 강변축제장무대에 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안흥동을 가로질러 오면서 시간이 멈춘 이 골목을 이번 호 골목기행으로 정했다.
안흥(安興)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다. 그저 난 안흥동과 운흥동을 항상 헷갈려 했다는 것뿐. 게다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안흥찐빵’이 생각나는 건 뭘까. 


안흥동은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마실 다녔던 개울은 지금 복개천이 되었고 안동시내의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가로지르는 기차소리가 허스키하게 들리는 곳, 사장뚝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것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사장뚝’이라는 명칭은 구한말시대 관가에서 관리들이 궁술을 연마하는 넓은 늪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제방을 막았기에 ‘사장뚝’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조 말엽 낙동강 제방을 더욱 튼튼하게 쌓은 이후에는 강이 범람하여도 물이 고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낙동강이 자주 넘쳤고 서문뚝 또는 사장이라 하여 여기저기에 둑이 있었다. 인가가 드물고 주로 논밭이거나 늪이 있었던 안흥동은 넓이가 10마지기 정도의 자연마을이고 모래 천방이 터져서 물이 넘어 늪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구무탕 또는 개변늪, 갱변늪이라고 하였다 한다.


안흥동은 행정구역상 서구동에 속한다. 서구동은 안흥동, 대석동, 옥야동, 광석동, 당북동, 법상동, 금곡동, 화성동 등 8개 동이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합쳐 인구가 약9천여 명으로 2만을 훌쩍 넘는 용상동과 옥동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도상으로 보면 시내 중심가에 뾰족이 위치해 서쪽으로는 태화동, 평화동이 남쪽으로는 강남동, 동쪽으로는 목성, 북문, 운흥, 천리 등을 포함한 중구동, 북쪽으로는 명륜동과 안기동에 둘러싸여 있다. 가까이엔 신시장과 구시장, 예전보다 학생수가 많이 줄어든 전교생 70여명의 영호초등학교도 있다.




막걸리 울타리, 농작물은 취하겄네
아침나절 사부작 빗자루로 쓴 것이 분명한 어느 집 입구에는 빈 막걸리 통으로 울타리를 쳐놨다.  파릇한 파의 주인이 있음을 알리는 것인데, 어르신네 술 취향이 소주가 아니길 얼마나 다행인가.
노상에는 윷놀이를 즐기는 할머니들이 있다. 돗자리 하나 펴놓고 제법 심각하게 윷말을 놓고 계신다. 셋이서 하는 윷놀이는 편먹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각개 전투할 수도 없을 터인데. 시멘트바닥에 엉덩이가 시릴 계절이 오면 한동안 보이지 않을 풍경이다.


길가에 고추는 영글게 익었고 한옥집 지붕에는 장독과 가스통과 화분이 세트로 나란히 있다. 또 어느집 지붕에는 석류가 발갛게 익었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려다가 전봇대 주위에서 레이스를 뜬 거미 때문에 흠칫 놀라고 만다. 손바닥만한 거미가 미동도 않은 채 걸려있는 있다.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서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낭만적인 골목길 상가 이름
언젠가 대구의 공구상가 인근을 지났을 때였다.비 오는 버스창밖으로 작은 술집들이 즐비해 있었다. 장미, 호박, 수선화, 제비, 로즈 등 예스런 이름의 술집 간판에 불이 켜졌다. 더러는 빈 점포이기도 했지만 비 오는 날의 옛 술집 이름은 어쩐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낭만을 안흥동에서 느껴본다. 양장점 이름은 ‘수연 양장’. 친구의 첫사랑 이름 같기도 한 수연 양장점 건너에는 천리고가의 응달진, 동네 어르신들의 만남의 광장이 나온다.


천리고가 아래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쉼터다. 그늘진 곳에서 여름을 나는 걸 몇 번 본적이 있다. 돗자리를 깔고 점에 십 원짜리 고스톱을 치거나 윷놀이를 하거나 바둑이며 장기를 둔다. 더러는 낮잠을 자기도 하고 더러는 막걸리 한잔이 오가기도 한다.
여름과 가을, 금 긋듯 계절이 달라지니 노인들은 실내로 들어가 버리고 남아 있는 헌 소파와 낡은 자전거만 천리고가 아래를 지키고 있다. 또 매트리스나 실내용 운동기구 등 주체 못할 대형 쓰레기들이 나와 있기도 하다.


겨울이면 노인들은 노인정에 모이거나 곗돈을 모아 월세 하나 얻어 모여서 놀곤 한다. 맘 맞는 이들 여럿이 뜨끈한 방에 모여 놀기에도 좋고 겨울나기에도 그만인 것이다. 
날씨가 흐려서일까, 할머니 한분이 저 멀리서 우산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마치 지팡이처럼 허리가 굽었는데 꽃분홍 우산에 왼손엔 작은 백 하나를 앙증맞게 들고 있다.


안흥동 골목엔 그 흔한 쓰레기 하나 날리지 않는다. 치킨이며 피자며 배달음식점의 광고전단지 하나 날리지 않는다. 눈 깜짝할 새 자전거를 도난당하고 잠금장치를 해놔도 안장까지 떼 가는 세상에 안흥동 골목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자전거 두 대. 야박한 인심조차 잠시 쉬어가도 좋을 골목길이다.




영호새싹길의 이름 없는 점방
영호초등학교 인근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길 이름 ‘영호새싹길’일대를 거닌다. 골목에는 면패드가 하나 널려 있다. 손주 녀석이 오줌을 싸서 애벌빨래도 없이 말리는 것일까 골목 입구에 척하니 널려 있다. 맞은편 간판 없는 구멍가게 앞을 지난다. 평상이  하나 있고 그 앞에는 자주빛 가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점방집 주인이 가꾸는 텃밭인가, 꽤 사람의 손을 탄 것처럼 야무지게 가꿔져 있다. 이름도 없는 구멍가게가 궁금해 안을 들여다보다 문을 두드리니 영 기척이 없다.


인근에서 고스톱을 치던 할머니들이 ‘그 할배, 귀가 잘 안 들려’한다. 다시 문으로 다가가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팡이가 있는 걸로 봐선 외출을 하지 않음이 분명한데도 기척이 없다. 단잠을 주무시나, 문을 몇 번 더 두드려보곤 돌아서 나온다. 실내에는 빈 박카스 통과 음료수 몇 병, 신라면과 종이컵, 파리채, 또 무엇인지 분간이 잘 안가는 물건들이 몇 개 있다.
마치 자신만의 공간인양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어느 깐깐한 할아버지가 자신만의 아지트를 꾸며놓은 것만 같았다. 문을 두드리고 얘기를 나누면 바로 1.4후퇴 얘기부터 궁금한 튀어나올 것처럼 사연 많은 할아버지가 살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다. 할아버지의 근황은 다음으로 미뤄놓는다.




느리게 가는 시간, 안흥동 골목길
목줄을 하지 않은 개를 데리고 아주머니가 길을 간다.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얼마 전 목줄을 하지 않은 개 때문에 훈계하다가 일어난 살인사건소식을 접한 터라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근처에서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옥을 개조한 어느 집 출입문 앞에는 주의사항을 예의바르게 안내하고 있다.
-사람이 다니는 출입문입니다. 주차하실 때 다닐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어느 누가 주차할 때 배려하지 않을까, 주인장의 마음씀씀이가 보이는 글이다. 그래서일까, 빽빽이 주차된 골목에는 이 집 앞에만 훤하게 비어있었다. 글에서도 느껴지는 차분한 말투, 맞춤법 하나 틀린 곳 없고, 컴퓨터로 깨끗하게 프린트한 것으로 보아 점잖은 성품의 40대~ 50대 남자가 기거하는 곳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부자동네에는 전봇대가 없다고 했던가. 도시 미관상 지하로 매설된다. 어느 네티즌이 우스갯소리로 ‘부자동네에는 전봇대가 없다...고로 노상방뇨도 없다’고 했다. 전봇대도 있고 노상방뇨도 있는 이곳 골목에는 실타래처럼 죽 늘어선 전선이 당연히 많다. 전봇대엔 그 흔한 ‘빈방 있음’등의 전단지조차 붙어있지 않다. 습기 먹은 담벼락은 세로로 죽 금이 가 있다. 담장 안 빈집은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있지만 나무는 푸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식물은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어느 집 지붕엔 콩이 널려 있고 어느 집 담장엔 감이 익어간다. 빨갛게 익은 고추밭 옆에 세워진 빨간 구형 자동차. 디자인 올림픽 포스터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말끔하게 하수관거 공사를 마친 골목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느껴진다. 왁자한 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 없어 그러한가, 외롭게 감만 매달려 있다.


귀가가 늦은 딸을 기다리는 엄마, 헤어지기 아쉬운 연인, 창문 아래 흐르던 FM방송, 어슬렁거리는 농염한 밤의 고양이까지. 골목 어귀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은 잊혀져간다. 하지만 아주 조금쯤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이곳, 자전거도 쉬어가는 이곳 안흥동에서는 아마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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