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우스 매컬럼의 안동에서 맞는 열번째 가을(글/김필녀_시인)
산과 들은 온통 가을빛으로 넘실된다.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며 고개를 떨구고, 집집마다 한 그루씩 심겨진 감나무의 감도 빨갛게 익어 길손들에게 잠시나마 어릴 적 고향에서의 가을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푸르기만 하던 나무들도 지난 봄, 여름동안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끝내고서 한 잎 두 잎 예쁜 색으로 물들이며 마지막 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긴 가뭄에도 가는 물줄기를 줄기차게 이어가는 도랑가 억새도 허옇게 머리 풀어 헤치며 갈바람에 살랑대고 있다. 길섶 언덕마다 보라색 쑥부쟁이와 하이얀 구절초가 청초하게 피어 바쁘게 사느라 계절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듯, 맑고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삼아 마음껏 뽐내고 있다.
가을은 산과 들에 펼쳐지는 황금물결과 단맛을 채우며 영글어 가는 과실들을 보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지난날들을 반성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풍요 속 빈곤이라고나 할까. 해 놓은 일없이 세월만 낭비한 것 같은 생각들이 더 많아서일까. 가을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더 쓸쓸해진다고 한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방황하기 이전에 내가 가진 작은 것에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멀리 여행하는 것만이 행복은 아닐 터. 안동에는 혼자 조용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천년고찰 봉정사나 길안 만휴정을 찾아 이런저런 생각이 잠기다가 목이 마르면, 곱게 단풍들어가는 길섶에 푹 주저앉아 보온병에 싸온 따스한 커피에 가을 햇살 한 줌, 갈바람 한 스푼 넣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한 잔 마시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안동대학교 원어민 강사 데리우스 매컬럼
이렇게 좋은 가을날 안동대학교를 찾았다. 가을빛과 달리 캠퍼스는 연둣빛 파릇파릇 새봄이다. 젊은이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는 곳마다 열정이 넘친다.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그 왁자한 활기에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계절에 상관하지 않고 청춘을 불사르던 그런 20대가 있었지’ 하며 대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동대학교 어학원에서 10년 동안 원어민강사를 하고 있는 데리우스 매컬럼(Darius McCallum, 60세)씨를 만나러 어학원으로 갔다. 10년 동안 영어를 배워도 서툰 한국사람 마냥 아직도 한국말이 쉽지 않다는 그를 위해 안동대학교 어학원 교육부장 임설원 씨가 기꺼이 통역을 맡아 주었다. 매컬럼의 연구실은 어학원 건물 5층에 있었다. 희끗한 머리의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겼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취재를 많이 했지만 항상 긴장이 된다. 혹여 나 한사람으로 인해 안동사람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매컬럼의 고향은 남호주 오클랜드와 뉴질랜드라고 했다. 어떻게 고향이 두 군데냐고 물었더니 “호주에서는 이중 국적을 가질 수 있다”는 대답을 했다.
“그럼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항상 두 군데를 다 이야기 하세요?”
“그때그때 상황을 봐서 대답을 해요.”
동향사람에게 유난히 살가운 한국 사람의 특성에 영향을 받았나, 그가 한국 사람 특유의 처세를 벌써 익힌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호주에서 대학을 나와 교사자격증을 딴 후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이민자들(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뉴질랜드에 한국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엔 참 많이 산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청주 사람이었어요. 영어 학원을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해서 1995년에 한국에 처음 와서 청주에 있는 학원에 근무했지요. 그 다음 멕시코에서 살다가 2000년부터 안동대학교 원어민 강사로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어요.”
적지 않는 나이지만 가족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기에 홀로 외국에 올 수 있었다.
“이혼을 해서 싱글입니다. 아이들은 다 컸고, 아버지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 다 돌아가시고, 5남 1녀중 제가 맏아들지요. 가족들과 전화통화는 자주 하고 있어요.”
형제들이 한국으로 여행을 온 적이 아직 없다고 한다. 대신 그가 1년에 한두 번씩 고향에 다녀온다고 한다. 적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업무와 취미생활, 친구들을 만나다보면 오히려 시간은 훌쩍 가기 마련이란다. 안동생활 10년이니 더 말해 무얼할까. 그에게서는 그 나이에 갖는 여유로움을 더해 생김도 크게 이국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청량산과 만휴정, 내 영혼을 맑게 합니다
안동대학교에서 원어민 강사를 모집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합격을 해서 맺어진 안동과의 인연이 벌써 10년째다. 오래 살았으니 그만큼 안가본데가 없다는데 그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은 산이다. 전국에 있는 웬만한 유명한 산은 다 가보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까이에 있는 청량산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청량산이 가장 마음에 들고요, 길안에 있는 만휴정도 조용해서 자주 찾아가요.”
옛날에는 안동과 봉화가 같은 동네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퇴계 이황 선생께서 청량산으로 공부를 하러 자주 다닌 것을 설명하니 그가 흥미롭게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매컬럼의 기억에 남는 또 다른 곳은 유명한 금강산과 울릉도다. 금강산은 그가 다녀본 우리나라 산 중에 최고였으며, 울릉도는 한국 땅이 아닌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안동에 오래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으세요?”
“안동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정말 친절해요. 작은 실수가 있어도 덮어주는 관대함을 가지고 많이 도와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대부분 성실하고 정직한 것이 참 마음에 들어요.”
그러면서 원래 매컬럼 씨 자신의 성격이 그다지 차분한 편이 아니었는데 안동사람들이 자신을 차분한 성격으로 만든 것 같다고 했다. 반면, 힘들었던 기억은 없었는지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힘들었던 기억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언어 때문에 조금 힘들 때가 있어요. 전화나 가전제품이 고장 나서 AS를 부를 때, 쇼핑할 때가 말이 통하지 않아 조금 힘들었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한다.
안동생활 10년차에 우리말이 서툰 그에게 한국말 배우기가 어렵냐고 묻자 그가 웃으면 대답한다.
“한국 사람들 모두 저한테 영어를 배우러 오기 때문에 한국말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한국말을 할 기회도 잘 없었어요. 책을 보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해 하지만 대화하는 것은 사실 좀 어려워요.”한다.
매컬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역시 영어책을 보면 대강 내용은 이해가 되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더듬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는 지금 안동대학교에서 교직원들과 원어민 강사를 위해 마련한 용상동 ‘게스트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 동료 원어민강사와는 자연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특히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음대교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또 어학원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데 그들 중에서도 친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홀로 이국생활에 외로움을 탈 것 이라 생각했지만, 여행을 즐기고 사람을 만나고 누구보다 활기차게 지내는 그다.
역시나 빠질 수 없는 안동음식 얘기를 했더니 좋아하는 음식은 대부분의 외국 사람들이 꼽은 바로 그 음식이다.
“안동찜닭을 특히 좋아해요. 안동음식 뿐 아니라 한국음식은 거의 다 좋아하지요. 그러니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세요.”
“그럼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이세요?”
“번데기는 한국의 음식 중에서 최악의 음식이에요.”
번데기가 떠오르는지 그가 징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호주에서 온 피리 부는 사나이, 매컬럼
시간이 날 때면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조용할 때마다 리코더 연주를 하는 것이 취미생활이라면 취미생활이다.
“호주에서는 리코더를 참 진지하게 다루면서 연주를 즐기는 분들이 많은데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음악시간에만 다루어서인지 리코더를 연주하는 분들이 없어요. 그리고 좀 유치하게들 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한다. 매컬럼 씨로부터 리코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화적 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안동의 거리나 아름다운 곳을 사진으로 담아서 외국의 친구들에게 많이 보내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다녀오는 고향에 갈 때면, 이젠 한국생활에 오래 젖어든 터라 또 고향이 하나 더 늘었는 느낌이란다. 그의 안동살이가 앞으로 계속 될 것인지를 물으니 안동이 자신을 원한다고 계속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 현재 한국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안동대학교에서 원할 때까지 근무하고 싶어요.”
현재 원어민 강사는 1년 단위로 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매컬럼 씨는 주로 안동대학교 1학년 학생들의 교양과목으로 담당하고 있고, 새벽시간과 저녁시간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다. 또 방학 때는 안동대학교 직원들을 상대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10년을 이어진 인연들이니 그도 시내 나가면 한두 명쯤은 인사를 나눌 ‘안동사람’이 다 되었을 법하다.
그는 원어민 강사 중에서도 베테랑에 속한다. 젊은 강사들과는 아무래도 세대 차이는 없는지 물으니, 별달리 세대차이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간혹 원어민 강사 중에 적응을 하지 못해 일찍 떠나는 이들도 있을텐데 그런 모습을 보면 그는 어떤 생각이 들까?
“직장생활도 그렇고 세상 살아가다보면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항상 같이 있기 마련인데 힘이 들어도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생활하다보면 적응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불어 살아가게 되지요. 그런데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부정적인 면에 치우쳐 생각을 하게 되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안타깝지요.”
맏형다운 그의 조언이다. 한국 생활 베테랑인 그가 이곳에서 적응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긍정의 힘이 크다고 강조한다.
사진작가의 꿈, 여전히 꾸고 있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유명한 사진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많은 이들을 만나왔지만 60의 나이에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면 주로 자신과 자식들의 건강 등을 밝혔는데 이렇게 정확히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사람은 처음인 듯하다. 꿈을 이룰 나이가 지나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는 여전히 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매컬럼 씨는 얼마전 안동의 사진을 찍어 미국에서 열리는 사진공모전에 출품을 해 최종심이 올라 있다는 자랑까지 했다. 그러면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작가는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꿈 또한 음악가나 사진작가였다. 꼭 직업으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취미로 행복한 그를 보며 그게 바로 꿈을 이룬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 나이 예순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잘 살았다, 혹은 후회가 더 많은 삶이었다.’ 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를 하는데 맥컬럼은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
“흥미롭게 살아왔지만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돌아보면 시간을 낭비하며 헛되게 보낸 것들이 아깝기도 하고 후회스러워요.”
자신의 인생길을 뒤돌아보면서 만족한 삶을 살아온 사람도 많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쉽고 후회스러운 날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삶의 과정보다는 결과물로 평가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인생은 남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논두렁에 빠진 차 트랙터로 꺼내주던 안동인심
10년차 안동생활에서 그가 가장 감동받았던 순간은 언젠가 시골길을 가다가 일어난 사고 때문이었다.
“안동사람들과 정이 쌓여 감동받은 일이 너무 많아 다 나열할 수 없지요. 예전에 시골길을 운전을 하고 가다가 승용차가 빠졌는데 마을 주민이 트랙터로 차를 꺼내 주었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있지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외국인이기에 혹시 취재진들에게 궁금한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안동지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았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안동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 물어보라 하니 그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발이 취소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종플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축제가 취소되었지만, 아쉬워하는 안동사람들도 많다고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그는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 참석 했다고 한다.
“해마다 축제 기간이면 축제장의 사진을 찍어 CD에 담아 국내외의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다들 좋아했거든요.”하며 아쉬워했다.
안동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안동찜닭을 좋아하고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취소된 것에 마음 아파하는 매컬럼 씨는 안동사람임이 분명한 것 같다. 안동을 사랑하는 매컬럼 씨가 오래오래 안동인으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