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소녀 손은화, 부산내기 다 됐네(글/백소애_편집기자)
“내가 어두침침한 곳에/몸을 두는 이유는/햇빛을 싫어해서가 아니다.//내가 목을 축이고/물줄을 끊은 이유는/살아갈 수 있는/힘이 없어서가 아니다.//나는 햇빛을 좋아했고/물을 마셨으며/그러기에 살아갈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은/매끄러운 독의 피부와/해맑은 어두움/그것만으로도/나는 살아갈 수 있다.//이젠 명주실 같은/삶의 조건이 없어도/태양 같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나는 나를 불태우고/어둠과 나를 조화시키어/꺼져가는 육체와/타오르는 나를 만든다.//나는 만 번의/겁을 통해 살아도/더러운 육체를/그리워하지 않는다.”
1998년 새해 <산골에서 유학 나온 문학소녀 손은화>로 ‘안동’지 표지를 장식했던 열아홉 은화의 육사백일장 시 부문 장원작 ‘된장’이다. 재기발랄했던 봉화 석포 출신의 이 여학생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했을까. 문학소녀의 지금이 궁금해진 우리는 그녀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산골소녀 손은화, 11년만의 만남
“일부러 부산까지 오신다고요?”
11년 전 안상학 시인이 고등어 한손 들고 봉화 넛재를 넘어 만났던 문학소녀 은화는 이제 부산내기가 다 되어 있었다. 봉화 석포의 어머니께 근황을 여쭈니, 그녀는 지금 부산에 있는 셋째 오빠 만호 씨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굳이 부산까지 올 이유가 있냐는 그녀의 만류에도 막무가내 시간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오전엔 치과예약이 되어있고 낮에도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무작정 쳐들어간 내 덕에 그녀의 점심 약속은 깨져버렸다. 혹 남자친구와의 주말 데이트가 아닌가 싶어 미안해하니 그건 아니란다.
부산터미널 1층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파리바게뜨 앞에 있겠노라고. 이곳저곳 상점 앞에서 부글부글 끓어대는 어묵꼬지들을 보노라니 제법 부산다웠다. 저만치 걸어오는 단발머리의 낯익은 얼굴, 사진으로밖에 본적이 없었지만 나는 크게 변하지 않은 그녀를 단박에 알아봤다. 내가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밀어 악수를 한건 얼마만일까, 마치 11년 전 봉화 넛재를 넘어 석포까지 갔었던 사람이 나였던 마냥 그녀와 부산에서의 만남은 무척 반가웠다.
부산터미널 인근은 허허벌판처럼 성그러웠다. 어디 갈만한 곳이 없었다. 우리는 육개장으로 점심을 하고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그녀와 나는 각자 만나기 전 ‘부산터미널 근처 맛집’을 검색해보았음을 고백했고 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는 것에도 의견일치를 보았다. 사실 부산엘 가도 만날 사람 하나 없어 좀 서글펐고 그녀와의 인터뷰가 끝난 뒤 홀로 예전부터 별러 왔던 보수동 헌책방 골목길을 거닐 것이라 맘먹었었다. 그녀에게 내 계획을 말하니 자신도 가본 적이 없다며 흔쾌히 함께 보수동에 가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답사하는 걸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지하철1호선을 타고 부산터미널 노포역에서 40여분 가면 자갈치역이 나온다. 자갈치역 3번 출구로 나와 국제시장에서 10여분간 걸으면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온다. 국제시장 입구에는 흡사 구시장 떡볶이 골목처럼 막 저녁장사를 준비하려는 포장마차들이 즐비해 있었다. 부산 국제시장은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여 만든 일명 ‘도떼기 시장’이라고 한다. 그런 이름에 걸맞게 온갖 골동품이며 해산물, 의류, 음식이 종류 불문, 좌판에 벌려져 있었다.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겨왔다.
우리는 쌀쌀한 바람을 뚫고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어섰는데, 그 좁은 구간에 가득 쌓인 헌책들을 보자니 겨우내 먹을 김장준비를 끝마친 엄마들이 느끼는 포만감이 밀려왔다. 우리는 ‘우리글방’ 안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시종일관 솔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퍽 마음에 들었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간직했던 문학에의 열정
은화 씨는 3남 3녀의 막내다. 부모님은 봉화 석포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 계신다. 부모님 건강을 물으니, 굳이 아픈 곳은 없지만 그 연세에 아플만한 곳은 또 아프다고 한다. 빠듯한 살림에도 부모님은 6남매 모두 외지로 유학시켰다. 맏이 규호 씨는 부모님 가까이에 살고 둘째 주호 씨는 서울에, 셋째 만호 씨와 장녀 은섬, 둘째 은숙 씨 그리고 막둥이 은화 씨까지 모두 부산에 산다.
1980년 12월 28일생, 우리 나이로 치면 꼭 서른이다. 11년 전 당시 경안여자정보고등학교에 다녔던 은화 씨는 육사백일장 장원을 받을 정도로 촉망받던 문학소녀였다. 입학 당시 장학금을 받으며 안동에서 자취를 시작한 이 야무진 소녀는 학교 졸업 후 3년간 봉화에 있었다. 첫 1년은 신일전기회사에서 경리업무를 봤고 이듬해부터는 (주)영풍이라는 회사의 부속실에서 일했었다. 그러다 부산의 경남전문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을 때가 24살 때였다. 남들보다 늦은 대학생활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졸업을 했고, 취업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 바람에 대학 전공과 관련 없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지금 3년째 근무하고 있다.
보통 육사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면 문학과 연을 끊지 않고 살텐데 그녀는 더 이상 문학에의 꿈을 꾸지 않는 것일까? 학창시절 백일장에서 제대로 물 먹어본 나로서는 그녀가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에이, 그거 가지고 지금까지 우려먹기에는 지식도 짧고 실력이 많이 부족하죠. 절 아껴주신 분들이 과대평가했어요. 그때 그냥 한때, 잘 써졌던 시기였나봐요. 학내 백일장에서 끄트머리 상 하나 받아서 나갔었는데 운 좋게 상 탄거죠.”
아직도 문학적 재능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녀. 삶의 깊이, 지식의 깊이가 있어야 되는데 자신은 뭐든지 얕은 사람이라 택도 없단다.
“된장이라는 시도 처음부터 끝까지 번쩍, 하고 떠올라 단번에 써내려 간 거지 무슨 문학적 재능이 있거나 한건 아니에요.”
은화 씨는 주위의 칭찬에 붕 떴던 여고생 흉내를 내고 있었으나 나는 그녀에게 그게 바로 재능이라고 말해주었다. 고3이 됐던 그해, 국어담당 조석옥 선생님이 많이 밀어주셨는데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지 못해서 지금도 무척 죄송하단다.
“아마 특기생으로 대학을 보내시려고 했던 걸로 기억해요. 몇 군데 알아봤는데 다 떨어지고 잘 안됐어요. 선생님은 열심히 밀어줬는데 잘 안돼서 너무 죄송했어요. 괜히 실력도 없는 절 좋게 평가해주시는 것만 같고 해서 면목 없었죠. 사실 그때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다면 어쩌면 갔을지도 몰라요. 등록금이야 집에서 어떻게든 마련했겠지요.”
스물의 어린 은화 씨는 어쨌건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론에 항상 도달했다. 딱 1년만 돈 벌어 학교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1년이 3년이 됐고 수능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4년제 대학 가기에도 어중간했고 등록금도 비쌌다. 게다가 졸업하면 스물여덟이 된다는 생각에 이건 아니다 싶어 전문대에 입학을 했다. 어쩐지 ‘약식’으로 보이는 게 싫어 야간이 아닌 주간으로 택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 후에는 자리를 잡고 편입하려고 했는데 자리를 못 잡아 편입도 안 되고 아르바이트를 계속 전전하게 됐다. 지금 하는 세무사 사무실 일은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안 된다고 한다.
“왜냐면 제가 배우면서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전 부기는 정말 엉망이거든요. 지금도 일을 썩 잘하는 건 아닌데 제 사수가 절 이끌고 그나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봉화, 안동 그리고 부산
사랑방에 관한 기억을 묻자 봉화 석포까지 힘들게 와서 눈 때문에 바로 나간 사연 때문에 기억하고 말고란다. 다음날 사랑방 사무실에 올라왔던 기억도 난다고.
“4층에 올라갔던 기억나요. 사무실이 어두웠지만 조용하고 차분했었고 또 한편으론 따뜻하고 편안했어요. 뭔가 그 오래된 느낌 있잖아요.”
당시 취재를 했던 안상학 시인에 대한 기억도 난다고 했다. 그녀는 부산의 어느 서점에서 안상학 시인의 시집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다고 한다. 시집 한권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온 부산 독자 은화 씨는 나중에 또 한권의 시집을 사 책장에 꽂아두었노라고 한다.
고등학교 3년간 안동에 있었다. 학교 다니느라 있었던 세월이 고작이지만, 그 기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이었다. 여태 봉화, 안동, 부산에서만 살아봤었다. 그녀에게 봉화와 안동 그리고 부산이라는 도시는 어떤 의미일까.
“봉화는 고향이자 마지막 보루. 이도저도 안되면 가야 되는 곳이죠. 안동은 내 청춘의 고장이이죠. 내가 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계기가 안동이었으면 좋겠어요. 중소도시 안동에서 항상 저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많은 생각을 품었었거든요. 또 어른이 되기 전까지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요. 성인이 된 후 온 큰 도시 부산은 항상 껍질을 깨고 나가야 하는 도시인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서울에 친구들을 만나면 서울이랑은 달라요. 부산은 그래도 촌 느낌이 나는 도신데 서울은 사막바람이 부는 도시 같더라구요.”
명절이나 휴가 때 봉화에 가면 당시 사글세 70만원에 물세, 오물세도 반으로 나눠 냈던 친구, 고교시절 룸메이트 희숙이를 꼭 만난다. 서울에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온 친구는 지금 농협에 다닌다고 한다. 은화 씨의 집은 봉화군에서도 차를 타고 2시간은 더 들어 가야하는 석포면 석포리다. 부산에서 한번 다녀가면 여간 큰 일이 아니다. 이러저러해도 모든 생각의 끝은 부모님과 고향이다. 부모님은 은화 씨의 마지막 보루다. 자주 못 보지만 그래서 애틋함이 덜하진 않다. 엄마 아빠한테 참 잘하고 싶은데 이래저래 돈 없고 시간 없고 버벅거리다 보니 세월만 훌쩍훌쩍 잘도 간단다. 어쩌다 한 번씩 집에 가서 엄마 채취를 맡으면 일상에 다시 적응하는 게 힘든 막둥이 은화 씨. 바로 위에 언니랑은 11살 차이가 난다. 큰언니 이름이 은섬, 이름이 무척 예쁘다고 하니 언니 자신도 그게 자랑거리란다.
“얼굴도 예뻐요. 그렇게 써주세요. 또 둘 다 되게 말랐고 뼈밖에 없어요. 그냥 그렇게 써주세요. 그런데.......과연 그럴까요?”
나는 함께 있는 내내 그녀의 유머를 무척 좋아했다. 큰언니 시댁은 봉화. 작은언니는 삼천포. 부산에살면서 시댁은 어찌 타 지역이냐 물으니 “부산 사는 남자가 부산 여자 만나 결혼할 줄 알았더니 봉화여자인거랑 같죠, 뭐.”한다.
보통 퇴근해서는 큰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자주 간다. 큰언니네 집에서 맛난 밥 공짜로 먹고. 막내의 특권인 투정을 실컷 부리다 돌아온다고 한다. 부산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은 언니들과 오빠, 조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없고 가족들과 함께 있었던 점이 방황하는 20대에는 딴 생각 안 들고 가장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녀다. 언니들과 오빠 모두 만덕에 가까이 위치해 산다. 조카는 모두 9명. 제일 큰 조카가 올해 스물 셋이다.
가장 행복했던 때?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태 살아오면서 돌이켜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였을까? 학창 시절을 짐작해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고등학생 때는 자취를 했잖아요. 사실 고1이 밥이랑 반찬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부모님이 밭일 하시면 저녁 준비한 적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살림한다는 그 자체가 좀 스트레스였어요. 또 대학시절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힘들었고요, 보면 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힘들지 않았던 때가 없었죠 뭐. 그래서 전 항상 지금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나의 가장 대표작은 ‘다음 작품’이라고 말하는 영화배우보다도 더 멋진 말을 하는 은화 씨다. 지나고 나니 별로 힘들 것도 아니었는데 부산에 처음 왔던 그때와 스물여섯 졸업 후 취업이 안됐던 시절은 그녀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당시엔 참 막막했어요. 그래서 전 뭐든 제때제때 그 나이 때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시기를 놓치면 한 번씩 늦어지고 늦춰지니 꼭 돌아가게 돼요.”
그렇다면 지금은 결혼 시기, 부모님 생각하면 결혼을 ‘해주고’싶지만 뜻대로 안된단다. 아버지가 내후년이면 칠순. 친구처럼 편한 사이의 멋진 남자가 있다면 결혼할 마음도 있다고 한다.
“스물에는 운명적인 사랑도 꿈꾸었는데요. 웬걸, 남자는 구경하기도 힘들어요. 제가 새벽길을 좋아하고 새벽기차를 좋아해서인가, 어디 남자 없는 데로만 골라서 다니나 봐요.”
나이는 먹는데 그녀말로 자신은 지금 3무(無) 상태라고 한다. 돈 없고, 남자 없고, 직업도 없고. 마지막 직업에서는 다니는 곳은 있는데 직업의식, 프로의식이 없는 것을 말한단다. 요즘 그녀가 가장 바라는 점은 ‘민폐 캐릭터’에서 탈출하는 것. 내내 언니와 오빠 집에 얹혀살다보니 이제 슬슬 따로 집을 얻어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일단 전세라도 마련해야겠는데 부산 집값이 너무 비싸고 늦게 시작해야 그런지 돈도 잘 안모여 걱정이란다.
11년 전 인터뷰에서 은화 씨는 농부도 되고 싶고 환경미화원도 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저 사실 지금도 새벽길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새벽에는 사람이 감성적이 되잖아요. 그런데 환경미화원은 경쟁이 세서 구청에 줄을 섰다라구요. 젊은 애들도 안받아주고, 쉽지가 않아요. 농부는 제가 근력이 없어서 안 되고요.”
이제 제법 부산내기가 된 그녀는 혼자 다니는 건 좋아하는데 혼자 있는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겠다고 말한다.
“위험한 거 같아요. 속 시끄럽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혼자 떠나고 싶기도 하지만, 이 도심에서 홀로 길가의 상점을 거닐면서 위로를 받아요. 콘크리트 바닥을 참 싫어하는데 이 콘크리트에서 위로를 받고 번쩍이는 네온사인 싫어하는데 그 불빛에 어느새 위로 받으면서 살고 있더라구요. 전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는 한편 항상 자기 위치를 부정해요.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새벽의 네온사인을 보며, 저 사람도 돈 벌려고 저렇게 사는 거지만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닐 것인데, 그런 생각하며 이곳 한 바퀴 거닐면 현실적으로 돌아와요.”
서른, 새로운 시작
어느덧 서른.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그대로 된 것 하나 없다고 앞으로도 지레 생각지 않는다는 그녀.
“전 사실 무계획 속에 살고 있어요. 내가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된 거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솔직히 뭘 계획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좀 멍한 상태예요. 이렇게 멍한 시기에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20대 초반에 했던 거창한 계획은 돈 벌어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거였다. 원래 계획은 1년만 일하고 학교에 갈려고 했는데 그게 또 틀어졌고 전공을 살리려고 했는데 못 살렸다고 한다. 하지만 1년 만에 안 된 일은 3년 만에 해냈고 전공은 앞으로도 살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못 찾는 거야, 사람이 일평생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를 수도 있고 그러니 또 그게 사람이지 싶은 생각도 들곤 한다.
여기 체력이 안 되서 환경미화원이 못되고 근력이 없어 농부가 못되고 재능이 없어 시인이 못되는 서른 먹은 여자가 있다. 부기는 못하면서 세무사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말이다. 꿈을 꾸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그녀에게 꿈을 꾸면 돈이 따라온다는 ‘무릎팍 도사’같은 답변은 진부한 것일까.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직은 앳된 그녀의 모습에서 현실과 실용이란 말이 꼭 붙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고등학교 문예반 담당 조석옥 선생님이 “은화의 시는 신산한 삶의 체험이 녹아있어서 진실성이 있으며 사물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다”고 촌평했었다.
나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본질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반나절 함께 보낸 은화 씨는 문학과의 인연이 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스산함과 불안한 서른의 기로에 선 은화 씨가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지나치지 말고 불면의 밤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쩐지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밥을 먹는 순간에도 부산에 있는 친구를 만난 마냥 즐거웠다.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으니 우리는 국제시장 삼겹살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부산에서 안동까지의 마지막 버스 시간 7시 30분, 장거리 버스 타기를 앞두고 음주라니, 평소엔 생각지도 못할 일을 저질러버렸다. 주량을 묻자 ‘세어본 적이 없다’는 그녀와 대적하여 깔끔하게 반주로 소주 2병을 비운 것이다. 출발시간 2분전에 간신히 터미널에 도착해 안동으로 향했다.
주말 저녁임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속삭이는 연인, 작별인사를 하는 아주머니, 통화중인 아저씨, 그리고 소주 마신 여자. MP3에 10곡의 노래가 채 돌아가기 전에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부산의 달은 차창 밖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안동까지 따라왔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