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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간의 유럽일주_ 파리1(글/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서 조금 넣어온 쌀과 인스턴트 국거리로 간단히 밥과 국을 끓여 아침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간단한 조리를 위해 가져온 전기냄비는 여행 내내 무척 요긴하게 쓰인 물건이다. 냄비와 히터 부분이 분리되어 있는 이 일본 제품은 가열을 위한 히터를 제일 큰 냄비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어서 작은 부피로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다. 어디서나 전기만 있으면 라면 등을 끓일 수 있고 밥도 금방 할 수 있다. 밥이 매우 빨리 되므로 밥을 덜어내고 국을 끓여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파리의 볼거리는 몇 군데로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루부르 박물관을 비롯하여 노뜨르담 대성당, 오르세 미술관 등 대부분이 시내 중심부의 세느 강변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사흘 밤을 자니까 파리에서 머무는 기간이 3박 4일이나 되지만 이미 어제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으니 하루가 지나갔고 떠나는 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테니 실제로 파리를 돌아볼 시간은 오늘과 내일 이틀뿐이다. 그래서 이미 계획된 대로 오늘은 루부르를 비롯한 몇 군데의 미술관과 노뜨르담 대성당 등의 주변지역을 돌아보고 내일은 오전에 베르사이유를 돌아본 후 다시 파리 시내로 들어와서 어제 보지 못한 곳을 여기저기 다녀보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파리를 둘러보는 것은 중요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샹제리제 거리를 걸어보며 노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여유를 누리는 것은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들 사이를 이동하면서 혹시 시간이 나면 해볼 만한 것이겠지만 일부러 그런 한가로운 시간을 만들기는 어렵겠지. 우리의 파리 구경도 그렇게 될 것이다.

루부르로 가는 길

길을 나서기 전에 우선 지도를 꺼내서 투숙 호텔의 위치와 루부르 박물관의 위치를 확인하고 거리를 계산하여 걸어갈 만한 곳인지 아니면 자동차를 이용해야할지 결정해야 한다. 여행지에서 지도는 반드시 휴대해야하는 첫 번째 물건이다.

호텔에 들면 먼저 호텔에서 제공하는 지도를 받아 두는 것이 좋다. 어느 호텔이든 지도를 비치해 놓고 투숙객들에게 서비스한다. 호텔 직원들이 지도를 내줄 땐 항상 볼펜으로 호텔의 위치를 표시하고 그 곳에서 가볼만한 곳을 체크하여 알려준다. 호텔에서 무심코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잃기 쉽다. 이번 여행에서도 몇 번 호텔을 찾아 헤맨 적이 있다. 그럴 때 호텔에서 준 지도는 여간 요긴한 게 아니다.

우리가 준비해 간 파리 지도는 렌트카 업체에서 제작하여 자기 회사를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한국사람을 위한 파리 가이드’라는 이름의 파리지도를 비롯해서 여행 안내책자에 첨부된 것이랑 몇 가지가 있었는데 렌트카 업체에서 준 지도가 비교적 사용하기가 편리하였다. 이는 아주 정교한 지도는 아니지만 중요한 관광지의 지명이나 건물 등을 한글로 표기하였고 한국식당도 표기하여 한국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또 파리 관광을 위한 몇 개의 코스를 만들어 제시해주거나 효과적인 이용 시간, 파리에서 전화 거는 법 등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세심한 배려도 보인다. 다만 종이 질이 나빠서 몇 번 접었다 폈다 하면 접힌 곳이 금방 찢어진다.

위의 지도가 괜찮아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좀 미덥지 못해서 시내로 나가다가 신문잡지를 판매하는 박스형 매점에서 다른 지도를 하나 더 구입했다. 그것은 수첩형으로 생긴 작은 지도인데 맨 앞에 파리 전도를 싣고 각 구역을 나누고 번호로 표기하였다. 그 번호에 해당하는 페이지를 펴보면 작은 골목까지 자세하게 나오는 세부 지도가 있으며 지도에는 중요 관광지와 식당 상점 서점 등도 표기되어 있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이 외에도 이제부터 여행을 시작할 유럽지도가 필요한데 유럽 전체보다 각 국가별로 구입하기로 했다.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것이 미쉐린에서 나온 지도이다. 이 지도는 전부 펼치면 웬만한 벽면을 가득 메울 만큼 크다. 따라서 아주 작은 지방도로까지 모두 나오며 이 지도 한 장이면 네비게이터 없이도 자동차 여행을 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은 정도이다.

지도를 보니 숙소에서 루브르 박물관까지의 직선거리가 2.6킬로미터였다. 그러면 골목을 여기저기 돌아가도 4킬로미터가 되지 않을 터이니 걸어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손에 집에서 가지고 온 유적 조사 때 사용하는 가민(garmin)사의 지피에스(GPS)를 들고 대충 콩코르드 광장 방향을 향해서 길을 나섰다. 가민제 지피에스에는 최신 유럽 지도를 넣어 왔기 때문에 자동차 네비게이션도 가능하고 들고 다니면서 길을 찾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다만 자동차에서는 화면이 작고 목소리 안내가 안 되어 사용이 어려웠다.

걸어서 파리 시내 골목길을 다니는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처음 보는 육중한 돌집들이 촘촘하게 붙어서 있고 길바닥도 몽땅 화강석이 박혀 있으니 파리의 골목은 온통 돌로 에워싸인 모습이었다. 큰 길을 위주로 방향을 잡아 걸으니 약간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는 도중에는 ‘갸르 생라자르’라고 하는 파리 북쪽의 기차역이 있었다. 1837년에 지은 파리의 첫 기차역이다. 이 역을 출발한 기차는 노르망디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인상파 화가 모네가 그린 화통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생라자르역을 출발하는 기차 그림이 있는데 지금 세느강변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네는 새로운 근대기술의 상징으로 등장한 생라자르 역을 그림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예술가의 삶과 시대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콩코르드 광장으로 가는 길가에는 생오귀스탱 교회와 마들렌 교회 같은 이름난 교회를 볼 수도 있다. 마들렌 교회는 직사각형의 건물을 코린트식 기둥들이 에워싸고 있는 로마의 신전 형태를 띠고 있는 유럽 교회로서는 매우 특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그의 군대를 기념하기 위해 신전 같은 건축물을 짓도록 했다고 하니 이해가 갈만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부르봉 왕조가 다시 권력을 쥐고 나서 이 건물은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려고 엄청난 건물을 짓고 기념물을 세우는 일 따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는 21세기에 사는 우리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이 보는 일인가?

마들렌 교회 앞에서 어느 골목으로 가야할지 좀 망설였으나 대충 남쪽으로 가면 세느강이 나오도록 되어 있어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갔다. 얼마 안있어 멀리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오벨리스크는 사각추 모양의 꼭대기가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있고 좌대라고 기단부에 해당하는 받침대에 쓴 글씨도 황금색으로 되어 있었다. 본래 이 오벨리스크가 있던 자리는 로베스 피에르나 루이16세, 마리 앙투와네트 등이 처형된 단두대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 혁명광장으로 불렸는데 1829년에 이집트에서 기증해준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화합의 의미를 가진 콩코르드로 이름을 지어 지금까지 이른다고 한다.

단두대 자리에 놓인 오벨리스크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서서 보고 있는 가운데 이 넓은 광장 한 복판에 시퍼런 칼이 달린 단두대가 세워지고 거기에 왕과 왕비를 묶어 목을 잘랐던 당시의 광경을 그려보면 당시에 파리 시내에 서려있던 혁명의 광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수많은 자동차들로 내 한몸 보전하기도 어렵고 길거리는 지저분해서 세계 제일의 광장으로 프랑스 사람들의 긍지를 심어준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광장 한쪽에 하늘 위로 치솟은 오벨리스크가 있다.

광장에서 동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면 거기서부터 튈르리 정원이 시작되고 정원의 끝에 카루젤 개선문이 서 있다. 그 문을 지나면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 나온다. 틸르리 정원은 1563년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명으로 세워진 튈르리 궁전에 딸린 이태리식 정원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비는 이탈리아의 명문 메디치 집안 출신으로 삼촌인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중매로 프랑스 오를레앙 공인 앙리와 결혼했다. 앙리는 1547년 아버지 프랑수아 1세를 뒤이어 프랑스 왕이 되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 중 세명이 왕위에 올랐으니 카트린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으리란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카트린은 튈르리 궁전을 짓고 그 정원을 이탈리아 식으로 꾸몄다. 지금도 정원에는 아름다운 분수와 조각상들이 마로니에 숲 사이에 서 있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튈르리 궁전은 1871년 파리 코뮌(프랑스 민중들의 봉기로 세워진 사회주의 자치정부) 당시 불타고 없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지금 정원은 그 모든 역사를 시간 속에 흘려보내고 그저 평화로운 파리 시민들의 휴식처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정원의 끝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 루부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앞에는 사진으로 보아 익숙해진 유리로 된 루부르 피라미드가 있었다. 이 고색창연한 유적지에 이런 엉뚱한 건물을 지어놓고 자랑해대는 프랑스 사람들이 이해가 잘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프랑스 문화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현대 미술을 보는 눈이 부족한가, 내 눈에는 루부르 박물관 입구의 햄버거 가게처럼 보이는 것은 웬 일인지. 지나간 역사 속에 20세기의 기념물을 만들어 현대인의 존재감을 미래의 그 땅에 올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인가?

루부르에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매표소는 여러 군데 있다고 하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 피라미드 지하라고 해서 그리로 들어갔다. 지하에는 생각지 못했던 넓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둘레에 매표소가 있었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표를 사야하는데 내가 사려고 하는 파리 박물관 패스는 일반 매표소에서는 팔지 않는다고 했다. 매표소 앞에 뭔가 잔뜩 서있는 것이 있어보니 파리 박물관 패스를 파는 곳을 화살표로 표시해놓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찾아가기에는 길이 너무 복잡하다. 몇 번을 물어서 박물관 패스를 파는 기념품 판매장을 찾았다. 박물관 패스란 파리에 있는 여러 박물관을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다.

파리에는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박물관이나 미술관만 해도 수 십 군데이다. 이 들 중 몇 군데만 골라 본다고 해도 시간과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 그러므로 특별히 관심이 있는 주제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미리 정해두어야 하며 루부르 박물관처럼 대규모의 것은 짧은 시간에 전체를 돌아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싶은 그림이나 유물을 골라보거나 아니면 루부르가 이렇구나 하고 인상만 머리에 담아올 수밖에 없다. 또 박물관 입장료도 싼 것이 5~6유로, 비싼 것은 10~15유로 정도이니 1유로에 1800원만 계산해도 두 사람 치를 생각하면 그리 만만한 돈이 아니다. 그래서 파리에서는 파리 박물관 패스라는 것을 구입하기로 했다. 이 박물관 패스는 파리 시내의 거의 모든 박물관이나 기념관 들을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 카드이다. 카드는 2일, 4일, 6일짜리가 있는데 값은 이틀짜리가 32유로이고 나흘이 48유로 엿새는 64유로이다. 살 때는 좀 비싼 느낌이 있지만 베르모든유 입장 한 곳이 15유로이고 루부르 박물관이 9유로, 노뜨르담 대성당 8유로, 오르세 미술관 6유로이니 이것만 해도 38 유로이니 본전은 금방 빠진다. 물론 이틀간 이 밖에도 돈 내고 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 패스를 구입하면 입장료만 절약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루부르 박물관이나 베르사이유 궁전 같은 곳은 입장권을 구입하는데 길게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므로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패스가 있으면 그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까다로운 보안검색을 거쳐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나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에 질려버렸다. 여기서 미술품을 감상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양미술들도 젊었을 때 나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때가 있었는지라 관심이 가는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입구부터 이 많은 사람들과 어마어마하게 크고 높은 건물벽들이 들어가는 사람 기를 죽이는 상황에서 나는 보기도 전에 피로가 몰려왔다. 유럽의 박물관들은 대체로 궁전 건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안에 소장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뿐 아니라 과거 왕조시대의 영광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화려하고 위엄이 가득한 건축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야 눈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건축도 세계미술사상 몇 손가락에 꼽히는 역사적인 예술작품도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는 쉽지 않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갖는 잘못된 선입감인가?

우리는 인파에 밀려 주어진 동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복도 한쪽에는 ‘모나리자’나 ‘미로 섬의 비너스’ 등 중학교 미술책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의 이름과 화살표가 그려진 안내판들이 서 있다. 바쁜데 그런 거나 대충보고 나가 달라는 뜻인가, 아니면 ‘당신 그거 보러 왔잖아~. 이것만 따라가면 돼~’하고 베푸는 친절인가 알기 어렵다. 이런 저런 통로를 따라다니며 박물관 안에서 몇 시간을 헤맸는지. 어쨌든 보기는 여러 가지로 많이 보았다. 그 유명한 모나리자 초상화며, 나폴레옹 대관식 기록화며, 이집트에서 약탈해 온 스핑크스며, 이제 그것들이 일일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루부르 박물관을 관람하게 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실에서 수집해 보관해오던 미술품들은 왕실 소유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향유하게 된 국가의 문화적 재산이 될 수 있었다. 이는 곧 유럽의 시민사회가 시작되면서 부터이니 우리가 그것들을 이렇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절대 왕정과 싸워 시민혁명을 이루어낸 프랑스 시민계급의 덕분이다. 그 이후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식민지로부터 많은 문화재가 약탈되고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건물 속으로 옮겨져 지금 박물관 한 쪽을 차지하게 된 왜곡된 역사도 보여주지만 루부르는 루부르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 인파들이 각각의 작품 앞에서 팔장을 끼고, 또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모습은 지금 내가 감동을 받고 있음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여기 와서 잘 모르지만 감동을 받고 가야 본전을 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진짜 감동은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루부르를 나왔다. 시간은 12시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사람들과 밀려다니느라 그런지 배가 고팠다. 튀를리 정원의 매점에서 빵과 콜라를 사서 벤치에 앉아 허기를 때웠다. 그래도 파리의 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있노라니 좀 한가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우리 세느강 옆 공원에 앉아 점심을 먹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다리를 좀 쉰 후 다시 온 길을 되걸었다. 튀를리 정원으로 들어오던 입구쪽 강변에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고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지금 독일에 있는 안상준 교수가 특별히 추천한 곳이다. 이 미술관은 아주 독특한 곳이다. 지상 1층과 지하1층으로 되어 있는 미술관 건물은 지상에는 모네의 수련 연작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에는 1900년대 초기의 유명한 미술상 폴 기욤의 관련자료 전시실과 실업가 장 모르테르의 개인 소장품과 세잔, 르누아르, 마티스, 모딜리아니, 피카소, 드랭 등 인상파에서 1930년대의 외국작가들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1층의 모네 수련이 전시된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들어가자마자 그 특이한 전시실로 인해 입을 다물지 못한다. 문을 들어가면 문의 정면은 막혀 있고 가림벽으로 막혀 있고 가림벽의 좌우통로를 통해서 방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방안으로 들어가면 방은 마치 계간처럼 긴 타원형 모양을 하였는데 천장은 자연광이 부드러운 우윳빛 유리를 투과하여 방안에 은은한 채광을 하는데 흰 구름 위에서 햇볕이 비치는 듯하다. 그리고 그 길고 둥근 벽면에 모네의 수련이 붙어 있는데 그것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벽 자체였다. 수련 작품은 단 네 점 뿐. 사면 벽이 없이 건물 밖의 연못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듯 했다. 솔직히 모네의 수련이 이렇게 크고 긴 작품이 있는지는 여태껏 들은 적이 없다. 그림은 긴 캔버스 만으로도 경이적이었다. 이런 방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어 두 전시실에 걸린 작품은 모두 여덟 점이다.

1918년 11월 11일, 이날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이틀 뒤이다. 그때 모네는 프랑스의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가 평소 즐겨 그리던 수련 연작을 대형으로 제작하여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당시 모네의 나이는 78세, 즉 그는 80세 이후 이 거대한 수련 연작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는 그가 기증하는 조건으로 이 그림들을 자연광이 들어오는 전시실에 전시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는 본래 튈르리 정원에 있던 오렌지 온실(오랑주리의 말 뜻이다)을 미술관으로 개조해서 모네의 요구대로 천장에서 햇볕이 들어오도록 전시실을 꾸미고 작품을 걸었다. 이 작품들은 모네가 죽은 다음 해인 1927년에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작품의 크기는 무려 높이 2미터, 길이 8에서 16미터이다. 여덟 점의 그림을 이어 붙이면 모두 100미터에 가깝다. 이러한 대작을 80 넘은 노 화가가 그렸다니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또 그의 수련 작품에 대한 사랑은 수련이 피어있는 연못에 언제나 자연의 햇볕이 내려오도록 하였으니 이 또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미술관에 앞에서 말한 기욤과 바르테르의 소장품이 들어오면서 천장이 가려졌다고 하는데 2000년부터 모네의 정신을 살려 새롭게 설계하고 6년에 걸친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06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모네가 이 그림을 완성하는데 6년이 걸렸다는데 리모델링에 6년이 걸린 것은 그것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지. 앙드레 마송이란 화가가 이 오랑주리 미술관을 ‘인상주의 미술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했다는데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가본 사람 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건물 지하층의 한쪽에는 공사 중 발견된 파리의 성벽이 발굴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미술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 미술관이 서 있는 곳은 튈르리 정원과 세느강의 경계선을 이루는 높은 토성처럼 보이는 언덕인데 여기 와 보니 그것이 바로 파리의 성벽이었던 셈이다.

미라보 다리 밑으로 세느강은 흐르고

오랑주리를 나와 세느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사진보다는 넓게 보였다. 오후의 태양이 머리위에서 내리쪼이는데 강 건너로는 파리 명물 오르세 미술관이 보였고 강 위로는 커다란 관광용 유람선들이 떠다녔다.

‘미라보 다리 밑으로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아폴리네르의 이 유명한 시는 화가 마리 로랑생과의 슬픈 이별 후 쓰여진 비련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아무튼 학생시절 이 싯귀 한두 번 흥얼거리지 않은 사람 없을만큼 우리에게도 이시는 넘나 친숙하며 아마 우리의 머리에 그려진 세느강은 이 싯귀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겠지.

세느강은 밤에 봐야 한다는데. 대학 일학년 때 늘상 다니던 학교 앞 개천이 생각났다. 제기동을 지나는 그게 아마 중랑천이지 싶은데. 개천가에는 판자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판자집들에서 쏟아낸 오물이 그대로 개천으로 흘러 낮에 보는 개천에는 똥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녔다. 판자집들은 주로 막걸리 장사를 했었는데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열심히 데리고 다니면서 막걸리를 퍼 먹였다. 밤중에 술이 거나해서 밖으로 나오면 썩은 개천물에 붉고 푸른 술집의 등불이 어른거렸는데 선배들은 그 개천을 세느강으로 불렀다. ‘야 너희들 세느강 가 봤어?’ ‘안가봤는데요.’ ‘임마 세느강도 가보면 이런 똥물이야. 조명불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는거지. 여기나 거기나 같아 임마.’ 그래서 학교 주변의 모든 개천은 세느강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물론 그 선배들 중에서 진짜 세느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접 내려다 본 세느강은 그때 그 선배들 말대로 안암동 개천들처럼 더럽진 않았지만 이름처럼 아름다운 강물도 아니었다. 세느강은 이미 오래전부터 돌 축대로 강안이 정비되고 그래서 지금은 시멘트도 더 바를 필요가 없이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인공하천이 되고 말았다. 다만 강위에 걸린 다리들이 그런대로 수백 년의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고 그 양쪽으로 도열한 웅장한 석조건물들이 왕조시대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의 청계천도 기왕이면 옛 다리라도 제대로 복원이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세느강 위에는 수 없이 많은 다리들이 걸려 있다. 방금 말한 미라보 다리를 비롯해서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로 유명한 퐁네프, 다이애너 왕세자비가 죽은 알마 다리,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그뤼넬 다리 등 이름난 것만 말하기도 힘에 겹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바로 솔페리노 다리를 건너면 쉽게 오르세 미술관으로 갈 수 있는데 강변길을 걷다보니 루부르쪽으로 너무 올라와 버렸다. 루부르 앞에 있는 로얄 다리를 건너 오르세 미술관으로 다시 내려갔다.

오르세 미술관이야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때 철도역 겸 호텔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된 이 건물은 1939년에 철도역의 기능을 잃고 영업이 중단되었다. 그 후 1970년대에 이르러서 다시 미술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이 되고 1986년에 현대적 미술관으로 리모델링되어 개관 되었다. 프랑스의 인상파 그림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들려야할 정도로 오르세에는 인상파 작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미술관 내부는 기차역 플랫폼을 연결해주는 육교를 건너다니듯이 중심의 긴 전시 공간 양쪽을 계단으로 옮겨 다녀야 한다. 육교 위에 올라서면 미술관 소개책자에서 친숙하게 보아온 조각 전시장이 내려다보이고 이층 양쪽으로는 작은 전시 공간들이 길게 늘어서서 각각의 칸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작가별로 감상하게 하였다. 천정으로는 자연광을 분산시켜 조명이 되도록 하여 언제나 자연광 속에서 인상파의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관 구경은 다리가 너무 아프다. 물론 허리도 아프다. 그런데 볼 것은 많이 남아 있어 한군데 앉아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그래서 대충 대충 보고 나와 잠시 앉았다가 또 걸어야 한다. 구경도 젊었을 때 해야 열심히 할 수 있고, 건강 뿐 아니라 본 것이 지적 재산이 되어 여기 저기 써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젊을 때는 밥벌이에 외국 나가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다가 이제 겨우 약간의 여유가 생겨 이곳저곳 다녀보니 힘이 너무 딸린다. 본래 파리 구경은 이번 회로 끝을 내려 했는데 쓰다 보니 이틀의 반의 반 밖에 쓰지 못했다. 그래도 이쯤 하고 이번에 못쓴 파리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기로 한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