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공학에 푹 빠진 청년, 재중동포 한장수(글/김필녀_시인)
댕그라니 한 장 남은 달력이 더욱 외롭게 느껴지는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늘 이맘때쯤이면 마음만 바쁘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을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한 해가 훌쩍 지나가고, 아무런 일도 이루어 놓은 일 없이 나이만 들어간다는 현실 앞에 빈 가슴을 쓸어내리기 일쑤다.
형형색색으로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추리를 쳐다보며 가슴 설레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지, 캐롤송을 따라 부르며 들뜬 마음을 더욱 밖으로 표출하기 위해 친구들과 손에 손 잡고 거리를 쏘다니며 깔깔대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만큼 내 삶이 바빴는지, 아니면 그런 낭만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월에 쫓기며 살았는지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나이가 든 사람들은 나이가 든 만큼의 회한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길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내심 위안을 해본다.
그래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 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세월이 빨리 간다고 해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하며 하얀 입김으로 언 손을 녹여가며 일분일초라도 아껴 써볼 요량으로 동동걸음을 쳐본다.
이번 호에는 중국에서 유학을 온 젊은이 이야기를 싣기로 하고 편집기자와 함께 승용차 대신 오랜만에 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동대학교로 향했다. 뽀얗게 입김이 서린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을 뒤로하면서 안동 시내를 벗어나자 몇 번을 지나다녔는데도 아직 낯설기만 한, 새로 난 선어대의 쭉 뻗은 길과 친해지려고 눈인사를 건네기 바쁜데 이내 안동대학교 정문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동생활 5년, 공학도 한장수
한국으로 유학 온지 5년이 된 한장수(25) 씨는 안동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공학도다. 약속장소인 공대 연구실로 들어가자 온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들과 함께 잘생긴 청년 한장수 씨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아주었다. 몇 개의 컴퓨터가 켜져 있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벽면을 가득 채운 기계음에 익숙해지기 위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일상적인 인사부터 건네기 시작했다.
“고향은 어디세요?”
“네 길림성 연길시입니다.”
“아! 우리 동포군요?”
“네, 재중동포 4세이지요.”
그렇다. 한장수 씨는 처음 인사를 건넬 때부터 억양만 조금 달랐을 뿐 우리말이 무척 유창했다. 어려서 집에서는 한국말을 쓰고, 학교나 밖에 나가서는 중국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말이 유창할 수밖에 없다. 한국말이 유창하기 때문에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언어 문제를 극복하고 어려운 공대 공부를 따라 잡을 수 있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공부에 집중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 유학생들의 어려움을 잘 알아서인지 그는 작년부터 200여명이 넘는 안동대 중국인유학생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들의 어려움이 무엇이고 함께 노력해나간다면 좀더 좋은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와 낯선 땅에서의 서로간의 친목도 돋우는 계기가 될 거란 생각에서 꾸려보았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IT강국인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 그것도 안동에 온 이유는 중국에서 가깝기도 한 나라였고, 또 국립대학교 입학을 알아보다가 안동대학교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현지의 대학에서 교류학생으로 오는 경우와 달리 그는 안동대학교에 입학을 한 경우라 유학생 혜택을 따로 받지는 못하고 자비로 유학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학부 2학년 때부터 거의 전면 장학금을 받았다. 남들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에 공부에 집중해 장학금을 받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 ‘보통’이 넘는 청년임에는 틀림이 없어보였다.
장학금 받은 이야기를 하는 한 장수 씨 얼굴은 웃음꽃이 범벅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언어장벽 때문에 유학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를 하거나 졸업장을 따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일쑤다. 그런데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학부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교수님으로부터 촉망을 받으며 대학연구실에서 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으니 참 대견스러운 청년이 아닐 수 없다.
하회줄불놀이에 매료된 청년
중국에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가족은 간촐하게 3명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중국에서는 자녀를 한 명밖에 가질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 형제가 없다고 한다.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외국에 보내고 부모님이 많이 보고 싶겠어요?”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먼 장래를 위해 IT강국인 한국으로 유학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셨지요.”
중국에서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려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는 뒷받침을 해 주셔야 할 텐데 집안이 그래도 좀 부유한 편인지 묻자 그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잘 살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중산층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어요.”
학부 시절에는 한 달에 40~50만원의 용돈을 받았었다. 대학원 들어오고부터는 논문도 발표하고, 연구실에 있기 때문에 연구비가 조금 나와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40~50만원이면 일반 공무원 한 달 월급 정도라고 한다.
학부 때는 기숙사에 있었는데 지금은 학교 근처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부터는 연구실에 근무하면서 논문도 쓰고,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교수님과 함께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숙사의 정해진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자취를 하고 있다.
처음엔 음식 때문에 고생도 좀 했지만 한 5년 산 지금은 가리지 않고 웬만한 안동음식들을 다 좋아한단다. 대부분 외국인들이 안동찜닭을 무척 좋아하는데 한장수 씨도 가끔 고향이 그리울 때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친구들과 함께 안동찜닭을 시켜놓고 소주 한잔을 기울일 줄 안다고 하니 정말 안동사람 다 됐다. 자취생활에 밥은 제때 챙겨 먹냐고 물으니 연구실에 있으면서 자장면도 시켜먹고, 도시락도 시켜먹는다고 하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안동에 오래 살았으니 웬만한 관광지는 다 가봤겠네요?”
“네! 하회마을, 도산서원, 봉정사 등 유명한 곳은 거의 다 가봤어요.”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들던가요?”
“하회마을이에요. 특히 하회선유줄불놀이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안동생활 중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학생이 공부한 걸로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였다. 특히나 유학생이기 때문에 더더욱 장학금을 받았을 때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취재를 하면서 한 마디 한 마디 건네는 한 장수 씨의 생활은 정말 버릴 것 하나 없는 모범 유학생이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성취감을 느끼면서 학부 2학년 때부터 거의 전면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고 또 하나 유학생활 중 행복했던 기억은 여자 친구를 만난 것이라고 한다. 잠깐 여자 친구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중국 한족이며 자기보다 한 살 아래라고 한다. 데이트를 할 때면 어김없이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타국에 와 곁에 여자 친구가 있는 것처럼 든든한 게 없는 마냥 한장수 씨에게선 행복한 모습이 역력했다.
여태 중국에서 유학 왔다고 차별받거나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은 없었다. 다만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는 겉으로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조금 서운하다고 한다. 누구나 다 조국애가 있으니까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단다.
“물론 한장수 씨는 중국인이지만, 한국의 피가 흐르는 만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은 없는지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한국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유리하지요. 부모님 세대에는 인종에 대한 차별을 많이 받았는데 요즘 중국에서는 한국말을 할 수 있어 인정을 더 받고 있지요. 그리고 중국은 다민족 국가라 정치인들이 여러 민족을 끌어안고 가야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혜택을 더 많이 주고 있지요.”
위에서는 밝힌 바 있지만 한장수 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어릴 때 한국말을 다 배웠고, 집에서는 한국말을 쓰고 학교나 사회생활을 할 때는 중국말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문화는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워서 한국에서 유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변은 북한과 가까운 곳이고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어 여행을 몇 번 간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남한에는 친척이 없다고 한다.
박사과정까지 밟고 한국에 오래 머물고파
“젊은 친구로서 안동에서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언제였는지요?”
“문화적 차이보다는 학생이다 보니 학교에서 수업방식이 중국에 비해 너무 자유로워서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학년별로 시간표를 짜서 일률적으로 수업을 듣는데, 한국 대학교에서는 학년에 관계없이 자기가 듣고 싶은 수업을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어야 하는 것 등입니다.”
안동생활 5년째, 많이는 아니지만 이젠 제법 친구들도 생겼다. 주로 학과와 관련된 선후배들이랑 교수님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서글한 인상과 중국인 유학생 모임까지 꾸려갈 정도로 적극적인 그가 인덕나. 학부 때와 달리 지금은 많이 바쁘다보니 취미생활도 못즐기고 있다. 축구에 주로 운동을 많이 했었는데 스스로도 여유가 많이 없어진 거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고향에는 다녀온지도 1년이 넘었다. 한국으로 유학 온다고 했을 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는 부모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학부 때는 여름 방학 때마다 고향에 갔었는데 대학원에 들어오고는 공부 때문에 바빠서 가지 못했어요. 그리고 부모님들은 중국과 가까운 나라이고, IT강국인 한국으로 유학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어요.”
석사과정을 끝내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궁금했다. 그처럼 유차한 한국말의 공학도는 분명 공부욕심이 많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아닌게 아니라 역시나였다.
“한국에 좋은 자리가 있으면 계속 남고 싶어요. 그리고 박사과정까지 밟으면서 이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연구한 다음 경험을 많이 쌓은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국 뿐 아니라 중국도 취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취업문제가 아시아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절심한 문제인 만큼 한 장수 씨만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걱정이 더 많다. 중국에서 유학 온 한장수 씨도 열심히 공부하는 만큼 취업도 되고 꿈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중국인 유학생들, 언어문제로 가장 힘들어해
“중국유학생 단체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네. 작년에 만들었으며 유학생들의 유대관계와 처우개선을 위해 만들었어요. 안동대에도 중국유학생이 약 200명 정도 있지요. 가톨릭상지대학의 유학생 단체들과 교류도 하고 있구요.”
중국 유학생 대부분은 한족이 많기 때문에 언어 문제가 제일 힘들다고 한다. 해서 교수님들께 유학생들에게만 따로 보강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기숙사문제나 처우개선 등에 관한 문제점들을 토론한 뒤, 교수님이나 학교 측에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한장수 씨는 유학생회장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는 듯하다. 명절 때는 집으로 가지 못하는 유학생들과 함께 모여서 운동도 하고 한 잔 술도 곁들이면서 향수를 달랜다고도 한다. 중국유학생들 대부분은 사회대학 계열에 다니고 있으며 공대는 어려워서인지 3명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언어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보니 성적여부를 떠나 졸업장을 따는 것만도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사실 한장수 씨처럼 언어를 마스터한 사람에게도 공학은 어려운 공부인 것이다. 그는 컴퓨터 네트워크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중국의 젊은이 한장수 씨가 한국의 젊은 친구들을 보며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차분하고도 조목조목 말을 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공부를 하려고 세계의 여러 나라로 유학을 갈려고 해도 비자 문제 등 너무도 많은 제약 때문에 가지를 못하고 있어요. 한국의 젊은이들은 조건이 너무도 좋은데 현실에 너무 안주하는 것 같아요. 젊을 때 도전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하는데 고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 나라에든 가서 마음껏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더 큰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안정된 직장만 구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유학생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릴 때부터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살면서 부모님의 과보호로 젊은이들이 자립심이 적은 것이 원인이 아닐까요?”
고개를 끄덕여본다. 외국 유학생 눈이 비친 한국 젊은이들의 잘못된 한 단면을 들키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이전에 한장수 씨가 논문 때문에 일본으로 갈 일이 있었는데 비자가 힘들게 나와 참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 학생이었다면 바로 출국 했을텐데 하마터면 가지 못할 뻔 했다고 한다.
장래희망은 IT엔지니어
어렸을 때의 꿈과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서 컴퓨터를 끼고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래희망은 IT엔지니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교도 컴퓨터공학과를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지금 한장수씨는 차근차근 꿈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학관을 나오는 길, 심재창 교수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장수 씨의 칭찬이 대단했다. 인터뷰 내내 야무진 청년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스승의 눈에도 낯선 땅에서 힘든 내색없이 반듯하게 생활하는 제자가 무척 미더워보였나 보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때로는 좌절도 느껴가면서 꿈을 이루다보면 언젠가는 그 꿈이 실현되지 않겠는가. 젊기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큰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먼 훗날 중국의 한 지면에 한국으로 유학 와서 배운 IT산업을 이끌어가는 유능한 한 인재의 성공담을 실은 기사를 읽어보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