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되고 싶었던 펠리칸 ′펠리칸맨′(글/김종규_안동병원 진단검사의학과장)
미수다 따루가 공동번역한 펠리칸맨
‘펠리칸맨’은 외국인 여성들의 토크 쇼인 ‘미녀들의 수다’ 즉 ‘미수다’에 출연하는 따루 살미넨씨가 공동 번역가로 참여한 책이다. 초창기에 몇 차례 ‘미수다’를 본 일이 있지만 텔레비전을 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후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본 일은 없다. 대신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들의 인터뷰기사는 한두 번 본 일이 있다. 출연자들은 한국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충고하고 싶은 말들이 있으며 오락 프로그램의 특성상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도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은 백혜준 씨가 1988년에 출판된 일본어판을 번역하고 따루 씨가 다시 핀란드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2중 번역의 과정을 겪었다. 세계의 주요 언어가 아닌 언어로 된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고려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언어를 잘 번역할 수 있는 한국인이 없고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 중에 한국어가 완벽한 사람이 없을 때, 영어나 일본어와 같이 번역 전문가가 많은 언어의 전문가와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능숙하지는 못한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공동번역을 한다면 번역 과정에서의 오류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수다’의 따루 씨가 번역자로 알려지면서 같이 번역을 하고도 묻혀버린 백혜준 씨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도 따루 씨 때문에 이 책을 사게 되었다.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한 따루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이 책을 사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핀란드 작품이라는 것에도 관심이 갔고 따루 씨가 가지고 있는 북유럽의 보편적 가치관에도 호감을 느끼게 되어서다. 따루 씨는 핀란드 사람이다. 사실 핀란드라면 북유럽에 있는 나라, 복지국가, 핀족의 나라, 언어가 우리말인 알타이계와 비슷한 우랄계 언어의 나라라는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핀란드 문화로는 고등학교 때 시벨리우스의 작품 핀란디아라는 노래(물론 그 곡의 일부이겠지만)를 배운 것이 전부일 정도로 낯선 나라다. 반면 따루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한국인 펜팔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헬싱키 대학교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했는데 1998년 한국에 처음 왔고, 재미있어서 2000년부터 1년 동안 서울대 국문과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지금은 프리랜서로 동시통역과 번역 일을 하고 있다.
핀란드의 국민작가 레나 크론의 대표작
저자 레나 크론(Leena Krohn)은 핀란드의 국민작가다. 헬싱키대학에서 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고 1970년 ‘녹색 혁명’을 처음 발표한 후, 그림책, 동화, 소설, 에세이 등 폭 넓은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1992년에는 핀란드 최고의 문학상인 핀란디아상을 수상했고, 핀란드 예술가들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프로핀란디아메달도 받았다. 이 책 ‘펠리칸맨’은 ‘인간의 옷 속에서-도시이야기’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리사 헬미넨 감독에 의해 ‘펠리칸맨(Pelikaanimies)’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2005년 부천국제영화제에도 초대된 영화이다. 이 책 제목 ‘펠리칸맨’은 영화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되고 싶은 펠리칸
인간이 되고 싶은 펠리칸이 있었다. 인간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의 터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동물로서 편안히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인간이 되어, 인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이 펠리칸은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몸짓과 습관을 흉내 내며, 인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이 새는 어느 인간의 옷을 훔쳐있고 인간세계로 들어왔다. 인간세계로 온 첫날 이 펠리칸맨은 오페라 ‘마술피리’를 보고 음악이 있는 인간의 삶에 감동한다. 그 후 노숙, 도둑질, 애 보는 유모를 경험하고 검표원을 거쳐 가수가 되어, 초기에 자신을 체포한 경찰의 이름인 ‘휴류라이넨’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세계에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그의 모습이 보통의 인간과 달랐지만 어른들은 ‘휴류라이넨’이 인간이 아닌 펠리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약간 특이하게 생긴 인간이라고만 생각한다. 타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차별하는 마음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 깊은 곳에는 다름에 대해 차별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체득한 어른들은 그냥 특이하게 생긴 인간일 뿐이라는 믿음대로 펠리칸맨을 본다.
어린 아이인 에밀은 달랐다. 에밀은 첫눈에 이 ‘인간의 흉내를 내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펠리칸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시골 마을에 살던 에밀은 이혼한 엄마를 따라 도시로 왔다. 매일 일하러 가야 하는 엄마가 한 가지 일을 더 하기 위해 구청으로 청소하러 가는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엄마에게 받은 돈으로 에밀 혼자 식당에서 점심을 사먹어야 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간 식당에서 그는 이 펠리칸맨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호기심으로 펠리칸맨을 추적하여 정말 그가 인간이 아닌 펠리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는 펠리칸
에밀과 펠리칸맨은 친구가 되고 펠리칸맨은 에밀로부터 글자를 배운다. 글자와 함께 에밀로부터 인간의 언어가 100가지도 넘는다는 사실, 인간세계에는 법률이라는 것이 있어 법을 어기면 교도소에 갇힐 수도 있다는 사실 등 인간세계에 대해서도 공부한다. 영화라는 것도 체험하고 천문학 관련 대중서적도 읽는다. 시간과 역사의 개념도 알게 된다. 신문을 읽으면서 펠리칸맨은 살인과 미사일 같은 무기에 대해 알게 되고 인간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된다. ‘마술피리’와 같은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드는 인간이 한편으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도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죽음과 종교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이후 펠리칸맨은 도서관에서 생물학, 화학, 물리학, 천문학, 대수, 기하, 음악, 언어, 역사를 공부한다. 예술, 문학, 음악, 영화에도 관심을 가진다.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 펠리칸맨은 인간이 존경스럽지도 부럽지도 않게 된다.
펠리칸맨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이는 에밀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펠리칸맨이 잠시 돌보던 아이가 그랬고, 에밀의 친구 엘사가 그랬다. 엘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휴류라이넨’이 인간이 아니라 펠리칸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 믿지 않던 경비 아저씨는 결국 동물원에 연락하고, 동물원에서 나온 사람들은 펠리칸을 잡아 가둔다. 펠리칸맨은 에밀의 도움으로 동물원을 탈출해 본래의 고향인 바다로 돌아가게 되는데, 에밀은 펠리칸맨의 고향으로 따라가기를 원하지만 펠리칸맨은 이미 인간의 모든 것을 잊고 펠리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상태였고, 너무 많은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 에밀이 펠리칸 사회에서는 살 수 없음을 가르쳐주고 떠난다.
인간문명은 자연과 갈등하면서 발전
저자 레나 크론은 “학창시절의 마지막 시기였던 1960년대에 나는 인간 문명이 자연은 물론 다른 생물과 갈등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 이면에는 심각한 자연 파괴가 뒤따릅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뒤에 그런 고통스런 갈등의 원인 제공자인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라고 밝혀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와 다른 생물들과의 갈등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라고 밝혔다. 펠리칸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이 언급된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부분보다는 낯선 세계에 들어온 이방인의 모습,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인간사회, 이방인을 대하는 사회 구성원 등 이방인과 기존 사회구성원들과의 갈등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공동 번역가로 참가한 따루 씨가 쓴 옮긴이의 글 마지막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저는 적어도 한국에선 이미 한 마리 펠리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 싶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이라고 표현한다. 따루 씨의 말대로 펠리칸맨은 동화되고자 찾아왔지만 동화되지 못하고 떠난 이방인의 이야기다.
세상의 수많은 펠리칸맨, 바로 우리 자신
세상에는 많은 펠리칸맨이 있다. 이주노동자, 북한이주민, 다문화가정 여성 등 이 땅에도 많은 펠리칸맨이 있다. 불행히도 이 땅은 펠리칸맨이 살기에 그리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펠리칸맨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두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 땅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안동에 와서 안동에 정착하기 위해 안동사람 흉내를 내며, 안동을 공부하고 있다. 결국 정착해서 ‘휴류라이넨’으로 살아갈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펠리칸이 되어 날아갈지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책 뒤편에 뻬까 우오리스또(Pekka Wuoristo) 주한핀란드 대사의 추천사가 있다. 책 한 권을 출판하는데 원작자의 나라에서 온 대사가 추천사를 쓰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문화강국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국익으로 봐서도 주한 핀란드 대사를 통해 핀란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보다는 따루 씨나 이 책으로 인해 핀란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니 대사로서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보이지 않고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네의 군림하는 외교관과 대비되어서인 모양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