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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고향 생각′을 더듬으며 오미마을을 가다(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고향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고향이 되기 때문이니 고향이 없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직접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대대로 부모나 조상이 살아온 터전이 있다면 그곳 또한 고향이 되는 것이니 고향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이것조차 어렵다면 마음의 고향이란 것도 있다. 명절 때마다 대이동이 일어나는 우리 문화현상을 보면 여전히 부모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태어난 곳 보다는 부모의 고향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의 전통이 흐르는 곳을 고향이라 여기고 사는 거 같다.

오늘 찾아가는 풍산 오미마을은 일제 때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풍산김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풍산읍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옛날 길을 따라 풍산김치 공장을 지나니 곧 오미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한때 분주했던 옛길은 고속도로가 놓이는 바람에 한적하면서도 깨끗한 마을길이 되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너른 들판에는 군데군데 수확을 미뤄둔 배추가 보였다. 서리나 눈을 맞은 배추가 따뜻한 햇살에 몸을 녹이면 곧 싱싱해진다니 신기한 일이다. 무우 같으면 바람이 들고 슴벅거려 맛도 없는데 배추는 좀 야무진 데가 있는가 모르겠다.

마을입구에 닿으니 입석과 오미마을의 유래가 짤막하게 새긴 돌이 있다. 다섯 형제가 과거에 급제해 마을이름을 오미(五美)라고 했다니 예부터 인물이 많이 배출된 지역인 모양이다. 불천위로 모시는 허백당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살아온 지 600년이 되는 날에 맞춰 마을출신 독립운동가 24명을 기려 광복기념공원을 조성해두었다. 북경재라는 야트막한 마을동산에 올라보니 예쁜 육각정 연계정(蓮桂亭)이 보이고, 24명 독립운동가의 구체적인 활동을 기록해서 전시해 둔 기념탑도 있었다. 어떻게 한 마을에서 이토록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는지 놀라웠다. 또 마을 역사와 문화를 타임캡슐로 저장해서 500년 뒤에 열어보도록 하였다. 오미마을은 검무산 아래로 도청이 들어설 테니 새로운 천년의 중심이 될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골목길에 들어서니 ‘고택마을’답게 기와를 얹은 한옥들이 차분하게 앉아 있다. 접시 안테나와 이끼가 자란 전통기와는 흙벽 탓인지 조화롭다. 현대식 유리문을 하나도 달지 않은 전통집의 가지런한 마루의 결도 고색창연하다. 그리 건조하지 않으면서도 유난히 빛을 내지도 않는 수수한 나뭇결이 좋았다. 밖으로 나있는 사랑채 마루도 겨울준비를 한 듯 보인다. 마을 안쪽에는 양옥집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미마을 입구에는 지은 지 오래지 않은 멋진 양옥들이 많았는데 북경재가 있는 마을에는 한 집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전통한옥집이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집도 있었고 주인은 떠나고 빈 집이 된 곳도 있었다. 집이 낡아도 지붕은 그대로 기와를 얹어두고 있어서 북경재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민속촌에라도 온 듯 전통의 풍모가 한껏 살아났다. 더욱 겨울날 반짝하던 햇살이 구름 뒤로 숨고 몇몇 집에서는 장작 패는 소리까지 들리니 타임머신을 타고 한참 옛날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방을 쓸고 먼지를 터는 모습을 살짝 볼 수 있었다. 마당에는 외지 번호를 단 승용차가 한 대 있는데 열어둔 방문으로 여자아이가 먼지를 터는 모습이 보였다. 이끼도 오래된 기와집, 대문도 따로 없는 집, 안팎으로 사람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집에 청소를 하는 아이는 아마 멀리서 부모를 따라왔을 것이다. 마침 국가지정문화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겨울햇살을 받고 툇마루에 앉은 할머니가 보여 인사를 드렸더니 손짓을 하신다. 혼자 사신다는 할머니는 말씀을 쉬지 않는다. 구열이 나서 틀니도 빼놓으신 할머니가 말씀을 얼마나 잘 하시는지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다. 열여섯에 소산에서 시집와서 평생을 사셨다는 할머니는 마을이야기는 뒤로 하고 당신 이야기로 하염없으시다.

열아홉 살에 첫 아들을 낳으셨다는 이야기,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다리가 아파 애먹은 이야기, 서울 아들집에 가면 답답하다는 이야기, 동네 할머니들 이야기며 끝이 없다. 자식들 오남매가 모두 서울, 대구로 나가 살고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겨울밤은 깊고 길 것인데 어찌 혼자 지내실까 궁금했지만 여쭙지는 않았다. 친정보다 오래도록 살아온 오미땅이 그분에게는 자식만큼은 못하지만 등 기대고 살 언덕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다리가 아파서 읍내를 자주 갈 수 없고 몸에 힘이 빠지니 보호자가 없으면 먼 길을 갈 엄두를 내지 못해 파마도 못했다는 할머니는 하얀 단발머리가 예쁘셨다. 거기에 대충 머리핀까지 꼽고 계셔서 고운 소녀가 되어 계셨다.

풍산김씨 종택은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손님을 반겨했지만 집을 관리하시는 아주머니는 마을회관에 가서 이것저것 문의를 하라고 하신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마을회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엉거주춤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 할머니 한 분 뿐이었다. 더 놀다가 가라고 하시니 난감할 정도였지만 가슴 저 밑까지 따뜻한 하루였다. 골목 전봇대에 붙은 ‘땅 삽니다’는 광고의 글자가 색 바래 희미해진 것으로 봐서 땅을 두고 주고받은 이야기도 이미 옛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빈 집이 한 채 보였는데 이곳은 도청이전지역으로 땅값이 올랐으니 아마 원래 주인은 넉넉하게 원하는 곳으로 이사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새 단장을 하려고 일부러 집을 비웠을 수도 있을 거다.

동네 이야기를 한창 하고나니 마을기행이 되고 있다. 오늘 수필가 김진섭 선생 이야기를 하려고 오미마을까지 두루 다녔으나 사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서 가묘까지 그곳에 있으니 오미를 고향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물론 부모님의 고향을 따진다면 이곳 오미가 맞다. 문인사전에 등록된 고향은 경북 안동이니 우리들의 고향은 부모님의 고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가. 선생의 아버지는 직장을 따라 나주까지 오셨고 제주도에서도 근무했으니 한반도 남쪽에서 유년을 보내고, 철이 들 무렵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오미를 찾아온 것은 마을풍경이 궁금해서이다. 선생은 타지에서 나서 학교 다니고 직장에 두루 바빠 자주 이곳을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선생의 수필 ｢없는 고향생각｣이란 글을 보면 고향에 대한 생각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것이 고향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 이유로 고향은 시간을 뛰어넘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적인 보금자리로 설명한다. 마을을 이루고 함께 살던 사람들은 공동의 관심사와 개인의 중요한 일을 크게 구별하지 않고 살았으니 공동체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농사짓고 사는 일은 남의 손을 빌려야했고 그것이 다양한 마을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런 마을의 공동체 아래 성장한 사람에게 고향이란 가족적인 친밀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고향은 원래 인간적 이기주의를 떠난 존재요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까지든지 우리의 영원한 소년시대 내지는 청춘시대를 속 깊이 보호해주는 존재이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을 오미마을의 풍경을 기억하는 것인지 그가 쓴 고향이야기는 오랜 고향생활을 한 적이 있는 사람처럼 애틋하다. “우리네 부모와 우리네 애인의 머리는 드디어 백발이 되고야마는 때가 있어도 고향산천의 얼굴은 옛 모양 그대로 청청한 것이니 우리들에게 있어 검은 수풀의 속삭임은 영원히 없어질 수 없는 음악이 되는 것이요, 전야(田野)에 빛나는 황금색의 물결, 흐르는 시내의 고요한 노래, 땅에서 솟아나는 샘의 맑은 빛, 우리를 두 팔로 안아주는 힘차게 뻗친 산줄기……”오미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면 사방 산들이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이런 산세를 어린시절부터 줄곧 들었을 것인가 그저 짐작할 뿐이다. 풍수를 모르지만 남향의 따뜻한 양지마을에 풍부한 전답, 특히 논이 대부분이니 풍족한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에 대해 ‘산만한 인상’밖에 가지지 못한 선생은 고향에 두고 온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선생은 스스로 ‘내 고향인 경상도 안동’이라고 밝히면서 다 자라서 여름휴가로 몇 번 안동에 갔었고 그것으로 고향체험이 전부라고 한다. 나주에서 태어나서 일곱 살이 되도록 살다가 제주도에서 4년을 보내고 다시 나주에서 살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로 이주해서 학교를 다녔고 일본 동경에서 몇 해를 보내고 귀국하면서 서울서 정착했으니 고향에 대한 추억이란 것이 있을 게 없다. 특히 선생은 제주시절을 두고 ‘굳센 인상’을 얻지 못했다고 술회했는데 특이하다. 제주도는 모든 물상이 육지와는 다르며 생활풍습조차 매우 다를 것인데 별로 인상적이 않았다는 대목이 눈에 걸린다.

제주도의 생활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달이 밝은 밤에는 여자아이들과 강강술래 놀이를 했고, 전복 잡는 일도 해봤고, 가마도 타고 놀던 일, 비사치기 하며 놀던 일, 일본인 여자아이를 놀려주던 일 등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또 조밥과 메밀국수가 맛이 없던 것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런 유년의 놀이가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크게 재미있지 않았다는 것일까. 기억에 자세하게 남은 것은 인상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굳센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너무 잦은 전근으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정붙이기가 쉽지 않은 점이 컸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여동생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다른 아름다운 기억을 묻어버리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어느 지역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한다. 어느 지역도 고향다운 신뢰감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고장의 자연 속에 깊이 친근할 수 없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큰 불행이었다.’아버지 직장을 따라 전전하면서 선생은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썼다. 전남 나주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이곳에도 들리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지상에서 가장 장엄하고 사람 개개인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곳이 고향이라고 강조하는 글을 보면 고향을 살갑게 지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유년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곳은 전남 나주이고 머릿속으로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오미이지만 이 두 곳을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김진섭 선생은 근대문학사에서 수필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초기 수필가들 이양하, 피천득 등의 이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이 무렵 우리 문학사에서 수필은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독문학을 전공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해외문학파라는 동인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수필에 대한 장르인식이 일반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짧은 산문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차츰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시기가 1930년대를 전후하는데 당시 자유시나 소설을 쓰던 작가들도 수필을 함께 쓰기도 하였다.

수필은 어떤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글이므로 누구나 쓰기 쉽다. 그래서 수필형식의 글은 전문 글쟁이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책으로도 묶을 수 있는 좋은 길이 된다. 그리고 시나 소설처럼 특별한 형식을 따르지 않아도 되다보니 수필은 글 쓴 사람과 글 내용이 항상 일치한다. 글쓴이가 직접 겪은 이야기가 주제를 이루고 글을 구성하기 때문에 수필은 대체로 글 쓴 사람의 이력과 삶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살아있는 전기적인 기록이 된다. 이런 좋은 점이 수필이 가진 매력이다.

글이 지닌 문체는 시대마다, 개인마다 다른 것이므로 어법을 보면 시대를 알고 문체를 보면 글 쓴 사람의 생각도 짐작된다. 그처럼 사람을 잘 담아내는 장르가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글은 삶의 체험이 짧은 사람보다는 인생의 깊이를 알고 체험이 다양한 사람이 훨씬 잘 쓰기에 유리하다. 그래서 수필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사람이 쓰는 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이 겪는 뻔한 이야기를 써 두면 읽는 사람이 자신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감동은 고사하고 읽는 일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체험의 깊이가 남다른 연륜이 수필에서 필요하다고 하는 모양이다.

선생의 수필 가운데 ｢백설부｣(1939)는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글이다. 문장이 한문투로 길지만 부드럽고 아름답다. 도시에서 맞이한 겨울날의 눈에 대한 감성이 무궁무진하게 피어난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글로 풀어낸 눈에 대한 작가의 인상은 아름답게 펼쳐져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글의 미덕은 수식에 머물지 않고 메마른 도시 겨울날 눈을 통해 도시가 새롭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에 있다. 겨울날 내리는 눈이 선생의 필설에 따라 조화를 빚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연하고 아름다운 힘을 지내게 된다. 글을 꾸미다 보면 식상해지는데 선생의 글은 꾸밈과 내용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낸다.“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인지, 부지중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이런 글을 당시 사춘기 소녀들이 읽으면 감흥이 남달랐던 것인지 굉장히 인기 있었던 글로 소개된 적이 있다.

서양의 에세이에 해당하는 중수필을 많이 쓴 분으로 김진섭 선생의 글은 필화에 연루되기도 했다. ｢아직은 염려 없다｣는 글은 매일신보에 실린 글이다. 매일신보사는 일제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유명한 작가들에게 연작으로 전쟁옹호의 글을 준비시켰고 그 필진 중에 한 명이 김진섭 선생이었다. 신문사 자체 내부 검열에서 아무 이상이 없어서 신문에 게재되었던 것이 뒤늦게 헌병대로부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편집국장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신문기사를 확인한 친일파 단체에서 고자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문사 내부검열 체계의 문제점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어서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정리되었다. 그래서 선생에게는 무척 다행한 일로 시말서를 쓰는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다.

선생의 글 내용은 세계2차대전을 예로 들어 전쟁의 심각성을 드러낸 것이다. 왜 선생은 이런 글을 썼을까.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분도 아니고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무난한 제목으로 위장한 뒤 세계대전을 대상으로 할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인가. 일제의 검열이 날이 갈수록 압제적이어서 의도적으로 작정을 하고 쓴 글일까. 이 시기 신문에 발표된 어떤 글도 일제정책에 반하는 것을 보기 어렵다. 더구나 이 시기는 많은 작가들이 친일문학작품을 발표하던 시기이다. 일제의 지시에 따라 전쟁에 지원하라고 종용하는 작품을 쓰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선생의 의도적인 혹은 우연적인 집필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전쟁은 때에 따라 문화에 관해서는 파괴자라 할 수 있다. 육탄과 폭격으로 국가 최고의 자본인 사람의 생명을 무제한으로 살상하고, 전쟁 수행의 필요상 국가는 국민의 생활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인격의 자유나, 의견의 발표도, 경제적 활동도 제한한다. 즉 전쟁은 개인의 광범위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근대 문화의 특징인 개성적 발전의 경향과는 결정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썼다. 이 사건이 언론학 연구자에 의해 밝혀지면서 일제 당시 검열의 이중구조가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군대, 경찰, 총독부 등 당시 검열체계는 일제에 반하는 어떤 글도 발표할 수 없는 시스템을 작동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파악한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고 소식이 두절되면서 이곳 안동과의 인연은 더욱 이어지지 못했다. 선생이 태어난 나주에서는 시비를 두 곳에 세웠다고 한다. 향토문화관 앞마당과 목포 문화의 거리로 들어가는 도로변 우측 언덕에 서 있다고 하니 언젠가 목포를 방문하는 날에 꼭 들러봐야겠다. 작가가 고향을 찾지 못하면 고향 사람들이라도 작가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김진섭 선생을 통해 해보게 된다. 고향과 살뜰한 정이 크게 없던 분이지만 그 없는 정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크지 않았을까. 선생이 납북되면서 그 아쉬움의 공백이 채워질 수 없는 아픔으로 남고 말았으니 안타까움이 끝이 없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