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대에서 굽어보다(글/이동백_시인)"강은 고이기도 하고 흐르기도 한다. 강은 굽이돌기도 하고, 곧게 흘러내리기도 한다.
강에는 물이 있고, 돌이 있다. 강에는 개미귀신이 있고 연애각시-쉬리-가 있다.
강에는 버드나무가 얽혀 있고, 갈대가 설켜 있다. 강은 카오스다.
그러므로 강은 태초에 닿아 있을 뿐더러 생명의 원류를 이룬다. 이것이 강의 본질이고 생태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를 대자(對自)적 존재와 즉자(卽自)적 존재로 나누었는데, 대자적 존재는 의식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일컫고, 즉자적 존재는 의식 없는 존재로서 인간 이외의 사물을 일컫는다. 사르트르의 이분법적인 철학의 근저에는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모든 사물의 상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논리이다. 이러한 판단은 사르트르 철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의 중심 명제는 인간이었다.
여기서 사물을 자연으로 바꾸어 놓고 보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된다. 사물, 즉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인간의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 왔지만, 정작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살아왔을 뿐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의지에 장악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연에 오만할 것이 아니라,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 자연 가운데 하나가 물이다. 그런데 이 물이 모여 샘을 이룬다. 샘은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인간의 생명도 예외가 아니다. 샘에서 흘러나온 물은 부풀어 개울이 되고, 개울이 여럿 모여 마침내 강을 이룬다. 결국 강은 생명의 근원에 닿아 있다. 강은 단순히 즉자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강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강은 생명의 근원이다
지금 우리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나라의 명운을 걸고 있는 듯하다. 2008년 12월 29일,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4대강 살리기 사업, 안동지구 착공식이 낙동강 둔치에서 거행되었다. 그때 새워진 입간판이 영호루가 건너다보이는 자리에 지금도 서 있다. 이 입간판에 쓰여진 ‘한국형 녹색 뉴딜 사업- 낙동강 살리기 프로젝트’ 표어가 사뭇 사람을 압도한다.
2010년의 입춘 날, 매섭게 부는 바람에 입간판의 글자들이 저르릉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겨울 낙동강은 갈퀴를 곧추세우고 서쪽으로 내닫는데, 습지에선 겨울새들의 짖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카롭게 날아왔다. 낙동강은 잘 다듬어진 둔치에 갇힌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 그 품에다 습지를 지어 놓았을까. 도시를 끼고 흘러가지만 낙동강은 습지가 있어 외롭지 않고, 아름답다.
겨울잠에 든 분수대를 일별(一瞥)한 후, 영호대교를 건너 영호루 곁을 자동차로 내달았다. 강은 스스로 흘러가고, 인간은 기계의 힘에 의지하여 달렸다. 아마 영호루 옛터 근처에는 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그 나루 곁에는 허름한 주막집 한 채쯤은 터를 잡았을 터이고. 황포 돛대에 몸을 기대어 강을 건넌 나그네는 술청 한 모서리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 막걸리 한 사발로 객고를 풀어냈을 것이다. 나룻배의 용골이 불콰해진 나그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낙동강은 쉼 없이 먼달을 거쳐 하이마를 지나 호암을 휘돌아 나가면서 먼 바다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 옛날의 일들을 기억으로나마 간직하고 있는지, 지금 강은 그저 무심히 흘러가고만 있다. 그 옛일을 알 리 없는 후인(後人)이 오히려 가당찮은 스토리를 꾸며가면서 강섶을 달렸다. 한티를 넘어 개곡 마을로 들어서는데, 작은 개울이 차창에 바싹 다가붙는다. 미천이다. 미천은 땅에 낮게 깔려 계평 마을을 향해 나아가다가, 송야천 한 가닥을 받아들인 낙동강으로 스며든다. 송야천도 미천도 이쯤에서 자신들의 몸을 낙동강에게 맡기고 그 생을 스스로 거둬들인다.
송야천과 미천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그 좌우에 꽤 넒은 범람원을 이루어 놓았다. 강이 길을 열어 나아갈 적에 운신(運身)의 자유를 위해 마련한 것이 범람원일진대,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몸을 옥죄는 빌미를 인간에게 주고 말았다. 인간은 연명의 명분으로 범람원에 쟁기를 깊이 꽂아 넣었고, 그것도 모자라 인간들은 강과 범람원 사이에다 견고한 둑을 쌓아버렸다. 둑으로 갈려버린 강과 범람원. 이것이 낙동강의 현실이다. 아니, 이러한 현실은 세상의 강들이 처한 운명이다. 파리의 세느강이 이렇고, 하이델베르크의 네카강이 이러하다.
둑의 역사 속에는 강과 인간 사이의 오랜 갈등이 존재해 왔다. 그 갈등의 승자는 언제나 강이었다. 강의 침범에 인간은 한없이 연약했다. 그러나 인간은 지혜로워 그 강을 다스리는 법을 찾아냈다. 이것이 둑이다. 말하자면 둑은 인간이 강에게 띄운 공생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둑에게 강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그 위에 군림하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영악한 인간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초심을 잃은 탓이다. 우리는 둑에서 찾을 것이 하나 있는 듯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강은 스스로 운신한다
중앙고속도로가 낙동강을 타고 넘어 북으로 내닫고 있다. 고속도로 밑을 빠져나와 상락대(上洛臺) 벼룻길을 힘겹게 차고 올랐다. 벼룻길 높은 곳에 발을 멈추고, 강을 눈 안에 담았다. 동쪽에서 문득 몸을 나타낸 낙동강은 미천을 받아 안으면서 상락대 벼룻길로 곧장 다가든다. 겨울이라 물의 세력은 크지 아니했지만 검은 빛으로 흘러가는 그 기상은 장쾌(壯快)한 바가 있었다. 조물주의 운필(運筆)답게 기운차다. 물길 가장자리엔 너른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마른 갈대와 잎을 떨군 버드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습지는 강을 따르기도 하고 에워싸기도 하는데, 한 편에서는 자신의 몸 안에다 물을 가두어 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둑이고 그 둑 너머는 습지만큼의 땅이 산을 사이에 두고 펼쳐져 있었다. 그 땅은 인간이 차지한 예의 그 범람원일 터이다. 또 하나 눈에 잡혀든 것은 멀리 계평 마을에 들어선 큰 구조물 둘이었다. 그것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세워진 교각인데, 산을 뚫어 새 길을 내고, 그 길을 이을 다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리를 낙암정(洛巖亭)으로 옮겼다. 낙암정은 조선 문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낙암 배환의 정자인데, 상락대 동쪽의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이 정자는 벼룻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은 터라 은일의 멋과 자연 풍광의 아취(雅趣)을 겸비하였다. 천길 단애 끝에 서니, 시심이 발동할 만도 한데, 마음은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고려 때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시를 짓다가 그 경치에 압도당하여 그 시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허언(虛言)은 아닌 모양이다. 당대를 휘어잡던 풍류객도 그러하거늘, 이름 없는 서생이야 물어 무엇하겠는가.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 대강 얽어내고 덮어버리자.
낙동강은 안동에 이르기까지는 대체로 협곡 사이를 뚫고 흘러내린다. 안동을 지나면서 강은 긴장을 풀고 그 형세를 좀 다르게 고쳐나간다. 완만해진 물굽이가 협곡 대신에 단애와 모래톱을 어긋지게 거느린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물굽이가 휘어드는 안쪽은 모래톱을 이루고, 물굽이가 휘돌기 위하여 부딪치는 쪽은 단애를 이룬다. 상락대 주변의 형상도 이에 멀지 않다. 상락대는 한 줄기 산자락을 낙동강 쪽으로 끌어 그 강에 급하게 몸을 담그는 순간, 천길 낭떠러지를 이룬다. 상락대를 사이에 두고 모래톱이 동서에 형성되어 있는데, 동쪽으로는 강 건너편이 모래톱이고 서쪽으로는 모래톱이 상락대에 바투 붙어있다. 강은 그 사이를 깊게 사행(蛇行)한다. 사행하는 물을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니, 한 빛이 아니었다. 한 가닥이 흰 빛인 듯 옥빛이더니, 다른 가닥은 에메랄드빛이고, 또 한 줄기는 검푸르다. 그리고 모래 근처에는 습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상락대 건너편 먼 산기슭으로 따라가던 한 줄기 가느다란 길이 산을 넘어 회곡으로 들어가고 있다. 회곡 어름에 머물던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서 닿은 곳은 학가산이다. 학가산 국사봉이 나그네의 눈길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상락대의 겨울 풍광도 이처럼 예사롭지 않게 도도하거늘, 하나 눈을 자극한 것은 상락대 서쪽 산등성이에 들어선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스카이라인이 그 구조물 때문에 흐트러지는 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자리이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이 남는 자리에 선 건물이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 긴 성벽 한쪽으로는 강물이 늠실늠실 흐르고 넓은 들판 동쪽 머리엔 점점이 산이로구나.) 고려 전기 때, 한시를 잘 지어 해동제일이라 칭송받던 학사 김황원이 평양 북벽루에 올라 그 아래 펼쳐지는 경치를 보고 감격하여 읊었으나 더 이상 잇지 못하고 통곡하며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다시 봄을 준비하는 낙동강
다시 길을 잡아 서쪽으로 나아갔다. 낮은 구릉지를 지나고 들길을 한참 달려 닿은 곳은 단호 2리였다. 수령 200년의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단호 2리는 낙동강의 남쪽 마을이어서 풍산에 가깝지만 남후면에 속한 마을이다. 지금이사 길이 훤히 뚫리고 다리가 놓여서 어디서든 접근하기 쉽다지만, 옛날 이 마을은 강에 갇힌 오지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강에 의지해서 살지만 강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했던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예로부터 강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소통의 매개자였다. 그런 반면에 강은 단절의 공간으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강은 이처럼 이중성을 지닌 야누스이다. 단호는 야누스의 두 얼굴 사이에 낀 마을이었다.
단호에서 강을 건너면 바로 마애이다. 마애에 들어가기 전에 홀리듯 이끌려 들어간 곳은 마애 습지였다. 입춘이었지만 바람 끝은 매서웠다. 가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날씨였다. 그러나 계절은 스스로 속이지 못했다. 버드나무 가지가 ‘볼소름’하니 이미 봄 기운을 머금었고, 그 끝은 벌써 연한 녹색 빛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었다. 산발치 양지녘엔 버들강아지가 지나가는 바람에 제 몸을 떨어댔다. 겨울 습지의 갈대는 잎사귀는 꺾이고, 그 꽃은 뭉개져서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줄기는 여름의 그것보다 강해 바람에 몸이 흔들릴 뿐, 바람 때문에 눕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 가는 생에 대한 오기가 추상같다. 습지에 갇힌 물은 얼어 있는데, 습지가 머금은 물은 눅눅하게 습지를 녹이고 있었다. 새들이 간간이 울어대며 날아다니긴 했어도, 습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움직임을 이 겨울에 감지해 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오는 봄을 맞이할 생명의 합창을 습지는 지금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리라.
습지 위로 마애로 들어 기는 다리가 산뜩하게 놓였다. 습지에서 머뭇거리던 강이 다리 밑을 지날 적에는 그 흐름이 숨 가빴다. 그렇다. 강은 고이기도 하고 흐르기도 한다. 강은 굽이돌기도 하고, 곧게 흘러내리기도 한다. 강에는 물이 있고, 돌이 있다. 강에는 개미귀신이 있고 연애각시-쉬리-가 있다. 강에는 버드나무가 얽혀 있고, 갈대가 설켜 있다. 강은 카오스다. 그러므로 강은 태초에 닿아 있을 뿐더러 생명의 원류를 이룬다. 이것이 강의 본질이고 생태이다. 마애교를 건너는 나의 그림자가 길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