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흥 안동향우회 박기선 회장(글/김영희_경기도 과천 사는 안동사람, 객원기자)
곧 설이다. 눈이 많이 내렸고 또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내려가는 길이 걱정이다. 최근 고속도로가 많이 생겨서 예전만큼의 정체는 없지만 그래도 명절이니까. 짐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자동차를 타고 거북이 고속도로를 당연히 여기며 달성에 갔다가 안동을 들러서 다시 과천으로 돌아오는 일을 17년째 하고 있다. 그것도 일 년에 두 번씩. 막히는 고속도로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남편을 둔 덕에 대구로 내려가는 길과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손금 보듯이 환하다. 또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크고 작은 사건 사고도 많아서 17년 동안의 에피소드를 모아서 책을 쓴다면 한 권은 족히 채우고 남을 것이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보니 마치 짚시처럼 길 위의 삶을 산 것 같은 낭만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힘들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여행을 하듯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문득 올해는 ‘이게 무슨 일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짐을 싸는 일도 선물을 챙기는 일도 세배돈을 바꾸는 일도 전처럼 즐겁지가 않다. 명절이 한 번이면 좋겠다는 형님 말을 이제야 이해 할 것 같다. 고향 가는 길이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다니 17년 만에 닥친 이 권태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난감하다. 설 쇠고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리 만나야겠다.
나에게 안산지역 안동향우회 박기선(와룡면 가류동 출생, 55세)회장을 소개해준 분은 영주가 고향이다. 같은 지역이다 보니 만나면 자연 안동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고 안동향우회 활동도 듣게 되는데 재미있고 특별하다고 많이 부러워했다. 특히 안동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안산에 있는 한양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찾아갔더니 마침 그날은 안산.시흥 안동향우회 회장 이.취임식 및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 게스트하우스 사장님도 안동분이시고 우리 회원입니다. 등록된 회원은 한 이백 명인데 다는 못 오시고 반 정도는 오십니다. 따 같이 참석해서 저녁도 드시고 안동 분들하고 인사도 하고 가세요.”
저녁 7시 행사가 시작할 무렵이 되자 연회장에는 사람들로 꽉 찼고 여기저기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로 즐겁고 편안한 잔치집이 되었다.
“안산 지역에서 안동향우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한지는 한 3년이 넘었어요. 그때 회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사무국장, 사무총장이 열심히 해줘서 다른 지역보다 회원이 많습니다. 한 3년을 열심히 하고 오늘 이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섭섭한 것보다도 이제 다른 사람이 새롭게 하면 좋지요. 안동사람들이 나서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뭘 맡게 되면 열심히 하고 그 주변 사람들도 나서서 도와주고 그러니까 한 번씩 이렇게 바뀌어야 발전도 되고 그렇습니다.”
객지에서 고향사람들을 만나 서로 위로도 하고 즐거움도 나누면서 함께 상부상조하는 모임을 이루어 가는 것이 본인에게도 큰 힘이 되고 기쁨이 되지만 자신의 일도 있다 보니 아무래도 좀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란다. 회장이라는 책임 있는 자리보다는 회원이 더 마음이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전직 회장이니만큼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 향우회는 좀 특별한 것이 있는데 안동장보기 행사입니다. 새벽에 버스를 타고 안동 장날에 맞춰 갑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몇 시까지 오세요.’ 하면 신시장이든 구시장이든 원하는 곳에 가서 장을 보고 잠간 짬을 내서 부모님이나 친척분도 만나고 저녁에 한보따리씩 들고 다시 모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회원들만 갔는데 이제는 주위 분들도 같이 갑니다. 지난 가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원을 제한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또 장보기 하러 내려가면서 자기 어머니 집에 깨 있다, 오빠가 과수원을 한다 이러면 그 자리에서 깨를 주문받고 사과를 주문 받아서 바로 사오곤 합니다. 좋으면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받아서 다시 주문을 하기도 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야죠. 다들 좋아합니다. 이제는 주위 분들이 더 갈려고 해요.”
지역 특산물도 사고 관광도 하는 열차상품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어떤 모임에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장을 보러 가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라 매우 신선하게 생각되었다. 여행을 통해 그리운 고향의 정취도 느끼고 안동의 지역경제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특히 고향 사람들이 농사지은 것을 직거래 하는 것은 고향을 살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장보기 행사를 가질 계획이라고 하니 더욱 다행이다.
회원들이 더 즐겁게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자신은 제대로 장을 볼 시간이 없는데 간고등어 좀 사고 서울 사람인 집사람이 주문한 고추 말린 것이나 엿기름 같은 것을 사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직 율세동에 살고 계시고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들 몇 명이 안동지킴이로 남아 있어 자주 내려오는데 그 길에 장을 봐간다고 했다.
그는 안동시 와룡면 가류동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안동시내 명륜동으로 이사를 왔다. 영가초등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부속초등학교로 바뀌어서 부속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다. 부속초등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되었지만 집 옆에 학교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기도 어려워서 그냥 다녔다고. 아마 전교생 중에서 가장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가 아니었나 했다. 경안중학교와 경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국제상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프로스펙스 만들던 그 회사인데 그때는 거기 들어가기 힘들었습니다. 그 회사에 있을 때 거래처 직원이던 집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지요. 집사람이 제게 용기를 많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함께 사업을 하면서 저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는 1983년 무렵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구로구 개봉동에서 건축자재도매상인 경안상사를 차렸다. 무슨 사업을 할까 생각하다가 재고가 없고 썩을 염려가 없는 건축자재업이 적격이라 생각했다. 경안상사라는 상호는 자신이 안동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은 경북 안동의 줄임말이다. 1990년도 경에 안산으로 사업체를 모두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경기도 안산의 줄임말도 경안이라 경안상사라는 이름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지금은 아내에게 경안상사를 맡기고 이젠건설 회장으로 더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어릴 때 형편이 어려워 워낙 돈에 구애를 많이 받아봤기 때문에 항상 ‘최고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최고는 아니더라도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생각하기에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단다. 미약하게나마 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자부하고, 자신의 회사에 속한 30여명의 직원들의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것도 무엇보다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욕심을 내기 보다는 지금 회사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향우회 회원들과 교류하며 주변사람들을 도와주며 챙기는 삶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저는 부모님 속을 유난히 많이 썩혔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소위 불량학생이었습니다. 친구들하고 추억은 너무 많지만 아름다운 추억이라기보다는 친구를 괴롭게 한 기억이 많습니다. 객지생활 하면서 철이 들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뤄보고 사업을 하면서 밑에 직원도 거느려보고 하니 내 자신도 모르게 달라졌죠. 그 당시 못했던 것을 충분히 보답해 드리는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한테도 그렇고 어머님한테도 그렇고.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할 뻔 했는데 끝까지 책임을 지고 졸업을 시켜준 은사님이 계신데 너무 고맙습니다.”
그래서 십 년 전에 그 은사님 부부를 모시고 일주일간 일본 여행을 다녀왔단다. 안동에서 출발해서 안동까지 다시 오는 동안 선생님은 지갑 한 번 열지 않아도 되도록 그이 부부가 정성을 다 해서 모셨다고 한다. 선생님이 퇴임하는 날에도 여행 티켓을 선물해 드렸더니 잘 다녀왔다고 선생님이 선물도 보내 주셨다고 했다.
“제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저를 끝까지 지켜줬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갚고 나니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합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참아낼 수 있었던 것도 저를 지켜주셨던 선생님처럼 안동이라는 것이 친구들, 친척들이 저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동사랑이 특별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마음속에 항상 고향 안동이 자리 잡고 있고 안동 말씨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잘해 주려고 애쓰고 향우회 활동 열심히 하고 어머니와 친구들이 있는 안동에 자주 내려가려 하는 것 정도. 또 서울로 올라 갈 때는 항상 안동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는 것도.
“지난번에 주위 사람들하고 안동에서 고택체험을 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우리가 가던 날 마침 그곳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아직도 그때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자랑을 많이 합니다. 제가 이제 서서히 은퇴를 준비해야 돌 나이가 되었습니다. 훌륭한 사업 파트너인 집사람도 있고 자식들도 다 커서 딸은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고 아들은 대한항공 토론토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 결혼만 시키면 제 일은 다 하는 셈이죠. 나이도 먹고 어머니도 안동에 계시고 친구들도 있고 하니까 안동으로 자꾸 눈이 갑니다. 그리고 선산도 거기 있고 하니까 나중에 안동 가서 살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고향은 그저 언제나 거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가고 싶기도 하고 가기 싫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된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