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간의 유럽 일주_ 파리2(글/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파리의 중심부를 흐르는 세느강은 시가지의 동남쪽에서 루브르 박물관 앞으로 흘러들어와 에펠탑까지 서쪽으로 거의 수평으로 흐르다가 에펠탑 앞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둥글게 유턴을 하며 빠져나간다. 루부르에서 약간 동편으로 비스듬히 흘러 들어오는 곳에는 두 개의 큰 섬이 강 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서쪽에 있는 것이 시테 섬이고 동쪽에 있는 것이 생루이 섬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세느강을 거슬러 올라 시테섬의 서쪽 끝으로 건너려면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영화로 유명한 퐁네프 다리를 건너게 된다. 시테 섬에는 프랑스의 최고 재판소도 있고 또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생 샤펠 교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노뜨르담 대성당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시테 섬의 동쪽 끝에 있어서 최고 재판소랑 생 샤펠 교회 앞을 거쳐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노트르담 앞에 섰다.
꼽추 콰지모도의 추억,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처럼 초등학생 시절부터 익히 듣고 또 온갖 미디어로부터 실물을 보아오던 건축물이나 유적 앞에 서면 처음부터 감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준비한대로 감동을 먹거나 아니면 ‘듣던대로군’ 하고 시큰둥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러나 천천히 대상을 살펴보면 듣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또 아무리 잘 찍은 영화로도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머리를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트르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줄을 서서 성당 문 앞으로 점점 가까이 가면서 그것이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보다도 엄청나게 더 크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지붕 위에서 하늘 높이 치솟은 두 개의 거대한 종탑 아래 개미처럼 조그만 사람들이 올라서서 파리 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성당 입구 문 위로 장식된 수많은 조각상들, 아마 성경 속의 등장인물이 총 출동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머리 위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의 표정만 보아도 이를 새긴 장인의 정신에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성당 입장은 무료였다. 유럽의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안 사실이지만 몇몇을 내놓고는 대부분의 성당은 입장료가 없었다. 하긴 성당 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안은 어두컴컴했으나 이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높은 천정과 기둥들, 거대하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파이프오르간 등이 나를 엄청나게 왜소하게 만들었다.
1163년에 시작해서 182년 걸려 지었다는 이 엄청난 집의 이름 노트르담은 본래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이고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고 했다. 즉 이 성당은 성모마리아에게 바쳐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는 노트르담이란 이름의 성당이 많았고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도 본래대로 부르면 ‘노트르담 드 파리’ 즉 ‘파리의 노트르담’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가톨릭을 대표하는 이 성당은 그 이름만큼이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지나갔다. 마녀로 찍혀 화형을 당한 잔 다르크의 복권이 이루어졌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국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고 했다. 또 이곳에서 결혼식을 치른 왕후장상은 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을 것인데 생각나는 것은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가 고작이었다. 어릴 적에 본 영화가 생각났다. 꼽추 콰지모도(안소니 퀸)가 종탑에서 줄을 타고 사랑하는 에스메랄다(지나롤로브리지다)를 형장에서 나꿔채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면 종탑을 안 볼 수 없지 않은가?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종탑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입구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몇 번을 물어물어 찾아 올라갔으나 입장료도 비쌌을 뿐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 또한 장난이 아니어서 그걸 기다리다 시간을 보내다가는 오늘 보아야할 다른 곳도 물 건너가지 싶었다. 아쉽지만 다음 예정지로 발길을 돌렸다.
청년 시절의 나를 길들여준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박물관
콰지모도가 살던 노트르담의 종탑을 못 들어갔으니 콰지모도를 만들어낸 빅토르 위고를 찾아보고자 빅토르 위고의 박물관으로 향했다. 노트르담에서 시테 섬의 북쪽으로 세느강을 건너면 파리 시청사가 나온다. 유럽의 어느 도시라도 시청 앞 광장은 꼭 들러볼 만하다. 수백 년 묵은 역사의 때가 켜켜이 쌓인 청사 건물만 보아도 그 도시가 얼마나 유서 깊은 도시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 청사 앞은 깨끗한 공원으로 단장되어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어 우리 같은 여행객들이 편안하게 앉아 한숨 돌릴 여유도 주게 마련이다. 청사 앞 공원에는 야생화들이 가꾸어져 있었고 한 쪽으로 허수아비가 시골 들녘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빅토르 위고의 박물관은 그가 살던 아파트에 마련되었다. 아파트가 좁으니 이웃 아파트까지 사서 연결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물관은 좁은 입구를 지나 어둡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계단의 한쪽 벽에는 그와 관련된 신문이나 사진들이 붙어 있고 책에 실었던 삽화도 걸려 있었다. 진열실은 유물을 보기에도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그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 시절까지의 각종 사진들과 원고를 쓸 때 사용했던 문방사우들, 그의 교우관계를 말해주는 각종 자료들이 꼬불꼬불하게 연결된 여러 개의 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작가의 명성대로라면 널찍한 방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전시실을 마련할 만도 하건만 박물관은 빅토르 위고에게 미안할 정도로 좁고 을씨년스러웠다. 방안 한쪽 구석에 세워둔 물 긷는 꼬제트의 흰색 석고상이 그런대로 방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있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레미제라블 속의 아리따운 꼬제트와 미청년 마리우스는 얼마나 나의 가슴 속을 달구어 놓았던가? 레미제라블을 통속소설이라 폄하하기도 한다지만 나에게 그 작품은 젊은 시절의 나를 지탱하던 기둥의 하나였다.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공부는 열심히 하지 못했지만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사학과에 다닌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던지. 박물관의 설비가 썩 훌륭하지는 못했어도 오랜 아파트에 낡은 가구들과 함께 놓여있는 위고의 유품들은 그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는 오히려 효과적이었다. 번쩍거리는 현대식 전시실에서 그의 인간적 냄새를 과연 얼마나 맡을 수 있겠는가?
박물관 앞에는 널찍한 공원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밑 풀밭에는 많은 시민들이 여기 저기 모여 앉아 저물어가는 파리의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대형 거울에 비친 피카소 미술관
공원을 가로질러 다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제 또 피카소를 만나러 가야지. 허리에 찬 지피에스를 들고 피카소 미술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턱대고 그 방향으로 골목을 이리저리 돌았다. 피카소 미술관은 몇 번의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다가 가장 좁은 골목 안에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시간이 6시가 넘어 이미 미술관 건물은 닫혀 있었고 안에 미리 들어갔던 사람들만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그냥 현관 앞 계단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 건너편에는 건물을 보수하기 위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나는 처음 그것이 큰 설치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커다란 유리벽을 건물 높이만큼 세워 앞쪽 건물이 그대로 거울 속에 반사되고 있었다. 절반짜리 건물이 거울 속에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모습은 현대적 냄새가 물씬 나는 설치작품 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공사장을 가린 차단벽일지라도. 피카소의 유족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속세로 인해 피카소가 남긴 작품들 모두를 파리시에 기증하여 마련된 미술관이라는데 들어가 볼 수는 없으니 마당에 앉았던 걸로 본 것으로 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현관 앞만 보고 지나칠 곳이 앞으로 얼마나 많겠는가 생각했다.
피카소 미술관이라면 피카소가 화가로 출발한 바르셀로나의 것을 대표적으로 칠 수 있겠으나 작품의 수나 질에서라면 당연히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을 첫 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없다. 91년을 살면서 80년 이상을 작품 활동에 매진한 그는 엄청난 작품을 세상에 남겨 나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의 진품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을 통시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는 20세기 역사의 변화를 통째로 그림으로 표현해 냈으며 그래서 그의 그림은 바로 현대 세계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초기의 청색시대와 장미시대 작품들을 아직도 사랑하지만.- 귀국해서 알았지만 미술관은 2009년 8월 24일부터 확장공사에 들어가 2012년 2월 다시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는 전시장이 1000 평방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그때가 되면 2000평방미터로 넓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 때 다시 이곳을 올 수 있을는지.
여기서 몽마르트르 호텔까지는 몇 킬로미터나 될까? 지도를 펴보니 대충 4킬로 정도이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냥 천천히 걷기로 했다. 사실 뭐 별다른 방법도 없으니까. 가다가 잠깐 옆길로 새어 퐁피두 센터 겉모양도 보고 지피에스가 가리키는 대로 한 방향으로 줄곧 걸으니 비스듬한 언덕길 위로 물랑루즈의 풍차가 보였다. 아직 해는 중천에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여덟시가 거의 되었다. 파리의 하루가 정말 힘들게 지나갔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것은 아닌지.
운동화에 점령당한 베르사이유
파리에서의 셋째 날은 자동차를 타고 베르사이유를 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오늘이 사실상 파리의 이틀 째 관광이고 또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내일은 파리 서쪽 노르망디 해안 근처의 몽생미셀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낸 후 베르사이유로 가는 길은 네비게이터에 맡겼다. 파리의 서쪽 외곽길을 달리다가 다시 세느강을 건너 남쪽의 시원한 녹색 들판을 잠깐 달리는가 했더니 바로 조그만 도시가 나오고 이어서 차는 돌이 잔뜩 깔린 넓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대놓고 사람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늘어선 기다란 줄이 두 군데 있다. 왼쪽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줄은 매표를 위한 줄이고 광장 중앙에 늘어선 줄은 입장을 위한 줄이다. 우리는 이미 파리의 박물관 패스를 샀으므로 바로 입장객 줄 뒤에 섰다. 줄은 백미터는 넘게 보였는데 다행히 줄어드는 속도는 그리 느리지 않았다. 박물관 패스를 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들어가면서 올려다 본 지붕은 다락방 창틀에 황금빛 용마루가 얹혀져 있었고 다락방 창틀도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어 호사스러움을 뽐내고 있다. 베란다 난간이나 지붕 처마 끝에는 여러 여신상들이 제각각 포즈를 취하며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침시간이어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궁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았으나 이는 본래의 현관은 아니다. 들어가면서 처음 본 것은 왕실교회당이다. 몰려선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본 교회당의 내부는 어두컴컴했으나 금빛으로 빛나는 제단과 그 뒤의 장식들이 어두운 공간을 가로질러 눈에 들어왔다. 2층 난간 위로는 파이프 오르간의 은빛 파이프들이 장식기둥처럼 버티고 섰다. 그리고 그 위 푸른 하늘에서 성인들과 천사들이 회당 안을 내려다보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 천정화를 보려면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궁전 안을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교회당 2층에 서 있었다. 2층에서는 왕족들이 예배를 보고 1층에서 귀족들이 예배를 보았다고 하는데 왕족들이 하늘로 가는 우선권이 있었는가? 루이 14세는 이곳에서 매일 예배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는 지금 하늘나라 어디쯤 살고 있을까?
궁전 한복판에 창문으로 바깥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울의 방’이라는 궁전의 중심 공간이 있었다. 방의 길이 73미터, 너비 10.5미터, 높이 13미터의 기다란 이 방은 창문 안쪽의 벽체 위에 거울을 장식하여 ‘거울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천정에는 루이 14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프레스코화가 가득 덮여 있다. 그 아래 공중에는 화려한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샹들리에에는 촛불이 밝혀져 있다. 창문 밖으로는 햇살 가득 내려 쪼이는 녹색 정원이 시선이 끝나는 곳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이 화려한 방에 운동화를 끌고 반바지 차림에 허름한 배낭을 걸머지고 배회하는 사람들이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눈에 베르사이유는 운동화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삼대를 못 버틴 절대권력의 산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스스로 대 예술가를 자처했고 뛰어난 발레리노의 10대를 보냈다.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귀족들의 등살에 힘겹게 살다가 21살에 섭정 마자랭이 죽고 겨우 왕으로 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반란군에게 쫓겨 다니면서 목숨조차 위태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절대왕권을 세우는데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궁전에서의 법도도 엄격하게 규율화 하였고 모든 신하들에게 절대충성을 강요했다. 스물다섯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그가 이 궁전을 중심으로 해서 절대주의 왕정을 펴나간 배경은 그의 개인사적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죽으면서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말은 볼테르가 꾸며댄 것이라 한다. 실제 루이 14세는 죽으면서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과 반란을 치루면서 엄청난 세금을 부담한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루이 14세는 태양 노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 궁전 안에서 엄격한 규율을 강요받았던 귀족들도 마음속으로부터 그를 태양으로 받들었을까? 어쨌든 그는 그 자신의 화려한 왕성 안에서 왕비 마리 테레제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로부터 열두 명의 자녀를 남겼고 자녀의 수에 반비례하여 나라는 점점 더 골병이 들어갔고 문란한 성생활 때문인가 그의 몸도 함께 병들어 갔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울의 방은 루이 14세라는 절대 권력자의 영광과 영화로운 삶을 보여주지만 그 뒤에 서려있는 암울한 그림자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볼테르는 루이 14세의 시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했다고는 하지만 연속된 전쟁과 내란,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세금이 사람들의 가슴 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가뭄과 전염병의 창궐로 1710년 한 해에만 3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했다. 루이 14세는 1715년 9월 1일 일흔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육신이 병에 시달릴 무렵인 18세기 초 파리 시내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의 대자보가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고 한다.
베르사이유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이름을 이제 거룩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어디에서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더 이상 맹트농 부인의 시험에 들지 마옵시며
그리고 재무총감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
아멘!
이는 주기도문을 패러디하여 말년의 루이 14세를 비방한 것이다. 위 기도문에 나오는 맹트농 부인은 만년에 루이 14세의 사랑을 받으며 정권을 농단하던 여성으로 왕자들을 가르치던 가정교사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루이 14세에게 이를 갈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루이 14세가 죽은 이후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르고 그는 60년이나 왕 노릇을 했다. 그러나 내정과 외교 모두에서 뚜렷한 업적을 내지 못한 그도 여성들과의 문란한 생활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개인의 인생에서 모두 성공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루이 16세 역시 무능하면서도 이전부터 내려온 사치스러운 궁중생활의 나쁜 전통만을 그대로 이어받아 드디어 터진 1789년의 대혁명으로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베르사이유는 더 이상 절대권력의 중추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베르사이유의 몰락은 유럽 역사에서 근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미 이 시기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권력이 시민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 결정타가 프랑스 대혁명이고 그것은 베르사이유 궁전이 왕궁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 후 거울의 방에서는 세계사의 향방을 정하는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기도 하고 국제적인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것으로는 베르사이유 조약이 있다. 1차대전 후 국제연맹을 탄생시키고 독일을 전범국으로 정하고 독일로부터 전쟁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서 연합국들이 서명한 독일로서는 치욕적인 조약이 이 방에서 체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40십 여 년 전 1871년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바로 이 거울의 방에서 자신이 독일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했다. 이 선포로 인해 프로이센의 독일 지배가 확고해졌으며 또한 프랑스 왕궁에서 선포함으로써 프랑스도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온 것임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참으로 역사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프랑스 한국을 표절했네!
일일이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개의 방을 거쳐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이 궁전의 주인이 태양왕이란 사실을 새삼 기억시켜주려는 것처럼 정오를 조금 넘긴 태양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뒷마당의 궁전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나왔으나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쪼이는 햇볕 저 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정원의 길들이 우리를 지치게 했다. 우리는 그냥 파리 시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늘이 실제 마지막 파리 여행이니 파리의 랜드마크들을 더 확인해야 한다.
차 문을 여니 열기가 그대로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어느 정도 열기를 시킨 후 시동을 거니 기름이 거의 바닥이다. 네비게이터를 눌러 가까운 주유소를 찾았다. 주유소는 우리가 가야하는 반대쪽에 있었으나 그래도 일단 기름부터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주유소를 찾아 기름을 가득 넣고는 바로 파리 시내로 방향을 꺾었다. 이제는 차를 가지고 파리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 우선 에펠탑으로 목표를 정했다. 차는 오던 길을 그대로 다시 거슬러 가다가 시내 가까운 곳에서 오른쪽으로 고속도로를 바꾸었다. 이내 세느강이 눈에 들어왔다. 길마다 차고 넘치는 자동차의 물결이 미리부터 주차할 걱정을 하게했다. 에펠 탑을 눈앞에 두고 골목길을 여기저기 드나들었지만 어떤 길이든지 내 차가 설만한 공간을 찾기는 어려웠다. 집사람이 공용주차장 표지판을 발견하고 표지판을 따라 방향을 몇 번 바꾸니 에펠탑을 북쪽으로 바라보는 큰 길가에 널찍한 주차장이 있었다.
다행히 차는 많지 않았다. 적당한 공간에 차를 막 세우는데 허름한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땅에서 무언가를 줍더니 내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에는 금반지처럼 보이는 노란 반지 하나가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와 몸짓으로 말을 건넸다.
“이 반지 당신 것이지요? 가져가세요.”
“아니 아니에요.”
그래도 사내는 막무가내로 반지를 내게 넘겨주려 했다.
억지로 반지를 뿌리쳤더니 이번에는 옆에 있는 아내에게 반지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 것 아니래도 그냥 가져요. 어차피 내 것도 아니니 당신 드릴게요.”
아내가 반지를 보니 그것은 노란 구리 반지처럼 보였다.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가 다시 말했다.
“그 반지 가지는 대신 술이 한잔 하고 싶은데 술 값 좀 주시오.”
이제야 그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생각해보니 지금 본 부랑인 같은 사기꾼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나는 반지를 던져주고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빠져 나와 에펠탑을 바라보고 천천히 걸었다. 자동차가 안전할지 걱정이 되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울타리를 빠져나와 왼쪽으로 몇 걸음 옮기니 어디서 많이 본 디자인의 기념물이 보였다. 그것은 서울 올림픽 공원의 평화의 문을 그대로 축소해 옮겨 놓은 듯 했다. 문 양쪽에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운 것도 똑같았다. 나는 처음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 김중업이 파리의 기념물을 흉내낸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이 기념물은 2000년에 세웠다고 되어 있으니 김중업의 올림픽 공원 기념물보다 무려 12년이나 뒤의 일이다. 그러니 이건 누가 뭐래도 프랑스의 건축가들이 김중업을 표절한 것이다. 거기다 이름까지도 ‘평화 모뉴먼트’로 비슷하다. ‘평화의 문’이나 ‘평화 모뉴먼트’나 그게 그거 아닌가? 이름까지도 그대로 베꼈다. 아, 세계 디자인의 중심지 파리에 한국 것을 표절한 것이 있다니 그것도 에펠탑이 마주보이는 샹드마르스 공원 입구에서. 기념물의 한쪽에는 아크릴 판을 세우고 세계 여러 나라 말로 ‘평화’라는 말을 잔뜩 써놓았는데 그 맨 밑에는 한글도 있었다. 이런, 한국 것 베껴놓고 한글은 맨 밑에 써놓다니.
하늘에 똥침 주는 쇠송곳 에펠탑
샹드마르스 공원은 평화 모뉴먼트에서 에펠탑까지 약 750미터 정도로 중앙에 길게 잔디밭이 있고 그 양쪽으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여기 저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보기도 했다. 에펠탑은 바로 앞에 있는 듯 보였으나 생각보다 멀었다. 공원 한쪽으로 걸으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에펠탑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 이 거대한 철제 피뢰침을 시내 한복판에 세웠는가하는 의문이었다. 밑에서 치켜보는 에펠탑은 참으로 거대했다. 이미 백년도 더 전에 당시로서는 아마 최신 건축기법을 써서 초현대식 건축물을 세웠다고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었겠지.
파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세운 높이 300미터의 이 철제 건조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초의 계획대로 세운지 20년 뒤인 1909년 헐었어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느강변의 고색창연한 도시에 하느님에게 똥침이라도 매기듯이 쇠송곳을 거꾸로 박아놓는 고약한 심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이 관광수입을 올려주니 파리의 효자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할 터이나 에펠탑 없다고 볼 것 많은 파리에 관광객이 줄어들겠는가? 에펠탑은 샹드마르스 공원 어구에서 본 표절 작품처럼 프랑스 사람의 이해 못할 심사의 하나였다.
어쨌거나 에펠탑은 거대했고 그 밑에 있는 사람 기 죽이기 딱 맞았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 기죽일 일이야 뭐 있겠는가? 한번 위로 올라가 보기도 싶었으나 길게 늘어선 인간띠가 에펠탑보다 또 한 번 우리의 기를 죽였다. 그냥 근처 빵 가게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샤요궁으로 향했다. 샤요궁은 에펠탑에서 세느강 건너의 작은 언덕위에 웅장하게 서 있다. 좌우 대칭의 권위적 건축물은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에펠탑을 껴안으려는 듯한 모양으로 눈에 들어왔다. 국립극장, 인류학 박물관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인류학 박물관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인류학 박물관은 내부 수리 중으로 문이 닫혀 있었다. 그냥 광장에서 에펠탑을 바라보고 한참을 쉬었다. 광장에는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여러 가지 춤을 추면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곳 젊은이들은 사람이 좀 모일만한 곳이 있으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고 사람들을 흥겹게 했다. 기왕 구경다니는 데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은 듯 했다. 또 한쪽에서는 아시아 어느 곳에서 온 사람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결혼예복을 입은 신랑 신부를 가운데 두고 결혼식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되어도 중천에 뜬 태양으로 인해 한 낮처럼 생각되는데 그래도 태양의 열기는 어느 정도 식는 것 같았다.
개선문 위에서 건너다 본 거대한 설치미술, 라데팡스
다시 발길을 개선문으로 돌렸다. 오후 일정의 대표적인 곳이 에펠탑과 개선문이다. 사실 이 두 곳은 별 흥미는 없었으나 여기도 안보고 오면 친구들이 파리 갔다 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 덮어놓고 잡아놓은 일정이다. 샤요궁에서 길을 건너 로타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두 번째 길인 클레베르 거리를 북쪽으로 약 1.2킬로미터 올라가면 개선문이 있다. 멀리 마치 거대한 돌기둥 같은 개선문의 측면이 가로수 숲 위로 우뚝 서 있었다. 이미 베르사이유에서 부터 중노동을 한 우리의 다리에게 1.2킬로미터는 그리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나무 그늘을 골라 휘적거리며 걷다보니 개선문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방사상으로 펼쳐진 열 두 개의 길이 모여들어 둥근 로타리를 형성하고 있고 그 중심에 샤를 드골 광장이 있으며 광장의 중심에 개선문이 서 있다. 로타리 밖에서 건너다 본 개선문은 그 크기만으로도 전 세계에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워줄 만 했다. 높이 50미터이니 현대 건축물로 따져도 16,7층은 되는 높이다. 약 7,80미터 밖의 인도에서 보아도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보아야 한다. 드골 광장으로 건너는 지하도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몇 개인가의 횡단보도를 건너고서야 겨우 광장으로 건널 수 있었다. 문은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샹젤리제 거리를 통해 연결되고 그 길이 개선문을 통과하여 다시 멀리 파리의 마천루 지구인 라데팡스와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을 바라보면 거의 남서쪽이다. 1806년 나폴레옹의 명으로 설계가 되었지만 나폴레옹이 죽은 후인 1836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개선문을 만든다고 목에 힘주고 있을 때 과연 누가 10년 후 황제에서 쫓겨나고 유배생활 끝에 생을 마감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문은 그가 죽은 후 다시 1년이 지나 완공되었으니 귀양 가서 죽은 황제의 야심찬 마스터플랜을 몇 십 년이 걸려서라도 완성시키는 프랑스 사람들의 끈기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312년에서 315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파리 개선문의 사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개선문의 나라는 이태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태리 개선문의 숫자는 열다섯 정도로 프랑스와 비슷하지만 프랑스 것이 19세기 것이 많이 포함된 반면 이태리는 기원전 7세기의 수사 개선문을 비롯하여 거의 전부가 4세기 전후의 로마시대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개선문 건립의 붐을 일으킨 것은 역시 프랑스로 보이는데 현재 전 세계에 있는 개선문은 대략 70여개로 꼽힌다. 그 중에는 평양의 개선문도 있고 서울의 독립문도 있다. 몇 년 전 라오스에 갔을 때 수도 부앵쨩에서 본 개선문이 생각났다. 많은 개선문들이 권력자들의 절대권력을 영속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보면 나폴레옹의 개선문이 얼마나 많은 부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의 개선문은 2차대전의 종전 선언이 있은 후 수많은 파리 시민들과 연합군들이 개선문 앞에 쏟아져 나와 다시 찾은 평화와 자유에 환호를 하던 기록 영화의 장면이다. 어렸을 때, 지금 생각해보니 2차대전 끝난 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 우리는 그 장면이 끼어 들어간 기록필름을 정말 많이도 보았다.
개선문 위에는 개선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다. 얼마 전 안동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 교수로 부임한 유동환 교수가 파리에서 시간이 나면 꼭 한번 가보라고 권한 곳이다. 그 곳에는 개선문의 모든 것을 현대적 전자장치를 총동원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개선문 자체가 하나의 대형 유적이고 그 유적 내부에 개선문의 역사에서부터 건축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철저하게 해부하여 보여주는 작은 테마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어려운 옛 역사를 최첨단 기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쉽게 들이댈 수 있는지를 그 박물관은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개선문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한 것은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가서 멀리 라데팡스를 바라보았을 때이다. 높이 솟은 마천루군 한 복판에 콩코르드 광장과 개선문을 잇는 직선의 맨 끝에, 거기에 또 하나의 개선문이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전위적 설치작품을 개선문을 향하여 세워놓은 듯이. 그것은 높이 110미터의 초현대적 건축물 그랑다르슈였다. 사각형으로 우뚝 솟은 건축물 한 가운데 뻥 뚫어진 빈 공간으로 건너편의 저녁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첨단과 고전의 조화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문 닫은 기메 박물관을 거쳐 다시 에펠탑 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7시가 좀 넘었다. 간단한 저녁을 호텔 방에서 먹은 후 창을 보니 밖은 아직도 대낮이다. 오늘이 파리의 마지막 저녁이니 몽마르뜨르 언덕을 안 올라갈 수 없지 않은가? 호텔을 나와 언덕길 위를 향하여 천천히 걸었다. 언덕 위 골목길에는 온갖 관광기념품 상점들과 초상화가들로 걷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몽마르뜨르의 가장 높은 곳에는 유명한 샤크레쾨르 성당이 있다. 내부를 둘러보고 성당 앞 마당으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물어가는 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멀리 우리가 어제 오늘 무거운 다리를 끌며 여기저기 다닌 곳들이 손에 잡힐 듯 들어왔고 성당 밑 계단 아래서는 젊은 아이들의 춤과 노래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 저기 쉴 새 없이 다리를 혹사시켰지만 보고 싶은 곳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은 이렇게 파리를 접어야 한다. 이제 유럽여행의 첫머리를 겨우 지나고 있으니까.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