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마뜰(글/백소애_편집기자)
마씨의 들 마뜰, 인어룡의 전설
옛날 늙은 총각머슴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머슴생활에 질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강물이 굽이치는 언덕에 섰다. 뛰어내리려 순간 예쁜 여인이 나타나 “소녀는 이 아래 소(沼)에 사는 인어입니다. 소녀의 말을 따르면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하며 말렸다. “저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고 하는데 임하에 사는 용이 번번이 방해를 하니, 여기서 소녀가 용으로 화하여 하늘로 오르려할 때 필경 저 위의 임하룡이 나타나 맞붙어 싸울 것이니 그때 큰 소리로 '야 이놈아'하고 소리만 쳐주면 그 소리에 임하룡이 한눈을 팔 때 그를 물어 죽이고 하늘로 오늘 수 있을 겁니다.” 하니 총각은 그렇게 하기로 승낙을 했다. 임하룡과 인어룡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 총각이 인어룡이 일러준 대로 "야 이놈아"하고 외쳐 임하소의 용이 한눈을 판 새 인어룡이 승부를 끝내고 승천하였고 머슴에게 넓은 토지를 주었다. 이 머슴의 성이 마씨(馬氏)였으므로 마씨의 들, 즉 마뜰이라 불리게 되었고 용이 올라갔다고 하여 용상(龍上) 인어룡이 사람으로 나타난 언덕을 선어대(仙漁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09년의 끝과 2010년의 시작은 눈
며칠째 비가 내리더니 기어코 눈으로 음력 2009년을 마무리를 한다. 이 일련의 이상기온 현상을 ‘엘니뇨 모도키’라고 한단다. 일종의 변형 엘니뇨라는 건데, 날씨건 세상이건 사람이건 이젠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만 같다. 눈이 내리니 마침 눈발이 날리는 골목을 거니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서둘러 길을 나선다. 눈 내리는 날, 용상의 전설을 안고 길을 나서니 제법 운치가 있다.
싸라기눈은 땅에 닿으며 바로 녹아 추적추적해진 길로 변해 지나가는 차를 피해 조심스레 걸어야만 했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빙판길이 될 것이 분명해보였다. 우산을 써도 될법하고 쓰지 않아도 그만인 날이었다. 시내에서 법상고가를 건너 용상시장에서부터 길을 걸어본다. 설 대목을 앞두고 있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눈발이 날리는 복개천 정자에는 사람이 없다. 건너편 세탁소가 있던 자리는 화재로 인해 휑했는데 타이어와 문짝이 나뒹굴고 있었다. 안쪽으로 길을 꺾어 잠시 성곡길로 접어 들어본다. 중들2길과 3길이 교차하는 성곡길 담벼락에는 누군가 붉은 스프레이 락카로 써놓은 소녀시내 멤버 ‘제시카’의 이름이 적혀있다. 중들과 중평은 용상초등학교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용상동의 중심이 되는 가장 큰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인적 드문 성곡길, 봄을 기다리는 들마루
인적이 드문 골목길 어느 집 대문 앞에 놓인 들마루에는 사람 대신 눈만 앉아 있다. 들마루는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다지는 곳이다. ‘평상’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동네의 슈퍼나 이장, 반장, 통장 혹은 터줏대감 집 앞에 펼쳐져 동네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는 모기향을 길게 피워두고 부채로 더위를 쫓기도 하고 수박을 쪼개 먹기도 하고 화투장을 돌리기도 하고 누구누구의 뒷담화를 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를 보며 숙덕이기도 하는 곳이다. 골목에서 눈을 맞던 자전거는 잠시 뒤 자전거의 임자인 한 할아버지가 집으로 끌고 들어간다. 연통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훈훈한 연탄온기가 밖에까지 이어질 듯하다.
어느 집 옥상에 장독 하나가 눈을 맞고 있었다. 또 다른 집 대문 옆에는 부부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당연하지만 흔치 않은 풍경이다. 새 주소가 부여되면서 집집마다 건물번호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공터에는 재활용품을 모아두는 공간인 듯 갖가지 물건들이 천막포장에 덮여 있다. 시계와 핸드백 등 폐품을 활용해 문 앞에 소품처럼 걸어둔 집이 있었는데 아마도 재활용품의 주인장이 사는 곳이리라. 재잘거리는 아이둘이 눈을 맞으며 지나간다.
성곡길을 빠져나와 낙동사진관을 지난다. 안동의 주요행사가 있으면 꼭 현수막을 붙여놓는 육교를 건너 용상전화국 건너편 신우상사 골목길, 마들길로 접어든다. 마씨의 들이었다니 마들이 맞겠고 실제 골목 이름도 ‘마들’로 지어졌지만 안동사람은 ‘마뜰’이라 부르지 않던가. ‘자장면’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마들’이라는 이름을 나는 그냥 마뜰이라 부르기로 한다. 용상전화국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만 KT로 바뀐 지 오래됐다. 글로벌 시대에 기업명이나 브랜드명이 대부분 영문화 되고 있다. 영문화가 곧 글로벌로 이어지는 것인지는 의문인데 3살짜리 조카도 ‘올레’하고 외치니 광고효과는 제법 먹히는 모양이다.
아파트와 빌라, 개조된 한옥이 공존하는 마뜰
내부공사를 하는 듯한 한옥집에서는 뿌리가 얕은 나무 두 그루를 담장 안쪽에서 내뺀 밧줄과 호스를 이용해 단단히 동여매어 놓았다. 왼편 공터에는 낡은 냉장고 위에 빨갛게 꽃이 피어 있다. 도도하게 피어나는 것이 움츠린 사람보다 낫다. 헌옷수거함은 입구로 들어가지 않는 담요를 머리에 이고 있고 대성전원빌라 안에는 우산을 쓰고 있는 오토바이가 보인다. 몸체를 비닐로 싸고 그것도 모자라 우산까지 씌워진 오토바이 역시 사람보다 팔자가 낫다.
젖은 땅에는 뽀얀 곰탕색깔의 연탄재가 나란히 서 있다. 연탄을 피웠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연탄보일러는 구들장 밑에 호스를 넣고 끓인 물의 증기를 이용했었다. 연탄을 덮는 뚜껑 대신 큰 플라스틱 물통에 연결된 뚜껑을 덮으면 물이 순환되면서 덥혀지는데 아침마다 머리를 감는 순서가 늦어지면 온수가 아닌 찬물이 돌아와 자매들끼리 다퉜던 기억이 난다. 위아래 연탄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으면 2홉들이 소주병을 이용해 두들기기도 하고 것도 어려우면 식칼 뒷면으로 때려 떼어내기도 했다. 방문 앞에 둔 찬물 한 대접은 자리끼 대신도 있지만 연탄가스를 걱정해서 놓아둔 것이기도 했다. 혹 연탄불을 꺼뜨리는 날에는 번개탄을 붙이기도 했고 옆집에서 윗 장을 얻어다가 불을 지피곤 다음번에 옆집이 빌리러 올 때 잊지 않고 똑같이 한 장 내주기도 했었다.
골목에는 마침 주유소 기름차가 골목을 막고 서 있었다. 쓰레기 배출장소에 곧잘 연탄이 나오기도 하지만 주택가의 난방은 기름보일러를 많이 이용한다. 한 드럼에 20여만 원의 기름을 넣으면 주유소 상호가 찍힌 곽 휴지 한통을 사은품으로 받곤 한다. 신용카드며 현금영수증을 모르는 노인들이 기름을 넣으면 주유소 입장에서는 더욱 짭짤할 것이다. 가끔은 주유 미터기에 표시된 주유량과 호스에 남았을 기름 때문에 서로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개조된 한옥건물이 많은 이곳에는 겨우내 기름 걱정에 외풍 걱정에, 얼른 봄이 오고 여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어느 한옥집 벽에는 가루를 치는 나무 체가 걸려 있고 마당 안 나무에는 일부러 걸어놓았는지 실수로 걸렸는지 모를 장난감 망원경이 팽팽하게 매달려있다. 당그랗게 벽에 걸려있는 체는 날리는 눈발을 보드랍게 쳐줄 것만 같았다. 체와 망원경은 곧 할머니와 손자가 연상된다. 중간 세대의 흔적이 없는 주택가 풍경, 불편을 감수한 한옥집 거주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거나 맞벌이 자식들을 위해 돌보는 손자 손녀들이다.
한옥집, 다락방의 추억
개조된 한옥집 건너에는 대성전원빌라가 서 있다. 마들길을 빠져나가 큰길 건너에는 용상5,6주공아파트와 현대아파트가 서 있다. 같은 거주지에서 서로 다른 주거공간인 한옥, 아파트, 빌라가 공존하고 있다. 인근 길주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은 하교 후 아파트 쪽으로 많이 향한다. 아이들의 부모가 대부분 30~40대일 테니 주거공간은 아파트가 많을 것이다. 자연히 용상동 일대에는 술집과 치킨, 배달가게가 많아졌다. 퇴근 후 거주지 부근에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인터넷과 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해 제공되는 양방향 텔레비전 서비스인 IPTV가 늘어나면서 용상동 큰길가의 비디오대여점은 하나만 남기고 모두 없어졌다.
용상동은 8,300여 가구에 23,000여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다른 동보다 월등히 가구 수도 인구도 많은 곳이다. 용상, 성곡, 석동, 송천이 관할 구역으로 안동시가지 동쪽에 위치해 만화 ‘보노보노’의 너구리 얼굴 모양과 흡사하다.
마뜰의 어감에 맞는 정감 있는 골목은 역시나 이곳 ‘마들길’이다. 비슷비슷한 한옥이 즐비한 골목에는 아슬아슬하게 좁은 공간에서도 나무가 반듯이 잘 자라 있었다. 어느 집엔 다락방도 있을까 깨금발로 자세히 살펴본다. 안방과 연결된 부엌 위에 위치한 다락방의 동선이 얼추 그려진다. 옛날 한옥집에 살던 때의 기억이 난다. ‘유상고’라 불렀던 다락방에는 발로 굴리다 손으로 돌리는 가정용으로 개조한 재봉틀과 아빠의 오래된 상장, 오빠의 교련복, 나의 일기장, 엄마의 처녀적 원피스 따위가 나프탈렌냄새와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앉은키만 한 공간이어서 항상 머리를 수그리고 들어가야 했고 줄나간 언니의 오래된 세고비아 기타가 비스듬히 서 있고, 경음악 메들리, 들국화 1집, 해바라기, 배따라기 테이프, 영국그룹 퀸의 음반, 페루의 민담 같은 오래된 책도 먼지를 먹고 있었다.
담장이 높아 그런가 같은 한옥집이라지만 성곡동과 달리 이곳에는 장독대가 잘 안보였다. 보이는 것은 대부분 LPG가스통이었다.
굴삭기도 쉬는, 눈 오는 날의 마뜰
죽 늘어선 한옥집 앞에는 무너질 듯 주저앉은 담이 위태롭게 걸려 있고 두집 건너 한 골목에는 좁은 공간에도 꼿꼿이 한두 그루씩 나무가 서 있다. 임시로 세워둔 철재 담벼락에는 담쟁이넝쿨이 샌드아트처럼 담을 타고 있었다. 어설프게 비처럼 내린 눈이 한옥집 담벼락을 적시니 마치 마스카라가 얼룩진 모습처럼 벽은 덕지덕지 얼룩이 졌다.
눈 오는 날 쉬는 주인 따라 담 넘어 굴삭기도 쉬고 있는 마뜰길을 오래도록 걸어본다. 그건 눈 오는 낭만에 젖어서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어쩐지 나는 백석의 시가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많지 못한 내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 수염을 길러 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지진 것도 맛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