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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까지 안동 사나이, 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 사무관 이정원(글/천남희_객원기자, 사진/박영대_동아일보 사진기자)

봄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시간이 지난다. 꽃 몽우리를 봤나 싶었는데 벚꽃은 벌써 만개 하였고 어제까지만 해도 입 다물고 있던 목련은 벌써 꽃잎을 떨어뜨린다. 뭣이 그리 바쁠까? 자연은 만개한 꽃들을 눈에 담으러 나들이 나가지 않으면 억울한 생각이 들만큼 완연한 봄의 모습이다. 눈으로 보이는 계절은 봄인데 속으로 들어온 쌀쌀한 기운은 아직 우리네 언저리를 맴돌며 따뜻한 봄 햇살에게도 청명한 봄바람에게도 쉬이 길을 내주지 않고 있다. 지금쯤 고향 강변 벚꽃은 어떨까? 용상대교 옆 산자락에도 개살구 꽃이 몽실몽실 피어 한창이겠지. 아련한 추억속의 안동을 회상하며 또 한사람의 안동사람을 만나러 서울 나들이를 나섰다. 그날도 따스한 봄 햇살에 감춰진 바람이 골목골목 휘젓고 다녔다.

지하철 안 사람들은 거의가 무표정이다. 손에 작은 기계하나씩을 들고 뭔가에 빠져 있거나 책이나 신문을 보거나 그냥 앉아 있거나 아무런 표정이 없다.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계절도 항상 똑 같은 표정이 아닐 텐데 지상에서 마치 고독과 허무에 허덕이다 내려온 사람들처럼 그들의 모습은 닮아 있었다. 길눈 어두운 탓에 서울만 나가면 항상 지하철을 이용하지만 그 답답함을 참기란 인내심에 한계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사람과 차가 북적거리는 지상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곳에서 살면 정말 숨이 막혀 하루도 못 베길 거라고. 그 숨 막히는 5호선 지하철을 타고 공덕로터리에 위치한 한국산업인력공단을 찾아갔다.

안동양반? 서울상놈!
그곳에서 아니 서울하고도 강남에서 30년 동안 안동의 정신을, 말을, 색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는 퇴계선생 14대 손을 만났다. 그 스스로가 서울 상놈 다 되었다며 이제 양반은 안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란다. 이 시대에 무슨 양반 상놈 타령인가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말하는 양반과 상놈은 조선시대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마음 그 마음을 얼마나 지키고 실천하며 살아가느냐로 나눠지는 정신의 계급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는 진정한 좌파요 진보요 혁신 가였지요. 그게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문이 유지되지 않았겠지요. 제대로 된 양반은 혁신가였어요. 그 시대에 있어서 지식계급이 양반이었고 안동에는 좌파가 많았어요. 순수한 좌파지. 퇴계선생은 요즈음으로 치면 재야 인사였지. 벼슬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분수껏 내 형편대로 하는 것 그게 안동 정신이죠. 나도 그 정신을 이어 받으려고 해요. 그래서 한 계급으로 쭈욱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노동부 중앙노동 위원회 사무관으로 있는 이정원(54세)씨의 말이다.

24세에서 29세까지 젊은 나이로 노동부 장관 비서를 시작하면서 세 사람의 장관이 바뀌었다. 그 후 인력공단 국영기업에 2급 부장으로 발령이 났으니 그의 말대로 제대로 출세를 한 것이다. 헌데 그는 그 자리를 사양했다. 옛 조상들처럼 분수에 맞게 형편에 맞게 생활해야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또 그때만 해도 정권이 성장 중심으로 국가 경제정책을 운영하였는데 그의 생각에 언젠가는 분배 문제가 이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그 문제를 제도권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장관 비서로 있으면서 여러 정보들을 접해보니까 그 때 당시 앞으로 10년 안에 세상이 한번 뒤집어질 것 같았어요. 국민소득 3천불이 넘어가면 국민들 의식이 깨진다 말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민주화 바람이 불 것이고 그 핵심은 노동문제가 될 것 같았지요. 이미 그때는 오늘날로 치면 좌파세력이 노동 현장에 들어가 위장취업을 하고 있을 때였고. 헌대 당시 노동정책을 보면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었어요. 요즘으로 보면 내가 블루오션을 발견한 거지.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겠더라구요. 나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했지만 장관실에 있으면서 학벌사회에서 전문대 학벌로는 좀 그렇잖아요. 다 일류대 출신들이 들락거리는데. 그래서 방송통신 대학에도 등록하고 경희대 연구과정도 등록해서 나름대로 공부하려고 노력하다가 시간이 없어 끝을 못 봤지요. 그러다가 더 이상 학벌에 연연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당시 위장취업자들은 대학생이지만 노동계 인사들이나 한국노총위원장이 다 고졸 이하 학력이고 내가 이사람들하고 눈높이를 맞추려면 학교에서 이론을 배워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이미 여러 장관 비서 하면서 당대 노동 분야 석학들을 다 만났는데 미국의 어디 영국의 뭐 나왔다 하는데 이 사람들이 뜬 구름 잡는 얘기만 하는 겁니다. 그래 나는 현장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노동부에 요구를 했지요. 어디든 노동부 안에 내가 갈 자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해서 그는 인천에 있는 노동부 노동연수원에 전임 교관이라는 사무관 자리로 옮겨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여러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그게 그는 안동사람의 유전이라고 말했다. 없는 사람 도와주고 실질적으로 힘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 양반이라고. 안동사람이 제대로 된 양반이 노동문제를 배워 그것을 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으로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강사를 불러 강의를 했는데 이론위주로 하니 답답하더란다. 그가 들어도 되지도 않는 소리를 공무원이나 공사기업체, 민간기업체 대표들에게 하니 세상말로 먹히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답답함을 참다못해 86년도에 내가 직접 강의를 해봤어요. 2시간 강의를 했더니 100명중 20여명이 줄서서 명함을 받아 가며 자기네 회사에 와서 강의를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합디다. 해서 그때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 오십만 명 했지 아마. 강의주제가 뭐 따로 있나 안동말로 별의별거 다해요. 안동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으면 특별한 전문지식이 없어도 다 통하더라고요. 유학이라는 게 리더십, 직업윤리, 경영혁신, 노사관계가 다 들어있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것이 안동의 유학정신과 다 통한다니까요. 그래서 안동정신이 오늘날에도 경쟁력이 있고 유효해요.”

첫 직장에서 얻은 교훈, 지금의 직업으로 이어져
안동 중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상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평소 어머니가 사람은 아예 살만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삐그덕 거려야 뭐가 되도 된다 하길래 1979년 학교를 졸업한 후 보따리를 싸서 서울에 있는 외사촌 형들 집에서 동가숙 서가식(東家宿西家食)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80년 2월에 경기도 과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실기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보충수업비 문제로 학교와 약간의 마찰을 빚었다. 당시 보충수업비가 시간당 3000원 이었는데 월급명세서에는 2000원만 지급된 것이다. 규정대로 임금을 주지 않았는데도 입사동기생 10여명이 아무도 말을 못하더란다. 당시 선생님들이 다 그이 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인데도.

“안동 사람 수틀리면 나서잖아요. 그래 내가 정중하게 시정을 요구 했더니 안주더라고. 내노라 카이 안준다 캐서 교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문제화 시켰더니 학교가 다 발칵 디비진기라. 80년 4,5월이 전국이 어수선할 때인데 나보고 정화대상자니까 사표내라카대요. 정당한 대우를 하라고 한 것뿐이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어야지 사표를 안 냈지 뭐. 자꾸 버티니까 4년제 대학 나온 후임자를 뽑아 놓고 계속 압력을 넣는 거야. 그래 당시 노동부 청장이던 권중동 안동고 선배에게 억울하다고 말했더니 사실 확인을 하고는 문교부 쪽 기획관리실장 하던 안동사람과 연결해 줬어요. 그래서 고향사람이 좋나 봐요. 그때 일개 선생이 어째 노동부 청장을 대면 할 수 있었겠어요. 다 고향후배라 카이 만나 준거지. 역시 안동사람은 달라 자초지종을 듣더니 걱정 말고 가있으라 카대요. 학교 재단이 과천에서 그래도 쎄다고 하지만 그때부터 나도 쎈 사람이 되었부렀지뭐. 어느 날 교장이 날 조용히 부르더니 교육위원회에 아는 사람이 있냐며 요구조건을 다 들어 주겠다고 하대요. 신 권력이 교체되던 때이니까 완전히 꼬리를 내린 거지 뭐. 지금 생각하면 그건 엄연히 노동법 위반이지요. 그래 그냥 3개월 월급주면 사표 내겠다고 하고 나와 버렸어요. 안동 사람은 남의 곤궁함을 이용해서 등쳐먹지는 않잖아요. 난 또 다른 뜻이 있었어요. 원래 내 꿈이 선생이 아니고 정치를 하고 싶었는데 수가 틀려서 끝까지 누가 이기나 해 본거지. 교직생활 기껏해야 8개월 남짓 했나 봐요. 그 후에 정치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권중동(당시 노동청장) 선배를 다시 찾아 가서 솔직하게 말했지요. 청장님 모시고 일을 좀 배우고 싶다고. 그르이 방법을 한번 찾아보자 하더니 1981년 비서로 특채가 된 것입니다.”

낙동강변에서 은어잡이하던 유년
그는 9남매 중 다섯째로 서악사 옆 태화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공직생활을 해서 일정한 소득이 있었지만 당시 마작에 빠져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아 가족 모두가 고생을 많이 했었다. 백리 안에서는 남의 땅을 안 밟고 산다 할 만큼 재력이 있던 재령이씨 집안에서 더 양반이라고 진성이씨 집안으로 시집온 어머니는 없어도 없는 티를 못 내게 했다. 79세로 돌아가실 무렵 ‘내가 진성이가 문중에 와서 고생만 하고 간다’고 하실 만큼 어렵게 생활하셨다. 그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아마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가 알음알음으로 손바느질을 해서 돈 벌이를 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니 대학을 갈려고 공부를 했지만 사실상 희망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그냥 허송세월 한 것도 입학금이 없어 대학진학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재종숙부 친구였던 상지전문학교(현재 가톨릭상지대학) 교장(류시근)이 ‘그래도 반가의 자식이 배워야 한다’ 며 그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집안에서는 학교는 뭐할라고 보내냐며 여자들에게 가학(家學)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몇 살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안동 철도역에서 군청까지 포장공사를 하느라 불도저가 와서 길을 밀면 그게 그리 신기합디다. 그래 따라 다니며 구경하고 또 시발택시 지나가면 휘발유 냄새 맡는다고 따라다니고 그랬지요. 지금 생각하면 기겁할 노릇이지만. 전화국 사람들 전봇대 올라가서 전화선 연결하다 납땜하고 잘라놓은 구리선 주워 엿 바꿔먹기도 하고, 낙동강 갱변에서 은어철 되면 은어 잡고 멱 감고 천지가 다 놀 거리였지요. 낙동강 갱변에 어매가 광목 빨래하러 가면 누런 광목을 양잿물에 삶아서 모래위에 널어 옥양목 수준으로 하얗게 바래던 모습도 생각나고, 그때가 동부동에 살 때인데 문화여관 바로 옆집이어서 갱변이 엎어지면 코댈 데라 늘 거기서 살았어요. 내가 안동서 산 세월보다 서울서 산 세월이 더 많으니까 안동을 지키는 사람한테는 할 말이 없어요. 9남매 모두 객지 생활하고 지금은 집도 없고 아무도 없으니 서울 상놈 다 된 거지요. 그래도 여기서라도 안동을 알리며 안동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근데 말은 유일하게 안 고쳤어요. 일부러라도 안고치고 있는 거지. 전라도고 어디고 강의를 가도 고향이 안동이라고 밝히고 내말 그대로 써요. 그래도 다 알아 듣대. 오히려 오늘은 녹음기 들이대니 표준말이 나오네요.”

퇴계 14대손 자부심 잊지 않고 삽니다
그 진짜 안동 사투리라도 잡고 있음이 그에게 오히려 위안이 될 수도 있음 일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안동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안동말씨를 쓰고 있었다. 사실 고향 떠나 살다보면 어느새 그 곳의 말씨를 쓰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방 억양에 서울말을 섞어 어정쩡한 말씨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고향 분들 모임인 재경안동향우회, 재경 대구경북 도민회, 상락회, 퇴계학 진흥 협의회, 박약회, 진성이씨 서울 화수회, 영가회 등 안동과 관련된 단체는 다 거질러져 있어요. 선배들이 다 감투 씌워 놓은 거지. 감투가 뭐있나 심부름 하고 회비 더 내는 거지요.”
비록 안동을 떠나 살고 있지만 그의 삶은 그대로 안동이었다. 1남 1녀를 둔 그는 아이들에게도 항상 퇴계 자손임을 강조 하며 그가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에게서 배운 가풍을 그대로 전수 하고 있었다. 강남에서 그의 가족은 유명하다.

“아이들이 중학생일 때 ‘퇴계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에 학교를 결석시키고 데리고 갔었는데 학교가 난리가 난 겁니다. 세상에 이런 부모도 없고 또 퇴계선생 후손이라는 사실에 놀란 거지요.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휴대폰이 없었고 또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배운 아들이 친구들에게 항상 존댓말을 썼다고 하대요. 어린 시절 조부 손에 이끌려 도산서원 가서 배운 걸 얘들한테 얘기해 주며 너들 고향은 안동이라고 항상 말했지요.”

퇴계선생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여러 가지 제약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성적이 우수했으니 인성과 성적을 모두 잡은 그의 교육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전문대를 졸업한 그가 명문대룰 나온 아내와 결혼 할 때도 그는 안동정신과 양반정신을 팔았다고 한다. 장관 비서직에 있었고 천 원짜리 돈에 나온 집안이라는 사실에 참 대단하고 부자인줄 알았는데 뒷조사를 하고는 시골 양반집이라 별나고 까다롭고 고생한다며 딸 내주기를 거부했단다. 그렇다고 그가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었다. 서울은 어떤지 모르지만 안동 사람은 아니 양반은 한번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결혼약속을 했으니 당사자들의 의사가 중요한 것이라며 떳떳하게 맞선 것이다. 물론 결혼 후 아내는 한 십년간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서울 대치동아파트에서 생활 하던 그이가 안동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올해부터는 안동식혜도 만들었는데 그의 입에 맞아 이제야말로 안동 귀신 다 되었다고 귀띔 해줬다.

그는 옛날을 이야기 하면서 나를 내세우는 것 그것이 문화라고 한다. 옛 것은 지나고 보면 다 값진 것이라고. 그 값진 문화 속에서 살아와서 지금까지 경쟁력을 가지고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것이란다. 이제는 정신만 가지고 있지 객지인이라 고향에 별 도움은 안 된다고 말은 하지만 그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두 팔 걷고 나선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를 가든 얘기 한다. 안동말이 표준말이라고.

“조선의 모든 예법이 안동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안동 말이 상류사회가 쓰던 말입니다. 우리 마누라는 어거지라 카는데 퇴계 선생이 한양 와서 벼슬 할 때 뭔 말 썼겠어요. 다 안동말 썼지. 안 그르이껴”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