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그려내는 안동문화, 만화가 신진석(글/이희수_프로랜서 작가)
독서실에 가기 전 으레 들리던 코스가 만화방이었다. 학창시절 만화에 빠져 살지 않았던 사람도 있을까. 어쨌든 필자는 드래곤볼이 해적판으로 나오던 시절, 처음 만화책을 접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수험생이라는 고3 꼬리표를 달았을 때조차도 교과서보다 만화책을 더 많이 보지 않았을까 싶다. 한 때는 ‘이렇게 끝내주게 재밌는 만화’ 를 그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에 대한 은근한 동경도 있었다. 지금도 그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땐 좋아하는 만화가에 팬레터를 썼는데 인기 만화가의 인기로 치면 지금의 잘나가는 연예인 못지않았을 듯싶다. 비슷한 연배 되는 한 지인은 팬레터를 보낸 만화가로부터 답장도 받았다고 하니 인터넷에서 몇 초의 타자로 끝나는 댓글로 소통하는 지금보다는 어쨌든 훨씬 낭만적이다.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만화가’하면, 때문에 필자는 그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어떤 부류’라고 생각되는 만화가의 작업 스토리를 흔하게 들을 수 없기에 이달에 만난 신진석 만화가와의 만남이 적잖이 설렜다. 아이큐 점프를 통해 데뷔한 정통 만화가, 안동출신의 신진석(47) 만화가를 만나봤다.
1. 시나리오 - 인연
갸름한 턱 선에 동그란 안경테가 그를 더욱 익살스럽게 보이게 했다. 날렵한 콧날 아래로 깊게 패인 인중과 얇게 올라간 입 꼬리가 고집스럽게 보였다. 게다가 셔츠와 자켓을 갖춰 입은 모습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만화가라고 하면 왠지 서글서글하기만 할 것 같고 항상 유쾌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감은 오산이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 같은 딱딱함과 중년에 들어선 무게감이 느껴지는 ‘어른’ 이었다. 왜 만화가라고 하면 ‘어른’ 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너무나도 당연한 ‘어른’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학창시절 만화책 속에 파 묻혀 한 때는 연습장에 순정만화를 그려보았던 필자로서는 앞에 마주한 만화가의 생애 첫 대면에 살짝 헛헛함이 남았다. 하지만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화는 쉽고 재밌으니까 작가도 그러지 않을까. 만화가도 쉽고 재밌는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잘 볼 수 없는, 만화가의 시선이라는 것이 결코 예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쉽고 재밌는 이야기 뒤에는 늘 어렵고 고통스러운 혹은 슬프기도 한 ‘현실’이 있다. 그러한 세상을 유쾌한 터치로 그려내는 만화가의 진정성이, 미처 몰랐던 만화가의 모습이었다.
벽면 가득 차 있는 만화책과 지저분하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는 만화가의 작업실과 달리 신진석 만화가의 두 평 남짓한 작업실은 꽤 단정했다. 평소 그의 부지런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작업실이 그가 처음 자리를 튼 곳은 아니다. 모든 만화가들이 그렇듯이 흔히 유명 만화가의 일을 도와주는 문하생으로 시작하는 것이 만화가로 입문하는 길이다. 그 역시 그랬다. 중학교 때부터 연습장에 재미삼아 만화를 그리던 그의 만화는 친구들이 돌려볼 만큼 인기가 많았다. 천리동에 살던 어린 시절 그가 살던 집 앞에 만화방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가까이 접한 것이 자연스러웠고 덕분에 가끔 가게를 봐주면서 공짜로 만화를 실컷 봤던 그때가, 만화가로서의 그의 인연이 그려지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군대를 갔던 그는 제대 후 서울로 가 명랑만화의 대가이자 70년대 만화계를 주름잡았던 김기백 화백의 문하생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아기공룡 둘리>를 그린 김수정 만화가 역시 김기백 화백의 제자이니 둘은 동문이 아닌가. 신진석 만화가는 이후 <쩐의 전쟁>으로 최근 유명세를 탄 박인권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길을 옮기게 된다. 나름 잘 나가던 문하생 신진석은 드디어 90년대 인기 주간 만화 잡지였던 아이큐 점프를 통해 데뷔하게 되었다.
만화방 뒷집에 살던 작은 꼬마가 스무살을 훌쩍 넘어 늦깎이 문하생이 되어 만화 잡지를 통해 데뷔한 시나리오야 말로 그의 만화가 인생이 우연찮은 길이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2. 콘티 - 만화가가 되다
많은 만화가 지망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문하생이 되어 만화계에 들어섰던 1980년대는 지금 인터넷 만화가 보편화된 것처럼 만화의 인기가 대단했었다. 때문에 많은 만화 지망생들의 꿈은 잡지 데뷔였다. 흔히 등단을 꿈꾸는 소설가나 시인을 지망하는 예비 작가들의 등단 무대인 신춘문예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신진석 만화가가 아이큐 점프에 낸 첫 작품은 ‘저승사자 또리’ 이다. 1년 여간 연재를 하면서 그는 신진석이라는 만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한 그의 첫 콘티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어느 작가를 보니 만화를 그리기 위해 사진을 많이 찍는다고 했다. 사진으로 담은 여러 곳의 배경이나 인물의 자세나 모습을 실제로 만화를 그릴 때 이용하는 것이다. 그에게도 물어보니 그런 버릇이 있단다. 만화가의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관찰인데, 그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거리의 모습을 눈에 익혔다가 눈으로 따라 그리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눈이 펜이 되어 사람들의 앉는 자세라든가 웃는 표정들을 뚫어지게 관찰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가끔 오해를 사기도 한다는 해프닝도 있었단다.
이후 ‘타임 브레이크 , ‘인형의 저주 , ‘천상십팔반을 연재했고 ‘아작’ 과 ‘권’ 같은 단행본을 발간했다. 특히 일간 스포츠에 연재했던 ‘동풍’은 유명작가 야설록과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 그의 만화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초기 데뷔 만화와는 달리 ‘아작’이나 ‘권’ , ‘동풍’ 같은 것은 만화체도 많이 다르다. 학원물과 액션물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강한 만화체가 지금 그가 주로 다루는 명랑체와 사뭇 다른 느낌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성격마다 펜을 달리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프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없다면 동일 작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만화체가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작’은 5권짜리 단행본인데 잘나가는 조직 폭력배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1999년에 ‘아작’ 1권을 출간했는데 사실 우리가 많이 봤을 조폭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아작’의 모티브와 상당히 닮아있다. ‘아작’ 을 완결한 것은 2001년이다. 부득이하게 심의에서 성인물로 판정을 받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현재 안동으로 작업실을 옮긴 그는 고등학교까지는 안동에서 학업을 마쳤기 때문에 사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만화가로서 성공한 그의 인생에 지금의 안동은 고향이기 이전에 만화에 대한 또 다른 모티브를 생성해준 동기가 되고 있다. 서울을 떠나 안동으로 돌아와서도 끊임없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니 데뷔 20년이 넘은 중견만화가인 그의 샘이 마를 날이 없어 보인다.
3. 데생 -‘권’과 ‘안동 보물을 찾아서 ’
언제 가장 재밌게 작업을 했냐고 물으니 학원물을 그렸던 ‘권’이라고 한다. ‘권’은 다슬이와 태극기를 주인공으로 한, 권법 소년이 정상을 향해 성장해가는 학원물이다. 여전히 스푼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사실 타블렛은 가당치도 않다. 종이책 만화가 지금과 같이 사양되지 않았다면 그는 ‘권’ 과 같은 학원물 만화를 계속 그려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안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 안동을 담고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를 본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콘티가 데생을 통해 캐릭터에 생명을 넣어 주듯이 그에게 안동행은 또 다른 데생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안동으로 온 후,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같은 이야기 거리를 소재삼아 아이들을 위한 교육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8급 한자를 내용으로 한 ‘뒤집어지는 한자 한마당’과 ‘귀뢰명왕의 전설’ 과 같은 책들이 그 시작이다. 특히 ‘귀뢰명왕의 전설’ 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물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흥미롭다.
특히 2008년에는 안동시청에서 발행한 ‘안동 보물을 찾아서’ 를 작업했다. 안동 주요 문화를 쉽게 볼 수 있는, 명랑한 만화 ‘안동 보물을 찾아서’는 학교와 각 기관으로 나눠져 교육 책으로서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잘난 체 여왕’ 역사 박사 ‘예솔’은 사실 그의 딸 이름이다. 딸의 이름이 곧잘 그의 만화 속 주인공 이름으로 등장한다니 예솔이는 좋겠다. 이름 말고도 간혹 주변 인물들을 만화 속 캐릭터의 모델로 삼기도 하는데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아내란다. 물론 아내를 바탕으로 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렸을 때 아내에게 그 만화를 안 보여주면 된다는 그를 보니 첫 인상과 달리 여유로운 동심이 그의 농을 치는 웃음에서 묻어났다.
4. 배경 - 안동, 제 2의 만화터전
안동보물을 찾아서와 같은 교육, 학습서를 쓰는 것 외에도 그가 안동에서 하고 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지역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일반을 위한 안동영상미디어센터 ‘만화콘텐츠’ 강의이다. 올해 4월 개강한 제 1기 만화콘텐츠 제작반은 곧 있으면 수료를 앞두고 있고 곧 이어 만화콘텐츠 중급반 개강으로 현재 수강생을 모집 중이다.
만화에 대한 관심은 애나 어른이나 매한가지일터다. 그저 좋아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지역에서 쉽게 배울 수 없는 만화 제작에 대한 붓 사용하기, 먹칠하기, 데생, 인물 그리기 등의 다양한 작업을 현역 만화가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을 것이다.
그에게 또 다른 계획이 하나 있다면 안동의 문화 소재를 연계한 만화를 그리는 것이다. 안동에 산재해있는 문화와 이야기 거리를 정리한 ‘제대로 된’ 만화책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만화가인 그에게 안동은 새로운 작품을 낳게 하는 또 다른 배경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구상하는 다음 작품에서 예솔이가 어떤 안동 여행을 하게 될 지 궁금하다.
5. 펜 터치 - 살아있는 만화, 펜
아직도 말풍선 안에 직접 글씨를 써 넣는 식자 작업을 하고 있으며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신진석 만화가는 요즘 보기 드믄 만화가이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문하생 생활에 대한 어려움과 막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을 그는 가장 안타까워했다.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진정한 프로정신이라며 목숨을 걸 만큼 절실한 노력을 강조했다. 한참 그림을 그릴 때는 스푼펜 하나가 삼, 사일이면 닳기 일쑤였다. 수명이 다된, 쓰고 난 펜도 촉이 닳고 두꺼워 지는 대로 다 쓰임이 있다는 그는, 펜으로 그리는 그림을 고수하고 있는 만큼 그 자연스러움을 만화의 생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요즘은 지면 만화를 그리던 많은 만화가들이 타블렛과 같은 컴퓨터를 이용한 만화로 많이 전향하고 있기에 펜 작업을 하는 만화가들이 더 귀해졌다. 물론 인터넷의 발달도 한 몫 하겠거니와 펜으로 그린 만화도 이제는 원본을 스캔해 후 작업은 많이들 컴퓨터로 한다고 한다.
데뷔 후 문하생을 두고 연재를 하던 시절에는 주간 잡지에 연재를 했기 때문에 원고를 넘기는 당일만 오로지 휴식을 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와 콘티를 짜고 다시 수요일부터는 데생과 배경, 팬 터치를 시작해야 주간 마감을 지킬 수 있었다. 건강은 둘째 치고 밖에 나갈 수가 없을 만큼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기에 연재만화의 어려움을 잘 아는 그는 만화를 그려온 시간에서 그 때를 가장 힘든 기억으로 꼽았다. 스포츠 일간지에도 야설록 원작의 ‘동풍’을 연재했기 때문에 독자와의 만남은 늘 그에게 긴장감이 있는 약속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의 말에 의하면 ‘이제 나이도 있고’ 몇 달치를 미리 그려놓고 시작해도 결국 마감에 쫓기는 게 연재라고 했으니 그것에 대한 미련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이제는 다년간의 연재만화를 했던 중견 작가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픈 마음이 엿보였다. 안동에 와 자비를 들여서 발행한 ‘귀뢰명왕의 전설’과 ‘뒤집어 지는 한자 한마당’ 이 아마도 그 시초이지 싶다. 만화는 물론 어른도 본다. 하지만 그는 늘 ‘어린이’를 생각하고 만화를 그린다. 아이들에게 ‘좋은 만화’를 보여주고 싶기에 ‘살아있는 만화’를 고집하는 만화가 신진석은 만화가로 걸어온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 땅, 우리 역사에 대한 재미난 전설과 역사를 활용한 만화를 보여주기 위한 준비로 늘 바쁘다.
인터뷰 후에 또 다른 약속이 있다며 그가 다음 길을 재촉한다. 오전에 방문했던 그의 작업실을 나오니 벌써 한낮의 태양이 뜨겁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만화가를 지망했던 녀석들이 떠오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