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속의 로마문명을 찾아서(글/사진/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폰드곰 동굴을 나오니 3시가 다 되었다. 해는 아직도 중천에 있으나 오전에 온 소나기로 인해 숲은 제법 선뜻한 기운을 뿜어내어 차창 안으로 시원한 바람을 넣어주었다. 세계 어디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모든 걱정거리를 지구 반대편에 둔 채 남프랑스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행복일 수 있다. 사를라에서 쑤이약까지 돌도뉴 강을 따라 구불거리는 길가의 풍광은 운전하고 가는 자동차까지 그냥 그대로 자연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지도상으로 다음 목적지 카르카손까지는 대충 300킬로미터는 넘게 보였다. 근처에 라스코 동굴이 있었으나 가도 입구 사진 밖에 찍을 수 없으니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쑤이약까지는 대체로 동쪽으로 오다가 쑤이약을 지나 고속도로에 오른 후 길은 남쪽으로 꺾어졌다. 이제부터는 속도를 내서 달려야 한다. 프랑스의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130킬로미터인데 교통경찰도 없고 감시 카메라도 거의 없어서 차들은 대체로 시속 140에서 150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 듯 했다. 고속도로의 장점은 빨리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지만 지금처럼 여행을 즐기려면 일반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좋다. 길가의 마을과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맛있는 지방 음식도 사먹을 수 있으며 산 좋고 물 좋은 곳 있으면 잠시 차를 세워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 오르면 멀리 지나가는 마을과 산, 강들이 그냥 그림처럼 휙 지나갈 뿐 가슴 속에 담아 둘 수 없다. 그래도 어쩌랴, 그리하려면 두 달 가지고도 모자를 여정임을.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는데 길 왼쪽으로 거대한 성곽이 멀리 보였다. 카르카손에 도착한 것은 7시가 넘어서였다. 시가지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오른쪽에 이비스 호텔 간판이 보였다. 예약해둔 호텔인 줄 알고 들어갔으나 그곳은 도시의 정 반대 쪽에 있었다. 호텔 종업원이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참을 헤멘 끝에 찾은 새로 지은 이비스는 시 서쪽 외곽의 대형 슈퍼마켓 뒤쪽에 있었다. 찾기는 어려웠으나 비교적 조용했고 인터넷도 무료로 잘 터지고 깨끗해서 하룻밤을 지내기에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제일의 성곽도시 카르카손
아침에 호텔을 나서니 벌써 햇살이 뜨거웠다. 이곳의 햇살은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오지 않았다고들 하나 피부가 따끔거리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따갑고 희고 투명했다. 고성과 카르카손 시의 사이에는 오드 강이 흐르고 있고 오드 강의 서쪽을 빌바스, 동쪽을 시테라고 부르며 시테는 사방이 다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으로 되어 있다.
빌바스(Ville Basse)는 신시가지이고 시테(cite)는 구시가지이니 당연히 볼거리는 시테에 있고 먹고 자는 것은 빌바스에서 해야 한다. 시테는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이고 21세기에도 유럽 중세의 성곽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실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숙소로 사용한 이비스 호텔에서 빌바스의 남쪽을 돌아 동쪽 시테지역으로 빠지는 큰 도로를 따라 성의 주차장으로 오르다보니 성의 아래 오드강의 옛 다리에서 성을 보는 유명한 뷰포인트를 놓쳐버렸다.
성은 이 시테를 둘러싸고 축조되어 있으며 언덕 주변에는 이와 같은 높은 곳이 없어서 주변 어디에서도 성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시테는 누가 보더라도 천혜의 방어요새다. 성이 있는 펑퍼짐한 언덕 아래로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멀리 지평선까지 기름진 땅이 있으니 기원전 수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 시테에서 도시를 이루며 살아왔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대륙을 잇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이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전쟁을 치뤄야 했고 전쟁을 거치면서 성곽은 계속해서 새롭게 수축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확정되고 나서야 천 수백 년의 전쟁이 끝을 맺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이후 이 성이 복원되면서 옛날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그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의 시간을 이어 앉은 공동묘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문으로 향했다. 성은 외성과 내성이 있는데 외성 높이가 내성보다 낮아서 멀리서 보면 외성 뒤로 겹쳐 보이는 내성이 실제보다 훨씬 더 웅장하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 외성을 거쳐 내성의 성문 앞에 서면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성들과 비교하여 엄청난 높이의 돌벽과 그 무게가 주는 중압감이 한꺼번에 보는 이를 짓누른다. 양쪽에 거대한 원형의 탑이 서고 그 사이에 아치형의 성문이 뚫려 있는데 성문 안은 문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으로 인해 캄캄한 동굴처럼 보였다. 성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마치 현재의 시간을 싸말아서 먼 옛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성문을 통과하면 정말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수 세기 전의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서 있고 골목과 골목은 얽히고설켜서 마치 미로처럼 어지러웠다. 건물의 아래층은 대부분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집과 기념품점 그리고 셔츠 류를 주로 파는 옷가게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런 골목을 얼마큼 빠져나오면 매표소가 있고 그 앞에 다시 새로운 성채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성이 바로 카르카손 성의 중심을 이루는 콩탈성이다. 콩탈성은 12세기 말 세워졌다고 하니 벌써 팔백년도 넘게 카르카손의 심장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성의 둘레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있고 해자를 가로질러 놓은 다리를 건너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금 해자의 바닥은 풀밭으로 되어 있고 해자를 건너는 다리도 튼튼한 돌다리로 되어 있지만 본래 해자 속은 물을 채워서 깊은 호수를 이루었을 것이고 다리도 성안에서 들어 올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성벽 위를 돌아가면서 성 내부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성 내부 공간을 활용한 라피데르 박물관에는 성 안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과 내부 장식에 사용된 채색벽화나 분수대, 각종 조형물 등이 보는 이들의 흥미를 끄는데 그 중에서도 둥글게 마연된 돌포탄이 눈길을 끌었다.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기면 다리도 아프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내와 함께 기념품 옷가게에서 옷 구경을 하다가 흰색 셔츠가 너무 멋지게 보여 하나 구입한 후 성을 빠져 나왔는데 아뿔싸, 유명한 생 나제르 성당을 빼먹고 왔다. 하기야 성당은 지금까지도 숱하게 보아왔고 앞으로도 눈이 짓무르도록 볼 것이니 포기하고 그냥 가기로 했다. 성 밖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오래된 것은 백년 넘은 것도 있고 최근 것으로는 몇 달 지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예쁜 꽃들이 화병에 꽂히고 화분에 심겨져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어서 묘지는 온통 꽃밭처럼 보였다. 그 묘지 뒤로 서있는 성의 첨탑들이 마치 묘지의 일부처럼 보이고 있었다.
아비뇽, 나는 교황이 교회 안에 유폐된 줄 알았다.
카르카손에서 동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내려오면 나르본느라는 곳이 나오고 길은 그곳에서 지중해와 나란하게 동쪽으로 달린다. 그러나 길에서 해안선까지는 7에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르본느에서 직선으로 뚫린 고속도로 위를 아비뇽까지 내쳐 달렸다. 아비뇽에 오기 전 약 40킬로미터 앞에서 님을 지나왔으나 님은 아비뇽을 본 후 다시 되돌아와 보기로 했다. 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아비뇽과 아를 그리고 랑그도크루시옹 지역의 동쪽 끝에 있는 님은 각각 한 변 길이 약 30킬로미터 내외의 정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룬다. 님과 아를은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프랑스 안의 작은 로마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비뇽은 14세기 초 프랑스 왕 필립4세와 로마 교황과의 대립으로 인해 로마교황 클레멘스 5세 때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후 1세기에 걸쳐 교황청이 있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황은 완전히 프랑스 왕의 권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위 ‘아비뇽 유수(幽囚)’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 시기 로마 가톨릭은 프랑스인 교황이 프랑스 국왕의 간섭아래 행정을 담당해 온 교황권의 몰락기로 평가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재정의 혁신이나 예술의 발전, 휴머니즘 학회의 보호와 장려 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조명을 받는다고도 한다.
아비뇽 시내에 들어오니 3시가 좀 넘었다. 숙소로 예정된 캠프장은 아비뇽 시내가 마주보이는 강가의 숲 속에 있었는데 입구를 찾는 것이 좀 애매해서 입구를 두 번이나 지나친 끝에 어렵사리 들어갈 수 있었다. 캠프장은 무척 넓었고 시설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입구에는 유스호스텔 겸 야영장비가 없는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이 있었고 입구 가까운 곳에 식당과 샤워장, 화장실, 세탁장, 설거지장 등이 모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몇 걸음만 떼면 바로 강 가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저녁 무렵 강 가 벤치에 앉으면 강물 위에 떠있고 그 건너로 저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아비뇽의 성곽이 그림처럼 펼쳐져 바쁜 여행의 피로를 한 순간에 씻어준다.
텐트를 쳐놓고 텐트 옆으로 자동차를 세워둔 채 아비뇽 시내로 건너갔다. 캠프장에서 다리를 건너면 육중한 바윗돌로 쌓여진 성벽이 가로막아 서고 성벽 아래에 작은 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다. 성벽 앞 강변도로에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길을 건너는 것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성벽 밑으로는 듬직한 가로수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그 밑에 벤치들이 놓여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작은 성문을 들어가면 중세 그대로의 시가지가 눈앞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얽혀있고 예쁘게 치장된 작은 레스토랑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골목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성 내부는 위로 갈수록 높아지고 가장 높은 곳에 교황청이 있다. 교황청 바로 아래에는 비교적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광장 서쪽에는 1619년 지은 바로끄 양식 건물인 올리비에르 메시앵 음악학교(Hotel des Monnaies)를 비롯한 오래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동쪽 언덕 위에는 교황청과 노트르담 데 동 대성당이 론 강 너머 푸른 숲을 굽어보고 있다.
교황청의 교회 첨탑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성모상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 아웅거리는 저자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당 내부에는 교황청 당시 교황과 주교들이 입던 성의와 사용하던 여러 가지 화려한 기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비뇽 유수’라고 해서 나는 교황이 이곳 성당에 죄수처럼 갇여 있는 줄 알았더니 교황은 어디 있어도 교황이었고 온갖 호사는 다 누리고 살았음을 이곳 성당의 전시물을 통해 새삼 알게 되었다. 성당 옆의 교황청 건물은 7대에 걸친 아비뇽의 교황들 중 제4대의 클레멘스 6세가 파리의 왕궁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하는데 입장료가 10유로 50센트로 비싸기도 했지만 시간이 늦어 들어가 보는 것은 단념했다.
갑자기 떠오른 돔바위 산의 추억
성당 뒤편의 높은 언덕에는 로셰 데 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돔 형상의 바위 공원이란 뜻인데 이 글을 쓰면서 어릴 때 살던 서울 보문동 동네 뒷산인 돔바위 산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 동쪽으로 난 집 대문을 나서면 안암천 너머로 채석장으로 사용되던 바위 봉우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났는데 그 바위산은 내게는 독서처이기도 하고 놀이터이기도 하고 혼자 또는 동무들과 함께 틈만 나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나는 뒤에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연작을 책에서 보면서 돔바위 산이 생각나곤 했었다. 지금 내 어릴 때 살던 작은 기와집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는데 그 산은 도시의 확장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생 빅투아르 산은 바로 여기서 멀지 않은 세잔의 고향 액상프로방스에 있는 산이다. 다음에 다시 프로방스 지역에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엑상프로방스에 가서 생 빅투아르 산을 가보고 싶다. 사라진 돔바위 산의 추억이 먼 프랑스 남쪽에서 되살아 날런지야 알 수 없지만.
저녁 무렵 로셰 데 돔 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론 강의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교황청 포도원 밑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이고 그 밑으로 아비뇽 다리로 널리 알려진 생 베네제 다리가 보인다. 강 건너로 우리가 하룻밤 지낼 캠프장이 있는 강변의 숲과 그 너머로 높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오랜 풍상을 견뎌온 고성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비뇽의 교황청 포도원은 유명한 ‘사토뇌프 뒤 파프’라는 포도주를 생산한 포도원이다. ‘샤토뇌프 뒤 파프’는 새로운 교황청이란 뜻이라는데 이 포도주는 지금도 로마 교황청의 공식 포도주로 사용된다고 한다.
교황청 밑으로 내려오니 시간은 6시가 넘었지만 아비뇽 다리는 아직도 입장이 가능했다. 입장료가 4유로 50센트. 다리 위를 한번 거니는 값으로는 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작은 도시에서 교황청보다도 더 유명한 랜드마크이니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다리는 우리가 늘상 다니는 다리와는 구조가 많이 달랐다. 다리는 성벽 위에서 건너도록 되어 있는데 성벽과 다리는 목제 도개교(跳開橋)로 연결되어 필요시 도개교를 들어올리면 다리에서 성으로 건널 수 없도록 하였다. 아마도 옛날에는 론 강을 건너는 다리가 생베네제 다리 하나 밖에 없었을 것이니 다리 끝과 성벽의 사이의 도개교는 일반 적인 성에서 볼 수 있는 해자를 건너는 것과 같은 구실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다리 윗면에는 동글동글한 예쁜 강자갈이 깔려 있어 매우 따뜻한 느낌을 전해준다. 다리 중간에는 교각 하나를 차지하는 작은 예배당이 있는데 생니콜라 교회(Chapelle Saint Nicolas)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중국 휘주 지역의 마을들을 조사할 때 보았던 옛 다리 위의 관음당과 같았는데 강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연들이 모두 이 예배당에 모여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양치기 베네제가 신의 계시를 듣고 1188년 건설했다는 생 베네제 다리는 수차례의 홍수로 무너지고 복구되길 반복하다가 1680년 대홍수로 무너진 후 다시 복구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무너진 다리는 그대로 그 사연을 전해준다. 어차피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구실을 하지 않는다면 그걸 꼭 완전한 형태로 복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무너진 유적을 새것으로 바꾸는 일에 너무 열중하는 것이 아닌가? 복원 과정에서 없어지는 옛 역사의 흔적은 헤일 수 없이 많다.
캠프장으로 돌아오는데 다리 난간 옆의 전봇대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는 여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우리를 보고는 겸연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비뇽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은 아비뇽 다리도 아니고 아비뇽 유수같은 어려운 용어의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그것은 바로 아비뇽 연극축제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아비뇽의 연극은 길가의 연극 포스터를 보는 것으로 때울 수밖에.
프랑스에서 보는 로마의 모습
7월 5일, 잠이 깼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있었다. 그래도 숲 속이라 아침 공기는 그런대로 시원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어제 온 길을 되돌아 님으로 향했다. 아비뇽과 님의 중간 쯤 되는 곳에 유명한 퐁 뒤 가르(Pont du Gard) 다리가 있다. ‘퐁 뒤 가르’는 가르 다리라는 뜻이지만 퐁 뒤 가르 자체가 고유명사화 되어 있어 우리말로 옮길 때는 끝에 ‘다리’라는 말을 중복해서 붙인다. 주차장에서 약 5백여미터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그러나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의 땡볕이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그 무방비상태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비록 5백미터라고 해도 산책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이제 11시가 거의 되어가니 아직은 오전인데 햇볕은 오후 두시의 그것이다. 옆에는 오랜 세월 바위를 깎고 문질러 깊은 넓은 계곡을 만든 가르동 강이 뜨거운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갔다. 강물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산책로가 강 옆에 닿았을 때 멀리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거대한 아치교가 눈에 들어왔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였다는 갈리아 통치자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명으로 지어졌다는 그 유명한 다리, 길이 275미터, 높이 49미터, 모두 세 개의 아치교를 수직으로 쌓아올린 것 같은 이 다리는 첫 층은 사람이 건너다니는 인도교이고 둘째 층도 사람이 다닐 수 있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셋째 층인 도수로로 사용하는 다리를 받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다리의 주목적은 사람이 건너다니는 것보다도 도수로(導水路) 즉 물을 대기 위한 것이었으니 셋째 층의 도수로로 사용된 다리가 가장 핵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로의 깊이 1.45미터, 폭 1.22미터라고 한다. 다리가 이렇게 거대한 삼층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은 가르동 강의 흐름과 수심 그리고 홍수 때의 여러 조건 등을 고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천 년도 더 전의 로마 사람들의 기술 수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가서 본 이 거대한 돌의 구조물은 거석기념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교각에 사용된 돌 하나가 웬만큼 큰 사람의 체구보다 더 커 보였다. 이 수많은 돌을 운반하고 치석하고 설계대로 쌓아올리는 기술은 가히 경이적이다. 우리는 절간 앞에 있는 조그만 무지개다리 하나만 보아도 감탄을 마다 않는데. 이런 거대한 유적 앞에 서면 이거 만들 때 우리역사는 어느만큼 와 있었지? 하는 생각이 왜 자꾸 드는지. 다리 중간에 서서 가르동 강의 흐름을 따라 멀리 눈길을 주면 레프팅을 즐기는 고무보트 너머 검푸른 숲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카스티요 뒤 가르의 고성이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
폰 뒤 가르 다리를 시작으로 이제 본격적인 로마의 세계가 님과 아를을 무대로 펼쳐질 것이다. 프로방스 지방에는 기원전 2세기에 갈리아인들에 의해 발달된 상업을 기반으로 많은 도시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점령된 후 로마인들에 의해 로마식의 도시가 건설되고 많은 로마식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남겨진 로마의 문화와 유적들은 지금까지도 원형을 잃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 로마문화를 제대로 보려면 로마보다도 님이나 아를 또는 오랑쥬 등을 찾아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역의 로마유적이 본고장의 그것보다 오히려 제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님의 3대 로마유적, 아레나 ․ 메종카레 ․ 투르마뉴
그 중에서도 님은 로마 유적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로 꼽힌다. 대표적인 것은 1세기 때 지었다고 하는 아레나 즉 원형경기장이다. 아레나라는 말은 본래 모래를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에서는 검투사들이 사투를 벌였으므로 싸울 때 흘린 피가 잘 흡수되도록 모래를 깔았던 데서 연유된 말이라고 한다. 지금도 로마시대의 모습 그대로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님의 아레나는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경기장이다. 긴 쪽의 길이가 135미터이고 짧은 쪽의 길이 100미터의 타원형으로 높이가 21미터나 된다.
경기장 안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나 전차경주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지금도 여기서는 투우경기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경기장 밖에는 투우사의 동상이 서 있는데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투우경기는 내 머리 속에 별로 그려보지 못한 것이라서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님의 3대 유적이라고 하면 이 원형경기장과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들인 가이우스와 루시우스 카이사르에게 바쳐진 유명한 메종카레(Maison carree) 그리고 시 외곽 언덕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석조건축물 투르마뉴(La tour magne)를 말한다. 님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없어 어떤 곳을 골라보아야 할지 망설여졌는데 원형경기장에 들어갈 때 이 세 유적을 모두 보는 통합 티켓을 팔고 있었다. 세 곳 합쳐서 9유로 80센트, 우리 돈으로 약 2만원이다.
메종카레는 사각형의 집이란 뜻이라는데 파르테논 양식의 작은 신전이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을 가보지 않았지만 밖에서 보면 거의 흡사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라지만 건물 한쪽은 수리중이고 내부는 영화관으로 꾸며져 님의 역사에 대한 다큐멘타리가 상영되고 있었다. 제목은 ‘님의 영웅들’. 고대 로마시대 아레나에서 벌어진 검투사들의 이야기로부터 중세 이후의 님의 역사적 인물들과 전쟁영웅들이 대형화면에 박력있게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갔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님의 진정한 영웅들은 바로 오늘의 님을 번영시키는 시민 여러분들이라는 메시지로 끝맺음을 하는, 그래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역사가 무엇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소위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어떤 존재들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제법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메종카레에서 투르마뉴는 서북쪽으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산 위에 있다. 산이라고는 하나 메종카레가 있는 시내의 해발 높이가 50여 미터이고 투르마뉴가 있는 산 정상이 100미터가 좀 넘는 정도이니 시내에서 이곳까지 고저 차이는 겨우 50미터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나 투르마뉴 꼭대기에 올라서서 님의 전경을 바라보는 맛은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진 푸른 숲과 함께 장쾌함을 느낄 수 있다. 투르마뉴는 원래 기원전 5세기 경에 이곳의 원주민들이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채로 세운 것이라 전하는데 기원전 135년에 로마가 침공하면서 님의 대부분과 함께 파괴되었다가 옥타비아누스 황제 때 남아 있는 기초 위에 42미터의 탑을 쌓아 올려 지금까지 전한다고 한다. 성채 안에는 발굴작업을 한 흔적을 그대로 남겨 전시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는 로마시대의 님 시가지 그림이 있어서 지금의 시가지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오전에 보았던 폰 뒤 가르 다리의 도수로를 통해 흘려 보낸 물은 바로 이곳 투르마뉴 부근의 저수지에서 발원한 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저수지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복차림 교통경찰에 걸리다
투르마뉴를 보고 시내로 내려오다가 우회전을 하는데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별 생각 없이 차를 움직이는데 좌측에서 들어오는 왼 승용차에서 한 남자가 머리를 밖으로 빼더니 나를 보고 차를 길옆으로 대라는 수신호를 한다. 일단 차를 대니 그 남자가 내려와서 뭐라고 말을 거는데 뜻은 알아들을 수 없으나 신호위반을 하였다는 뜻인 듯 했다. 서로 말은 했으나 뜻은 통하지 않았다. 아래 대화 내용은 그냥 눈치로 알아듣고 나눈 대화다.
“우리 외국 관광객이요”
“라이센스 있어요?”
한국에서 급히 만들어 온 국제면허증을 내 주었다. 이것 만드느라 출국 전날 문경까지 갔다 왔다. 쓸모가 전혀 없는 줄 알았더니 여기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한국 면허증 내놔봐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없어요“
경찰관이 덧붙여 무슨 말을 했는데 불어라서 알아듣지 못했고 19유로라는 말은 영어로 또렷하게 해 주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벌금이겠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는데 동전 몇 개 밖에 안 잡혔다. 원 세상에 사복차림으로 개인 승용차를 타고 교통단속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가짜 아닌가 생각했으나 건너편에 있는 경찰차에 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가짜는 아닌 듯했다. 차를 세운 채 어떻게 하나 망설이는데 아내가 그냥 가자고 했다. 무슨 벌금을 현금으로 내는 경우가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경찰들은 또 다른 신호 위반자를 잡아놓고 딱지를 끊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가는 것은 도망가는 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짓이야 할 수 있나. 차를 몰아 경찰 차 옆으로 갔다.
“우리 어떻게 하면 돼죠?”
영어로 얼버무려 말을 건넸다. 그러자 경찰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뭐요? 어디로 가시죠?”
느닷없이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아를”
그러자 그는 아를 가는 길을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네비게이터에 의존해서 가는 것이니 자세히 알아들을 일도 없다. 댕큐를 두 번이나 해주고 손을 흔들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찌된 심판인지 알 수 없으나 아내 말대로 그냥 갔으면 될 일이었다. 말이 안통해서 벌어진 일인 듯 한데 말 안 통한 덕을 본 것인가?
아를은 님에서 동쪽으로 3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님을 출발한 것이 다섯시 반이 다 되어서이니 오늘은 아를에 도착하면 그냥 자고 구경은 내일 아침에 해야 한다. 아를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가 훨씬 넘었다. 기왕 들어온 김에 시내 길 옆에 적당히 차를 대놓고 시가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보았는데 시간이 늦어 문을 닫은 곳이 많고 관광안내소조차 잠겨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을 둘러보고는 바로 캠프장으로 향하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으로 확인해 둔 캠프장은 아를 시내에서 약 12킬로미터 정도였는데 차를 몰아보니 한적한 농촌 길이라 그런지 먼 듯 느껴졌다. 이미 여덟시가 넘어 캠프장 사무실은 잠겨 있었고 캠프장 내에 사람들도 별로 없었는데 문 앞에서 서성거리니 길 건너 집에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텐트는 있죠? 저쪽 코너에서 두 번째 칸을 사용하세요. 밤에 필요한 것 있으면 여기 이 초인종을 누르세요. 좋은 밤 되세요.” 시종 웃음을 머금은 채 친절한 어조로 설명을 한 후 다시 맞은 편 집으로 들어갔다.
텐트를 쳐 놓고 보니 몇 군데 사람들이 보였으나 캄캄한 숲 속에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 건너 한쪽에 우리 것보다 더 작은 텐트 하나가 보여 궁금했는데 자전거 여행을 하는 젊은이였다. 텐트 밑으로 작은 솔방울들이 등을 찔러댔으나 곧 잠으로 빠져 들었다. 오늘도 참 많은 것을 보고 또 달렸다.
중세를 되살린다 - 환상의 전통의상축제
7월 5일, 일요일이지만 여행객에게는 휴일이 없다. 오전 중으로 아를시내와 주변 관광지를 끝내고 오후에는 코타쥐르 해변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 한다. 아침 일찍 아를 시내로 들어갔다. 여덟시 좀 넘은 이른 시각이라 시내는 한산했다. 주변 주차장을 찾아 차에서 내렸는데 주차장에 웬 흰 말 한 마리가 매여져 있었다. 조금 있으니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실크햇에 턱시도를 입은 남자 그리고 예쁜 전통복장을 한 아이들까지 한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떠들어댔고 어떤 사람은 주차장 한쪽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결혼식이라도 있나? 좋은 구경을 할 것 같은 예감에 그 사람들이 움직이는 뒤를 천천히 따라 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내는 벌써 교통경찰들이 나와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큰 길 복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양복쟁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코스튬 페스티발이라 했다. 전통의상 축제였다. 그런데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사람들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와 시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시청 광장에는 축제에 참여하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혼잡하기 짝이 없다. 귀부인 차림으로 말 위에 앉은 나이든 여자와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는 젊은 부인, 마차에 부인을 앉힌 실크햇의 노신사,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듯한 애기가 장난감 유모차에 인형을 태우고 밀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아름다운 전통의상으로 치장을 한 남녀노소 수백 명이 이곳에 모여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한 떼의 일본 관광객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들이 섞여 들었다. 광장은 그야말로 중세와 현대, 동양과 서양이 한데 어우러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저건 고흐가 그린 ‘아를의 여인’이란 그림 속의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웃으면 양 볼과 눈 가에 깊은 주름이 패이는 얼굴에 흰색의 넓은 숄칼라를 단 검정색 로브를 입고 작은 보닛을 쓰고 있는 모습이 영낙없는 고흐 그림 속의 그 여자였다. 그림 속의 여자는 숄칼라가 녹색 바탕에 꽃무늬 수를 놓은 것이 다를 뿐이다.
사실 아를이 유명한 것은 고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와서 15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무려 3백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서 그는 후원자이기도 했던 동생 테오에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 여기서 나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쓴 것처럼 파리에서의 우울한 나날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과 예술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온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발작을 일으켜 자기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으로 가야 했다. 아를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 파리 근교 오베르에서 권총 자살을 기도하였고 1890년 7월 30일 서른 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고흐에게 아를을 빼면 무슨 이야기가 남을 것이며 어떤 작품이 남을 것인가? 아를 역시 고흐를 빼면 남을 것이 없을 듯 했다.
축제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는 말을 탄 사람이나 마차를 모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문제는 말들의 대소변이 어쩔 수 없이 골목을 더럽히는 것이다. 와, 이 많은 배설물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지?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와 사람들, 전통이 생활 속에 녹아든 듯한 축제의 현장이 말똥으로 더럽혀지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행진은 시청을 출발해서 골목을 돌아 시의 중심도로로 나와서 도로의 한쪽 끝에 있는 대성당 앞에서 끝이 났다. 행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미사를 보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이웃, 친구, 가족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행진 때 입었던 의상 그대로 시내를 누비며 어울려 다니니 아를 시가지는 그대로 중세의 어느 때로 돌아간 듯 했다. 관광안내소 근처의 또 다른 성당앞 빈터에는 임시로 장이 열려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일요일 오전은 그야말로 즐거운 잔칫날 그대로였다.
이제 아를 시내 구경을 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축제 행렬로 시간이 계획보다 두 시간은 족히 지나버렸다. 큰길에서 다시 시청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말똥과 오줌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던 골목길이 언제 여기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걱정을 했던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고흐가 그렸던 아를의 도개교
시청 앞을 지나 골목 속으로 여기저기 발걸음을 옮겼다. 고흐가 다녔던 밤의 카페 주변은 아마 고흐가 살았을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환경이었을 듯 했다. 몇 군데 카페와 피자가게가 있고 중앙 광장에는 노천카페가 자리 잡아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골목길은 아름다웠는데 이곳은 집을 지으려면 철저하게 붉은 지붕을 지켜야하고 옛 건물의 디자인을 살려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장관을 하면서 강력하게 시행된 법이라고 했다.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은 님에서도 들어가 봤으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략했다. 론 강의 제방 옆에는 로마시대의 목욕탕 유적이 있었다.
아를은 아침에 보았던 전통의상 축제로 깊은 인상이 남아 다른 유적들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로마의 유적들은 앞에서 님을 지나면서도 충분히 보았으니 이정도로 떠나도 될 것 같다. 아를을 벗어나기 전에 한군데 더 가볼 곳이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고흐 그림 한 점이 우리집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를의 도개교이다. 노란 색을 주조로 푸른 하늘 아래 농가와 오래된 도개교(배가 지날 때는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된 다리)가 있고 그 밑 개울가에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 그림은 색이 바래도록 벽에 붙어 있다가 이사하면서 한쪽이 찢어져 집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림 속의 다리가 이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으니 아를을 벗어나면서 들러보고 싶었다. 다리는 아비뇽에서 흘러온 론 강에 연결되는 좁은 운하에 걸려 있었다. 시내 중심지에서 3킬로미터 쯤 떨어진 가까운 곳으로 고흐는 화판을 둘러메고 천천히 강변을 걷다가 이 멋진 풍경과 만났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네덜란드의 고향 풍경을 떠올리고 여섯 주일 동안 아홉 작품을 그렸다고 했다. 고흐 자신도 이 그림들에 만족하여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하면서 이 그림들을 팔지 말고 두면 뒤에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풍경은 그림에서 본 것과 비슷했으나 어쩐지 옛 그림의 분위기는 살지 않았다. 우리집 벽에 걸렸던 바로 그 그림이 관광객을 위한 안내판 위에 인쇄되어 있었다. 다리도 옛 다리가 아니라 관광객을 위해서 새로 복원하였고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다리가 도개교 바로 아래 새로 놓아져 있었다. 관광버스가 한 대 서더니 한 떼의 일본 관광객들이 와글거리다가 다시 떠났다.
우리도 떠나야 한다. 이제부터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라는 코타쥐르를 거쳐 이태리 국경인 망통까지 가야 한다. 지도로 대충 보아도 4백 킬로미터는 넘게 보이니 또 저녁 늦어야 들어갈 것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