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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한 시인의 흔적을 찾아서(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1.
무더운 한 여름이 지나간다. 시간의 흐름은 인정하면서도 여름이 가을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은 무디다. 그러니 느낌이란 얼마나 막연한 기운인가. 장하(長夏)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해가 진 오후나 한밤중도 가릴 것 없이 더웠다. 이제 절기상 입추도 말복도 넘겼으나 여전하다. 이런 더위에 해를 안고 움직이자면 땀줄기는 쉴 줄 모른다. 초면인 사람 만나는 일을 새벽이나 밤중에 할 수도 없고 늦은 오후라도 중천에 해가 떠 있으니 더위를 피할 수 없다. 더위타령을 끝없이 늘어놓아도 더위는 가실 줄 모르니 더운 상태로 길을 나서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구담을 향해 길을 나선다. 도청 이전지로 확정된 데다가 하회·양동마을이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풍산으로 가는 도로가 보통 때보다 번잡하다. 하회로 향하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한창 휴가철에다가 즐거운 행사도 많아서 풍산 동네가 행락객들로 분주하다. 여행을 떠나면 더위도 잊을 수 있으니 길 위에서 더위를 내려놓고 싶은 사람들이 좀 많으랴. 그리고 몸이 매여 보면 그 묶인 시간의 고통을 길 위에 풀어놓으려는 마음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안동의 평야라고 부르는 풍산들에는 벼들이 익어가느라 반짝반짝 빛이 나고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도 정겹다. 오늘 구담으로 길을 나서는 것은 김기한 선생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는 것이다. 김원길 시인이 󰡔안동문학󰡕에 시와 수필을 등사판으로 묶은 김기한 선생의 시집을 소개한 글이 있다. 실제로 후손을 만나 뵙고 그 복사본을 살펴보니 대구에서 등사판으로 인쇄를 했다. 김원길 시인에게 전화를 드리니 당시는 인쇄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활자가 아니었고 골필로 긁어 잉크로 찍어서 만든 시집이란 설명을 한다. 이 시기 안동에서 문학 활동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니 어쩌면 김기한 선생의 시집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육사 시인이 있으나 지역 현장성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논의를 벗어난다.

해방 전후, 일제식민지 시기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내상, 외상을 심각하게 입었던 기간이다. 특히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지점에서 식민지 체험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전통과 조화로운 우리 문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지역에서의 문화적인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시절에 김기한 선생의 시집이 지니는 문학(화)사적 의의는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의 제목은 <祭祀:제사>인데 조상신에게 음식을 차려두고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닌 기독교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후손의 설명이다. 이 시집의 시는 종교시가 거의 대부분이므로 김기한 선생에게 제사는 전통조상신 모시기와는 차이가 있다. 종교적인 추도식으로 의미를 규정할 필요도 없이 신앙의 대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자세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제사’라는 제목을 선택했을 거라 짐작한다.

2.
김기한 선생(1916~1978)은 북후면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릴 때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일찍 할머니와 안동으로 나와서 시내에 거주하였고 교회와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줄곧 농사를 지으셨고 이상촌 건설을 향한 농장을 지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마음을 󰡔향기로운 마을󰡕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으나 선생은 책 편집의 계획만 시집 말미에 소개하고 정작 책 인쇄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다. <군경민보>에는 낙동강가에 있는 선생의 향촌농원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채소재배, 양송이재배, 통조림가공공장 등을 주력사업으로 향촌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향촌문고를 발행할 계획을 소개한다. 이 신문에는 날짜가 보이지 않는데 선생의 69년 약력까지 소개한 것으로 보아 그 이후로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장남은 약사로 구담에서 현 혜민의원 자리에서 김철약국을 경영했었는데 어린시절 특별히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선생의 인상 자체가 호랑이 상이기 때문에 웃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인상에 따라 긴장 했을 소년의 모습이 퍽 재미있다. 그런 엄친 슬하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를 몹시 존경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아버지야말로 형제들의 삶의 자세와 정신력을 키워주신 분이라고 한다. 사실,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공자도 자식을 바꿔서 가르쳤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부모에게 감동을 받으면 최고의 교육이란 생각이 든다. 존경을 주고받는 일은 평범한 부모-자식 관계를 넘어선다. 사실, 감동이 더욱 어려운 세계일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감동은 사소한 곳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이 어려운 것은 가벼워서 무시하고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나 존경하는 부모를 두기는 어려운 일이다.

장남의 추억 한 자락에는 아버지의 특별한 훈육방법이 숨어 있다. 어린 시절의 잘못은 기억나지 않지만 특별히 꾸중 들은 일이 드문드문 있다고 한다. 한 해 한두 번 정도 회초리까지 드는 일이 생기는데 그 때마다 그 동안의 잘못을 꺼내놓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부터 있었던 모든 잘못을 반복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라 회초리 드는 때를 한 기간으로 묶어서 그간의 잘못을 모아뒀다가 꺼내 놓으셨다. 이러니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잔소리로 들을 수 없었으리라. 자신도 잊어버린 일들을 조목조목 지적해서 잘못된 행동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끌었다. 놀랍지 않은가,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차근차근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그 반성의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웬만한 교육자로서는 흉내 내기 힘든 배려 깊은 아버지의 마음이 숨은 훈육이다. 이런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존경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이 일화 외에도 선생의 훈육방법은 참 독특했을 것이나 그 구체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니 여기서 그쳐야겠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잘못해서 매가 필요할 때, 매 맞는 아이의 마음상태가 참 중요할 것 같다. 소위 부모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으면 곤란하다. 선생의 아드님처럼 아버지로부터 맞은 매도 교육의 과정이었음을 뿌듯하게 생각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 잘못을 납득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자신의 내면에서 생기도록 돕고 있는가, 뭐 이런 교육적인 내용을 감안한 회초리를 선생은 소유했다는 설명이다.

또, 선생은 안동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설교를 할 때, ‘안동의 노인들은 환갑이 넘으면 다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공공연하게 했다. 이유는 노인들 때문에 젊은이가 기를 펴지 못한다는 것이다. 1950년대 안동사회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통가치관이 강고했던 보수적인 세대에게 막말 수준으로 오해를 받을만한 내용이지만, 이후 선생의 죽음은 이 말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환갑을 넘기면 하느님이 데려가시기를 기도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하고, 정말 예순 둘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사회의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청장년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물론 나이 드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른의 지혜를 청년은 늘 배워야 한다. 이 순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가장 먼저 스스로를 향해 있었으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불안한 세대에게 기회와 용기를 주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는데 원예, 오이, 수박, 토마토 등 원예작물을 하우스로 재배하는 일을 처음 시도해서 박정희 대통령시절 농업기술자상을 받기도 했다. 자살하러 선어대에 갔다가 풀잎에 앉았던 새벽이슬이 햇빛에 씻기는 걸 보고 호를 노초(路草)라고 짓기도 했다. 동물 중에는 소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살아서는 갖은 노동을 다 하고, 죽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송이 통조림 공장도 운영하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대단히 위축된다. 이 공장은 주위의 권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양송이 통조림을 대만으로 수출하고 있었고 경북북부지역에서도 이 공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마땅한 사람으로 선생을 지목했던 모양이다. 농업기술자상도 받고 처음으로 하우스 재배방법을 도입하는 등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업이 잘되지 않으면서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3.
선생의 가족들은 한국전쟁 통에 집이 불타면서 선생의 서재를 지키지 못해 󰡔제사󰡕의 원본을 찾을 길 없었으나, 가나다 상점(책과 함께 문방구를 팔던 가게) 주인을 통해 선생의 시집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 상점 주인은 선생과 친분이 두터운 분으로 대전에 오래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김기한 선생의 등사본 시집을 발견하고 후손에게 보내준 것이다. 선생의 자제분 중 막내 아드님이 원본을 가지고 있고 구담의 맏아드님이 복사본을 지니고 있다면서 보여주셨다. 복사본에는 겉표지가 따로 없는데 원본의 겉표지는 다 낡아서 복사 자체가 불가능했는지 관리를 위해 복사를 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제사>라는 제목의 시는 선생이 밝히고 있듯이 신앙고백을 묶어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선생은 이 시집으로 시의 가치평가를 받고 싶지 않다고 밝히고 있지만 또 책이 남아 전하니 그 가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들 때 써두었던 것을 시답게 만들지 못하고 묶어서 부끄럽다고도 했다. 굳이 선생이 시라는 틀을 벗어나고 싶어하고 평가받는 일을 피하고 싶다는 말씀은 모두 겸사라고 생각한다. 마음에서 울어나서 시를 쓴 것이니 그 마음바탕에서 이미 시인이지 않은가. 안동에서 이 당시 출판된, 혹은 복사된 시집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안동의 문학사에서 특출한 개인을 제외한 안동사람들의 문학현장을 지면으로 만나는 일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선생은 이미 그때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시도하고 낯선 길을 나서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하신 인생역정을 보면 용기와 의지가 남달랐던 분으로 생각된다. 사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맏아드님은 아버지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신 것은 물론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집 서문에서 1945년 12월 20일 법상동이라고 쓰신 것으로 봐서 해방 당시 법상동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시 광석동에 시온협동조합 자리에 사셨다고 아드님이 말씀하셨으나 법상동-광석동은 지척에 있으니 이 부근에서 줄곧 생활하신 것으로 보인다. 맏아드님이 약사로 약국운영을 하면서 구담으로 옮겨간다.

해방이후 1945년 8월 26일에 기독창립총회를 했고 그것을 기념하면서 ｢재건｣이란 시를 썼다.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통해 ‘무너진 집의 문은 열렸’고 앞으로 희망의 별이 찬란할 것임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았다. 신앙이란 단어는 믿음을 우러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선생의 신앙인으로서의 진정성이 제대로 드러나는 작품이 ｢호소｣에 보인다. ‘이 땅에/단 한사람이라도/자기 몸을 고기 버이듯(베듯)/난도질 하면서/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는 자가 있다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쓴 글인데 믿음의 가치나 진정성은 자신의 내면에서 뿜어지는 것임을 절규에 가깝게 호소한다.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며 늘 채찍질하는 자세는 ｢신앙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제시대 때 쓴 ｢기도｣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힘들었던 내용이 나온다. 안동교회 80년의 역사를 담은 기록에 따르면 신사참배로 교회는 위기에 시달렸다.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구실’로 참배압력을 시작한다. ‘모든 교회에 가미다나(신위를 모시는 선반)의 신사 위패를 교회 안에 설치하도록 강요’도 하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연맹 결성하여 전승기도회를 여는 등 한국기독교 신앙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이 작품은 1944년 3월로 표시된 것으로 봐서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심각한 상황을 인식하고 쓴 것 같다. 태평양전쟁은 일제가 1941년에 하와이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패전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 힘든 상황은 조선사람이면 누구나 예외일 수 없었는데, 이때 한국종교도 매우 심각한 처지였다. ‘오십만 당신의 백성을 멸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을 하늘을 향해 알리고 있는 형식이며 호소내용은 우리 민족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으니 하느님은 우리의 호소를 들어달라는 간언이다. ｢주의 제단 앞에 놓이리니｣의 부제는 조선교회는 죽었다고 적혔다. 무슨 일 때문인지 글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일제시대 때부터 심각한 문제인 신사참배로 추정된다. 안동교회사에서는 교회의 시련기로 1938~1945년으로 잡고 있고 이때 신사참배로 불거진 다양한 문제가 들끓었다고 할 수 있다.

｢추억｣이란 시에는 ‘어머니 주일을 맞이하면서’라는 부제가 있는데 시 내용으로 보면 어머니 기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조실부모한 선생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저는 무명의 노방초랍니다/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으시고 가신/아버지! 아버지!/철모르면서 눈물만 흘렸습니다// 사진 한 장 없으니 모습도 알 수 없고/홀로 앉아 옛꿈만 추억합니다//아즉까지 ｢아버지 어머니｣라고/불러 보지 못한 고독!/남모르는 서러움에 목매여 웁니다’ ｢왜 이다지도 유심히 보이오｣에는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은 것이 없는데 친척 아주머니가 선생의 얼굴을 보고 ‘너 눈매 콧매 웃는 양이 꼭 너 애비 닮았다’는 말에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드려다 본다. 천생의 그리움을 풀지 못하는 외로움이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일제시기 법상동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그곳에 생후 2개월 만에 죽은 아들을 묻은 아버지의 심정을 담은 ｢어린 것 영전에｣가 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그 아픔의 깊이를 다 말할 수 없다. 선생은 10남매를 두셨으나 현재 3남3녀가 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마음이 절절한 글이다. 의료기술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린시절 부모님을 일찍 잃어버린 선생이 아버지가 되어 자식 잃었으니 그 가슴의 멍울이 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선생은 스스로 시집 서문에 시답지 못한 글이라 평가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나 마음에서 촉발되는 감성이 시가 되었다. 의식적으로 시를 쓴 것이 아니고 사물에 감응한 마음이 움직여 시를 만들었으니 전형적인 서정시인의 심성이 아닌가. 그러고도 시집에 불편해 했던 것은 시에 대한 겸손이 지나쳤던 탓일 거다.

4.
김기한 선생의 흔적은 안동교회사에서도 드러난다. 해방 이후 1946년 교회조직도에는 임시집사 명단에 올라있고, 부흥전도회 조직에서 부원으로 활동한 이름이 있다. 해방 이후 교회가 주도한 교육사업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교회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동유치원 운영자 명단에도 이름이 있다. 1952년에 시무장로가 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활동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차츰 종교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정치활동으로 확장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어느 곳에서나 식민지의 처참함과 해방의 혼란, 전쟁을 겪은 상처와 공포를 감싸 안을 인물이 많이 필요했고 선생은 솔선해서 그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시집 곳곳에 보이는 신앙인으로서의 경건함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내면에서 울리는 지독한 절규에는 삶의 절실함이 보이는데 개인의 복을 비는 차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그리려는 데 그 마음이 있었다.

문학사적으로 선생의 존재는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해방 전후의 안동이란 지역에 거주하면서 시집을 낸 경우는 김기한 선생을 제외하고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선생의 시집은 우리 문학사가 기억하는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안동의 문학사가 기억하고 가치를 평가하고 의의를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문학사의 보폭도 넓어지고 지역문학 현실도 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적어도 시집내용은 식민지 당시 신사참배 강요로 안동의 교회관계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일을 당해야 했던가하는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많은 활동을 했던 선생에게도 좌절은 깊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신념과 다른 선택을 강요받고 그 불의의 힘에 굴복당할 때 정신적인 좌절은 심각하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자괴감으로 나타나지만 선생은 신앙의 힘을 통해 극복해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세 살 무렵에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란 선생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생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선생은 또 정치인으로 인생을 펴기 위해 국회의원에 두 번 출마했다. 아마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촌을 현실에서 이뤄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한 마음이 크게 움직여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을 것 같다. 정치, 종교활동 등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면모는 강한 실천력을 보여주는데 시집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매우 다정하다. 선생이 남겨둔 다른 유고는 없는지 두루 살펴보아야겠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