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에 낙동강이 살아나다(글/이동백_시인)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매미들 울어대는 초가을, 소산들은 스산했다. 둑 너머의 풍산들에선 벼들이 노랗게 익어 가는데, 소산들은 잡초들로 어지럽다. 황량한 들판이 사람의 마음까지 황량하기 그지없게 만들어 버렸다.
"예원아, 니 그림 어딨노?"
"여깄다!"
네 살짜리 꼬마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젖히고 엄마를 쳐다보고, 그 엄마는 딸이 대견해서 꼭 안아 올렸다가 내려놓는다. 팔을 얼굴에 붙이고 물구나무선 사람의 그림 밑에 빨강, 노랑, 파랑으로 비뚤어진 동그라미 몇 개를 포개어 그려놓은 그림을 들여다보며 젊은 어머니와 어린 딸이 오후 한때를 가을 햇살처럼 보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또 다른 꼬마가 엄마의 손을 이끌고 자신의 그림을 찾아 동동걸음을 친다. ‘마음대로 그려 보아요.’란 현수막의 글귀처럼 ‘마음대로 그린 그림’에 코를 박고 엄마 둘과 꼬마 둘이 한데 어울려 ‘마음대로’ 까르르 까르르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황량했던 마음 살에 네 사람의 꼬마와 엄마가 까르르 웃는 웃음을 꽂아준다. 문득 마음이 따뜻해진다.
자리를 조금 옮겼다. ‘환경부는 바보인가 모래섬이 습지인가’, ‘불안해서 못 살겠다 구담 습지 제거하라’, ‘구담 습지 제거하라 풍천 면민 다 죽는다’ 풍천의 여러 단체에서 붙인 현수막들이 서쪽 구담 마을을 에우는 듯 했다. 따뜻하던 마음이 순간 섬뜩해졌다. 낙동강은 지금 리모델링 중인데, 4대강 사업은 아직 갈등 중인 모양이다. 갈등의 골을 퍼 올린 낙동강의 모래로 메울 수는 없는가. 내 생각이 어리석고 어불성설이겠지만, 하도 답답해서 해 본 소리이다.
천주교 구담 교회로 들어가는 길을 지나 모퉁이하나를 돌아 나가니, 들판은 모래성을 이루었다. 집채만한 모래더미들이 신풍 앞들까지 빼곡하게 들어섰다. 지난여름에 본 것보다 모래더미는 크고 길었다. 말하자면 낙동강은 지금 리모델링 중인 것이다.
신평 마을을 지나면서 낙동강과 헤어진 916번 지방도는 축동 마을로 들어섰다. 길섶 낡은 정미소가 정취어려서 길손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했다. 문은 닫혔는데, 바람벽엔 연탄이 단정하게 쌓여 있었다.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억새가 다시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은빛 머릿결을 가을바람으로 쓸어 넘기는 억새꽃이 방장의 은발과 같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는데, 방장은 이내가 가뭇하게 낀 비봉산을 원경으로, 억새꽃을 근경으로, 논배미를 내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선이 고운 비봉산의 짙은 갈매빛과 논배미의 녹황색과 억새꽃의 은빛이 역광 속에서 아름답다. 햇빛은 비봉산 근처에서는 아득한 듯하다가, 노랗게 익어가는 논배미 위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더니, 억새꽃 속으로 잠입해서는 소리를 팔랑팔랑 내고 있었다.
잠시 낙동강과 헤어졌던 길은 지보 초입에 이르러 한 줄기를 지보에 내 주고 좌측으로 급하게 휙 돌아나갔다.
그 길은 풍지교와 지인교를 낙동강에 걸어 두고, 길게 그 강을 건넜다. 이 두 다리를 기점으로 해서 예천과 의성이 남북으로 갈리고, 다인과 풍양이 동서로 갈린다.
풍지교 근처에 차를 세우고 풍지교에 들어서니, 다리는 낡아 까만 때가 끼었다. 지인교는 자동차 굉음으로 요란한데 비해 풍지교는 적막했다.
작업 중인 틈서리를 빠져나와 다리 밑을 흐르는 낙동강은 흐렸다. 풍지교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에 깔려서 흐르는 낙동강도 흐리고, 지인교의 적막을 건드리며 흐르는 낙동강 역시 흐렸다. 그러나 모래톱은 흐리고 빈약한 물을 옆구리에 차고 넓고 훤하게 펼쳐졌다.
풍지교 옆으로 난 강섶 벼랑길을 타고 매창리 마을로 들어갔다. 공주이씨 집성촌을 이루는 매창리 산기슭이 온통 분묘로 가득했다. 문중의 묘소를 몽땅 모아 놓은 모양이다. 마을에서 만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은 “등 너머 우리 마실은 모래 야적장으로 강제 수용돼서 어쩔 도리 없이 내 줬제.”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보상으로 받은 평당 8만 7천 원이 마음에 차지 않는단다. 인욕은 무한값이거늘 어찌하겠나마는 우리 고향 사람들은 단돈 만 원짜리 땅에 목숨을 걸고도 가멸케 사는데…….
풍지교를 건너서 삼강 마을로 가는 길, 낮은 구릉 위를 길은 가볍게 출렁거렸다. 길섶엔 코스모스들이 한창 시절을 화사하게 넘기고 있었다. 고개를 빠짝 치켜들고 살래살래 흔들어대는 모습이 천상 초등학생 일학년 같다. 길손은 코스모스의 환호를 받으며 한참을 카퍼레이드를 하는 호사를 누렸다.
풍양에서 59번 국도로 들어선 차는 고개 하나를 성큼 넘어섰다. 저만치 삼강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고갯마루를 타고 내리는 길에서 낙동강과 다시 만났다. 낙동강은 북쪽에서 내리꽂혀 오다가 길 밑에서 급하게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낙동강에 아랫도리를 파묻은 봉우리들의 안존한 배치가 범상찮은 경치를 연출해 냈다. 강의 북쪽으로는 열사흘 달만큼이나 둥글게 부풀어 오른 모래펄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가을은 빛과 색깔의 계절이다. 갈매빛의 산 그림자를 띄운 낙동강 물빛은 푸른데, 모래톱과 모래섬은 그 빛깔이 달라 모래톱은 노릇하고, 모래섬은 희다. 나뭇잎에 암팡지게 묻은 햇빛을 바람이 뜯어내는 모습도 멋지다. 나 역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길에서 가을의 빛이 되고 싶었지만, 그 욕심을 다스리며 삼강 마을로 들어갔다.
삼강은 오래전 나루터 마을이다. 사불산에서 발원한 금천과 무섬 마을과 회룡포를 깊게 휘돌이친 내성천이 만나자마자 낙동강에 몸을 섞는 지점에 나루터 마을로 터를 잡은 곳이 삼강이다. 세 줄기의 강을 타고 내려온 배가 서로 섞이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와 부딪치는 삼강 나루에서는 뱃사람이 쉬어가고 보부상들이 묵고 갔다. 때로는 시인묵객이 찾아들어 술잔에 시를 띄우기도 했을 터이다. 각 고을의 말과 인심이 여기서 교차하고, 각 지방의 물산들이 이곳에서 교환되었다. 때문에 삼강엔 물의 역사가 스며 있고, 인간의 삶이 고여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삼강은 그 옛날의 고장이 아니다. 청풍자 정윤목이 세운 삼강 강당이 그나마 옛것을 지니고 섰다. 정윤목이 백이숙제의 묘(廟)에서 모사(模寫)해 왔다는 ‘百世淸風’ 편액이, 길손이 이 삼강을 찾아온 뜻을 알아주는 듯해서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삼강주막 주변에는 그 옛날 강에 정박하던 나룻배만큼이나 많은 차량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나는 몇 해 전에 이 주막을 스쳐간 일이 있다. 그때 주막은 홰나무 그늘에 갇혀 퍽도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아니다. 사람들은 막걸리 한 사발을 사 먹으려고 삼강주막 마당에 늘어섰다. 시끌벅적하기가 60년대 시골 장터 같다. 그러나 이 또한 그때의 시끌벅적함이 아니었다. 오늘의 시끌벅적함 속에는 절제된 질서의 냄새가 났다. 자연적인 인간미가 빠져버린 감을 지울 수 없었다.
홰나무 밑의 그 삼강주막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봉놋방에서는 사람들이 이미 낮술에 취해 몇은 눕고 몇은 벽에 기대어 세설(細說)이 한창이었다. 툇마루에는 임자 잃은 빈 술상 하나가 놓였다.
‘창수 오빠, 우리 이쁜 2세 빨랑 만들자’
어느 예쁜이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남기는 사랑의 메시지다. 봉놋방 바람벽에 새까맣게 새겨진 낙서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듯 예쁜 낙서가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낙서들은 괴발개발 마구 쓴 것들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벽을 긁어 왜 낙서를 하노? 문화재를 이렇게 관리해서는 안 돼. 전에는 부엌도 참 아기자기해서 좋았제. 지금은 다 버려놨어. 집을 다 뜯어고친 게야.”
삼강이 문화 마을로 개발되면서 원형을 잃어버린 삼강 주막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방장의 말이다. 왜곡된 부분을 낌새채지 못한 나는 그 옛것과 새것의 차이를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
새까만 그을음이 낀 바람벽에 유리판을 덧대고 ‘외상 변재 장부’란 설명을 붙여 놓은 것을 가리키며,
“저것으로 봐서는 고친 흔적을 내 눈으로는 찾을 수 없는데요?”
반문을 하고 나서자, 방장이 말을 받아넘긴다.
“저건 집을 헐고 고치면서 원형을 살려낸 부분이지 뭐. 그나마 남겨 놓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이 문자가 모자라 벽에다 자기만 알아보는 금을 그어 놓은 외상 장부야. 참 재미있제.”
부엌에도 외상 장부 둘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뱃사공의 외상 장부였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의 외상 장부였다. 뱃사공과 일반인을 갈라놓은 까닭을 알 길이 없지만, 아마 뱃사공과 일반인의 술값을 달리 매긴 모양이다. 나루에 기대 사는 사람과 나루를 거쳐 가는 사람의 질긴 인연이 이렇듯 흙바람벽에 얄궂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아닐는지.
주막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아왔을 홰나무도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버거운지 여기저기 썩은 자국이 깊었다. 거룻배가 드나들고 황로돛대가 일렁이던 나루엔 긴 제방이 쌓였다. 삼강제(三江堤)이다. 삼강제 한 편에 ‘삼강나루터’란 명문이 새겨진 낡은 나무 팻말이 고독하게 서 있었다. 그것도 제 몸을 주체치 못하여 비스듬히 기운 채. 삐딱하게 선 팻말을 잡고 삼강을 내다는데, 삼강이 보이질 않았다. 거대한 삼강교가 삼강 위를 지나가면서 그것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삼강교로 올라가서 북쪽으로 걸었다. 주막집 홰나무와 평생지기로 살아왔을 또 다른 홰나무가 삼강교에 바짝 붙었다. 그 홰나무의 우듬지가 손이 잡힐 듯하고. 가지 하나는 아예 다리 난간에 몸을 얹어 놓았다. 조금 걸어 나가니, 동쪽에서 낙동강이 그 줄기를 드러냈다. 거기서 다시 몇 발자국을 내딛자, 내성천과 금천이 합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전망이 확 트인 들녘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들 끝으로는 높다란 산들의 능선이 부드럽게 하늘에 드리워졌다. 그 산들 가운데에는 청정한 절집 하나를 품은 사불산도 분명히 있을 터이다.
질주하는 차들의 위압에 질려 삼강의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호사를 오래 누릴 수는 없었다.
해가 서쪽으로 설핏하니 기운 시각에 삼강 고갯마루 아래 길로 늦은 오후의 낙동강을 다시 보러 갔다.
저녁나절 가까이에 이른 낙동강은 명주 피륙을 펼쳐놓은 듯 주변을 압도하는 흰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모래톱은 죽고, 물은 살아났다.
자리를 조금 옮겨 강을 조망했다. 구름의 터진 틈서리를 뚫고 나온 가을 햇살에는 빛의 가시가 돋아났다. 나는 그 빛의 가시에 눈이 찔려, 낙동강이 눈부시게 보였다. 그도 잠시, 구름이 지나가버리자 햇빛 가루들이 좌르륵 낙동강에 떨어져 내렸다. 햇빛 가루들은 일제히 물에 볶이더니, 타닥타닥 작은 빛덩이를 튕겨냈다. 그 서슬에 강도 타고 사람의 눈도 탔다. 역시 가을은 빛의 계절이었다.
햇빛가루를 자글자글 볶아내던 낙동강은 다시 몸을 일으켜 남으로 방향을 잡아 흘러가고, 길손도 삼강의 한 줄기를 따라 길을 나서는 발길에 마음의 채찍을 가했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어렴풋이 낄 무렵인데도 성급한 밤벌레들이 세상으로 나와서 ‘자르릉’ 울어댔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