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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김종상의 고향을 찾아서(글/사진/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1.
아침 밥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방안에 앉아 소복소복 내리는 눈구경을 하면 참 좋겠다. 부산하게 움직이지 말고 하염없이 눈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더구나 너무 멀지 않게 낮은 산들이 포복하고 그 앞으로 추수가 끝난 들판이 여유롭게 있거나, 살얼음 낀 개울이 흐르는 풍경 속에 놓일 수 있다면 또 어떨까.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하늘을 가득 메운다. 그 눈 속에서 한참이나 서 있어도 좋을 일이다. 눈발에 흥이 나서 바라보다가 덜컥 겁이 난다. 한두실과 대밭골로 길을 나서야 하는 일 때문이다. 아동문학가로 알려진 김종상 선생의 고향을 찾아보려는 것인데 마침 마음을 낸 시간과 강설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선생에게 고향은 부모님과 가족들의 고단한 일상과 사랑이 녹아든 삶의 근원이다. 가상유서에서 귀천이 아니라 귀향을 유언으로 삼고 계시는 걸 보고 놀랐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의 실감을 느낀 글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다행히 정오가 지나고 해가 비치더니 아스팔트는 비온 뒤처럼 추적추적거린다. 눈이 녹은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한두실로 길을 나섰다. 흐리지만 해는 비추는 편이고 해를 받은 양지쪽이나 차량흐름이 많은 도로는 모두 눈이 녹아서 운신의 폭이 넓었다. 낙동강변을 낀 외곽도로나 옥동을 관통하는 큰 도로는 다 눈 녹은 물로 축축하다. 눈이 온다고 일 안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차를 타고 도로 위를 달린다. 안동교도소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니 추위에 언 개울이 보이고 눈 내린 산은 조용하게 앉아 있다. 드물게 차들이 다니고 느릿느릿 길을 가는 경운기도 한 대 보인다.

그런데 한두실 초입부터 이상한 냄새며 소 울음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린다. 안동에서 발생한 구제역이 아직 멈추지 않아서 이곳에도 차량소독기가 설치되어 있다. 입구에서 어디를 가는지, 무엇하러 가는지 꼬치꼬치 묻는다. 혹 기자는 아닌지 차 안을 두루 살핀다. 질문에 답을 드리고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도로가에 있는 축사에서 포크레인으로 소를 트럭에 싣고 있다. 이미 축 늘어진 소는 눈도 감은 상태였다. 구제역의 구체 현실을 목도하니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마음속으로 명복을 비는 일을 겨우 했을 뿐이다. 한두실에는 소를 키우는 축산농가 시설이 많이 보였다. 규모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거의 비어 있는 축사에 간간이 소가 보이기도 했다. 구제역 발생지역 출입금지라는 표시와 출입금지 테이프가 붙어 있다.

한두실 입구에서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아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를 보니 대밭골은 왼쪽으로 가야 한다. 대밭골로 들어서니 아담한 동네가 나오는데 인적이 드물다. 대밭골 동네집들은 하나같이 담을 두르지 않았다. 날이 추워 길을 다니는 사람 없고 개 한 마리 짖지 않는다. 우연히 마당에 나섰다가 나와 맞닥뜨린 어르신께서 원래 담이 없이 산다고 하셨다. 들판은 추수가 끝난 여유로움이 가득했고 산은 아침에 내린 눈으로 더욱 고요에 들고 있었다. 마실을 다녀오시는 할매한테 관음절이 어디냐고 여쭤보니 대밭골에서 학가산 쪽으로 계속 더 가라고 하신다. 그래서 길이 보이는 대로 들어가니 눈밭이다. 응지에는 눈이 전혀 녹지 않아서 더 이상 들어가기엔 곤란해서 그 길에서 멈추고 말았다.

선생의 고향 관음절이란 곳엘 가면 어린시절을 보낸 집이 그대로 있고 부모님 묘소에는 시비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쉬움이 많다. 굳이 눈오는 날을 잡아서 길을 떠나다니 세상일은 참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꼭 그곳엘 가서 선생의 문학세계를 담은 고향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아보고 싶다. 곧 다시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눈밭을 조심조심 돌아나왔다. 나오면서 한두실로 발길을 옮겼다. 한두실에서는 트럭에 실려가는 소를 봤다. 몸이 늘어진 상태여서 트럭이 흔들리는대로 다리가 일렁거리는 소들. 힘들게 언덕을 오르는 트럭에 실린 그 소들을 보며. 죽음 앞에 놓인 가축과 축산농가의 고통과 전염병 확산을 막자고 불철주야로 현장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 어디 하나라도 마음 아프지 않은 현실이 없는 이 동네를 하필 이맘 때 찾아나선 것도 모두 인연이 아닌가. 이곳이 고향인 선생께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거란 생각이 불현듯 든다.

2.
선생은 1935년에 한두실에서 태어났고 해방이 되면서 관음절로 옮겨 살았다. 가족들이 관음절로 옮겨 살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한두실에서 살던 시기는 해방 전으로 친일세력으로부터 압박과 핍박이 대단히 심했고 땅까지 모두 빼앗겨버렸다. 해방 후, 땅을 돌려받으려 소송을 했지만 그들이 요직에 앉아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일제 앞잡이 노릇한 사람들의 방해로 땅을 모두 빼앗기고 맨손으로 관음절로 이사 아닌 이사를 해야 했고 이때 조부는 아예 호적까지 바꿔버렸다고 한다. 역사의 상처와 시대의 우울이 그대로 개인 가족사에 그늘을 드리웠다. 태어나서 자라면서 정이 든 마을을 개인의지나 자유로운 선택과 관계없이 부당한 권력에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것은 실향체험과 다를 것이 없다. 조부가 고향을 등지면서 선택한 것은 고향과 멀지않은 동네로 옮겨가는 일이었다. 집안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 앞에 아버지는 가족을 떠나 객지로 나가시고 어머니의 수고로 겨우 집안이 유지되었다. 선생은 가난의 무게만이 아니라 부당한 세상살이를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소년이었다.

고향에 대한 깊은 마음을 볼 수 있는 글이 선생의 가상유언장에 나온다. 이 세상 마지막날 그리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화장을 해서 고향 논밭에 뿌려달라는 것이다. 물론 선생의 철학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나고 자란 터에 대한 고마움, 평생의 누림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주문한 것에서 선생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고향의 이슬과 풀, 별의 기운을 통해 자라고 들판의 논밭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채소로 피와 살을 키웠으니 그리로 돌아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행태를 유언으로 남기는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지만 그 마지막을 고향 안에서 나누고 싶다는 소망에 겸허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선생은 조부의 반대로 일제시기 일본글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학령이 넘어서도 글자를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문맹의 상태였다. 해방 되고 풍산초등학교에 입학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1학년에 입학해야 하나 나이가 많아서 4학년으로 들어갔다. 이때 나이가 13세로 추정되는데, 6학년에 해당한다.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4학년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는 9월이 학기말인데 6월 달에 입학을 했으니 4학년을 서너 달에 마친 셈이다. 글자도 깨치지 못한 소년이 몇 달 만에 5학년이 되고 말았다. 대신 아버지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월반하여 6학년이 되었다. 아마도 뒤늦게 입학한 부끄러움, 바삐 한글을 깨쳐야 한다는 다짐이 대단했을 것 같다. 이후로 선생의 학력은 우수하고 모범적인 상태로 변하게 된다.

동년배들에 비해 학력이 떨어졌던 현실을 재빨리 깨닫고 만회하는 방법으로 ‘월반’을 선택했던 선생의 의지가 놀랍다. 이미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년을 월반까지 해서 또래들과 같은 나이로 병산중학교에 입학한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선생은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생물과목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나기도 하나 비장함이 가득하다. 학교생활을 훤하게 드려다 볼 수 있는 멋진 일화이다. 생물시험은 한 문제에 시험답안지 2장을 주는 주관식 논술이었다. 예를 들면, ‘고사리의 세대교번을 도해하여 논하라’라는 시험문제는 제대로 쓰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특히 고사리는 세대교번 과정을 반복하는데 이 과정을 전부 그림으로 그린 후, 설명까지 붙여야 하니 중학생에게 너무나 버거운 시험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선생은 생물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을 모두 외워 완벽하게 그려냈고 설명도 붙여 담당선생님이 보기에 흡족한 답안지를 만들었다. 모든 과목을 암기했고 수학까지 문제를 잘 모르면 공식을 외워서 풀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중학시절을 보냈으니 소위 우수한 모범생이 되었다. 생물 선생님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으나 집안 살림이 워낙 힘들었던 시절이어서 사범학교를 가게 되었다. 당시 전국에 사범학교는 몇 되지 않았고 입학금이며 일체 비용이 들지 않았으므로 선생의 가정형편에 딱 맞는 학교였다. 한국전쟁 후 곧바로 발령이 났고 상주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선생의 50년 문학인생을 다룬 자료에 보면 중학교와 사범학교를 같이 다닌 신현득 선생의 기억이 등장한다. 전쟁통에 학교를 다닌 세대이니 가난과 전쟁후유증을 함께 나눈 동기였고, 교사로서 작가가 되면서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였다. 여기에 고향까지 다를 것이 없으니 이 두 분의 우정은 따로 인터뷰가 필요한 내용이라 이쯤에서 묶어둔다.

많은 작가들에겐 문청시절이 중요한 글쓰기 시절이라고 할 때, 선생의 문청시절은 아마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실에서 비롯한 것 같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문학의 낭만을 논하기엔 전쟁이라는 시대적 현실이 너무나 암울했을테니까. 글은 사람의 진정성을 닮아 있고 그럴 수밖에 없다. 선생의 동시쓰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보니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한국전쟁 직후에 상주 외남초등에 부임해서 문예반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손수 동시를 쓴 것이 문학에 대한 촉발의 시간이었다. 당시 읽을 책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니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사에게 창작은 중요한 업무가 되고 말았다. 읽을 수 있는 자료를 만들기 위한 글쓰기과정에서 문학적 감수성이 드러나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구체적으로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읽을거리가 없어서 직접 써서 읽은 세대가 있는가 하면, 전문작가가 아니라 교사가 창작한 읽을거리를 읽으며 자란 세대도 있던 아동문학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교사로서의 면모도 놀랍다. 선생의 방과 후 서예교육은 특별하다. 방학을 해도 지속적으로 가르쳐서 한 학급아이들이 모두 상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고,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화까지 겸비한 교양인으로 키워내려는 선생의 의도가 빛을 발했다.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전통정서를 붓글씨 쓰기를 통해 몸에 체득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선생께서 스스로 방학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고스란히 내놓지 않으면 힘들었을 일을 자청하고 나섰던 것도 모두 아이들 입장에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한 결과이다. 담임을 맡은 학급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붓글씨는 정신으로 쓴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 아름다운 스승이었다.

선생의 칠순을 기념하며 쓴 어떤 제자분의 글에서 놀라운 대목과 만났다. 선생의 군 입대를 두고 학급의 아이들이 서운해 하여 집에 가지 않고 밤새 교실에서 선생과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날은 학교 옆 고개마루까지 선생을 배웅했다니. 당시 상주 외남초등의 박노익 교장선생은 선생의 문예지도를 특별히 배려하여 새학기가 되어도 학급학생과 담임이 변하지 않도록 했다. 그런 배려의 도움으로 선생의 학급아이들은 수업 성적은 물론이고 전국의 각종 글쓰기 대회에서 수상하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이 전국을 놀라게 할 글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배경과 선생의 사랑이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이 담임이 되길 은근히 기대했다는데 그 속사정은 글쓰기 지도는 물론이고 농사일로 바빠 숙제를 안 해 가도 나무라지 않으셨고, 즐거운 노래로 교실 분위기가 늘 즐거웠다는 것이다.

글쓰기 잘하는 선수를 기르는 일을 한 게 아니라 아이들의 집안사정까지 깊이 헤아려 지도를 한 점이 놀랍다. 여자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두고 학부모와 담판을 짓거나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아이들은 선생의 집으로 데려다 먹이기도 하면서 공부까지 시켰으니. 선생의 제자들이 한결같이 선생님의 존경을 표현하는 일은 당연한 모습이다. 선생도 단칸방에 살았던 시절인데 사람을 기르는 소중한 일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사람답게 기른다는 것은 지식만으로 불가능하며 잘 먹여주는 일로도 모자란다. 감동없이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 것인데 그 역할을 선생은 훌륭하게 감당하셨던 것이다.

3.
아이들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어른이 된 작가가 다시 아이의 심정이 되어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일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작품 쓰기이다. 언제나 느끼는 고충이겠지만 아이의 시선과 ‘통’했는지가 늘 염려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 선생처럼 교직현장에서 아이의 눈높이를 헤아릴 수 있고 아이의 현실이 대체로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분들이 아니면 감히 마음내기 어려운 글쓰기분야이다. 더구나 동심을 그저 천사로 알고 있거나, 아이를 ‘작은 어른’ 정도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동심이 왜곡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동문학자들은 이중의 고충을 겪는다.

선생의 수많은 작품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어서 처음 묶은 동시집 <흙손엄마>를 선택해본다. 1964년에 형설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지만 올해 새로 양장본으로 편집해서 재출간 한 작품집이다. 그 당시 선생의 월급이 4천원인데 자비출판비가 1만원이었다니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책을 출판했다. 대구에서 출판한 이 책은 지역문단에서는 아주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주변의 신현득 선생 등이 좋은 작품을 아이들에게 널리 읽히자고 종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을 도용하여 은근슬쩍 책을 낸 몰염치한 작가가 있었다니 선생의 동시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시를 쓰는 작가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했던 것을 거꾸로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호기심이 동해서 선생의 글을 표절한 작가가 누구인지 이름까지 알아냈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아동문학의 진짜 어려움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굽히고 사물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고 짚어낼 수 있을지 여간 궁금하지 않다. 봄에 대한 눈높이 조절의 시어는 바로 ‘아기’로 제시된다. 생명이 움트는 계절을 아이로 은유화하는 것은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기’라는 새로운 생명의 신비를 친구처럼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낯선 호기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아이들은 낯선 모든 것들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친화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아마도 아동문학자들은 아이와의 거리와 눈높이를 가상의 화자를 통해 적절하게 조율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해방 이후 관음절로 옮겨 산 동네가 그려질 만한 작품도 보인다. 산허리를 감아돌아 가면 초가집이 두세 채가 있고 아침 해도 선잠에서 깨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동네, 구름도 쉬어 넘는 높은 고개 <하늘 첫 동네>가 그렇다. 산이 높아 해가 그리운 나무가 목을 길게 느려뜨린 <외딴집>은 산동네 송이버섯을 닮은 초가집 한 채에 실같이 가느다란 연기가 오르는 곳이다. 농사일로 손의 뼈마디가 굵어지고 커진 아빠(<손이 큰 아빠>)는 분수를 지키는 삶을 몸소 보여주신다. <흙손엄마>는 밭에서 아침 해를 맞이하고 저녁해도 보내며 손에는 흙이 늘 묻어 있다. 엄마, 아빠 들일 나가고 혼자 남은 아기가 심심해 엄마를 부르면 산꿩이 대답하는 <아기>(2), 머루 다래 으름 찾아서 산골짝을 누비는 <두메 아이> 등 학가산 허리춤에서 시작되는 산동네 관음절의 풍경이 그대로 작품에 담겨있다.

시집의 제목처럼 작품 전체가 고향의 산과 냇물, 바람, 햇볕 등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시집에서 다룬 산골마을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면 외딴 초가집 서 너 채에 박 넝쿨 올리고 낮은 산으로 아이들의 주전부리가 될 것들을 그려 넣고, 철마다 변하는 산색과 나무와 꽃들을 그리면 어떻게 보일까. 이 시집의 세계와 적잖이 닮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더 보탠다면 눈망울 맑은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을 산중턱의 들판도 한몫을 할 수 있겠다. 시집이 1964년에 묶였으니 휴전되고 남의 나라 구호물자를 받아 살던 시절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꿈을 나누고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작품 저변에 깔려 있다. ‘휴전선을 두고 전쟁놀이를 하며 자라는 아이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희망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잘 보인다. 곱고 따뜻한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하는 일, 주체적으로 삶을 사는 일,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일 등 인생에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고 있다. 가족, 친구, 산과 강, 그리고 바람과 햇볕 등 자연과 조화로이 어울리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열고 있는 작품집이다.

4.
날이 포근해지더니 내린 눈이 다 녹았다. 착한 눈이 따로 없다. 다시 관음절로 나섰다. 예상대로 학가산 밑 동네답게 언덕의 경사가 제법이다. 눈 온 날 이곳에 왔다면 동네 한 바퀴는 고사하고 꼼짝 못하고 갇혔을 것 같다. 이 동네에도 우사가 제법 보였고 대체로 텅 비어 있었다. 소독작업 하는 풍경은 한두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길은 꼬불거리고 높은 언덕이었지만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다. 산 중턱이라 그런지 단장된 묘지가 많았다. 선생이 부모님 묘소에 시비를 세워뒀다고 하셔서 그 묘를 찾느라 잔디가 잘 정돈된 묘지를 산중턱에서 찾아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포기하고 터덜터덜 언덕길을 다 내려오는데 왼쪽 언덕으로 비석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은 빗돌이 보여서 혹시 아닐까 짐작하며 가까이 갔다. 다행히 시비가 맞다.

아들이 시인이면 부모님은 늘 맑은 글을 읽고 또 듣고 계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짊어지고 사셨던 부모님의 고통과 가난을 그나마 위로하겠다는 시인 아들의 고운 마음이 아닌가.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과수원이 보이고 그 위에 선생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선생이 사셨던 집도 그대로 있다고 하나 구제역으로 텅 빈 축사를 따라 마을이 휑해서 집을 방문하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짧은 해가 지니 산골은 더 빨리 어둠이 몰려온다. 동네가 크지 않으니 잠깐 둘러봐도 될 일이지만 마을 전체가 우울하고 슬프게 보인다. 내 마음이 슬퍼서 그럴 것 같다. 날이 풀리고 봄이 오면 꽃구경삼아 다시 들러보려 한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