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알프스를 넘어 베네치아에서 잘츠부르크까지(글/사진/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1999년 가을에서 2000년 여름까지 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머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팜스라는 곳에 베니스 블러바드라는 큰 길이 있었는데 그 길 끝에 베니스 비치가 있었다. 관광객들로 넘치는 베니스 비치에는 언제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길가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고 음식점이며 다양한 가게들이 있어서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곳에 베니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여러 개의 운하를 파서 뱃길을 만들어 선박 왕래를 편리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여행을 하는 중간 중간 만나는 지명들은 지금 가는 곳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그 기억들이 앞으로 가게 될 지역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기도 한다. 그런 기억들이 베로나에서 베네치아까지 140 킬로미터의 별 재미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도로 가에 베네치아라는 표지판이 휙 하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차! 또 출구를 놓쳤다. 베네치아 출구를 지나면서는 새로 건설된 도로 같았는데 네비게이터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 다음 출구에서 내려 다시 길을 되돌아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네치아,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와 400개의 다리
2009년 7월 12일 아홉시 반쯤 베로나를 출발해서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베네치아로 건너가는 폰테 델라 리베르타 즉 자유의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3850미터의 이 긴 다리가 개통된 것은 1933년 무솔리니에 의해서였다. 당시의 이름은 리토리오 다리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나치와 파시스트에 저항하여 자유를 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자유의 다리로 고쳤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 자동차는 멈추어야 한다. 길의 끝에는 오른쪽으로 주차빌딩이 있고 그 안에 주차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베네치아 내부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차 요금은 한 시간에 3유로, 하루에 20유로다. 프랑스에서부터 이태리까지 주차장은 하루에 20유로짜리가 가장 많았다. 베네치아는 좀 비쌀 것으로 생각했으나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차를 하고 나오니 11시 반이 되었다.

오늘 계획은 베네치아를 둘러본 후 베네치아 건너편의 푸시나 캠프장으로 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베니스로 건너와 오전에 어제 보지 못한 곳을 마져 본 후에 10시 전후해서 알프스를 넘어 잘츠부르크로 가는 것이다. 푸시나 캠프장에서는 베네치아까지는 약 4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20분 간격으로 맞은 편 트론케토 섬까지 페리선이 다닌다고 했다.
인구 27만의 베네치아 시는 아드리아 바다의 서북쪽 끝에 있는 베네치아 만 안쪽으로 형성된 라군-석호-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 많은 섬들은 150개의 운하와 약 400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독립된 왕국으로 존재했었다. 15세기 전후 지중해의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누렸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두칼레 궁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그 당시 완성된 것들이다. 우리에겐 베니스 국제영화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공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리세공업의 중심지 무라노 섬이 유명하다.

일단 주차장 앞에 있는 코스티투찌오네 다리를 건너 베네치아의 기차종점인 산타루치아 역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스티투찌오네’는 헌법이란 뜻이다. 다리 이름으로는 좀 생뚱맞은 이 다리는 2008년 9월 11일 밤 개통되었는데 2008년이 이태리 헌법 60주년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다. 다리 위에 올라서니 널찍한 운하 건너편으로 베니스의 오래 묵은 지붕들이 빼곡히 들어찬 있었다. 산타루치아 역은 이름은 꽤나 친숙했으나 다른 지역의 여느 정거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실망스럽다.

골목과 운하와 다리 위에서 벌이는 미로게임
역 앞을 지나는 대운하는 산타루치아 역앞에서 베네치아의 중심부를 크게 S자를 뒤집은 형태로 지나면서 베네치아를 둘로 갈라 놓고 있다.
스칼치 다리를 건너면 길은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 속으로 연결된다. 골목들은 엄청나게 좁아 세 사람 정도가 가로로 걸으면 꽉찰 정도의 길이 대부분이다. 우선 방향을 베네치아의 남쪽 끝 바닷가에 있는 산마르코 광장 쪽으로 잡고 골목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런가 사람들은 유별나게 많았다. 어차피 보는 것마다 처음 보는 것이니 골목길을 가면서 만나는 유적들을 닥치는대로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서 길을 찾아 나섰지만 이곳의 길은 생각대로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많은 운하로 인해 운하를 연결하는 다리를 제대로 찾지 못해 골목의 끝은 언제나 물길로 막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운하로 막힌 골목을 수도 없이 되돌아 나가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도 소용 없게 되었다. 이건 숫제 미로게임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젠 그냥 재미로 이곳 저곳을 보면서 리알토 다리 표지판을 찾아 대충 남쪽으로 빠져 나갔다.

골목은 수시로 좁은 운하와 만나는데 운하는 또 하나의 골목이었다. 좁은 물길에는 곤돌라들이 줄지어 다니고 검은 가로줄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사공들이 한껏 폼을 잡으며 노를 젓는다. 이를 보니 정말 우리가 베네치아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골목을 이리저리 빠져다니다 보면 자주 널찍한 광장을 만난다. 광장을 중심으로 작은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광장은 한 복판에 우물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는데 광장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일정 지역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리알토 다리는 꽤나 유명한가보다. 웬만한 좁은 골목에도 리알토 다리로 가는 화살표가 붙어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에스자로 구부러진 대운하를 건너는 다리가 겨우 세곳 뿐인데 리알토 다리는 운하의 중심에 있어서 산마르코 광장쪽으로 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리알토 다리의 바로 앞에는 유명한 산 지아코모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421년에 세워졌다고 하는 베네치아의 가장 오랜 교회로 알려져 있다. 1500년대 리알토 지역의 대화재에서 살아남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회 전면 중앙에 15세기의 것이라는 거대한 원형시계가 걸려 있었다. 베네치아의 풍경은 중세화가들의 좋은 소재였는데 산 지아코모 교회도 화가들이 즐겨 그린 대상이었던 것 같다. 1725년에서 26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카날레토의 그림이 있는데 그림 속의 풍경과 지금 보는 풍경이 하나도 보태진 것도 빠진 것도 없어 베네치아가 얼마나 중세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시간이 한시가 다 되었고 배도 고팠다. 카날레토가 그림을 그렸을 법한 성당 맞은 편 계단에 앉아 성당을 보면서 골목에서 산 빵과 음료수로 점심을 때웠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산마르코 광장의 화장실
리알토 다리는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옛날부터 베네치아 상권의 중심지여서 사람도 물건도 모두 이 다리 위로 모여들었다. 현재의 대리석 다리가 놓여진 것은 16세기 말이라고 하니 이미 사백여년이나 나이가 들었다. 다리 위에는 양쪽으로 화려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고 한쪽에는 골동품 시장도 열려 있었다.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운하의 풍경은 베네치아의 영화로운 역사가 묻어 있는 듯 했다. 리알토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빠져나오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고 흰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햇볕으로 눈이 부셨다.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산 마르코 교회로 갔다. 마르코는 마가복음을 쓴 마가를 말한다. 베네치아는 9세기에 알렉잔드리아에서 사도 마가의 시신을 몰래 가져와 이 교회를 짓고 교회 안에 모셨다. 이후 마가 즉 산 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건물 안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카메라를 손에들고 맹목촬영으로 적당히 샷터를 눌러댔다.

밖으로 나오니 방광에서 아까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오늘 아침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화장실을 한번도 가지 않았다. 광장을 가로질러 길바닥에 그려진 화장실 화살표를 따라 광장 끝의 골목 속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들었다. 요금 1유로 50센트, 한국돈으로 2700원, 입이 벌어질만큼 비쌌다. 베네치아를 깨끗하게 보존해야 하니 가능하면 이 섬 안에서는 생리현상도 참으란 말인가? 인심이 고약해도 너무 고약하다. 그러나 불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카사노바 감방에는 왜 여 간수가 있었을까?
대성당을 나와 맞은 편 캄파닐레 종탑으로 올랐다. 높이 99미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면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종탑 위에서의 전망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힘들여 올라온 것이 후회되지 않는다. 광장의 끝에서 아드리아 바다를 보다가 탄식의 다리를 보라는 관광안내서의 말에 따라 바닷가를 동쪽으로 걸었다. 다리는 공사중이라 다리 양옆의 건물벽과 아래 위를 하늘색으로 칠한 판자벽으로 가려놓아서 나는 두 번이나 지나쳤다. 다리 밑쪽의 판자 벽에는 “IL CIELO DEI SOSPIRI"라고 크게 써있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까막눈이니 지나칠 수 밖에. 그 글자가 바로 ”탄식의 다리“란 뜻이었다.

이 다리는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인데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탄식을 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다리를 유명하게 한 것은 유럽 역사상 최고의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성문란죄로 이 감옥에 갇혔다는데 그의 특기를 발휘하여 여자 간수를 유혹하고 열쇠를 받아 문을 열고 유유히 감옥 밖으로 빠져 나갔다고 한다. 자신의 특기를 언제 어느 때나 유효 적절히 살릴 수 있는 것이 바람둥이보다 더 큰 그의 특기였던 셈이다.

다시 주차장 쪽으로 돌아가면서 물길에 막힌 막다른 길을 얼마나 많이 되돌아 나왔던지. 결국 마지막 1킬로미터는 수상버스를 타야만 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베네치아에서 하루를 묵기로 한 계획을 취소하기로 했다. 내일 오전 또 이곳을 헤멘다는 것은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골목 안 이곳저곳을 꽤나 많이 돌아보았고 그러면서 여러 곳의 교회건물과 유적들도 둘러볼 수 있었다. 곤돌라도 못타보고 박물관 미술관도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것으로 베네치아 구경은 끝내고 싶었다. 2700원짜리 화장실도 또 가기 싫었고.

밤에 오르는 알프스 암페초 계곡의 산길
시간은 이미 여섯시를 넘고 있었다. 피곤한 몸을 좀 쉬고 차안의 짐을 정리한 뒤 여섯시 반이나 되어서 차를 움직였다. 목적지는 알프스 중턱의 코르티나 담페초, 이 코스는 이효걸 교수가 추천한 길이다. 베네치아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려면 북쪽으로 곧장 난 고속도로를 타면 약 4백 7,80킬로미터 정도되니 충분히 잡아도 여섯 시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속도로 여행처럼 재미 없는 것은 없다. 또 알프스의 절경을 즐기려면 당연히 알프스를 정면으로 넘어가는 코스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동계올림픽을 열었던 명승지 코르티나 담페초를 경유하여 알프스 뒤편의 도비아코로 해서 왼쪽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려한 산계곡을 관통하기로 했다.

베네치아를 떠난지 한시간이나 지났을까 차는 산곡간으로 들어섰다. 알프스 산맥의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돌로미티 국립공원이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산괴가 양쪽으로 펼쳐진 사이로 좁은 자동차길이 구불거리며 끝없이 위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에는 차가 별로 없는데 반대쪽 차선에서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내려오고 있었다. 산간이라 그런지 여덟시 좀 넘었는데 이미 해가 떨어졌다. 캄캄한 밤이지만 희끄므레하게 스쳐지나가는 암페초 계곡의 양쪽에 높은 산의 실루엣이 검푸른 하늘을 찌르는 듯이 서 있었다.

코르티나 담페초에 도착한 것은 열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17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거의 네 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마을의 중심부는 관광지답게 환하게 불빛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호텔은 100유로를 훨씬 넘었고 밤이 너무 늦어 캠프장을 찾기도 어려웠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서 위로 더 올라가보기로 했다. 몇 군데의 호텔을 거쳐서 찾아낸 곳이 알 라린이라는 작은 목조 호텔이었다. 하룻밤 80유로였는데 작다고 싸지 않다는 것을 이미 다른 호텔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인터넷이 되냐고 했더니 되기 되는데 한 시간에 5유로라고 했다. 메일도 확인하고 여행정보도 좀 찾아보려고 했는데 포기할 수밖에. 방은 3층이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종업원은 짐을 들어줄 생각도 없이 카운터에 앉아서 웃기만 했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3층 방을 찾아 들어가니 방은 의외로 깨끗하고 알프스 산간의 분위기가 철철 넘친다. 자정이 다 되어가니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를 돌아 이곳 알프스 중턱까지 오는 여정이 참 만만치 않은 하루였다.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박물관 “시간의 흐름 속에서”
7월 13일 월요일이다. 여행을 시작한지 19일째고 파리를 출발한지 16일째다. 오늘은 일주일 간의 이태리 여행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간다.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암페초 계곡을 올라 알프스를 넘으면 오스트리아의 동티롤 지방이다. 도로의 양쪽은 여전히 산으로 막혀 있지만 산세는 훨씬 부드러워지고 완만한 경사지에 온갖 야생화들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길옆 숲 속에서 싸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한 시가 좀 넘었을 때 스타인펠트라고 쓰인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다. 화장실도 가고 좀 쉬기도 하려고 차를 세워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화장실이 있을만한 곳이 없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들도 모두 잠겨있고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무심고 길가에 세워진 마을 안내판을 보니 박물관이라고 쓰인 것이 보였다. 아, 저기 가면 해결되겠구나. 박물관보다도 볼일이 더 급했다. 그런데 박물관 화살표를 따라 차를 몰았으나 마을 끝까지 가도 박물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집안 텃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 묻고 다니다가 마을 끝에 있는 한 농가에 다다랐다. 그때 담 안에서 끈 달린 런닝셔츠를 걸친 건장한 남자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박물관 아세요?" 하고 소리쳤는데 뜻 밖에도 남자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 집이 바로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 들어가니 그곳은 큰 창고나 다름없었다. 입구에 몇 개의 진열장이 있었고 잡다한 기계류와 옛날 카메라, 축음기 등이 보였다. 주인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겼는데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며칠 만에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진열실 안으로 한걸음씩 들어가면서 우리 두 사람은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방에는 거대한 크기의 트랙터가 가득 세워져 있고 또 다른 방에는 농가에서 사용하는 농기구들이 가득 들어 있고 또 어떤 방에는 1938년도 스타이어 베비라는 작고 예쁜 빨간색 승용차도 있었다. 1940년대나 50년대의 이 지방에서 나온 각종 인쇄물은 물론 심지어는 학생 또는 여러 직종의 유니폼들도 전시되어 있어 이 지역 사람들이 100년 동안 사용한 모든 물건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전시실은 수장고와 구분이 되지 않았는데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지 싶었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컬렉션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박물관이 오스트리아 국립박물관보다 가치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박물관을 보다가 잊고 있었던 뇨기가 다시 방광을 짓눌렀다.

화장실을 찾다가 우리는 뜻밖에 놀랄만한 박물관 체험을 한 것이다. 안동이 생각났다. 우리는 지금 이런 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나오면서 안내 팜플렛을 받아 보았다. 삼단으로 접힌 작은 종이의 표지에는 "Museum Im Laufe der Zeit"라고 쓰여 있었다. 박물관 이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였다. 우리에게 자세히 안내를 한 사람은 박물관장 프란츠 피힐러였는데 삼대에 걸쳐 수집된 유물들이라 했다. 비록 허름한 창고에 불과했지만 이런 시골에 이렇게 멋진 이름의 놀라운 박물관이 있다니 그냥 부러웠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
스타인펠트 박물관에서 나와 한적한 숲에서 점심을 먹고 25킬로미터를 더 가서야 고속도로를 만날 수 있었다. 베네치아와 바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이다. 이제부터는 시속 13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내며 달릴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잘츠부르크까지는 150킬로 정도니까 늦어도 한 시간 반이면 잘츠부르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럭저럭 잘츠부르크에 도착하니 4시가 넘고 있었다. 잘 곳은 인터넷으로 눈여겨 봐둔 스타트블리크 캠핑장이다.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골랐는데 시설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직 해는 하늘 높이 있는데 시내에 나가기는 애매한 시간이다. 곧 대부분의 매표소가 문을 닫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냥 일찍 저녁해먹고 쉬기로 했다. 캠프장 바닥에는 자잘한 자갈들이 많았는데 일일이 치우기도 어려워 적당히 하고 텐트를 쳤더니 깔개가 시원찮아 그런지 등이 배겨서 잠이 잘 들지 않았다. 텐트 밖으로 나와 산 밑을 보니 잘츠부르크 시내의 불빛이 바로 눈아래 펼쳐졌다.

부지런히 서두른다고 했는데 아침을 먹고 시내로 내려가니 벌써 여덟시 반이나 되었다. 잘츠부르크는 지금까지 보았던 유럽 중세도시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르네상스 이전의 건물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오래된 건물들인 수도원 건물들도 18세기 전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래도 가장 오랜 건물은 13세기와 15세기에 지어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회와 16세기의 것으로 호엔잘츠부르크 요새를 비롯한 몇 개의 교회와 수녀원 등이 있다. 시내 중심에는 잘차흐 강이 거의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데 강의 서쪽에 호엔잘츠부르크를 비롯해서 대성당 수도원 그리고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도시 중심가가 있고 동쪽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유명한 미라벨 궁전과 정원, 모차르트 박물관 등이 있다.

시내로 들어오는 순서대로 모차르트 박물관을 보고 미라벨 궁전 앞의 정원을 거쳐 잘차흐 강을 건너 호엔잘츠부르크 성으로 올르기로 했다. 모차르트 박물관을 비롯해서 역사박물관, 파노라마 박물관 등을 둘러 보았는데 역사박물관의 전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비디오 모니터의 활용은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모니터들을 유물들과 따로 분리해 설치한 것이 아니고 같은 진열장 안에서 유물들과 서로 섞여 있으면서 전시효과를 상승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히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 첨단 기술의 효과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어서 안동에 돌아가면 대학박물관에서도 시도해볼 만 했다. 미라벨 궁전은 내부가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정원은 아름답긴 했지만 나에게 그리 흥미를 주지 못했다. 강을 건너 잘츠부르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레지덴츠 광장으로 건너갔다.

레지덴츠 광장에는 잘츠부르크의 모든 것이 있다
레지덴츠는 잘스부르크를 지배하던 대주교의 관저를 말한다. 레지덴츠 광장은 중앙에 분수가 있고 남쪽으로 대성당, 서쪽으로 레지덴츠 화랑, 동쪽으로주교 관저(레지덴츠)가 있는데 현재 잘츠부르크 박물관과 파노라마 박물관이 들어 있다.
대성당은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바로크의 반복적이고 복잡하기 짝이없는 장식성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장엄한 성당안에서 보는 바로크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고딕 교회가 갖고 있던 장엄 또는 엄숙성을 깨주는 것 같아 그리 싫지 않았다. 특히 돔 위에서 내려오는 밝은 광선에 노출된 흰 벽은 교회 안을 경쾌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레지덴츠 광장을 둘러싼 이 건물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잘츠부르크의 중요한 유적은 거의 훑어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안에 잘스부르크의 역사와 문화가 거의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광장에 앉아서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호엔잘츠부르크 성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은 제법 가팔랐는데 관람열차가 있긴 했으나 그냥 걷기로 했다. 이 성은 현재 보존된 유럽의 성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데 성 내부를 박물관으로 만들긴 했으나 규모만 클 뿐 다른 중세성들에 비해 크게 볼 것은 없다. 그러나 성에서 내려다보는 잘츠부르크 시가지와 그 반대편의 전원풍경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에서 내려와 성 밑의 광장에서 동쪽을 보니 성의 동쪽으로 낮은 산언덕에 교회처럼 보이는 낡은 건물이 보였고 그리로 올라가는 조용한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옮겨졌다. 언덕 위에는 세월의 때가 시커멓게 묻은 오랜 성당이 있었는데 문에는 기도하는 곳이니 가이드를 동반한 관람을 사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바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수녀로 있던 논베르크 성당이었다. 성당에는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어 고요하기 그지 없고 밝은 햇볕 만이 성당 옆에 조성된 묘지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나마 넋을 잃었다.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잘츠부르크에서 이런 장소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게트라이데 골목에는 간판도 관광상품
잘스부르크를 말하면서 게트라이데 거리의 상점 간판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의 상점간판이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거리의 간판을 보면서 유럽인의 미적 감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간판은 모두 금속공예 작품으로,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이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그림으로 상품을 알리는 것은 글을 모르는 중세 유럽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상점의 품목을 알려주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라는데 오늘날 이처럼 아름답게 발전하여 전 세계인들의 관광거리가 될 줄은 아마 당사자들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간판 외에도 건물들은 그 입구를 꾸민 것이 그대로 건물의 성격을 보여주도록 디자인되었는데 현대미술 박물관의 입구는 그것이 그대로 현대 미술작품처럼 보였고 거대한 절벽을 파고 지은 자연사박물관의 입구는 마치 지구의 몸통 속으로 들어가는 동굴 입구처럼 만들었다. 그림 간판을 만든 사람들의 후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츠부르크에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를 따라다니는 것은 포기했지만 이만하면 볼만큼 본 것 같다. 모처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째딸 수선이가 추천한 비너슈니첼이다. 이 요리는 사슴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인데 지금은 대부분 돼지고기를 사용한다고 했다. 마침 길가 식당 메뉴에 큼직하게 비너슈니첼이라고 써있었다. 식당 이름은 사란. 그런데 시간이 좀 이른가? 식당안에 사람이 없다. 그래도 안쪽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사인과 사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 형편없는 것은 아니겠지. 솔직히 나는 음식맛을 잘 모르니 그냥 맛있는 요리려니 열심히 먹어 치웠다. 얼마나 오랜만에 먹어보는 레스토랑 음식인가.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