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목소리로 말하리라 -고향에 잠든 권기도 형(글/김용직_서울대 명예교수)
한 학년 위의 상급생
그는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좀 쇳된 목소리에 상당한 부피를 느끼게 하는 승벽(勝癖)도 지니고 있어서 무슨 일에든 남에게 지는 것, 뒤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위에 집도 우리 마을이 아닌 고개 하나를 넘어서 있는 다른 마을 출생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 전해에 입학을 한 소학교의 등굣길에서였다. 우리 마을에서 학교와의 거리는 어른들이 7마장이라고 하는 10리 가까이가 되었다. 그 사이에는 낙동강가에 난 벼랑이 있었고 겨울이면 빙판길이 되어 버리는 개천도 건너야 했다. 어른들은 그런 우리의 등굣길을 염려하여 되도록 아침결에 우리가 하는 상학(上學)을 집단으로 하도록 말씀하셨다. 그 무렵 우리 마을에서 소학교에 다니는 학동은 대충 열댓 안팎이었다. 내가 다닐 때는 이미 불문율이 된 단체 상학 원칙에 따라 우리는 거의 날마다 동구 앞에 모여 학교로 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는 외톨이가 되어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좀 늦게 집을 나섰던 것이다. 내가 거의 뜀박질로 길을 재촉하면서 접어든 어느 나무 밑의 우물가에서였다. 그 자리에 고개 너머 마을의 한패거리를 거느린 그가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팔을 벌리고 길을 가로 막았다. 그가 나에게 던진 제일성은 “상급생 보고 왜 경례를 하지 않느냐!”였다. 그의 일갈이 있자 나는 입학과 함께 배운 일본군대식 거수경계를 그에게 붙였다. 그러자 그는 “요오시”라는 일본어와 함께 답례를 했다. 그리고는 그가 거느린 대열에 나를 편입시킨 다음 호기(?)를 부리면서 등굣길 행진을 계속했다. 그날 나는 처음 그의 이름이 권기도(權奇道)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우리보다 한 학년 위라는 것과 특히 운동을 잘하며 철봉과 씨름의 반 대표라는 이야기도 얻어들었다.
그 여름의 수난(水難)사고와 구조
나에게 거수경례를 강요한 그를 나는 상당기간 경계하고 좋아하지 않았다. 무시로 그는 하급생을 불러 복장이 단정하지 못하다든가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음에도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했고 같은 마을의 꼬마들을 불러 모아 전쟁놀이도 시킨다는 말이 들렸다. 그래 나는 먼발치에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길을 피하고 멀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곧 나보다 한 학년 위인 권기도형이 익사직전의 나를 낙동강의 소용돌이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그에게 거수경례를 붙인 바로 그 해 한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여름방학 중 실시하는 소집일을 맞았다. 그 무렵 우리학교에는 학생실습용으로 소와 돼지 등 가축을 사육하고 있었다. 여름철 교내 청소작업의 일환으로 축사와 그 주변 청소가 있었는데 그 당번조로 우리 마을과 권기도형의 마을 학동들이 동원된 것이다. 무더위 속에 우리 또래 10여 명은 축사 바닥을 긁어내고 소독약까지 뿌렸다. 찐 고구마 몇 개가 배당된 점심을 때우자 그날 작업이 모두 끝났다. 선생님의 해산 명령과 함께 사역에서 풀려나자 우리는 멱을 감기로 했다. 당시 우리 또래의 물놀이터였던 낙동강으로 향했다.
우리가 수영장으로 삼는 낙동강은 옛날 예안현을 휘감고 돌아가는 푸른 가람이었다. 그 흐름은 여름에 접어들어 장마철만 되면 유역 일대를 흙탕물로 바꾸며 범람했다. 어른들은 수방대책으로 장터거리 앞 강가에 긴 제방을 쌓아 물막이가 되게 했다. 그로하여 상류지역에 큰물이 나도 시가지가 침수되는 일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제방의 아랫부분을 석축으로 했는데 그 기초 부분과 흐름이 부딪치는 곳에 군데군데 깊은 소가 생겼다. 곳에 따라 수심이 어른 키로 몇 길이 되는 곳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우리들에게 수영전 반드시 준비운동을 하고 또한 얕은 곳을 골라 멱을 감으라고 가르쳤다.
땀범벅이 된 상태여서 나는 그날따라 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까먹어 버렸다. 제방을 내려서 넘실대는 강물을 만나자 곧바로 윗도리와 반바지를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무렵까지 나는 제대로 헤엄치기를 배운 적이 없었다. 개헤엄 정도로 수영의 시늉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뛰어든 강물은 뜻밖에도 깊고 물살이 세었다. 몇 번 허우적거린 다음 곧 나는 물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광경을 뒤따라 제방 끝에 내려선 권기도형이 보았던 것 같다. 그는 곧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내 구조에 나섰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나는 물에 뛰어들어 잠깐 헤엄치는 시늉을 하다가 물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에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를 몇 번 거듭하자 익사 직전의 꼴이 되어버렸다.
이 위기 상황을 보고 권기도형이 뛰어든 것이다. 그가 다가오자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검어 잡았다. 내 불의의 습격(?)을 받자 그는 아주 절박한 사태에 몰렸다. 자칫하면 그가 내 손에 휘감겨 둘이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을 판이었다. 절대절명의 상황이 닥치자 그는 일단 나를 뿌리치고 닥치는 대로 걷어찼다. 그것으로 내가 기진맥진 해버리자 그제야 내 팔목을 잡고 얕은 데로 유도하여 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생각한다. 10대 초입에 익사 직전의 나를 그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그를 내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근로봉사, 송탄유 채취
이야기의 시점이 조금 뒤로 돌아간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한 첫 해 한 겨울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이라고 한 침략전쟁의 초기에 그들은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말부터 전세는 크게 역전이 되었다. 무적을 자랑한 일제의 함대는 남태평쪽에서 미군의 반격을 받아 차례로 깨어졌다. 대륙 쪽의 병단(兵團)도 중국군의 총력전에 걸려들어 도처에서 패퇴해 버렸다. 일제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전국민의 동원을 뜻하는 ‘일억(一億) 총돌격(總突擊)’을 구호로 내걸었다. 그들의 총돌격 체제는 아직 소년들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까지를 침략전쟁 수행의 수단, 또는 부속품으로 내몰았다.
내가 3학년, 그가 4학년이 되자 각 학년의 학급이 일제히 군대식 편제로 바뀌었다. 각 학년의 분단은 분대로, 그리고 각 학급이 소대로 개칭되었다. 그 전까지는 주에 한 번이었던 열병 분열식이 거의 무시로 실시되고 방공훈련과 적전 돌격연습인 전쟁놀이가 교과목 학습과 병행으로 과해졌다. 특히 매주 하루가 수업이 없는 근로봉사 일로 바뀌었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낫이나 손도끼에 지게를 지고 소나무가 있는 산으로 내몰리었다. 일제는 그 무렵에 벌써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인 유류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체연료로 소나무공이를 따서 기름을 얻어 쓰는 송탄유자재(松炭油資材) 채취에 우리를 동원했다.
일제가 강제한 송탄유 채취는 군작전에 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출발 전에 우리는 연병장으로 개칭된 운동장에 모였다. 거기서 교장의 사열을 받은 각 반 단위로 송탄유 채취가 가능한 산을 향하여 행군했다. 대열 앞에는 군기에 해당되는 각 학급의 정신대기가 나부꼈다. 그런 대열에는 또한 행진곡을 부는 나팔수가 붙었다. 우리는 나팔수가 부는 신호에 맞추어 송탄유 채취장인 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권기도형이 바로 그런 나팔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와 급장인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학급 선두에 섰다. 그리고는 학급 담임의 지시에 따라 보조 맞추어 라든가 작업 개시, 헤쳐모여 등의 동작을 취했던 것이다. 더욱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송탄유 자재를 채취할 때 나에게 보여준 호의들이다. 송탄유채취나 기타 근로봉사에서 나팔수들은 작업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특전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와 꼭같이 채취도구를 가지고 가서 각자의 책임량에 가까운 일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유능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의 몫을 채취하고 나면 힘에 붙이는 듯 보이는 다른 아이의 몫도 돌보아 주었다. 언젠가는 그의 배려가 나에게까지 미쳤다. 그날 나는 말라리아에 걸려 오한이 난 다음이었다. 그런 내곁에 그가 다가왔다. “너는 몸이 약하니까 힘이들게라”하면서 자신이 채취한 것을 내 몫으로 하라고 보태어 주었다.
당시 우리 모두는 일제의 송탄유자재 채취량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더러는 제가 봐둔 나무의 공이를 다른 반의 학생이 가로채어 간다고 싸움이 붙는 수도 있었다. 그런 서슬 속에서 권기도형은 애써 채취한 솔공이들을 내 바지게에 옮겨 주었던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서 내 송탄유 채취량은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했다. 70년이 흘러가버린 세월 다음에 생각해도 그때 그의 살뜰한 정이 참으로 새삼스럽다.
대학 입학과 등록금 마련 작전
10대 초에 까까중머리로 헤어진 다음 우리는 환도직후의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1954년도의 신학기에 나는 많이 지각한 상태에서 지망한 대학의 합격증을 얻었다. 당시에 나는 홀어머님을 모시고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접지 못한 채였다. 어렵사리 등록금을 만들었을 뿐 그 다음에 필요한 학비나 숙식비는 전혀 마련이 없었다. 천성으로 나는 미련받은 편이다. 그저 어떻게 되겠거니 생각하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친구인 김호길(金浩吉-서울대 물리학과)군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 한 달이 지나자 쌀을 살 돈도 바닥이 났다. 천하태평식 체질을 타고 난 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한발 먼저 상경한 권기도형이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우리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내 서투른 솜씨로 차린 저녁을 먹고 나자 권기도형이 용건을 말했다. 당시 그는 교양서적을 주로 내는 출판사 <학우사(學友社)>에 나가고 있었다. 학우사 사장이 비상근 편집사원을 구하고 있는데 간단한 시험을 과한 다음 채용을 하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거리를 집에서 해가지고 가면 수당을 지불하는 조건이니 응시해 보겠느냐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런 조건이면 학교 강의는 제때에 들을 수 있을 듯했다. 식생활이 그것으로 해결된다니 나로서는 안성맞춤인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그래 일단 사장과 만나보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다음날 나는 인사동 통문관(通文館) 앞에 있는 출판사로 나갔다.
출판사에서 나는 영어소설 한 페이지와 일본 월간잡지 한 페이지를 시험문제로 받았다. 그것도 출판사측 감독 아래 답안을 쓴 것이 아니라 집에 문제를 가지고 가서 해오라는 조건이었다. 문제가 쉬운 위에 집에서 사전까지 볼 수 있는 편의를 얻었다. 그래도 다음날 긴장이 되어서 출판사로 갔다. 사장인 이종열(李鍾烈) 선생에게 답안지를 제출했더니 대충 보고는 “되었네”라는 말을 하셨다. 이어 일거리를 줄테니 집에서 해가지고 오라는 지시가 뒤따랐다. 그것으로 나는 <학우사(學友社)>라고 한 출판사의 비상근 근무 자리를 얻은 것이다.
처음 내가 학우사에서 맡은 일거리는 일본어로 된 처세훈(處世訓)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800매 남짓이 된 내용을 한 달 남짓 걸려 완성할 수 있었다. 내 일솜씨를 보고 이종열 사장은 그런대로 만족해 했다. 그때 그의 말이 “김군은 요령을 피울 줄 모르는 성격인 것 같아 마음에 드네.”였다. 첫 달 수당으로 나는 오천원인가를 받았다. 당시에는 일반 회사의 평사원 원급이 만원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내 손에 그에 준하는 금액이 쥐어진 것이다. 뜻밖의 보수가 내 손에 들어오자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것으로 적어도 여름방학 때까지의 끼니 걱정이 해결되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나는 권기도형과 함께 그 무렵 나와 같이 자취를 한 김호길, 이상옥(李相玉-서울대 정치학과)형 등을 이끌고 어느 허름한 국밥집에 가서 한턱을 쓰기까지 했다.
학부생활이 시작되고 여름방학을 맞을 때까지 나는 부산의 피난살이를 접지 못한 채였다. 그래 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부산의 어머님 곁으로 내려갔다. 한 달 남짓으로 안동으로 귀향을 예정한 어머님을 도와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그리고 가을 학기에 다시 상경하자 참으로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학기였으므로 상경하고 다음날 학우사로 나갔을 때다. 이종열 사장이 반갑게 내 인사를 받더니 새 일거리라면서 고등학교용 국어참고서 만드는 일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처음 나는 그런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고등학교 국어참고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상당한 전문지식과 교단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집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참고서를 몇 달 전까지 바로 그런 책으로 입시공부를 한 나보고 만들어보라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종열 사장의 제의에 대해 나는 더듬거리면서 내 실력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했다. 사정이 허락만 된다면 전 학기와 같이 일어판 책 번역을 맡겨 주셨으면 좋겠다고 의견도 덧붙였다. 그러자 이종열 사장은 크게 웃었다. “김군은 참 고지식한 데가 있어. 일을 하면 좀더 좋은 보수가 나오는 일을 왜 사양하나. 집필요령과 참고서를 구해 줄테니 일을 시작해 보라”고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가부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일단 사장실에서 물러난 나를 권기도형이 뒤좇아 왔다. 그는 내손을 잡다시피 하고 “그런 일, 너라면 문제없다. 겁먹지 말고 하도록 하라”고 나를 부추겼다. 권기도형의 격려로 나는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참고서 만들기에 착수하면 적어도 두어 학기의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한 해 정도의 생활비도 생길 전망이었다. 그래 이종열 사장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으나 그 다음의 문제가 또 다른 산이었다. 막상 종합 국어참고서를 만들기로 하고 내가 할 작업량을 셈해 보았다. 그 양이 200자 원고지로 자그마치 3000매가 넘을 듯했다.
다른 한편 나는 참고서 쓰기가 이루어지면 내 몫으로 돌아올 집필료를 생각했다. 그것에는 못내 군침이 돌았다. 이 현실과 욕망의 십자로에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공동작업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적격자로 같은 국문과의 동기인 김명곤(金明坤)군을 생각했다. 내가 문학전공 지망임에 반해 그는 국어학 전공을 지향하고 있었다. 가세가 넉넉하여 전공서적을 일찍부터 사서 모은 것이 있었고 또한 대단한 학구파였다. 선생님들이 과하는 기말 레포트를 그 무렵 우리는 대개 200자 원고지 5,60매 정도로 만들었다. 그런데 김명곤군은 그것을 250매가 넘게 써서 제출했다. 그가 인용한 논문 참고서에는 국내것은 물론 영어, 독어, 불어로 된 원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미로 얻은 사흘이 지난 다음 나는 출판사를 다시 찾아갔다. 이종열 사장에게 솔직히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내 말에 그는 참 좋은 생각이라고 전폭적으로 찬동했다. 김명곤군과 나는 그때부터 관계서적을 모으고 고등국어 1, 2, 3학년의 각 과목을 분석 검토하여 해석, 정리를 꾀한 작업에 들어갔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자 우리 두 사람은 같은 방에서 기거를 했다. 날마다 아침결에 간단한 산책을 하는 시간만 두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쳐 참고서 집필을 진행시켰다. 당시 대학은 11월 말부터 방학에 들어갔으나 우리는 그때부터 더 작업에 열을 올렸다. 밤에 5, 6시간 정도 잠을 자는 것과 밥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문자 그대로 총력을 기울여 원고지칸 메우기만을 해나갔다. 그 결과 다음해 1월말까지 종합고등국어 참고서의 원고 3000여 매가 탈고 되었다.
학우사는 그 아래층에 조판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종열 사장은 공무국의 힘을 총동원하여 우리가 쓴 원고를 차례로 조판하도록 했다. 그 결과 그 해 새학기에는 학우사판의 종합고등국어참고서가 책이 되어 나왔다. (단 이때 참고서 저자의 이름은 우리가 아니라 고등학교 현직교사의 이름을 빌려서 썼다.) 몇 달이 안되어 학우사판 종합국어 참고서는 같은 유형에 속하는 책 가운데 가장 많은 부수가 팔렸다. 이종열 사장은 그런 결과에 대해 매우 흐뭇해 했다. 책이 인쇄에 붙여져 출고된 직후 우리는 일반 공무원 일년치에 가까운 원고료를 받았다. 그것을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지자 나는 오랜만에 내 전공관계 서적을 대량 구입했다. 그리고 시골 어머님에게도 송금을 해드렸다. 그 후에도 나는 학우사를 들락거리면서 원고를 쓰고 편집 일도 보았다. 그것으로 4년 동안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고 학교공부를 병행하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나에게 권기도형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내 학부생활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인가. 이제 그는 가고 그와 함께 가진 시간의 기억들만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그는 우리가 함께 오르내린 고향의 산자락 한자리를 차지하고 잠들어 있다. 초상 때 그의 빈소에 달려가 눈물을 뿌린 것 말고는 아직 나는 그의 무덤을 찾아 절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봄에는 꼭 고향을 찾아 그의 무덤 앞에 서리라. 그리고 꿇어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리라. 뚜렷한 목소리로 말하리라. 이제는 이승의 사람이 아닌 나의 친구 권기도형, 고마웠다고, 참으로 고마웠다고.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