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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과거를 위대한 현재로 만든 독일, 독일사람(글/사진/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잘츠부르크의 첫날 캠프장에서의 잠자리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잘게 부순 돌조각들을 깔고 잤으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래서 둘째 날은 58유로짜리 에탑 호텔로 찾아들었고 그날 밤은 여태까지의 피로를 날려버리듯 세상모르게 잔 것 같았다.

7월 15일,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스무 하루 째 되는 날 아침 8시 40분에 호텔을 나섰다. 뮌헨과 뉘른베르크를 거쳐 밤베르크까지 가야했다. 거의 400킬로미터에 이르는 먼 길이다. 밤베르크가 목적지이니 중간의 두 도시가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건성건성 건너뛸 수밖에 없다.
언제 독일 국경을 지났는지 내비게이터에 제한속도 표시가 없어졌다. 유럽의 대부분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시속 130킬로미터인데 독일에서는 속도제한이 없다. 대부분의 차들이 180에서 200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 것 같다. 나도 덩달아 액셀 페달을 힘껏 밟았다. 속도계가 시속 185킬로미터를 넘고 있었다.

뮌헨 시내에 들어온 시각이 10시 10분이니 140킬로미터를 한시간 반이나 걸린 셈이다. 시내로 들어오면서 목적지를 독일 박물관으로 정했다. 뮌헨에서는 이 박물관 한 곳만 보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 최대의 과학박물관이고 고대에서 현대까지 독일 과학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곳이다. 50개 과학기술 분야의 2만 8천점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라 하니 들어가 보지 않고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독일박물관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정식 명칭은 ‘독일 과학기술 대표작 박물관’이다.

낡은 감옥 같은 건물 속에 독일과학기술의 모든 것이
과학박물관 앞으로는 도나우 강의 지류인 이자르 강이 흐른다. 박물관은 보쉬 다리를 건너 들어가게 되어 있다. 자동차길이 자연스레 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어 그냥 차를 몰고 박물관 안 마당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는 차가 몇 대 서 있어서 나도 그 옆에 차를 갖다 붙였다. 그때 콧수염을 단 멋쟁이 남자 하나가 다가오더니 웃으며 뭐라고 하는데 들으나 마나 이곳은 일반인이 차를 주차할 수 없단 말이겠지, 나도 웃으며 다시 차를 돌려 가까운 유료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하고 다시 돌아 들어왔다. 다리 위에서 이자르 강가에 서 있는 박물관을 보니 박물관은 강을 따라 길게 허름한 벽면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깨끗하지 못한 강물을 깔고 성벽처럼 둘러쳐진 길다란 벽면 위로 사각형의 높은 탑이 솟아 있는데 그로 인해 박물관은 마치 감옥처럼 보였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 감옥 같은 허름한 건물이라니. 1903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이 2009년, 100년에서 또 6년이나 지났다. 우리 같으면 싹 헐어내고 초현대식 건물로 새로 짓지 않았을까?

입장료는 8.5 유로이고 학생이 3유로였다. 그런데 매표소의 입장료 안내가 좀 어지럽다. 자세히 보니 어른과 학생 외에 concessions 7유로, 가족 티켓 17유로, 천문관 2유로, 독일박물관 + 교통박물관 + 항공전시관(flugwerft schleißheim) 17유로, 동물원 포함 열 곳을 보는 표는 60유로라고 되어 있었다. 유럽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다니면서 자주 보는 것은 몇 군데 볼거리를 한데 묶어 패키지로 표를 파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보고자 하는 곳 외에 다른 볼거리를 관람객에게 손쉽게 유도하여 관람객들의 편의도 헤아려주는 한편 여러 곳을 한꺼번에 홍보하고 관람을 유도하여 관광의 효율을 올리는 좋은 방법인 듯했다. 또 교통편도 통합카드를 발매하여 대중교통의 경우 하루 또는 이틀이나 사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도시도 많이 볼 수 있어 안동처럼 관광유적지들이 방사상으로 흩어져 있는 곳에서는 교통안내도 효과적으로 될 수 있고 유적지나 박물관의 안내도 함께 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진짜 잠수함
박물관 안은 수많은 관람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대다수는 학생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용 지도를 들고도 도대체 어디서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볼 것을 체크해 오는 것인데. 동선을 따라 처음 들어간 곳이 에너지 기술 전시실이었다. 물레방아나 풍차 같은 것에서부터 현대 전력의 생산과 공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시가 되어 있는데 그 규모나 전시방법이 실제 현장에서 보는 듯했다. 밑으로 난 계단을 따라가니 바다에서 활동하는 모든 배들이 역시 고대에서 현대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대부분의 배들이 바다에서 사용하던 진짜 배였다. 커다란 전시실 두 층을 터서 큰 배 한척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이차대전 때 사용하던 잠수함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실제 잠수함을 가져다 놓고 한쪽을 통째로 잘라서 내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지막지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독일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작고 어설픈 모형으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게 되었다. 비행기 있는 곳에 가면 라이트 형제의 진짜 비행기가 있고 제트 전투기도 진짜로 있다. 방안에 들어 앉은 이 큰 배들과 비행기들이 갑자기 불가사의한 마술사의 순간이동을 보는 듯했다. 사진 영상관련 전시실에는 세계 최초의 카메라 옵스큐라나 다게레오 타입 카메라를 직접 원리부터 볼 수 있도록 되어있고 최신 디지털 카메라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전시들은 그냥 진열장 안에 있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실제 손으로 작동해보고 원리를 터득할 수 있으며 각종 AV 장비를 이용한 전시들이 어려운 과학원리들을 아주 쉽게 이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과학지식을 알아가는 것보다도 그 전시방법 자체가 나에게는 큰 볼거리였다.

위로 위로 올라가니 알타미라 동굴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실도 있고 실제 방직공장을 옮겨 놓은 듯한 거대한 방에 방직기술의 역사가 펼쳐지기도 했다. 이것저것 훑어보고 다니다가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이러다가는 오늘 안에 밤베르크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물관 안에서 간단하게 빵과 음료로 요기를 하고 서둘러 박물관을 빠져 나왔다.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베드로 할아버지
시내 중심 광장 마리엔 플라츠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는 현대의 도시적 분위기와 중세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적당히 뒤섞여 있어 이런 곳에 살아도 그런대로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보니 신시청사 정면의 아름다운 모습이 골목 끝을 막고 서 있었다. 1867년에서 1909년에 지었다는 이 시청사는 글로켄슈필이라는 인형시계가 유명하다. 12시에 종이 울리면 수많은 인형들이 나와서 춤을 춘다는데 시간은 벌써 1시가 되었으니 인형들의 공연은 끝이 났고 다음 공연을 기다릴 시간은 없다.

시청사 맞은 편 골목에 있는 페터키르헤(베드로 성당)로 갔다. 뮌헨에서는 안타깝지만 성당 안은 기웃거리지도 않기로 마음먹었다. 들어갔다 하면 몇십 분을 잡아먹을지 모르므로. 그러나 페터키르헤 종탑은 올라가보자.
1278년에서 10년에 걸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이 성당은 1327년 뮌헨의 대화재로 첨탑 두 개만 남기고 모두 타버리고 다시 40년 걸려 1365년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그러다 1607년 첨탑에 벼락이 떨어져 다시 르네상스식 첨탑으로 새로 올려졌는데 그것이 지금의 알터 페터 즉 베드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당이다. 그러나 1944년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무자비한 폭격은 탑의 정상부와 성당 내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이후 정부에서는 성당을 폭파하여 철거하기로 했으나 성당 주임 신부의 저항으로 끝내 성당을 지켜낼 수 있었다. 성당의 복원은 1950년 전쟁 전의 영화필름을 자료로 이용하여 시작하였고 완성은 1975년에 보았다고 한다. 성당의 복원을 위해 수많은 뮌헨 시민의 성금이 모아졌고 페터 할아버지라는 복원을 위한 노래까지 만들어져 텔레비전 방송 막간음악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당시 이 교회에 대한 뮌헨 시민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할 수 있다.
교회 내부와 첨탑의 복원에 25년이 걸렸다고 한다면 지금 한국의 행정가들은 혹시라도 코웃음이라도 치지 않을지, 전국의 강바닥을 긁어내고 10여개의 큰 댐을 막는 작업도 3년이면 끝낼 수 있는데!

첨탑 위에 올라서니 신시청사와 그 뒤로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프라우엔키르헤(성모 성당)가 눈앞에 다가왔다. 현재 가톨릭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바로 저 교회의 주교였다고 하는데 회교의 모스크 모양을 한 교회의 첨탑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루살렘의 바위 돔 교회를 모델로 했다고. 구시청 청사는 아름답기는 했으나 너무 장식이 많고 요란스러워 그리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종이 울릴 시간은 지났으나 글로켄슈필의 인형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서 다음 종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에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앉아 다리를 쉬고 있었고 노천카페에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고 신문을 보고 있기도 했다. 그래, 내 나이 또래의 한국 사람들에게 뮌헨은 전혜린의 도시이기도 했다. 전혜린이 뮌헨에서 유학을 할 때 아마 저 길가의 카페에서 책을 보고 있었겠지 하는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나는 소위 여류들의 수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여류 뿐 아니라 내가 학교 다닐 무렵 유행했던 수많은 수필들은 독서광이었던 그 시절 내 손에 쥐어진 적이 없다. 또 그녀가 번역했다는 그 유명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마저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전혜린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데 어쨌든 그녀는 경기여고 서울대를 거쳐 뮌헨에서 독문학을 한 젊은 처녀 교수로서 서른하나의 나이에 자살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독일역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이름, KZ 다카우
뮌헨을 벗어나기 전에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다카우 수용소다. 1933년 히틀러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수용소로 수용인은 유태인이 많았으나 정치범과 동성애자 등도 수용되었다고 한다. 20만에 이르는 수용자들 중 4만 천오백 명이 강제노역과 기아,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다카우를 내비게이터에 찍었다. 다섯 개인가 여섯 개의 다카우라는 지명이 떠올랐다. 어느 다카우가 우리가 가야하는 다카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제일 위의 것이 맞지 싶어서 그것을 터치하여 목적지로 정하고 내비게이터가 시키는 대로 핸들을 돌렸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왔는데 수용소 비슷한 것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밤베르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안상준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안 교수는 용케도 전화를 받아 주었다. 안 교수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곳은 대학의 연구실뿐이기 때문에 전화통화는 원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은 행운이었다. 몇 개의 다카우를 불러주었다.
“KZ라는 표기가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게 수용소라는 뜻이에요.”

KZ-Gedenkstätte Dachau(다카우 포로수용소 기념관)이 정식 명칭이다. KZ는 집단 수용소라는 뜻이다. 숲속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주차장 한쪽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이 텅 빈 것을 보니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했다. 아마도 이번 여행에 다녀 본 곳 중에서 가장 한산한 곳이지 싶었다. 입장료를 내기 위해 들어간 창고처럼 생긴 안내소가 수용소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입장료는 무료다. 안내소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다카우 - 이 이름의 의미는 독일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안내소에서부터 뙤약볕을 그대로 받으며 한참을 걸어서야 수용소 철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철문에는 ‘노동이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철문 뒤에는 땡볕이 내리쬐는 넓은 마당이 있는데 그 뜨거운 햇볕 아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노동 때문에 죽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한산한 마당 한쪽에는 옛 수용소 건물이 마치 오래된 폐교의 교사처럼 아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자 아이 한명을 포함한 여섯 명의 독일 청년들이 건물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모두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나쁜 짓을 저지른 후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건물은 옛 수용소 건물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내부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각각의 방에는 수용자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세면도구나 밥그릇 또는 수용자들에게 휘둘러졌을 채찍, 이곳에서 출토된 당시 사용하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당시의 페인트가 그대로 남아 있는 회벽은 사람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어떤 방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고 또 다른 방에는 동영상이 돌아가는 비디오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당시를 회상하는 수용자들의 인터뷰나 수용자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기록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또 수용자들의 하루 일과표도 붙어 있는데 표에 의하면 그들의 하루는 이렇다.

수용자들은 새벽 4시 기상하여 5시 15분 점호를 취하고 6시부터 정오까지 작업을 했다. 정오부터 한시까지 점심과 휴식을 취한 후 다시 6시반까지 작업 후 7시에 점호가 있고 8시 45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며 9시에는 소등을 한다. 하루 노동시간은 모두 11시간 반이다. 일하다 병나면 죽고, 저항해도 죽고, 쓸모없어 보여도 죽는다.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은 곧 죽음만이 고통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이었다.

건물 앞에는 추모 조형물들이 있고 마당 저 쪽으로 수용자들의 막사 건물들이 있던 터가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맨 앞으로 당시 막사가 복원되어 있고 그 뒤로는 시멘트 바닥만이 옛 그대로 남아 있다. 가운데 통로의 양쪽으로 당시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드리 가로수가 한 여름의 땡볕을 감당하고 있었다. 통로가 끝나는 곳에는 수용소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처가 있고 그 양쪽으로 수녀원과 교회가 있었다. 이들 종교적 시설들은 전체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어서 신경쓰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였다. 울타리 밖으로 난 철조망 문을 지나면 한쪽 구석 외진 곳에 가스실로 알려진 작은 건물이 있는데 지붕 위로 거대한 굴뚝이 이 집에서 무엇을 했는지 웅변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공사 중으로 입구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다카우에서 생각하는 네오나치즘
이곳 저곳에서 단체관람자들이나 또 여러명씩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 모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 젊은이들이 그들 부모 또는 조부모 세대에 있었던 그 무서운 일들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2010년 1월 독일의 슈뢰더 총리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무릎 꿇고 참회했다. 지도자들이 나치스 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는 행동을 기회 있을 때마다 보이고 유태인 학살이 교과서에서 지속적으로 청소년들에게 교육된다고는 하지만 독일에는 아직도 옛 나치스 당원들이 참여하여 만든 국가민주당이이나 독일민중연합 같은 정당도 있고 이들이 지방의회 등에 무시못할 의석을 확보해가는 것을 보면 일본의 극우세력과 함께 앞으로의 역사에서 그들은 그냥 소멸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한쪽에서 세계질서를 어지럽히는 암세포로 남을 것인지 의문스럽기 짝이 없다.
역사가 뒤로야 가겠는가라고 낙관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 우리 땅에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반역사적 정치현상들을 보면 옛 망령들은 그리 쉽게 우리 앞에서 사라져 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머리 한쪽에서 무겁게 자리 잡는다.

수용소 철문을 나와 처음 만나는 삼거리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 왼쪽으로 갈 것을 큰길을 따라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 수용소 옆으로 붙은 마을로 접어들었다. 주차장은 가까이 있을 듯 했는데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와 큰길로 와서 다시 처음 차를 몰고 들어간 곳을 한참이나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30분 이상이나 허비했다.

벌써 다섯시가 넘었다. 부지런히 악셀을 밟는다. 이미 뉘른베르크는 틀렸다. 어릴 때 보았던 뉘른베르크의 재판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데 전범재판을 하는 내용이었다는 것 뿐 구체적인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2차대전 직후여서 그랬는지 중 고등학교 때는 유달리 이차대전 기록영화가 많이 상영되었고 그 중 히틀러에 관한 것이 많았다. 히틀러의 자서전 제목을 가져다 붙인 ‘나의 투쟁’도 그 중 하나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죽은 자들의 안경들, 금 잇빨, 전범 아이히만의 얼굴, SS 등 등. 다카우에서 뉘른베르크를 향해 가면서 그런 것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는 독일의 대표적인 중세 도시이고 화가 중세화가 뒤러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 출구를 지나치는데 시간이 7시 반이다. 거리는 160킬로미터가 넘고 있고, 밤베르크까지는 60여 킬로미터가 남았으니 한 시간 좀 못 걸릴 것이다.

8시 10분이 넘어서 차가 밤베르크 시가지로 들어섰다. 호텔 이비스는 찾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된 도로는 바로 옆에 보이는 집을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들어가야 했다. 안상준 교수가 나와 있었다. 2월에 밤베르크 대학으로 간 안 교수는 이제 다섯달 째 체류 중인데 그동안 헤어스타일이 몰라보게 변했다. 안동에서는 줄곧 짧은 옆머리가 절도 있는 독일냄새를 풍겼는데 독일에 오니 오히려 길게 장발을 하고 약하게 컬을 넣어 굽실거리는 머리가 연륜과 함께 여유도 풍기고 있었다. 독일에서 10년이나 공부를 했으니 제2의 고향에 온 것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텔은 수리중이어서 어수선했다.
안교수의 늦둥이 솔이는 그새 많이 커서 제법 큰 아이처럼 보이고 부인은 옛 독일 생활이 다시 돌아온 듯 얼굴에 생기가 보였다. 우리도 오랜 만에 가족적 분위기에 젖어서 밤베르크의 밤거리 산책을 즐겼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