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무더위의 용상동 숲쟁이길(글/사진/백소애_편집기자)
오르는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 8월
老시인은 8월을 일컬어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오세영, 「8월의 시」)’이라고 했다.
8월의 땡볕을 고스란히 쬐면서 얼굴은 찐감자처럼 익어갔다. 아무렴,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연이틀 갠 날이 드물다고 투덜거렸는데 하필 산책하기엔 고약한 무더위 날에 길을 나섰다.
용상 5주공아파트에서 선어대 방면으로의 경동길을 걷다보면 구 현대아파트와 상수도관리사무소쪽으로 향하는 골목이 있다. 이곳은 용상동 몇 번지 대신에 길주길과 숲쟁이길로 새주소가 부여되었다. 경동로 배롱나무 아래 흰둥이는 혀를 빼물고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안동가구프라자, 대경인테리어, 안동민속당, 금제PVC가 큰길 경동로 쪽에 위치해 있다.
구 현대아파트라 불리는 현대아파트 1단지 입구에는 고미술품 경매장 현수막이 걸려있다. 경매장임을 알리는 골동품들이 골목 입구 곳곳에 있다. 돌하르방과 울타리처럼 쭉 둘러선 장독을 지나 몇 발짝 골목길로 접어들면 기왓장, 함지박, 맷돌, 가마솥 솥뚜껑 등이 경매장 마당에 부려져 있다.
길주길의 구 용상동 현대아파트
골목으로 끝으로 오르면 5층짜리 용상동 현대아파트 1단지가 나온다. 3개동 70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로, 1995년 완공된 지금의 용상동 현대아파트로 불리는 2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인 1989년 완공된 곳이다. 아파트 뒤로는 해발 355m의 진등산이 버티고 서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모두 뒷산이라고 부른다. 아파트 뒤를 받쳐주고 있어서 예전부터 입에 붙은 명칭이다. 하물며 진등산이라는 명칭을 아는 이도 드물다.
이곳은 용상동이자 새주소 ‘길주길’로 불린다. 길주초등학교와 600m정도의 거리다. ‘길주(吉州)는 고타야군, 고창군, 영가군, 복주목 등 수많은 안동의 옛 이름 중 하나이다.
아파트 화단에는 아이들의 분홍색 자전거와 보드가 세워져있다. 철제 울타리 난간에는 이불 빨래가 널려있다. 넓지 않은 베란다보다는 더 널찍하게 이용할 수 있는 덕이다.
길주길 골목엔 푸릇하게 익지 않은 감이 매달려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말복이 지나고 날씨가 하루하루 다른 것이 제법 초가을 테가 나는 기세다. 홍고추가 널려 있는 집을 지나니 텃밭 비닐하우스에미역처럼 긴 머리 드리우고 말라가고 있는 시래기가 보인다.
당그랗고 아담하게 신축한 쑥쟁이 마을회관에는 더위를 피하는 어른들 몇몇이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맞은편 들마루에는 깔린 장판의 열기가 무서워서인지 누구 하나 앉아있질 않다. 숲쟁이길에 ‘쑥쟁이 마을회관’이라니, 하지만 이곳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숲쟁이지만 옛날부터 쑥쟁이라 불렸던 터라 어감이 이미 입에 붙어 그렇게들 부른다고 한다.
숲쟁이 마을은 마뜰 남동쪽 벌판에 있다. 옛날 낙동강의 지류가 곧게 안동부를 뚫고 흘렀는데 읍터를 돕기 위하여 이곳에 버드나무와 잡목을 많이 심어 큰 수풀을 이루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영해와 영덕에서 오는 고기장수와 등짐장사들이 안동으로 다닐 때 숙박하던 마방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만 ‘쑥쟁이’, ‘쑤쟁이’로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이름이지만 버드나무와 잡목을 심어 큰 수풀을 이루었으니 ‘숲쟁이’가 올바른 표현에 더 가까운 터라 새주소로 이름 지었다고 볼 수 있겠다.
용강서원이 있는 숲쟁이길
숲쟁이길을 걷다보면 신라를 대표하는 지성인 고운 최치원 선생을 향시한 서원으로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용강서원이 나온다.
용강서원 입구에는 깻잎이 활짝 열렸다. 더위에 지치지도 않고 생기 있게 달려있다. 깻잎 틈에 홀로 선 힘없는 전봇대를 오히려 깻잎이 지지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골목은 낡았으나 깨끗한 보도블럭이 깔려있다. 용강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모덕사, 10칸의 숭문당, 신문, 각 3칸의 동재와 서재, 2칸의 전사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불빨래가 빠짝 마르는 숲쟁이길 풍경
8월 무더위의 숲쟁이길의 주택가는 고즈넉했다.열린 대문 안으로 갖가지 풍경이 보인다. 마당에는 갖가지 생활용품이 나와 있고 낮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듯 살짝살짝 대문이 열린 집이 많았다. 수돗가 옆에 걸린 대형 솥과 촘촘히 매달아놓은 빨래며 화분, 처마 끝 빗물받침대는 부지런한 집주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주인 혼자 차 마시는 공간인지 일인용 탁자와 의자가 마당에 차려져 있는 폼이 꽤나 운치 있어 보인다. 한여름에도 다용도실 창에는 가득 쌓아놓은 연탄이 보이고 환풍구에는 빈 농약병이 비스듬히 기대있다.
공터에는 옥수수가 큰 키를 자랑하고 변덕스런 날씨 탓인지, 고추는 시들하게 크고 있다.
동네 곳곳에는 길 이름과 어울리게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인근의 현대아파트와 주공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한적한 산책로 같다.
신축건물의 장독대는 새 장독에 묵은 장은 담고 있듯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신축원룸은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하는지 ‘백년가약’이라는 건물이름으로 임대를 알리고 있다. TV며 냉장고 등 풀옵션으로 몸만 들어오면 되는 원룸 신축이 들어나는 추세다. 삶은 수건빨래가 햇빛을 받아 더욱 뽀얗게 길에서 말려지고 길가에 담요를 널어놓은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길에 널린 빨래가 부끄럽지 않은 동네, 동네 사람 누구라도 장롱 속 이불을 들고 나와 햇빛에 바짝 말리고 싶은 날씨다. 잎의 반은 떨궈 놓은 봉숭아가 소담스레 피어있고 어느 집 푸세식 화장실의 나무 판때기 환풍구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상가 앞 거울에 비치는 기중기가 아찔했다. 슈퍼 앞 분리수거함에는 소녀시대가 웃고 있다. 그녀들이 광고모델로 있는 비타민음료 빈병이 한가득, 폭염과 폭우로 힘겹게 여름을 나고 있는 사람들이 충전을 위해 마신 비타민 음료병만 덩그러니 남겨진 용상동 숲쟁이길을 내려왔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