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의 질주(글/백소애)
원 제: Running on Empty
감 독: 시드니 루멧
배 우: 리버 피닉스, 크리스틴 라티, 마샤 플림톤, 저드 허쉬/ 미국 / 1988년 / 116분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채식주의자이자 동물애호가이며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던, 할리우드에서도 드물게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던 배우 리버 피닉스가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죽은 것처럼 말이다.
1988년 작 허공에의 질주(원제: Running on Empty)는 할리우드 청춘스타 리버 피닉스의 매력이 오롯이 묻어나는 영화이며,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봉합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이다.
DVD와 영화파일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 비디오 테이프를 한창 수집하고 다녔던 오래전, 옛날 동네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비디오 대여점 맨 밑 구석에서 먼지 가득한 <허공에의 질주>를 찾아냈었다. 주인아줌마를 구슬려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속으론 쾌재를 불렀지만 표시 내지 않았다. 그럼, 흥정에서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정은 쉽지 않았다. 먼지만 먹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비디오 테이프 따위는 구입하겠다는 사람만 나오면 얼른 팔기 일쑤인데, 파마머리를 긁적이며 나온 주인아줌마는 딱히 잘 나가는 비디오는 아니지만(심지어 대여가 된 적도 없으면서!) 그래도 하나밖에 없으니 팔지 않겠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강적이었다.
1970년대 초 베트남전 반전 운동을 펼치던 부부 아서와 애니는 민간인 희생자를 막기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화학 공장을 폭파한다. 사람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그들은 그러나 공장 경비원을 다치게 하고, 그로 인해 FBI의 추적을 받는다. 추적을 피해 미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이름을 바꾸고, 직업을 바꾸며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들의 도피생활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져, 두 아들은 이제 약간의 낌새라도 있으면 바로 눈치를 채고 짐을 꾸리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새로 전학 간 고등학교에서 큰아들 대니(리버 피닉스)는 타고 난 음악적 재능으로 줄리어드 음악원에 합격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본 음악선생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부모의 이름조차도 밝힐 수 없는 현실에 음대 진학을 포기해야만 하고, 음악선생으로부터 아들의 줄리어드 음악원 합격소식을 들은 애니는 갈등한다.
아들에게도 자기만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인정한 애니는 깊은 고민 끝에 도피생활 이후 만날 수 없었던 아버지를 만나 아들의 인생을 위한 결단을 내리며 대니를 부탁한다.
오랜 세월, 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녀를 원망하지만, 이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손자 대니의 뒷바라지를 약속한다. 대니에게 새 인생을 주고, 아서와 애니는 미성년자인 작은 아들을 데리고 다시금 도피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1960년대 말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소위 미국의 운동권들은 언더그라운드 피플(Underground People)이라고 불리며 FBI로부터 끝없는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에게도 낯익은 노동운동, 반전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 <허공에의 질주>는 다수의 이념이 소수의 이념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는 영화이다.
혹자들은 아들 대니에게 새 인생을 준 엄마 애니의 모습이 다분히 감상적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또, 반전운동 동료의 죽음을 통해 더 이상 발붙일 곳 없는 운동가들의 모습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행동한 것이라며 이는 곧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데, 막 대학 입학을 앞둔 아들에게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의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길을 열어주는 것은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의 이데올로기는 생활에서 깨닫게 되고 전이되는 것이지, 꼭 함께 해야만 하고 당연히 같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들 대니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깨달음과 가치관은 이미 도피생활 속에서도 의연한 사상과 건전한 사고를 가진 부모의 모습 속에서 녹아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으로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미안함까지도 말이다.
모두들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는 따뜻하고 차분한 음악과 1993년 젊은 나이에 죽은 리버 피닉스의 정적이면서 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수작으로, 무거운 소재를 탄탄한 구성과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재미있게 그려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