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카리스마 배우 박기웅(글/김영희_객원기자, 사진제공/마이네임이즈엔터테인먼트)올 추석 무렵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은 ‘<최종병기 활> 봤냐’는 말일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그 얘기가 나왔고 중학생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과 모이면 어김없이 ‘활’ 얘기를 했다. 우리집 아이들도 모두 보고 와서는 멋있었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최종병기 활>은 올해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되었다. 최단기간 7백만을 돌파한 영화라는 말도 들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영화에 청나라 왕자로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안동출신 배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편집회의에서는 여러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활>의 배우 박기웅을 ‘나도 안동사람이다’의 주인공으로 점찍었다. 그러나 문제는 섭외였다. 어렵게 매니저와 통화를 했으나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찍고 있어서 바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안동’지 편집진의 근성이다. 궁리한 끝에 그의 아버지를 통해 압력(?)을 넣어보기로 했다. 아버지 박인환씨가 안동사진동호회의 회원인 까닭에 편집위원들과 돈독한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윤태권 운영위원장이 나서서 섭외는 성공이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매니저와 만날 장소를 정하는데 한참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카페로 정했는데 지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우여곡절은 순전히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안동사람이기 이전에 얼굴이 알려진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런 배려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안동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그를 곤란하게 한 점 지면을 통해서라도 사과하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동안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해주고 맛있는 커피까지 대접해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성실하고 진솔하게 얘기를 하는 모습이나 주변 사람들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참 괜찮은 청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더 덧붙이거나 포장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란다. 그렇지 못했다면 내 글 솜씨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
김영희(안동): 아버님 때문에 억지로 나온 것은 아닌지요?
박기웅(박): 아닙니다. 제가 안동 명예홍보대사였잖아요. ‘안동’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릴 때 본 기억이 있어요. 아버지 따라 주산지 사진 찍으러 간 것도 생각나고 시청에서 사진 전시회 한 것도 생각나요. 안동사진동호회 회원 안욱 원장님 아들 홍이도 불알친구예요. 그 친구는 중학생일 때 대구로 갔는데 지금 군의관으로 있어요. 한일외과 원장님 아들도 친군데 공보의로 가 있고 김재왕 내과 원장님 아들은 서울에 있어요. 지금도 다 봐요.
안동: 그럼 모두 스물일곱인가요?
박: 제가 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가서 친구들은 저보다 한 살 많아요. 제가 연예인이 된 걸 친구들이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부러워할 것 없다고 말해요. 특별하게 보는 분들이 많은데 특수한 직업이긴 하지만 이것도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고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편하게 하고 있어요.
안동: 군대는 다녀오셨어요?
박: 군대는 내 후년 정도에 다녀오려고 해요. 이미 늦어버려서 조금 더 제 나이 때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가려고요.
안동: 2005년도에 데뷔한 걸로 나오더라구요?
박: 2004년도 21살 때 뮤직비디오로 데뷔했어요. 벌써 8년차가 되었네요. 드라마 ‘별순검’을 기억하시는데 ‘별순검’ 땐 잠깐 나왔어요. 감독님이 도와달라고 해서. 흥행이 안 된 게 있어서 그렇지 데뷔 이래 꾸준히 많이 했어요. 네이버에 나온 것이 다가 아니고 더 많이 했어요. 작품 수로만 따지면 안 쉬고 많이 한 거죠. 지금도 두 개를 동시에 하고 있고. SBS에서 금요일 저녁에 하는 ‘더 뮤지컬’이라는 드라마랑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영화 찍고 있어요. 엄태웅 형님이랑 정래원 누나랑 저랑 유선 누나랑 부산에서 찍고 있어요. 부산에서 영화 찍고 서울 와서 드라마 찍고 그러죠. 전혀 안 피곤하다면 말이 안 되지만 직업적인 거라서 이동거리 이런 것보다는 캐릭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아요. 요즘에는 역류성 식도염이 오기도 할 정도로. 두 가지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는 것이 예민해서 그런 것이 힘들어요.
안동: 그나마 영화나 드라마라서 동시에 나오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박: 그렇죠. 동시에 한 번 나온 적이 있었는데 김선아 누나랑 했던 미니시리즈 ‘밤이면 밤마다’와 김민희 누나랑 했던 ‘연애결혼’이 촬영을 동시에 해서 방송이 일주일이 겹쳤어요. 같은 날 두 방송사에 동시에 나왔던 적이 있었는데 많이 민망하더라구요. 타 방송사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안동 그런 스케줄이 제일 신경이 쓰이겠어요?
박: 하고 싶은 작품이 있고, 실제로 그것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스케줄이 꼬여버리면... 작품 욕심이 많은 편인데.
안동: 어떤 걸 좋아하세요?
박: 저는 좀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어요. 잘 하는 걸 하라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저는 제 나이 때에 할 수 있는 배역들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나이 먹으면 못하니까. 어릴 때부터 호기심 많게 살아온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해요. 그래서 빨리 못 올라 간 것도 있겠죠. 후회되지는 않고 편해진 것 같아요. 지금도 제가 뭐 대스타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데 지장 없고 주변 사람들한테 맛있는 것 사 줄 수 있고, 하고 싶은 연기 하고 있고, 찾아가지 않고 들어오는 연기 할 수 있고, 편하게 하고 있어요.
안동: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달관의 자세를 가질 수 있나요?
박: 데뷔 8년차인데 흥망을 많이 겪은 것 같아요. 데뷔 후 얼마 안 되어 통신사 광고에서 맷돌춤으로 인기를 얻어서, 50억이 넘는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2’의 주인공도 해봤는데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어요. 그때 스크린 쿼터제가 축소되고 여러가지 일들이 생기면서 제가 준비하던 영화들이 자꾸 엎어지기도 했었죠. 불가피하게 드라마로 눈을 돌려 영화에서 드라마로 넘어가서 새로 시작해보기도 하고... 요즘엔 많이 섞였는데 예전엔 벽이 심했거든요. 영화로 데뷔한 제가 드라마로 넘어가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또 드라마마다 잘 안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추노’가 잘 되었는데 맷돌춤으로 인기를 얻고 다시 추노로 시청률이 30%가 되기까지 5년이 걸렸어요. 그 뒤 ‘황금물고기’도 잘 되었고 지금 ‘최종병기 활’로 7백만 관객이 들었지만 짧은 기간에 흥망을 많이 겪었어요. 그러다 보니 흥망은 배우가 고민해야 될 부분이 아니구나 생각했죠. 물론 책임감은 가져야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쓰면 연기도 흐트러지고 오히려 작품에 해가 되죠. 많은 일들을 겪다보니 그런 마인드가 구축이 된 것 같아요.
안동: 같이 일하는 유명한 연예인들 보면 기분이 어떠세요. 그냥 동료?
박: 전혀요. 동료라고 생각하다가도 가끔 신기할 때가 많아요. 내가 어릴 적 보고 자란 배운데, 그 선배님 드라마 보고 자랐는데 같이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신기해요.
안동: 저도 지금 무척 신기합니다. TV 화면에서 보던 사람을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현실감이 안듭니다.
박: 뭘요. 저는 그냥 안동 후배일 뿐입니다. 안동에서 나고 자라 같은 공간에서 학교 다니고 했던 고향 사람이죠. 저는 안동유치원, 서부초등학교, 경덕중학교, 경안고등학교 나왔어요. 고등학교는 안동고를 가려다가 미술 할려고 경안에 갔어요. 그때 경안고 미술부가 그림을 되게 잘 그렸거든요. 미대 진학한다고 했는데 목표했던 대학에 진학하는 걸 실패했죠. 목표는 홍대였는데... 지금은 제 업이 다른 게 되었지만 제 주변에 그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림은 꾸준히 계속 하고 싶어요. 그림은 정서적으로도 도움도 많이 되구요. 또 예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렸던 것들이 연기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요. 다른 부분이 있다면, 물론 감상하는 사람들과 공감해야 하지만 그림은 작가가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면 영화나 드라마는 감독이 작가가 되고 배우는 주제나 부주제가 되기도 하고 그리는 도구들은 카메라나 조명이나 그런 것들이 되겠죠. 영화나 드라마는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라서 어려운 것 같아요. 조율하고 같이 호흡하고... 상대배우와만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조명 등 기술 스텝들과의 호흡도 중요하죠. 그래서 어려우면서도 재미있어요. 항상 전체를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하려고 해요.
안동: 드라마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는 배우들이 많던데요?
박: 어느 것이 더 좋다기보다 각 장르마다 매력이 있어요.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캐릭터를 만들고 준비하는 과정을 프리프로덕션이라고 해요. 그 기간이 드라마보다는 영화가 길죠.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보니까 더 완성도를 높일 수 있죠. 드라마는 그렇게 여유를 갖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좀 더 예술적인 작업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 같아요.
안동 자신이 했던 것 중에서 어느 작품을 제일 높게 평가하나요?
박: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사실 모든 배우들이 아쉬울걸요. 조금 더 잘할 걸, 저럴 왜 놓쳤을까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정통 연기는 아니지만 맷돌춤으로 알려진 목 돌리는 스카이 휴대폰 광고가 많이 생각이 나요. 데뷔 초에 했지만 다시해도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안동: 사람들이 제일 많이 알아봐준 작품은요? 제 주변에서는 ‘황금물고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박: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어요. 근데 부모님은 ‘추노’랑 일일드라마 했을 때 인사를 제일 많이 받았대요. 일일드라마는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서 했어요. 우리 부모님이 어릴 때 맞벌이 하셔서 제가 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영화하고 미니시리즈만 하니까 할머니가 잘 못 보시잖아요. 일일드라마 했으면 좋겠다 해서 했죠. 근데 일일드라마는 너무 길어서 힘들어요. 최근에도 일일드라마 제의가 왔는데 제가 안한다고 했어요. 아쉬워하는 분들이 있는데 같은 값이면 제가 재미있게 하고 싶은 것 하는 게 좋아요. 욕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고 인기를 얻기 위한 욕심보다 연기적인 부분으로 욕심을 가지는 게 바람직한 욕심이 아닌가 해요.
안동: 어떻게 연기를 시작했는지,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은 있었나요?
박: 지방에 있는 친구들이 연기자의 꿈을 갖기가 힘들잖아요. 사투리도 심하고 또 연극이나 뮤지컬을 볼 기회도 적고. 저도 어릴 때 꿈을 갖지는 않았는데, 사실은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이 되었어요. 친구 소개팅 시켜주러 신촌에 갔는데 신나라 레코드사 앞에서 길거리 캐스팅이 되었어요. 그때는 연기학원에 다니라고 명함을 나눠주는 게 많을 때여서 신경을 안 썼는데 회사 관계자가 안동까지 부모님을 만나러 내려왔어요. 꼭 한 번 같이 해보고 싶다고. 그렇게 해서 시작했어요. 20살 되자마자. 제의가 왔을 때 별로 놀라지는 않았어요. 들뜨지도 않고. 그럼 한 번 해볼까? 이 정도의 감정이었어요.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으니까 막연하게 화려하고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버는 게 좋아서 시작했던 거 같아요.
안동: 소속사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시작했겠네요?
박: 연기 연습도 하고 사투리도 그때 고쳤어요. 진짜 힘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지방 출신인걸 아무도 모를 정도예요. 경상도 사투리를 고치려면 사투리의 억양을 다 뺀 다음에 입혀야 가능하더라구요. 억양 없이 읽는 걸 연습했어요. 근데 내용을 아니까 억양이 안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책을 거꾸로 읽었어요. 매일 밤마다 연습했는데 진짜 고생했어요. 주변사람들이 독하다고 친구하지 말라고 해요. 한번 시작하면 집착해서 해요. 아직까지는 이 직업이 저하고 잘 맞아요. 이렇게 열심히 해본 적 없었던 것 같아요. <활> 영화에서도 만주어 대사를 하잖아요.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해하고 말을 하고 감정을 담아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내 언어로 만들어야 하니까. 이게 사어예요. 없어진 언어다 보니까 어휘가 많지 않아요. 어휘가 하나씩 밖에 없어서 요말 요기 쓰고 요말 조기 쓰고... 그걸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해보고 싶었어요. 외국어 연기를 한 번도 안 해본 것이기 때문에... ‘동갑내기 과외하기’ 할 때 이청아라는 상대배우가 일본인 재일교포로 나와서 일본어 연기를 했는데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잘했었어요. 자극이 되었지요.
<최종병기 활>영화스틸컷
안동: <활>에 길게 나오진 않았지만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박: 감사합니다. 제가 불타 죽고 시체가 잠깐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위해 실리콘으로 전신을 떴어요. 7시간 걸려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체를 제작해서 눕혀 놓았는데 제가 보기에도 딱 저예요. 불탄 시체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이걸 부모님이나 지인들이 보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더라구요. 아무리 픽션이지만 보기 힘들어 할테니까요. 그래서 목이 잘리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되도록 안 할려구요. 그런 거 하면서까지 연기를 하고싶지는 않아요. 이번 영화에서는 그 장면이 다행이 슥 지나가버렸어요.
안동: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박: 아버지가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세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봤어요. 고전영화도 많이 보고, 제가 어릴 때나 태어나기 전의 작품도 봐요. 옛날 영화도 재미있는 것을 좋아해요. 얼마 전에 제 친구가 묻더라고요. 그림은 어떻게 봐야 되냐고 어떤 게 좋은 그림이냐고. 누가 뭐래도 네가 좋으면 좋은 작품이다 그랬어요. 대중예술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이건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소위 말해서 막장드라마라고 해도 저는 욕하지는 않아요. 어떤 작품이든 이건 내 취향이 아니라고 얘기하지 이상한 작품은 아닌 거죠. 그걸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예술적인 것도 가치는 있지만 좀 더 많은 사람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것도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의 눈이 대중들의 눈이 나의 눈보다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해요. 제가 그분들에게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는 프로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도 같은 값이면 제가 좋아하는 걸 하려고 해요. 하지만 지금도 생각이 변함없는 건 나의 눈이나 연출자의 눈보다 보는 관객의 눈이 더 정확하다. 그건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맞다고 생각해서 연기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보는 사람들이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동: 연기자로서 아니면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부분은?
박: 저는 연기적인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나이를 먹으면서 또 또래보다 사회경험이 많으면서 점점 무뎌져요. 예전 같으면 별거 아닌 일에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랬던 것들이 철이 들면서 초연해지는 것이 연기자들한테는 힘이 들 때가 있어요. 연기하면서 슬퍼야 하는데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데 기쁘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요. 아이러니컬한 건데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되면 초연해져야 정상인데 애로 머물러야 연기에 도움이 되는 거예요. 어른은 되고 싶고 연기도 잘 하고 싶고. 데뷔 초보다는 세련된 연기를 해요. 테크닉이 많이 늘었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고, 어느 정도 하면 관객들이 울고 웃고 화를 낼 것인지 알 수 있죠. ‘동갑내기 과외하기 2’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때 연기가 참 좋아요. 세련되지는 못하고 거친데 더 솔직하고 순수하게 진심을 담아서 연기하고 있어요. 지금 그때처럼 진심을 담아 연기할 수 있을까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때 했던 작품들을 보면 예뻐요. 실제로 옛날에 했던 작품들 보면 저때는 저렇게 열심히 했었지. 연기 참 예쁘게 했었구나 하면서 눈물도 살짝 나요.
안동: 예전 작품을 보더라도 연기 못한다는 생각은 안 들었던 것 같아요. 요즘 ‘발연기’ 그러잖아요?
박: 연기 못했죠. 못했는데 그 소리는 안 들었던 거 같아요. 그 경력에 연기는 곧잘 한다는 소리는 들었으니까요. 못하는 거 티 안 낼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요만큼인데 해야 하는 건 이만큼이라 그 갭을 메우기 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안동: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으세요?
박: 프리프로덕션 기간에 준비가 많이 필요한 것을 좋아해요. 영화배우 하지원 선배처럼 무언가를 배워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어요. 스포츠든 악기든 사전에 배워서 할 수 있는 역할들 도전해보고 싶고 안 해본 거 많이 해보고 싶어요. 그게 연기자의 매력이고 재미겠지요. 천재장애자 역할도 해봤고, 살인마, 악랄한 사람, 재벌 등 또래에 비해 다양한 역할들을 했죠.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새로운 드라마를 할 것 같은데 새로운 역할에 또 도전해 보려고요.
안동: 성격이 차분하신가 봐요?
박: 제 생각을 얘기하다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조용한 편입니다. 교외로 나가고 혼자 있는 것 좋아하고, 시골로 다니고 그래요. 휴대폰도 스마트폰 안 쓰고 폴더 써요. 컴퓨터로 타이핑 안하고 손으로 적구요. 아날로그적인 부분이 많죠. 사실 TV도 많이 안 봐요.
안동 가족은 어떻게 되세요?
박: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일곱 살 터울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착해요. 동생은 저보다 차분해서 제가 혼났으면 혼났지 동생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믿고 맡겨주시는 편이예요. 자립심 강하게 하셨어요. 연예인이 되겠다 했을 때 부모님도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나 한 번 해보라고 하신 이후부터는 믿고 전적으로 맡겨 주셨어요.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이 없으면 어떨지 생각도 못하겠어요. 떨어져 있어서 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가족 생각하면 늘 보고 싶고 더 잘해야겠다 생각하죠. 저는 어디 좋은 델 가고 좋은 것을 먹을 때면 부모님 생각나고 동생 생각나요. 제가 장남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가족도 그렇지만 주변사람들도 내 사람이다 싶은 사람들은 가족처럼 생각해요. 그들이 힘이 많이 되지요. 제가 결혼을 해서 아내가 생기고 자식이 생기면 또 그 가족들이 저의 힘이 되겠죠. 언제 결혼할거냐고 질문을 받는데 저는 지금 당장도 할 수 있어요. 10년 후에 만난다면 그때 할 수도 있구요. 하지만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요. 일로서 만나기는 한데 일은 일이라서... 팬들도 많이 좋아해주시는데 고맙죠. 제가 뭐라고... 고마운 마음을 연기 잘하는 것으로 보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안동: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박: 그런 부분에서 저희들은 복 받은 거죠. 판을 벌려 주니까요. ‘나는 가수다’를 즐겨 보는데 거기서 제일 감동적인 것이 노래하는 가수들에게 귀 기울여 들어주는 청중들이예요. 정엽 형과 옥주현과도 얘기를 했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연기를 나의 노래를 귀담아 들어주고 눈여겨 봐주는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건 정말 가치 있고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잘 하긴 정말 어렵지만요.
안동: 안동은 자주 가시나요?
박: 안동은 못간지 한참 되었어요. 추석 때도 못 갔고. 일을 하다보면 명절이나 휴일 이런 개념이 좀 없어지죠. 남들 쉴 때 일하기도 하고 일할 때 쉬기도 하고. 친구들이 전화해서 명절 때 쉬지도 못하고 일해서 어떡하냐 하는데 저는 괜찮아요. 어릴 때는 명절엔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하는게 아닌가 해서 싫기도 했는데 지금은 좋아요. 오히려 조용할 때 내려가서 부모님 뵙고 그게 낫더라구요. 안동은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인데 편하지요. 쉬고 싶고. 안동에 계신 분들은 그렇게 안 느낄 수 있겠지만 타지에 있다 보니 고향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해져요. 걸어 다니는 거 좋아하는데 전에 한번 안동에 가서 제가 다녔던 학교들을 걸어서 다 다녀봤어요. 경덕중학교 거쳐서 서부초등학교 거쳐서 경안고등학교까지. 교실에 들어가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어요. 액자도 안 바뀌고 그대로 있더라구요.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좋아하지만 예전에 느꼈던 그 이미지나 공간의 냄새 그런 것들도 좋아요.
안동: 안동 사람이라 생각하니 더 정이 가네요. 어제도 혼자서 ‘활’을 봤는데 박해일 보다 더 눈에 띄던걸요.
박: 열심히 연기 할게요. 지켜보고 계신 안동분들을 위해서. 실제로 안동에서 나고 자란 연기자는 제가 처음이잖아요. 가끔 가면 진짜 응원 많이 해주시는구나, 느껴요. 언제까지 할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오랫동안 하고 싶어요. 열심히 할게요.
인터뷰는 끝났지만 이런 저런 얘기를 한참이나 했다. 과천이 살기 좋다는 얘기며 청계산에도 가끔 오른다는 것과 또 얼마 전 강남과 우면동이 물난리를 겪었던 거며 지난여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곡식들이 걱정이라는 얘기까지……. 즉시 일어나지 않고 동네 친구 만나서 수다를 떨듯 부담 없는 얘기로 배려하는 것을 보면서 또 한 번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와 한참을 걸어오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사인을 받아야 했었던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언제 또 만날 수 있겠나 싶은 마음에서이기도 하지만 연예인들에게는 사인 요청이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참이나 마주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차를 마셨지만 그래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존재인가 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