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아직도 강에서 살다(글/이동수)1999년 11월. 그해 겨울이 오고 있었다. 낙동강 구담 마을에 습지가 생기고, 거기에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안동대 생물학과 교수들이 구담습지 생태 보고서를 내기 위해 현장 조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안동대 이종은, 정규영 교수였다)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낙동강 습지로 달려갔다. 저녁 무렵, 낙동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찬 바람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에서 무엇을 찍는단 말인가, 황량한 모래밭과 제멋대로 자란 풀들만이 전부인데.....' 마음속으로는 암담했다. 자연다큐. 나로서는 처음 시도해 보는 다큐멘터리의 분야였다.
"어미새의 사랑"등 이제까지 보아왔던 화려하고, 활기 넘치는 영상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자연은 그저 자연그대로였고 어떤 것도 내게 말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어둠이 스미는 낙동강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은 무척 멀게만 느껴졌다.
낙동강의 결사
11월 중순. MBC에서는 큰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각 지역MBC마다 자연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2000년-2001년 자연다큐 시리즈를 방송하자는 것이었다. 지역 방송사의 제작 역량을 키우고, 우리의 소중한 자연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교적, 당시로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이 좋았던 내게 임무가 맡겨졌다. 며칠간 아이템을 이것저것 떠 올렸다. 가능하면 구담 습지는 피하고 싶었다. 그날 낙동강의 황량함이 자꾸 나를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과 아이템의 초조함은 다시 구담으로 가도록 나를 재촉했다. 카메라맨 임호진(현 제일미디컴 사장)과 같이 낙동강변으로 다시 돌아왔다.
"형, 이거 합시다"
"니가 보니 될 것 같나?"
"그래, 이 정도면 찍을 거 있다. 한번 해 보시더"
그래서 낙동강의 결사(結社)는 이루어졌다. 자연다큐멘터리는 카메라맨의 피땀과 정열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꾀 많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 일의 절반을 벌써 그에게 현장에서 미루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1년 동안 나에게 다가올 고통과 고민은 쉽게 말을 허락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오는 지프 안에서 나보다 그의 말이 더 많았다.
그들, 강에 살다-낙동강 구답습지 생태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선 안동대학교 정규영교수를 만났다. 이미 [구담습지 보전을 위한 자연생태계 연구]의 중간보고서가 나와 있었고, 수서곤충 관련해서는 이종은교수와 의견을 나눴다. 그 외에도 계명대 김종원교수, 국립중앙과학관 백운기박사, 영남 자연생태보존회 회장 유승원박사, 강원대 변화근박사, 서울대 심재한박사 등을 만나 구담습지의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듣고 자료를 준비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기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능한 작가도 필수적이다. MBC 본사의 동기인 정호식PD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연다큐를 만들려는데 작가가 필요하다고. 자연다큐, MBC스페셜 등에서 일을 하던 유능한 작가 정수경씨와 연락이 닿았다. 기획의도와 구성안이 마련되었고 제작비를 산정해서 제작기획서는 만들어 졌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맨 임호진과 카메라 보조 안윤식은 벌써 매일 구담습지로 출근하고 있었다.
낙동강은 물과 모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자연다큐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나로서는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카메라맨에게 촬영을 위한 큐시트(일종의 촬영 지시서 같은 것)를 주어야 하는데 낙동강에는 정말 물과 모래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혼자 구담 마을에 갔다가 하루종일 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며칠을 보냈다. 멀리 새들 몇 마리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발견한 것이라곤 겨우 그것 뿐이었다. 카메라맨에게 그것밖에는 찍을 것이 없다고, 큐시트고 뭐고, 지금으로선 정말 막막하다고 솔직히 고백한 후 그것이라도 우선 찍자고 사정했다.
다음날 카메라를 들고 낙동강으로 다시 나갔다. 새들은 우리가 오기도 전에 날아 올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 순순히 연기를 해줄 그런 바보 같은 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중계차에서 쓰는 55배 망원렌즈(세사람이 들어야 될 만큼 대포같이 큰 렌즈)를 낑낑대며 강둑에 올려 놓았다. 그것도 허사였다. 문득 위장막을 쳐 놓고 새를 촬영하던 어떤 장면이 생각났다. 그래서 우리는 텐트를 치기로 했다. 성공이었다. 낙동강 4개 지점에 위장 텐트를 만들어서 세워 두었다.
1월, 겨울은 본격적으로 추위를 몰고 왔다. 영하 15,6도를 오르내리는 강가에 1월 내내 새벽 5시에 출근했다. 나와 카메라맨, 카메라보조 세명이 좁은 텐트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려 촬영을 했다. 너무 추웠다. 옷을 5-6벌씩 껴입어도 마찬가지였다. 불을 켤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7시 10분경부터 날이 밝아 오면서 오리들이 하강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비행기가 착륙하는 소리처럼 우리 머리 위를 지나며 강물에 뛰어 들었다. 그처럼 가까이 오리를 본 것과 비행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청둥오리, 쇠오리, 비오리, 가까이에서 본 오리들은 생각보다 종류가 많았다.
매일 새벽, 텐트까지는 허리까지 차 오르는 강물을 카메라와 장비, 그리고 짐을 지고 건너야했다. 한번은 캄캄한 강물위로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져 물에 빠지고 말았다. 허리까지 다 젖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텐트에서 12시까지 젖은 채로 촬영을 해야만했다. 그 후로도 같은 일을 몇 번 더 겪었다.
청둥오리와 원앙이를 만나다
1월 어느날, 새벽부터 촬영을 하고 있던 카메라맨이 소리쳤다.
"어. 저거, 저거, 원앙이 같은데…"
청둥오리들 사이에서 유난이 움직임이 빠르고 작은 새를 확인했다. 원앙이였다. 그것도 한두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얼음이 떠 내려 오는 낙동강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낙동강에서 집단으로 서식하는 천연기념물을 찾아 낸 것이다.
그날부터 촬영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텐트를 오가며 원앙이를 가까이에서 찍을 수 있었고 특히 짝짓기 하는 장면은 큰 전과를 올린 것인 양 우리를 들뜨게 했다. 원앙이와 청둥오리 등 겨울 철새를 어느 정도 촬영한 후, 비로소 나는 조금씩 구담의 자연다큐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구담 마을 앞쪽 강 한가운데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습지의 식물들을 태우기 시작하는 공공 근로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은 한 치 앞을 바라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기 시작했다. 오리떼는 놀라 하늘을 날아 올랐고, 새들은 이리 저리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안동]
-이동수 프로듀서의 낙동강 구담습지 생태보고 제작기는 네번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