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산선생 일화(글/김원길_시인, 지례예술촌 촌장)
편작이 따로 없다
젊은 시절의 향산이 어느 날 일행 서너 분과 같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어떤 초가집 따뜻한 지붕에 고양이 두 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 앞에 이르러 보니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서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연유를 물어보니 이 집 외동아들이 불덩이 같이 열이 오르고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학문을 많이 한 어른들은 의서(醫書)에도 밝았기 때문에 자청해서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니 그다지 심각한 병은 아니었다. 주인을 보고 짐짓 “오늘 이 집에 네발도치 짐승이 지붕에 올라간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주인이야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 알 턱이 없는 일이다. 내외가 서로 마주보며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아이들이 “조금 전까지 고양이가 지붕에서 놀았어요.” 한다. 이 말을 들은 향산은 혼잣말로 “으흠 그러면 그렇지!”했다.
주인 내외는 지푸라기라도 잡았다는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게 아시는 양반이라면 틀림없이 이 아이를 살리는 법도 아실 테니 제발 우리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 얘가 잘못되면 우리 세 식구는 같이 죽는 겁니다.” 하며 애원한다.
향산은 본래 짐작하던 병세라 “동쪽으로 뻗은 ××나무의 잎을 한 줌 따다가 대추, 생강을 같이 넣어서 달여 먹이라.”고 일러주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아이는 금방 열이 내리고 잠이 들었다. 그 집에서는 용하신 분이 찾아오셔서 아기를 살려줬다면서 닭을 잡고 저녁 대접을 잘 했다.
일행은 그날 밤 그 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는데 이튿날 새벽 날도 밝기 전에 밖에 인기척이 나더니 어떤 젊은 사람이 “혹시 안동에서 오신 손님 기침(起寢) 하셨습니까?” 하며 문을 두드리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숨을 헐떡거리며 방에 들어선다. 향산은 옷을 수습하며 젊은이를 바라보고는
“자네 병점(病占)하러 왔지?”
“예”
“자네네 집이 여기서 남쪽에 있지?”
“예”
“그래 누가 아픈가?”
“…….”
“내가 알지, 자네 처환(妻患)이 있는 거지?”
“예”
“증상이 어떤가?” 하고 물은 뒤 약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 젊은이가 간 뒤에 일행이 이상히 생각하고 “아니, 새벽같이 젊은이가 찾아왔으니 급한 병점 때문이라는 것은 짐작이 되겠지만 집이 남쪽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고?”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들어서는데 보니 등에 옷이 젖었고 문이 열릴 때 남풍이 불면서 비가 조금씩 뿌리데 그러니 집이 남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묻던 일행이 눈만 끔벅거리다가 또 물었다.
“그렇다면 부모가 편찮을 수도 있고 아이가 아플 수도 있는 일인데 처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예끼 이 사람아! 젊은이 보고 누가 아프냐? 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그것은 처환인 걸세.”
얼마나 기지(機智)가 있고 정확한 판단인가?
일곡자연비(一哭自然悲)
한번은 향산이 일행들과 함께 점심때가 훨씬 지나 시장기를 느끼면서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고래등 같은 큰 기와집에서는 반혼제를 지내는지 안, 밖 상주들이 삽짝에서 마주보고 곡을 하는 것이 보였다. 마을 사람을 보고 “저 집에 초상이 난 모양이지?” 하고 물었다.
“저 집은 이 인근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인데 연세도 그리 높지 않은 양반이 돌아가셨어요. 상주들도 아직 어린데 참상이라면 참상이지요.” 하고 일러준다. 향산은 일행들에게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내가 가서 문상을 하고 오겠네.” 하고는 혼자 상가를 찾아갔다.
빈소에서 일곡(一哭)을 하는데 곡성이 얼마나 애통한지 상주들도 슬프게 대곡을 하고 ‘안에서도 어디서 오신 손님인지 저렇게 섧게 우실까?’ 하며 수군거렸다. 곡을 마치고는 상주를 보고 “술상을 차려오게” 하니 그렇지 않아도 술상을 준비하던 참이라 금방 술상이 들어왔다. 상주가 술을 따를 겨를도 없이 자작으로 술을 잔에 가득 부어 마시고는 상주를 향해 “상주는 나를 모르지?” 하고 묻는다. 상주야 어리니까 당연히 모르겠으나 망인의 동생인 듯한 사람들이 전전긍긍이다.
그토록 서럽게 우시는 것도 그렇지만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술을 가져오라 이르시고는 손수 술을 따라 자실까? 형님하고는 자별한 관계였던 모양인데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죄스러워 하고 있었다. 상주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못 알아 뵈어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향산은 “괜찮아! 나도 망인을 모르고 망인도 나를 모르네. 다만 지나다가 상을 당해 애통해 하는 것을 보고 문상하는 걸세.” 라고 말하니 망인의 동생들이 깜짝 놀라면서 “예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그것도 모르고 형님과 자별하셨던 손님 같은데 알아뵙지는 못하고 쩔쩔 맸습니다.”하면서 또 술을 권한다.
향산은 “이왕 내가 문상을 했으니 그냥 가기는 그렇고 지필묵(紙筆墨)을 가져오게.” 하니 금방 준비해 주었다. 붓에 먹을 가득 찍어
나그네는 청산 길을 걸어가는데 (客過靑山路)
청산에 장사 지내는 사람은 누군가? (靑山葬者誰)
평생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平生無一面)
한번 울고 나니 자연 슬퍼지는구나 (一哭自然悲)
일필휘지로 이런 글을 남기고 일어선다. 상주들이 깜짝 놀라며 “아니 지금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벌써 저녁나절이니 누추합니다마는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떠나셔야 합니다.” 하고 붙든다.
“아닐세! 내 일행이 저 건너 주막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네. 내가 가야만 하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닙니다. 저희들이 사람을 보내 이리로 모셔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오늘은 못 가십니다.” 하고는 수하의 사람을 시켜 “저 건너 주막에 가면 안동서 오신 손님이 계시니 이리 모셔오너라” 한다.
일행과 같이 그날 밤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정중한 전송을 받고 떠나셨다고 한다. 혹 행자라도 좀 받으셨는지는 모를 일이다.
술잔보다 술이 더 중요하다
향산은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꾸지람이나 하면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그런 어른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한번은 멀리 재산(才山)에 모셔져 있는 선대 산소에서 묘사를 지내기 위해 제수(祭需)를 진설(陳設)하다 보니 잔대는 있고 정작 술잔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술을 따를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꾸지람이 내릴까 겁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산 아래 동네에 내려가서 잔을 얼른 빌려 올게요.” 하고 아뢰니 향산은 “됐다. 이렇게 놓고 술을 쳐라.” 하면서 놋으로 만든 잔대를 거꾸로 놓는다.
잔대를 거꾸로 놓고 보니 그 또한 잔 같지 않은가! 보통 분 같으면 “에이 정신없는 것들, 조상 제사에 정성이 있어야지!”하고 꾸지람이 났을 텐데…….
하기야 향산이 잔대를 거꾸로 놓고 술을 부었다고 “제사를 어찌 그렇게 지냈단 말인가? 조상님께 죄스럽지도 않던가?”하고 숙덕거리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역시 향산은 그릇이 큰 인물이야!” 하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출처: 『진맥』 창간호 (부포 이원정 씨의 ‘향산 할아버지 일화’ 중에서 전재함.)-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