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한지, 신라시대 종이재현(글/이소은)세계 최고 필사불경 영인발간
얼마전 문화재청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필사본 화엄경전인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花嚴經·호암미술관 소장)의 영인을 완료하고 이를 공개했다.
신라의 사경으로 알려져있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은 길이 1천990㎝, 세로 26.9㎝의 두루마리 형태로 돼 있으며,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80권으로 한역한 「주본 화엄경」중 권 1-10 내용을 필사한 것이다. 권말 발문에 따라 이 사경은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연기법사(緣起法師)가 부모 은혜를 기리고 일체 중생의 성불을 위해 발원·조성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 사경에는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재위 684-704) 시대에만 쓰인 독특한 한자인 소위 측천무후자(初.星.證 등 13종 512자)가 보이고 있어 현존 필사본 화엄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사경 작업에 따른 엄숙한 의식 절차와 참여 인물 등에 대한 구체 기록이 있어 불교학과 불교문화사 등의 연구에 획기적 자료로 꼽힌다.
풍산한지, 신라시대 종이 재현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번 영인 자료를 원본과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한다는 기본방침에 따라 전통 한지의 제작과 영인 방법 등에 대해 관계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고증 및 자문을 거치는 등 2년(2001∼2002년)에 걸쳐 영인작업을 추진해왔다. 그러한 결과 2002년 12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영인을 최종 완료하고, 영인자료는 국내 국·공립도서관과 박물관을 비롯한 관계기관과 해외 주재 한국문화원 및 주요 재외공관·유명박물관·도서관·한국학연구소 등지에 배포했다. 자료의 품격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배접 및 제책 작업은 중요 무형문화재 배첩장(김표영)에게 의뢰했다. 해제본에는 국문 해설과 함께 영어를 비롯해 불어·독어·중국어·일본어 등 5개국어로 요약된 번역문을 수록했다.
신라시대의 종이를 재현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제지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고는 하나, 옛 종이를 그대로 재현해내는 일은 뛰어난 기계나 화학약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재현해 낼 종이를 통해 당시의 제조방식을 유추해서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전통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한지생산업체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이 신라시대의 사경의 영인본 발간을 위해 몇 차례의 업체선정 끝에 97년부터 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주)풍산한지(대표 이영걸)와 계약을 맺고 재현에 들어갔다. 한지생산에 있어서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 안동시 풍산읍에 위치하고 있는 (주)풍산한지이다. 아쉽게도 국내 최대의 종이생산지로 알려져있던 전주에서도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업체는 단 한군데도 남아있지 않다.
풍산한지에서 신라시대 종이를 재현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풍산한지공장을 방문한 것은 초봄이 한참 지나서였다. 풍산한지 대표인 이영걸씨를 통해 풍산한지 재현의 과정들을 낱낱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재현된 신라시대 종이는 종이 보관실에 보관중이었다.
"종이가 참 얇고, 글씨를 써도 뒤에 묻어나지를 않아요" 라며 재현된 종이에 관한 이영걸씨의 설명이다.
문화재청에 납품하고 남은 이 종이는 인근의 절에 계시는 스님들이 종종 사가고 있다고 한다. 화엄경을 적었던 종이라는 사실을 아는 스님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중생들을 위한 소원지로 쓰여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호암미술관에 보관중인 국보 196호 신라 백지묵서방 광불화엄경(白紙 墨書方 廣佛華嚴經 : 755년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종이는 매우 희고 광택이 있으며 표면은 평활하고 강한 광택이 있다. 티라든가 풀어지지 않은 섬유 덩어리도 적은 아름다운 종이이다. 얇은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먹이 번지지 않았다. 비추어보면 전체적으로 조화있으며, 만지면 파닥파닥하며 치밀하고 밀도가 높은 종이로 보여진다. 종이의 색이 매우 연한 것을 보면 하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의 밀도는 0.64g/cm³으로 보통 닥나무 종이의 2배 정도의 밀도를 보이며 표면에 먹의 스며드는 것을 관찰하면 종이 표면에 먹의 침투를 막기 위한 무엇인가를 바르고, 다듬이질, 문지름 등의 가공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 종이는 원료의 닥나무껍질에서 최종 가공까지 일관되게 정성들여 만들었을 것이다. 제지기술의 뛰어남을 보면 고대 한국의 유명지(有名紙)의 하나로 보여진다.
시방서
풍산한지 이영걸 대표는 다음과 같은 시방서를 통해 신라시대 종이를 재현한 과정을 소개했다. ①닥나무 채취 ②피닥만들기 ③백닥 만들기 ④삶기 ⑤헹굼과 일광표백 ⑥티고르기 ⑦ 짓이기기 ⑧종이 만들기 ⑨물빼기 ⑩건조 ⑪도침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닥나무 채취는 강원도 원주 주문진, 경북 예천 의성등지에서 이뤄진다. 닥나무는 보통
1m50cm 되는데 끝부분 30Cm 와 잎부분 20cm를 잘라내고 가운데 1m만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산재된 닥나무를 채취하는데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모된다.
피닥만들기는 닥나무를 가마솥에 넣고 물을 부은후 10시간 정도 삶아서 벗긴 후, 닥나무 껍질을 건조시킨다. 1톤 차 12대분의 닥나무를 피닥으로 만드려면 1톤 차 3대분이 된다.
다음은 피닥을 장시간 물속에 넣은 다음, 불을 끈후 칼로 표피를 제거하는데 1톤차 3대분의 피닥을 백닥으로 만들면 600Kg 정도 된다. 한사람의 흑피를 제거하는 작업량은 피단 8근을 백닥으로 만들면 2근정도다. 1톤의 피닥 흑피를 제거하는데 드는 인건비도 만만치가 않다.
백닥을 만들어도 닥나무에 진, 즉 기름기가 있기 때문에 강원도 평창, 인제등지에서 눈이 쌓이면 눈속에 백닥을 부풀려서 겨울철내내 건조하면서, 눈속에 잠겨두었다가 봄철에 눈이 녹으면 수거한다. 이는 동태를 황태로 만드는 방법과 같은 이치로 닥을 얼리고 부풀리면 닥섬유가 질기고 종이질이 좋아진다.
메밀집을 태워서 재를 만든 후 시루에 천을 깔고 태운 재를 넣고 물을 부어서 우러나오도록 한 것이 잿물이다. 이 잿물을 백닥에 넣고 10시간 정도 장작불로 삶게 된다. 삶은 백닥을 소백산줄기인 예천 하리 천변 맑은 물에서 15일간 헹굼과 햇볕으로 표백한다. 강변에서 헹굼과 표백을 한 백닥에 들어있는 먼지나 불순물등을 제거하는 작업, 핀셋이나 손끝으로 잡티를 제거하기에 하루에 티고르기 할수 있는 작업량은 2근 정도. 티고르기 작업을 마친 닥을 널다란 돌위에 올려놓고 나무방망이로 닥섬유가 뭉개져 죽이 될 때까지 두들긴다. 한라람의 하루 작업량은 6kg정도라고 한다.
종이 만들기 과정은, 닥죽을 지붕에 깨끗한 물과 함께 넣고 세게 젓은후 홍촉규 점액을 자루에 담아 걸러서 닥풀의 즙이 잘 섞이도록 다시 저어준다. 그런 다음에 외발로 앞물을 떠서 뒤로 흘러버리고 옆물을 떠서 반대되는 쪽으로 버리는 것을 여러번 반복한다. 하루 기술자의 작업량은 70-80장 정도다. 물빼기는 발로 건진 종이를 바탕이라 하는데 바탕을 차례로 쌓아 올려놓고 그위에 널빤지를 얹고 돌멩이를 올려 밤새도록 천천히 물이 빠지도록 한다. 그런 다음 압축기에 올려놓고 물을 완전히 뺀다. 물을 뺀 종이는 한 장씩 떼어 햇빛에 또는 온돌방에 붙여서 하루 30장 정도 건조한다. 마지막 작업으로 우리 전통한지의 우수성을 인정받게 했던 것으로 도침기로 말린 한지를 수백 번 두들겨서 종이의 물도와 섬유질 형성을 높인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754년 경덕왕 13년)]에는 "닥나무에 향수를 뿌려가며 길러 껍질을 벗겨내고, 그 껍질을 맷돌로 갈아서 종이를 만든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알리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이처럼 신라시대 종이를 재현하는 과정에서도 이처럼 힘든 공정과 정성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성서가 겨우 5백년의 수명을 가지고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모셔져 있는 반면, 수백년 묵은 우리의 고서적들이 박물관이나 도서관 또는 골동품 상가에서 나뒹굴다시피 쌓여 있다. 한지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수백년전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무단 방치되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문화재청에서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을 재현해서 공공기관에 기증한 일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옛날 고문서를 재현하는 소중한 작업을 하고있는 풍산한지의 이영걸 대표의 바램이 있기에 희망적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으로 옛날 종이를 하나씩 하나씩 재현해 낼 것입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