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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걷는 길(글/박인수_본지 운영위원, 경희한의원 원장)

천등산으로의 가족산행 계획
때는 가을. 등산하고는 거리가 먼 내가 모처럼 큰마음 먹고서 산행 계획을 잡게 되었다. 아내와는 낭만의 가을 나들이를 아이들에게는 극기심과 호연지기를 길러줄 겸 해서였다. 가족동반 첫 산행지로 어디를 잡는 게 좋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천년고찰 봉정사가 있는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 574m)으로 정했다.

천등산은 내게 KBS가요무대에서 자주 듣는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를 연상하게 했는데 그 노래에 나오는 천등산(天登山, 807m)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과 충주시 산척면에 있는 산으로 안동에 있는 천등산과는 별개의 산이지만 그 재를 울고 넘는다 할 정도면 얼마나 험준할까 싶어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천등산을 다녀 온 등산객들이 한결같이 그리 쉬운 산행 코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힘들지도 않다고 하기에 그곳으로 결정했다. 또 무엇보다 예전에 봉정사에 들렀을 때 천년고찰을 병풍처럼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는 산이어서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봉정사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그런 이유가 좀 더 컸었다.

만추에 올랐던 천등산
가족동반으로 산행을 가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서도 주말마다 공적인 일이 연이어 있다 보니 불가피하게 일정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게 되었다. 답답한 주말이 계속해서 넘어가다가 등산하기에 좋은 단풍철도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인 11월의 셋째 주말이 되어서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단풍철의 절정기는 놓쳤지만 만추의 쓸쓸한 정경은 가족들과 함께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날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녀석이 어길 수 없는 중요한 약속이 잡혀 있다며 절대로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날은 안동교구소속 성당 초등부 축구경기가 있는데 자기가 축구 주전으로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 시합은 절대로 빠질 수 없으니 다른 날 가자고 하면 같이 가겠다고 한다. 워낙에 축구를 좋아하는 녀석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제일 맏형이 되는 학년이면서 책임감 있는 위치에 있는 애를 시합이 있는데 그냥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망이긴 했지만 더 이상 날을 미루었다가는 날이 추워져서 더는 안 될 것 같고 이런 식으로 연기한다면 다시 날을 다시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첫째만 데리고 산행하기로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아들
우리 집은 아들만 둘이다. 둘이 연년생으로 14개월하고도 반이 빠른 중학교 1학년인 맏이는 11월 20일 생으로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반면에 둘째는 형보다 키도 더 크고 덩치도 좀 있었다. 큰 애와 둘째는 집에서 친구처럼 놀았고 우리 집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둘을 쌍둥이로 오해하거나 동생을 형으로 형을 동생으로 뒤바꾸어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큰 애는 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운동에는 취미가 없어 혼자서 게임하며 놀기 좋아했는데 내성적이고 소심하다보니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학교에서 덩치 크고 못된 아이들로부터 간간이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늘 마음에 걸렸고 악착같은 면이 없었다.

공부는 엄마 등살에 떠밀려 마지못해 하는 편이고 집중력도 부족하여 공부하는 시간보다 멍하게 있거나 다른 것들에 정신을 빼앗겨 허비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엄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도 대놓고 조는 일이 많았다. 천성이 느긋하고 느려터진데다가 근성도 부족하고 의지력이 박약한데다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해놓고는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하니 아버지인 나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가 야단을 치면 눈물 찔찔 흘리고 마지못해 따라하고 그러더니 중학생이 되자 머리가 좀 컸다고 엄마에게 가끔 대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춘기여서 그러려니 하고 심하지 않으면 야단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열심히 뒷바라지 한 만큼의 반의반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아들 때문에 답답한 엄마와 자신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매일 잔소리하고 야단치는 엄마 때문에 괴로운 아들은 조그만 일로도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중학교 들어서면서부터 점점 심해지더니 2학기가 되어서는 하루라도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집사람과 큰애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고민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이 가족동반 주말 산행이었기에 매사에 제 할 일 알아서 척척 잘 하는 둘째 놈은 빠져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시종일관 투덜대는 녀석
등산을 하기로 한 그날은 늦가을인데도 날씨가 포근했고 하늘도 맑아서 기분이 좋았다. 오전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 산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타이르고 윽박질러서 집을 나섰다. 비록 엄마한테는 대들긴 하지만 아직도 엄한 아버지 앞에서는 대들 엄두를 못내는 아들이었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따라 나서기는 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동생은 안 가는데 왜 자기만 데려가느냐고 불만을 토로했고 나와 아내는 애써 못들은 척하며 그냥 묵살해 버렸다.

봉정사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이 녀석이 도무지 내릴 생각을 안 한다. “빨리 안 내려?” 하고 야단을 치자 자기는 그냥 여기 차안에 있을 테니 두 분만 다녀오시면 안 되겠냐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죽어도 등산이 싫은데 왜 자꾸 데려가려고 그러느냐며 버티는데 한 마디로 기가 막혔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하기 싫은 거 하지 않을 권리는 있다며 버티는데 도저히 말로는 안 되겠다싶어 “혼날래?”하며 소리 지르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렸다. 아내는 아들과 옥신각신하는 것이 보기 싫었는지 등산로 쪽으로 먼저 올라가버렸다. 간이매점에서 식수를 두 병 사서 배낭에 찔러 넣었다. 주차장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자 산행코스가 나타났다. 아내는 내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올라가겠데?”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아내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등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세 개가 있었다. 우리는 지인들이 일러준 대로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제1코스를 택했다. 그런데 수월하다는 1코스가 시작하는 초입부터 제법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었다. ‘이상하네?’하는 느낌이었지만 오르기로 한 일. 아내를 뒤에 세우고 아들을 중간에 두고 앞서 100m 가까이 올라가다 걱정스러워 큰애를 돌아보았는데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뒷동산을 오르듯 가볍게 깡충깡충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5분 정도를 계속 걸어 올라가는데 ‘이런?’ 등산 경험이 없는 내 다리에 조금씩 근육이 뭉치며 알이 베기면서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올라간 등산객 중에는 길이 꺾어지는 지점의 나무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아서 이정도가 보통 사람들로서 체력적으로 한 번 쉬어줘야 하는 한계 구간인 모양이었다. 거기서 잠깐 쉴까도 생각 했지만 이제 산행 초반인데 가장(家長) 체면에 먼저 쉬자 할 수도 없고, 또 그 정도는 견딜 만 했기에 군대시절 유격훈련 받던 때를 떠올리며 가파른 등산로를 계속해서 올라갔다.

가빠지는 호흡을 겨우 진정시키며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억지로 떼며 오르는데 뒤따라오는 아들이 그때서야 힘 드는지 큰 소리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동생은 놔두고 여기를 왜 나만 데리고 왔느냐, 아직 시간도 많은데 힘드니까 좀 쉬었다 가면 안 되느냐, 앞으로 얼마를 더 올라가야 되느냐, 자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내려가서 기다려도 되지 않느냐.........아이가 내뱉는 불평에 일일이 대꾸하면서 오르려니 숨이 가빠오고 더 이상 호흡 조절도 제대로 안되고 집사람도 많이 뒤쳐진 것 같아 기다릴 겸해서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기로 했다. 아들은 무릎에 손을 집고서 흙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와서는 가쁜 숨을 할딱거렸다.

목이 마르다기에 물을 건네주었는데 두 병뿐인 물을 아껴서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한 병을 다 마실 작정으로 벌컥벌컥 마시 길래 “그만 마셔”하고 매정하게 뺐어버렸다. “아버지, 물도 제 맘대로 못 마셔요?”하며 투덜댔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 집사람이 다 올라와서 잠시 가쁜 숨을 좀 돌린 다음, 서로 물을 조금씩 나눠마시고는 힘들다며 좀 더 쉬었다가 가자는 아들의 말은 무시하고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중도에서 쉬었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해서 그런지 조금 걸었는데도 숨이 가빠 턱밑까지 차오르고 종아리는 경련이 올 것처럼 딴딴하게 뭉쳐 다리가 무거웠다. 그런데도 우리와 비슷하게 출발한 분들 중에 환갑이 다 되어 보이시는 분들도 꿋꿋하게 잘 올라가며 우리를 추월해가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등산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지만 그래도 논산훈련소에서 50Km 야간 행군까지 한 놈이 이 정도야 못하겠나 싶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올라가기로 했는데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갈수록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힘들어서 이제 더는 못가겠다 싶은 지점에 이르자 계속되던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와 다름없는 조금은 완만한 오르막이 나왔다. 오르막을 지나 평탄한 길을 걸으니 뭉쳤던 다리도 풀리고 가쁜 호흡도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추의 계절이라 단풍색이 거의 다 바래긴 했지만 그래도 산길 주변의 단풍은 그럭저럭 볼만했다. 많이 지긴 했지만 여전히 예쁘고 발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 밟는 느낌도 좋았다. 뒤처진 아내와 아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걷고 있으니 아내가 산행 리듬이 깨지면 안 된다며 성큼성큼 걸어 나를 앞질러 갔다. 그런데 그렇게 평탄한 길도 잠시 두 번째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같이 함께 가야겠다 싶어 천천히 올라가는데 큰애가 도무지 따라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멈춰서 뒤돌아보니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입을 벌린 채 깔딱 숨을 쉬고 있었다.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을 하자 아들은 잔뜩 인상을 썼다. 목마르다 하여 물병을 건네주자 이번에는 내가 뺐지 못하도록 아예 한 손으로 나를 제지하고는 벌컥벌컥 남은 물을 다 마셨다. “야 이 녀석아” 하며 야단을 쳤는데도 못 들은 척이었다. 물을 다 마시고는 한 숨을 돌리더니 자기는 이제 힘들어서 도저히 못 올라가겠으니 기운이 회복될 때까지 여기서 쉬었다 가자고 했다. 지금 쉬면 더 힘들어지니까, 힘들더라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쉬자고 몇 번을 타일렀는데도 자기는 이제 더 이상 못가겠다며 그 자리에 퍼질러앉아버렸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으니 자기는 죽을 만큼 충분히 힘들었고 이젠 됐지 않느냐며 오늘은 여기서 그만 내려가자며 응석부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의지력에 무너진 평정심
그 순간 의지력이 저토록 약한 아들의 모습에 너무나 화가 났다. 주변사람들이 나를 어찌 보던 말든 큰 소리로 언성을 높이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 소리에 놀란 아내가 올라갔던 길을 황급히 되돌아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평소에 자신의 편에서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주던 아버지가 오늘은 무섭게 야단을 치니까 아들 녀석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서는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아내를 앞세우고 아들은 중간에 두고 내가 뒤에 섰다. 의지가 나약한 아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겁을 주며 다시 가파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좀 더 쉬자고 통사정을 하고 중간에서 내려가자해도 아버지가 요지부동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녀석은 무척이나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온갖 불평불만을 다 쏟아 내던 녀석이 된통 혼나고 난 뒤부터는 올라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약한 감기 기운이 있었던지라 말없이 콧물만 훌쩍거렸는데 두 번째 오르막은 첫 번째 보다 더 가팔라서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제는 그 좋아하는 담배도 끊어야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늦가을 추위에 대비한 두꺼운 옷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산 위쪽의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비추 길래 이제는 산등성이에 다 올랐나 싶은데, 막상 그 지점까지 오르니 다시 또 더 올라가야 한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아들을 달래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계속 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이 코를 훌쩍이는 빈도가 잦아지고 그 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콧물을 훌쩍이는 게 아니라 혹시나 우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는 싶을 때쯤 반갑게도 산등성이가 나타났다. 앞서 올라 간 이삼십 여명의 등산객들이 산등성이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힘들고 어렵게 산등성이에 도착해서 죽을 맛이었는데 나보다 먼저 도착한 아들은 기진맥진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푹 파묻고 있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다. 아들의 등이 가볍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아들은 가만히 울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다가가 가만히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괜찮아, 힘들었겠지만 잘 했어!”내가 그러자 그동안 울음을 참느라 ‘꺽꺽’거리던 아들이 갑자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어흥! 아빠, 너무 힘들어.......나 이러다 죽을 것 같아!”아들이 꺽꺽거리며 울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우는 아들을 야단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울음을 멈추게 할 방법은 없고 정말 난감했다. 혹시나 저 사람들 중에 우리가족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스러운데 한번 울음보가 터진 아들은 서러운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이 사태를 대체 어찌 수습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는데, 집사람은 창피하다며 저만치 멀찌감치 물러나있다. 안부(鞍部)에서 휴식을 취하던 등산객들이 재미있다며 아들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창피하지만 그래도 내 자식인데 어쩌겠나 …….’ 나는 야단을 치는 대신 힘들 땐 큰 소리로 울어도 괜찮다며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들은 한참을 소리 내어 울다가 제 풀에 지쳐 울음을 그쳤다. 나는 사람들이 없는 한쪽 구석으로 아들을 데려가서 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다시 설움이 복받치는지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한동안 소리 없이 울던 아들은 흘린 땀이 다 마를 즈음에야 울음을 그쳤다.

나는 말없이 마지막 남은 한 병의 물병을 건네주었다. 아들은 이번에는 조금만 마셨다. 더 마시라고해도 괜찮다며 마시지 않았다. 아들이 울음을 그치고 휴식을 취하던 등산객들이 떠나고 다른 등산객들로 안부의 주인이 교체되자 그때서야 아내가 우리 곁으로 왔다. 아내는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아들에게 과자를 내밀었다. “야, 임마. 먹고 힘내! 하하하” “푸하하하!” 그때는 나도 참았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 데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 줄은 몰랐다. 그것도 중학교 1학년인 다 큰 사내 녀석이 등산하면서 힘들다고 울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바로 내 아들인걸! 이런 아들을 어떻게든 제대로 교육시켜 보겠다고 이런 산으로 데려온 건데.

힘들게 산을 오른 이유를 이제는 알테지
휴식을 취하며 아들에게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알게 되었던 것들 중에 지금 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오늘의 등산 경험과 관련지어 이야기 해주었다. 아빠가 오늘 왜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하면서 데리고 올라왔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아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별다른 대꾸 없이 가만히 들었다. 아들의 눈가에는 흐릿하게 눈물 자욱이 번져 남아 있었다.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들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산에 오르기 전의 아무것도 모르던 멍한 표정과 한 고비를 넘긴 지금의 표정은 분명 달랐다. 눈빛에서 힘이 느껴졌다. 힘들게 올랐던 만큼 느낀 점도 분명히 있었으리라.

휴식이 끝나고 천등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내리막에서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는데 조금 경사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에 비해서는 수월했다. 일단 산등성이에 오르고 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게 없었다. 아들과 나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574m. 옛 안동도호부가 있던 웅부공원에 설치된 통합기준점(U0507)에 보면 그 곳이 해발고도 93m이고 거기서도 등산로 입구 봉정사 주차장까지는 꽤나 올라온 곳이니 실제로 우리가 오른 높이는 400m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었다. 산이 낮아도 어쨌거나 산 정상은 정상(頂上)이다. 그곳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며 땀을 식혔다.

안동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학가산(鶴駕山, 882m) 정상이 지척으로 닿을 듯 보이고 멀리 안동시가지의 모습도 보였다. 산등성이가 서로 연하여 내달리고 길은 그 산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졌다. 차를 세우고 올라온 주차장은 까마득히 발아래에 있고 봉정사는 성냥갑처럼 조그맣게 산 아래에 터를 잡고 앉아있었다. 봉정사를 다녀가며 한 번은 올라가보고 싶었던 천등산을 그렇게 아들과 함께 올랐다. 주변경치를 보며 준비해 온 것들을 먹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에 평소 못마땅한 표정대신 대견한 미소가 얼핏 보였다. 그렇게 행복하게 정상에 머물렀던 시간도 잠시. 땀에 젖은 옷 때문에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고 해가 빠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남은 음식과 물을 서둘러 먹고 마시고 배낭을 다 비웠다.

아들아, 마음의 눈을 뜨거라
하산 길. 가파른 길은 미끄러지다시피 하면서 내려오고 평탄한 길은 터벅터벅 걸었다. 그렇게 내려오는 길에 만난 개목사(開目寺).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께서 출가하여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있는 바위 밑에서 수도하였는데 밤이면 하늘에서 큰 등불이 내려 비춰주었다 하여 천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이 사찰의 이름은 흥국사(興國寺)였는데 안동에는 풍수지리상으로 앞 못 보는 소경이 많이 난다 하여 조선 초기 안동부사였던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중수하면서 개목사로 이름을 붙이고 난 뒤부터는 소경이 줄어들었다고 하는 내력이 내려오는 절로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잠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개목사 원통전(圓通殿)에서 아들의 눈을 뜨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빌었다. 법당에서 나와 아내가 먼저 절을 하고 나오고 밖에서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는 아들을 법당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쑥스러워하는 아들을 등 떼밀어 불전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하고는 불전함에다 제 몫으로 천원을 그리고 오늘 따라오지 못한 둘째 몫으로 따로 천원을 집어주어 같이 넣게 했다.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려면 뭔가를 바쳐야 한다고 말하자 아들 녀석은 그냥 피식 웃었다. 법당을 마주보는 툇마루에 잠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이렇게 해서 아들이 눈을 뜰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거기 머무르고 싶었지만 남아있는 하산 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 수 없어 다시 서둘러 떠나야 했다. 내려오는 길은 내내 즐거웠다. 아들은 힘들었던 때를 다 잊어버린 듯 했고 가족의 첫 산행지로 여기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으로 가까이 올 무렵 해는 완전히 빠져 버렸고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서 등불이 밝혀지는 것처럼…….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0호>